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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의 일이다.
제주도 주년뜰이라는 곳에 나라에 큰 벼슬을 한 김진국 대감과 자주부인 부부가 살고 있었다. 논밭이 많고 갖가지 세간에다가 하인들을 여럿 둔 큰 부자였다. 그런데 대감의 나이가 서른 마흔을 지나 쉰 살이 가까워 오는데도 자식이 없어 큰 걱정이었다.
하루는 대감이 심심하던 차에 동구밖 세거리 팽나무 그늘에 앉아서 시골 노인과 바둑을 두는데 어디선가 하늘에 울릴 듯한 큰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대감이 바둑을 멈추고
그 웃음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서 가보니, 거적을 쳐놓고 빌어먹는 비렁뱅이가 아이의 재롱을 보면서 웃고 있는 것이었다. 대감이 그 모습을 보고 집에 와서는 보석함에서 금거북과 은개구리 따위를 꺼내놓고서 웃음을 지어 보려 하였으나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돈이 있으면 무엇하고 논밭이 많으면 무엇하리. 자식이 없으니 다 소용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워서 먹는 일에 뜻을 두지 않았다. 자주부인 또한 곁에 앉아서 시름할 뿐이다.
그때 주년뜰 동쪽 시내 건너 상주사의 화주숭이 대감 집에
시주를 청하러 들어왔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대감님과 마나님의 안색이 좋질 않으시니 어쩐 일이십니까?"
"글쎄, 그럴 일이 있다오."
"우리 절 부처님은 못하시는 일이 없는데……. 한번 사연을
말씀해 보십시오."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나이 쉰이 다 되도록 아이를 갖지 못했다오. 자식을 하나 볼 수만 있다면 못할 일이 없으련만……."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백미 한 섬과 은 백냥
백근을 우리 절에 시주하시면 자식을 얻으실 수 있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내 그렇게 하리다."
대감은 자식을 볼 수 있다는 말에 시주를 올릴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곧바로 백미와 은 백냥 백근을 준비하여 상주사로 향하였다.
대감 일행이 길을 나서서 동쪽 시내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난데없이 한 스님이 나서서 길을 막고 김진국 대감에게 뵙기를 청하였다.
"잠깐 길을 멈추고 소승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스님은 어떤 분이길래 길을 막는단 말이오?"
"소승은 서쪽 시내 건너 백금사의 화주승입니다. 대감께서
상주사에 시주 가신다는 말을 듣고서 놀라 쫓아왔습니다.
대감마님, 상주사보다는 우리 백금사 부처님이 훨씬 영험하시답니다. 우리 절에 공양하고 자식을 얻은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지요. 우리 절에 시주를 올리시면 틀림없이 자식을 보실 것입니다."
그 말에 솔깃한 김진국 대감은 서쪽으로 길을 바꾸었다. 그리고 서쪽 시내를 건너 백금사에 백미와 은을 공양하고 부처님께 네 번 절을 올렸다.
"집에 돌아가신 뒤에 틀림없이 태몽을 꾸실 것입니다."
대감이 기뻐하며 집으로 돌아온 후 며칠 만에 꿈을 꾸었는데, 청주 술에 채소 안주를 먹는 꿈이었다. 대감은 즉시 해몽하는 사람을 불러 꿈을 풀어 달라고 하였다.
"딸아기를 낳으실 꿈입니다."
그런데 이때 대감집 하녀 정술데기가 옆에 있다가 자기 꿈도 풀이해 달라고 나섰다.
"저는 어젯밤 꿈에 소주 술에 고기 안주를 먹는 꿈을 꾸었답니다. 무슨 뜻인가요?"
그 모습을 본 김진국 대감이 어이없어 하면서 정술데기를
꾸짖었다. 그러자 해몽하는 이가 말하였다.
"꾸짖지 마십시오. 그건 아들을 낳을 꿈입니다."
그 후 과연 자주부인과 정술데기에게 각기 태기가 있었다.
열 달 후에 자주부인이 한 건강한 여자아이를 낳으니, 대감이 그 이름을 자청비라고 지었다. 한편 정술데기 또한 같은
날 같은 시에 아들을 낳아서 이름을 정수남이라고 지었다.
정수남이가 태어난 것은 백금사에게 시주를 빼앗긴 상주사
화주승의 조화였다.
