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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시l : 2016.01.16
2.장소 : 경주 배동 남산(금오산 468m)
제목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경주 남산의 유적지
부제목 :- 배리 삼릉에서 금오산 468m 정상까지-
병신년 1월 16일 경주 삼릉 주차장에 도착하여 안내지를 받고 오전11시부터 산행을 시작하였다. 경주 남산은 경상북도 경주시 경주평야 남쪽에 솟아있는 산으로 신라인의 숨결이 배인 자연을 벗 삼은 ‘야외박물관’이다. 남산에 대한 전설은 옛날 정착할 땅을 찾던 남신(南神)과 여신(女神)이 서라벌(徐羅伐)의 아름다움을 보고 기뻐 소리쳤더니 그 곳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산 같이 큰 사람 봐라” 라고 해야 할 말을 “산 봐라!”라고 소리 질러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南山)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한다.
향토사학자들은 ‘남산을 보지 않고 경주를 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남산에는 우리의 문화유산이 많은 곳이며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우리나라의 보물이다.
제1 탐방로는 삼릉공원에서 출발하여 금오산 정상까지로 정했다. 공원 입구의 가장 가까운 곳에 사적 제219호인 배리 삼릉이 있다. 배리는 마을의 이름이며 이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 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삼릉골을 지나면 탐방로 입구에서 삼릉골 제1사지 탑재와 불상을 만날 수 있다. 남산 계곡에 흩어져 있던 불상들을 한곳에 모아 정비한 것이 삼릉 골 제1사지 탑재와 불상이다. 앉은 불상은 약합을 들고 있어 약사 여래상이며, 옷주름 조각이나 특별한 양식이 없어 시대를 알 수 없다. 2점의 탑재는 각기 다른 탑의 조각이며 또 한 점의 불상은 여래입상이다. 허리 위나 발 대좌는 잃어버렸으나 옷의 주름 양식으로 보아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탐방 길을 힘겹게 올라가니 마애관음보살상과 삼릉골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 그리고 개울을 건너 선각육존불을 만난다. 양각화가 희미한 곳이 있으나 바위에 새겨진 불상을 잘 보이게 그려 넣은 설명이 방문객의 이해를 도왔다. 마애관음보살은 통일신라 후기인 8~9세기 경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돌기둥처럼 생긴 암벽 남면에 양각한 이 조각은 관음보살상으로 연화좌 위에 서 있다. 석조여래좌상은 보물 제666호로 머리는 골짜기에, 불신은 앞으로 광배는 뒤로 쓰러진 것을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선각육존불은 신라인의 모습 그대로 담은 것으로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이며 경주 남산 삼릉 계곡 입구에 있는 선각(線刻 : 선으로 새김)의 마애불상군이며 꽃 모양의 보살상은 드문 모습이다.
400여 미터 올라가면 마애불 기도 도량 상선암을 만날 수 있다. 상선암 위쪽의 광배형으로 생긴 암반에 높이 5m가 넘는 삼릉계곡 제6사지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는데 대불좌상은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앉아 있는 모습의 석가여래불이다. 너비 4.4m나 되는 큰 연꽃 위에 결과부좌로 앉아 있으며 남산의 좌불상 가운데서 가장 큰 불상이다. 상선암 뒤로 높이 솟아 있는 절벽의 바위 봉우리가 남상 神 상심이 살고 있는 상사바위이다. 남쪽 면은 산아 당으로서 많은 사람이 아기 낳기를 기도하였는데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동쪽 면에는 남근석과 기도용 감실이 있는데 상사병이 걸린 사람이 빌면 영험이 있다고 한다. 삼릉곡 마지막 제9사지 선각보살상은 누워있는 바위에 하반신만 남은 조각은 화려한 옷 주름과 구슬, 리본 등이 새겨져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상사 바위를 돌아 금오산 정상 앞의 편편한 쉼터에 도착하니 보기에도 인자한 모습의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의 그림엽서와 우체통이 반긴다. 경주시 남산 연구소에서 제공하는 이 그림엽서는 남산을 탐방한 사람들이 소감을 적어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한 엽서이다. 금오산 정상을 향하는 길은 넓은 테그와 안전한 오솔길이 반겨주어 468m의 금오산 정상을 올라 표지석에서 인증샷을 하고 다시 유턴하여 5.2km의 산행을 마치고 삼릉 주차장 옆의 유명한 칼국수 한 그릇을 먹고 부산으로 귀가하였다. 남산은 여러 갈래의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다음 제2 탐방로인 용장골의 모습을 뒤로 하고 봄에 다시 찾아 올 것을 약속한다.