김진국 대감의 딸 자청비는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났다.
그 용모는 가냘프고 고왔는데, 성격은 남자와 같이 활달하였다. 가만히 있지 않고 일하기를 좋아하여 집안에 있는 베틀이란 베틀을 장난감삼아 옷을 짜는데 그 솜씨가 남달랐다. 들판에 나가면 하인들이 논농사 밭농사하는 것을 일일히 참견하면서 한목 거드는 것이었다. 부모는 그러한 자청비의 모습을 보고 한편으로는 대견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좀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꼭 머슴아같이 일도 잘 한단 말이야."
"좀 얌전해야 할텐데. 저래 가지고 어떻게 시집이나 갈는지
걱정이예요."
자청비와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정수남이는 다른 아이들보다도 몸이 크고 건장하였다. 대감 부부가 일 잘하게 생겼다고 좋아했으나, 커가면서 무슨 불만이 있는지 일을 잘
하려 하지 않고 먹는 것만 밝혔다. 틈만 나면 빈둥빈둥거려서 주인의 속을 썩혔다. 특히 자청비 보는 앞에서는 좀체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빈둥거려도
그가 일한 분량이 다른 하인만큼은 됐다는 사실이다.
세월이 흘러 자청비가 열다섯살이 됐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자청비가 베틀에 앉아서 비단을 짜고 있는데 정수남이의 어머니인 정술데기가 옆에 와서 일을 도왔다. 그런데 자청비가 문득 보니 정술데기의 손이 희고 고왔다. 그걸 보고서 자청비가 정술데기에게 물었다.
"아주머니는 나이가 마흔이 다 됐는데 어찌 그리 손이 하얗고 고운가요?"
"아기씨. 다 이유가 있지요. 매일마다 남쪽 주천강 여울에
가서 빨래를 하다 보니 손이 이렇게 하얗게 됐답니다."
꾸민 말이었지만, 자청비는 그 말을 곧이듣고서 빨래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면 나도 주천강 여울에 가서 빨래를 할래요."
자청비는 바구니에 옷을 가득히 담아서 박씨 같은 발걸음으로 총총히 주천강 여울로 향하였다. 물가에 도착한 자청비가 빨래에 열중하고 있는데, 마침 한 도령이 책을 끼고서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발견하였다. 사람이 오는 줄도 모르고 일에 몰두하고 있는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저런 고운 아가씨를 놓아두고 어찌 그냥 지나가리. 말이나
한번 건네보자.'
문도령이 자청비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아가씨, 길 가던 사람인데 목이 말르니 물 한 바가지만 떠주시겠어요?"
빨래를 하던 자청비가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수려하게 생긴 도령이 서있다.
"깜짝 놀랐어요. 내 떠드리지요."
자청비는 가지고 있던 빨래 방망이로 물을 휘휘 저어 헤친
다음 큰 바가지에 물을 하나 가득 받더니 물가에 선 수양버들의 잎을 세번이나 훑어서 물에 띄운 다음 문도령에게 건네주었다. 바가지를 받은 문도령이 '이게 웬 심술인가' 싶어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청비를 바라보니, 자청비가 웃으며 말한다.
"급한 김에 훌떡 물을 마시다가는 체하시는 법입니다. 잎사귀를 불면서 천천히 드세요."
"그런 뜻이 있었군요.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그나저나 도령님은 누구시고, 어디를 가시는 길인가요?"
"나는 본래 하늘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문도령이라고 합니다. 이 주천강 건너 저 남쪽 마을에 사시는 거무선생이라는
분이 훌륭하다는 소문이 하늘에까지 퍼져 이제 3년을 기약하고 글공부를 하러 가는 길이랍니다."
그 말을 들은 자청비는 자기도 문도령과 함께 공부를 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그래서 얼른 말을 꾸며냈다.
"도령님, 마침 잘 됐군요. 우리 집에 나하고 똑같이 생긴 쌍동이 남동생이 있는데, 우리 동생도 거무선생을 찾아가서
글공부를 하려는 참이랍니다. 길이 가깝지 않은데 우리 동생하고 동행하도록 하세요."
내심 자청비 곁에 좀더 머무르고 싶었던 문도령이 얼른 허락했다.