실버넷뉴스 선진규 기자 3Dsjk3893@silverletnews.com">sjk3893@silverletnews.com
남산(南산)과 망산(望山)의 유래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별이라 했으며,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새별을 비추고 따스 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음으로 가득 찬 평화로운 땅이다.
검붉은 얼굴에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 불퉁 한 남신(南神)이 였고, 또 하나는 가름한 얼굴에 반짝 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음이 아름다운 여신(女神)이 였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별을 보고 "야" 우리가 살 땅은 이곳이구나!! 하고 외쳤고 이 때 개울에서 빨래하든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 때 산 같이 큰 두 남여가 자기쪽으로 걸어 오는것이 아닌가?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 !" 라고 해야할 말을 급하니 ;산 봐라" 는 처녀의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멈쳐서고 움직이지 못했다. 남산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南山)이 되었고, 여신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경주 배동 삼릉
이곳에는 신라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 제53대 신덕왕(神德王),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어 삼릉이라 부른다. 아달라왕(재위 154∼184)은 백제가 침입하여 백성을 잡아가자 친히 군사를 출동하여 전장에 나아갔다. 그러나 백제가 화친을 요청하자 포로들을 석방하였다. 왜(倭)에서는 사신을 보내왔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8m, 높이 5.4m, 지름 18m이다. 효공왕(孝恭王)이 자손이 없이 죽자 백성들이 헌강왕(憲康王)의 사위인 신덕왕(재위 912∼917, 박경휘)을 추대하였다. 견훤(甄萱)과 궁예(弓裔)의 침입이 있어 싸움에 진력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61m, 높이 5.8m, 지름 18m이다. 두 차례에 걸쳐 도굴을 당하여 1953년과 1963년에 내부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매장주체는 깬 돌로 쌓은 횡혈식 돌방[橫穴式石室]으로 밝혀졌다. 경명왕(재위 917∼927, 박승영)은 신덕왕의 아들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과 손잡고 견훤의 대야성(大耶城)공격을 물리쳤다. 중국 후당(後唐)과 외교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능의 크기는 밑둘레 50m, 높이 4.5m, 지름 16m이다
삼릉골 제 1사지 탑재와 불상
게곡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 곳에 모아 정비하였다.
앉은 불상은 약합을 들고 있어 약사 여래상이며, 옷 주름 조각이나 특별한 양식이 없어 시대를 알 수 없다. 또 한 점의 불상은 여래입상입니다. 허리 위나 발 대좌는 잃어 버렸다. 옷의 주름 양식으로 보아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2점의 탑재는 각기 다른 탑의 조각이다 - 경주 국립공원-
삼릉골 제 2사지 석조여래좌상
높이 1.60m 너비 1.56m 의 큰 불상이다. 옆 계곡에 묻혀 있다가 1964년 발견되어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 주름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가슴에 매듭이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어 전통 매듭이 신라시대부터 장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와 두 무릎 수인이 파괴되어 어떠한 불상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나, 편안이 앉은 자세, 탄력있는 가슴, 널고 당당한 어깨 등 8세기 중엽 통일 신라 전성기의 위풍 당당한 불상이다. - 경주국립공원-
삼릉계곡 선각육존불(三陵溪谷線刻六尊佛)
문화재 지정 (지정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 (1972년 12월 19일)
제작시기 통일신라시대(7세기 말 8세기 초)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호. 경주 남산삼릉 계곡 입구에 있는 선각(線刻 : 선으로 새김)의 마애불상군이다.