"잘됐네요.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자청비는 얼른 빨래를 헹구어 바구니에 담은 다음 문도령을 이끌고 마을로 향하였다. 자청비는 문도령을 마을 입구에 기다리도록 하고서 집으로 들어가 부모님께 고하였다.
"아버지 어머니, 글공부를 하도록 해주세요."
"아니, 일하는 것만 좋아하던 네가 갑자기 공부라니? 그건
갑자기 웬 말이냐?"
"아버지, 부모님 자식이라고는 저 하나뿐인데 저 아니면 부모님 제사 때 누가 축문을 쓰겠습니까? 공부를 하게 해주세요."
"어허, 이제 네가 철이 들었나 보구나. 좋도록 해라. 그래
선생을 대줄까?"
"아닙니다 아버지. 듣자 하니 주천강 너머 거무선생이라는
분이 훌륭하다고 소문이 자자합디다. 남장을 하고 그분께
찾아가서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좋을 대로 하려무나."
허락이 떨어지자, 자청비는 그 길로 남자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김진국 대감이 읽던 책을 아무거나 한 아름 안고서 한
손에 가득 붓을 들고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마을 밖에 기다리고 있던 문도령에게로 가서 말을 건넨다.
"저, 혹시 문도령 아니십니까? 우리 누님이……."
"예 제가 문도령입니다. 아까 그분의 동생이시군요."
"예, 저는 주년뜰 사는 자청도령이라고 합니다. 듣자 하니
거무선생께 글공부를 하러 가신다니 저하고 함께 가시도록
하지요."
"예, 좋습니다."
동행이 되어 길을 떠난 문도령과 자청비는 거무선생에게로
가서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둘은 같은 대청에서 글을 읽고 같은 방에서 잠을 자면서 서로 형제같이 친하게 지냈다. 그렇게 생활을 하면서 1년, 2년이 흘렀는데, 문도령은 가끔씩 이상한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자청도령이 행동거지는 자기보다도 활달한 게 남자가 분명한데, 그 용모나 음성은 아무래도 남자 같지가 않았다. 뒷간 갈 때나 목욕할 때 다른 사람을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유심히 자청도령의 모습을 관찰하였다. 자청비가 또한 그 낌새를 알아차렸다.
하루는 저녁에 잠자리에 드는데 자청도령이 자기하고 문도령 사이에 물을 담은 대야를 놓고 그 위에 은젓가락과 놋젓가락을 걸쳐놓는다. 이상하게 생각한 문도령이 물었다.
"아니, 왜 대야에다가 젓가락을 걸쳐 놓고 자는가?"
"아버지 말씀이 문득 생각나서 그리한 거라네. 대야 위의
젓가락이 떨어질 정도로 잠을 자면 글이 둔하다더군."
그 말을 들은 문도령은 자신도 한번 해보겠다며 대야 위에
젓가락을 얹어 자청도령의 대야 옆에 놓고서 잠을 청하였다. 그 대야 때문에 문도령은 자청비에게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젓가락이 떨어질까 염려하느라고 잠이 깊이 들지를 못하는 것이다. 건너편의 자청도령은 신경도 안
쓰는지 잠을 쿨쿨 잘만 잤다.
이렇게 여러 날이 지나자 문도령은 잠이 부족하여 공부하는 것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동안 거무선생의
여러 제자 가운데 문도령과 자청도령이 제일 뛰어나 막상막하였는데, 점차 문도령이 처지기 시작하여 자청도령이
으뜸 제자가 되었다. 마음이 상한 문도령이 하루는 자청도령에게 시합을 청하였다.
"공부는 몰라도 딴 재주는 나한테 못 당할걸. 어디 나하고
오줌발 멀리 보내기 시합을 한번 해볼텐가?"
자청도령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 그러자고 허락하였다.
먼저 문도령이 나서서 오줌을 누는데, 그 나간 거리가 열두자 반이었다. 의기양양한 문도령. 다음에 자청도령이 나서는데 미리 준비해 두었던 죽순 대롱을 통하여 오줌을 내보내니 그 나간 거리가 스무자 반이었다. 문도령은 이제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 혹시 자청도령이 여자가 아닐까 의심했던 것도 다 풀어지고 말았다.