좌측의 조금 돌출된 바위 면에 새겨진 불입상의 삼존불은 좌우의 두 보살이 무릎을 꿇고 꽃 쟁반을 받쳐 들어 꽃 공양을 하는 모습을 대담한 곡선의 선각으로 표현하였다.
편단 우견(偏袒右肩 : 왼쪽 어깨에 옷을 걸치고 오른쪽 어깨가 드러남)의 착의법에 왼쪽 어깨를 넘어가는 대의(大衣 : 설법을 하거나 걸식을 할 때 입는 중의 옷)의 옷단이 삼각형으로 접혀 있다.
보살상은 가슴 앞에 세 개의 구슬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어깨를 감싸고 양쪽 겨드랑이 밑으로 빠져나가는 천의(天衣 : 천인이나 선녀의 옷) 자락이 몸 옆으로 큰 곡선을 그리며 유연하게 흘러내리고 있다.
오른쪽 뒤의 큰 바위 면에 선각된 불좌상 본존의 삼존상도 착의법이나 표현 기법이 거의 같으나 묘사력에서는 뒤떨어지는 편이다.
좌협시는 바위 면의 균열로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다.
이 상들의 표현은 보살상의 착의법이나 목걸이 장식, 여래상의 소발(素髮 : 민머리)의 표현과 풍만한 신체 표현이 통일신라 초기의 경주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판불(雁鴨池出土金銅三尊板佛)과 가깝게 보이며, 우견 편단의 착의법만 다르다. 따라서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제작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꽃 공양의 보살상은 드물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삼릉계곡 제6사지 마애선각 여래좌상
이 불상은 남산의 북쪽 금오봉에서 북서쪽으로 뻗어 내려가다가 작은 봉우리를 형성한 바둑바위의
남쪽 중턱에 있다. 자연 암반을 파내어 광배로 삼았는데 깍아내다가 그만둔듯 거칠다.
높이 7m로 삼릉계곡에서는 가장 큰 불상이다.
이 불상의 머리는 거의 입체불에 가깝고 그 아래는 선으로만 조각되어 있다.
풍만한 얼굴에 눈썹은 둥글고, 눈은 반쯤 뜨고 입은 굳게 다물었다.
민머리에 턱은 주름이 지고 귀는 어깨까지 큼직하다. 옷은 양 어깨까지 걸쳐져 있으며,
가슴부분이 벌어진 옷 사이로 속옷의 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엄지와 둘째, 셋째 손가락을 굽혀 가슴에 올렸고 왼손은 무릎에 얹었다.
결가부좌한 발 표현과 연꽃 대좌가 아주 특이하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애불 기도 도량 '상선암'
마애불 기도 도량 '상선암'-
삼릉곡 제9사지 선각보살상
누워있는 바위에 하반신만 선각으로 남아있는 이 불상 조각은 화려한 옷 주름과 구슬, 리본, 꽃 등이 새겨져 있어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완전하다면 5m 정도 되는 큰 상을로 9세기에 조성된 보살상이며, 본래 위치는 알 수 없다.
금오산 중턱 전망대
상사바위와 포석곡 석조 여래입상
상선암 뒤로 높이 솟아 있는 깍아 지른 듯한 바위 봉우리가 남상 神 상심이 살고 있는 상사바위이다. 남쪽면은 산아당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아기 낳기를 기도하였는데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1856년에 새긴 산신당(山神堂)이라는 명문이 있다.
신라 49대 헌강왕이 포석정에 행차 했을 때 왕 앞에서 춤을 추기도 하였다. 동쪽면에는 남근석과 기도용 감실이 있는데 상사병이 걸린 사람이 빌면 영험이 있다고 한다. 마모가 심하여 연대는 추측하기 힘들다.
첫댓글 우리 문화유산은 귀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