그럭저럭 공부를 시작한 지 삼년이 다 돼가던 어느날이었다. 하늘에서 웬 새 한마리가 날아 내려와 입에 물었던 편지를 떨어뜨렸다. 주워 보니 하늘나라에 있는 문도령의 부모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였다.
"문도령아. 이제 3년 글공부를 마쳤으니 돌아와 결혼을 하거라. 서수왕아기를 네 색시감으로 정해 두었다."
문도령이 자청도령에게 그 말을 전하면서 이제 그만 헤어질 때가 됐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자청도령이 놀라면서
자기도 이제 공부를 그만두고 집으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둘은 거무선생 및 여러 제자들과 하직하고 길을 나섰다. 가던 길에 주천강에 도착하니 자청비가 문도령에게
말하였다.
"이제 저 강을 건너면 이별이군. 그나저나 우리 이 물에서
묵은 때나 씻고 갈까?"
"그래, 좋은 생각이야."
문도령은 아랫쪽에, 자청비는 저 윗쪽에 자리를 잡고 목욕을 시작하는데, 자청비는 옷을 벗는 둥 마는 둥 물소리만
내더니 버드나무 잎새를 따서 뭐라고 편지를 써 물 위에 띄우고 나서 집으로 향하였다. 아래에서 목욕을 하던 문도령이 버드나무 잎을 발견하고서 이상하게 생각하여 살펴보니
웬 글이 써있다.
"눈치 없는 문도령아, 멍청한 문도령아. 삼년간 한방을 쓰고도 눈치 모른 문도령아."
놀란 문도령이 윗쪽을 보니 자청비가 벌써 옷을 입고 나서서 저 멀리 가고 있는 것이었다. 문도령이 서둘러 옷을 입는데 윗도리는 어깨에 걸리고 바지가랑이 하나에 두 다리가 들어간다. 급히 자청비의 뒤를 따르는데, 멀리 보이는
자청비 뒷머리가 삼단같이 길고 곱다. 문도령이 옷도 제대로 못 입은 채 주먹을 불끈 쥐고 뛰어가니, 발에 콩알처럼
물집이 잡히고 머리로는 방울방울 굵은 땀이 흘렀다.
집에 당도한 자청비가 오던 길을 살펴보니 멀리 문도령이
엎어지며 일어나며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동안 몰래 문도령을 사모했던 마음에 야속한 마음과 가엾은 마음이 한데 얽힌다. 그는 문도령에게로 다가가서 말하였다.
"문도령님아. 제가 여자의 몸으로 오늘까지 도령님을 속였습니다. 그런데 저를 버리지 않고 이렇게 따라오시다니요.
오늘은 우리 집에서 쉬어 가도록 하세요. 제가 부모님께 한번 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자청비가 부모님을 찾아서 문안인사를 올렸다.
"그래 그 동안 3년 공부에 아픈 곳은 없었느냐? 어쩜 그리
소식도 뜸했단 말이냐?"
"죄송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 동안 더 늙으셨군요. 저는
편안히 공부 잘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청비가 덧붙였다.
그런데 부모님, 지금 집 밖에 3년 동안 저하고 같이 공부한
도령이 있는데, 발이 콩구슬처럼 부푼 데다 벌써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머물도록 해주세요."
"그래, 그 나이가 열 다섯이 넘었더냐, 안 넘었더냐?"
문도령의 나이는 자청비와 같은 열여덟이었으나 자청비는
문도령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짐짓 딴전을 피웠다.
"아마 아직 열다섯이 안 됐을 겁니다."
"그래, 그럼 네 방에 함께 머무르도록 해라."
부모님 허락을 받은 자청비가 남자 옷을 벗어놓고 여자 옷으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 문도령을 맞아들인다. 문도령이 보니 3년 전에 주천강가에서 볼 때보다도 그 모습이 더
성숙하고 아름다웠다. 둘은 손을 맞잡고 자청비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있는 비단 베틀을 보자 자청비가 반가운 마음에 선뜻 뛰어올라 옷을 짜니, 그 모습을 보며 문도령이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그날밤 자청비와 문도령은 밤을 꼬박 새우면서 마음속에
담았던 정회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서로 굳게 사랑을 다짐하였다. 어느새 닭이 울고 날이 밝아 문도령이 떠날 때가
되자 자청비가 문도령에게 말하였다.
"이제 하늘나라로 올라가면 언제나 오실 건가요?"
"내가 박씨를 하나 주고 갈께요. 내년 봄에 이 박씨를 심어서 열매가 익어서 따게 될 때까지는 꼭 돌아오리다."
"아쉬우니 정표라도 하나 주고 가세요."
문도령은 가지고 있던 상동나무 머리빗을 반으로 쪼개어
한쪽은 자청비에게 주고 한쪽은 자기가 간직하고서 하늘나라로 길을 떠났다.
문도령이 떠나고 나서 가을이 가고 추운 겨울이 지났다. 그리고 기다리던 봄이 왔다. 자청비는 문도령에게서 받은 박씨를 자기 방 뒷뜰에 심었다. 얼마 후 싹이 트더니 점차 줄기가 자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름이 되자 지붕 위에 올라온 박넝쿨에 하나 둘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열매가 점점 커져가는데도 문도령에게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드디어 열매가 항아리만큼 커져서 딸 때가 되었는데도 끝내 문도령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청비가 시름에 겨워 뜰을 거닐면서 울 밖을 살펴보니 한
농사꾼 부부가 산에 갔다 오는지 남자는 나무를 한 짐 해지고서 지게에 꽃을 꽂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오고, 여자는 머리에 꽃을 꽂고서 그 뒤를 따른다. 그 모습을 보니 자청비는 웬지 심통이 나는 것이었다. 마침 집 한 구석에 점심을
배불리 먹고 난 정수남이가 퍼질러 앉아서 바지 춤을 뒤적이면서 이를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자청비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정수남이에게 말했다.
"정수남아. 이 지저분한 녀석아. 너는 남의 집 하인으로서
밥만 퍼먹고 이를 잡고 있단 말이냐? 저 사람들 나무를 해서 짊어지고 오는 것도 안 보이니? 어서 나가서 나무라도
한 지게 해가지고 오너라."
그러자 정수남이가 실퉁맞은 표정으로 대꾸한다.
"상전님아. 이 꼴이 그리 보기 싫거든 말 한마리와 소 아홉
마리와 도끼, 잠뱅이를 챙겨 주오. 그러면 내 깊은 산속에
가서 한 달간 땔 나무를 바리 바리 해가지고 오리다."
그 말을 들은 자청비가 말과 소, 도끼 따위를 준비해서 주니 정수남이가 말을 타고 소떼를 몰아 굴미굴산 깊은 산으로 나무를 하러 떠났다. 숲속에 도착한 정수남이는 나뭇가지에 말과 소를 매놓고서는 나무를 하기는 커녕 누워서 낮잠만 자는 것이었다. 자다 깨면 또 자고 깨면 또 자고 하는데, 어찌나 잠을 오래 잤는지 몇날 며칠이 지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정수남이가 마침내 기지개를 펴며 잠에서 깨고 보니 며칠 동안 나무에 매여 있던 소와 말이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파서 다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이미 살아날
가망이 없었다.
정수남이는 주변에서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는 죽어 넘어진 소의 가죽을 하나하나 벗긴 다음 소를 통째로 불에다가 굽기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익었는가 어쩐가 하면서 고기를 떼어먹는데, 그렇게 한점 한점 먹다보니 한 나절
만에 소 아홉 마리를 온데간데 없이 다 먹어 치우고 말았다.
"모처럼 한번 포식을 했군. 그나저나 집에 가서 뭐라고 하나?"
정수남이가 소가죽과 말가죽을 짊어지고 도끼를 들고 잠뱅이를 입고서 숲을 나서서 내려오는데, 마침 근처 연못에 오리가 한 마리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옳지. 우리 상전이 고운 것을 주면 좋아하니 저 오리나 잡아다 바치고 밥이라도 얻어먹어야겠다."
그러면서 정수남이가 어깨에 맸던 도끼를 꺼내 멀리 오리에게 던지니 오리는 날아가고 도끼는 물 밑에 가라앉아 버리고 말았다. 정수남이가 도끼를 찾으려고 잠뱅이를 벗어놓고서 물속을 이리저리 뒤졌지만 도끼를 찾을 수가 없다.
그가 지쳐서 연못에서 나와 보니 아뿔싸, 웬 도둑이 말가죽
소가죽과 잠뱅이까지 다 챙겨서 도망가 버린 뒤였다.
"어허,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