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똑같은 인식에서 똑같은 결의로
밀양역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경이었다. 강성호와의 만남은 31일로 약속되고 있지만 구태여 하루 더 두고 만날 일도 없고 해서 집에 들기에 앞서 강성호를 만나러 갔다. 아마 학교에 있을 것 같아서 고등공민학교로 바로 갔다. 고등공민학교의 교사는 내이동 사람들이 「동사」라고 부르는 집인데 작은 사무실이 두 개 있고, 회의실로 쓸 수 있는 널찍한 방이 둘이나 있다. 일제시기에 동민들이 모여 회의도 하고 각종 친목회 사무소로, 청년단체 사무소 등으로 쓰기 위하여 동민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하여 지은 건물이다. 벽체는 알매 친 벽이고, 벽을 빗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송판으로 둘러친 건물이다. 양철지붕과 함께 건물 전체를 청회색으로 페인트칠한 당시 흔한 관청 식 건물이었다. 1930년대까지는 야학도 했고 문화적인 활동에도 이용했지만 일제의 대륙침략정책으로 무슨 애국봉사운동 따위를 하는 시기에는 각종 친일단체의 말단 동 사무소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8.15해방을 만나 그 「동사」는 일단 원래의 목적을 되찾았지만 곧 미 군정으로 되자 군정협조단체들의 하부 동조직의 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다가 밀양의 황용주 선생이 여기에다 우선 「밀양고등공민학교」를 설립했다. 이것이 지금 밀양의 「세종중・고등학교」의 전신이다. 「동사」의 정문은 바로 골목길에 난 현관이고 뒤꼍에 탁구대를 둘 수 있을 정도의 뜰은 있지만 학생들이 모여 조회나 무슨 행사를 할 수는 없었다. 이런 장소로 쓸 수 있는, 운동장까지는 못되지만 공간은 「동사」 현관 앞에서 옛 밀양성의 해자였던 개천으로 가는 길옆에 2, 3백 평쯤 되는 「동사」에 속한 터가 있어서 운동장 역할을 그런대로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 집 연계소는 5,60미터도 안 되는 데도 나는 집보다 강성호를 만나는 것이 급했다. 그것은 밀양을 떠나 있어서 조직의 정세파악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 갔더니 마침 수업이 쉬는 시간이라 성호는 곧 만날 수 있었다. 거기에서 강성호뿐만 아니라 그때 함께 퇴학당한 친구들도 있을 법한데 한 둘 말고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거의 모두 부산으로, 마산으로 전학했다고 했다. 내가 「동사」 현관 앞 골목에까지 들어가자 골목에는 학생들이 메우고 있는데 거기에 강성호가 있었다. “성호야!” 하고 소리치자 성호는 나를 보더니 웬일이냐는 듯 온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띠고 쫓아온다. 둘은 서로 손을 잡고 반가워했다. “내일 만나기로 했는데 어인 일고?”라고 성호가 말하자, 나는 “꼭 내일이라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럼 도로 가서 내일 올까?”라고 하자, “이건 만나자 마자 시비야.” 이렇게 수선을 한바탕 떨고 우리 둘은 골목길을 빠져나와 신작로로 들어 영남루로 올라갔다. 영남루 마당에서 영남루를 향해 왼쪽에 시멘트로 만든 계단이 있는데 그 길이가 5, 60미터나 된다. 이 계단은 왜놈의 조상신이라는 ‘아마데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신 신사로 올라가는 길이다. 일제 때 무슨 일이 있으면 거기에 모두 끌고 가서 손바닥 두드리고 절하면서 비는 곳이다. 우리는 그곳으로 올라갔다. 거기는 그 당시 밀양사람들은 잘 안가는 곳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밀담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처럼 조용해도 왜놈 귀신 때문인지 아베크족은 안가는 곳이다. 아마 재수 없는 왜놈귀신이 묻을까 해서 그럴까? 신사 건물 뒤편으로 좀 더 올라가면 무슨 돌무덤 같은 곳이 있어서 거기에 걸터앉을 수 있어서 우리들이 이야기하기에는 십상이었다. 둘은 거기에서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성호가 좀 추워보였다. 그래서 나는 모직 천으로 된 외투를 벗어 성호 어깨에 걸쳐주었다. 성호는 외투를 걸쳐주는 나를 보고 말했다. “이 사람, 이번에는 아주 부잣집 학생 같네. 너는 어쩌고?” 나는 웃으며 웃옷 안에 두터운 털실세터를 보이며, “이 안에는 따뜻한 내복도 입고 있어 이마에 땀이 날 지경이다. 대구에서 이모가 형아에게는 작아져서 나 입어라고 몽땅 내게 주셨다네.” “허, 이 사람 횡재했네.” 나는 그 동안 성호가 받아온 조직적 정세분석을 전해 받았고, 우리는 거기에 앉아 토론도 했다. 성호와의 이 토론에서 당시 세계정세와 거기에 따른 미제의 남조선 영구분단 음모에 관한 정세를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영・소・불・중 등이 승리해서 전승국으로 되었으나, 진짜 전승국으로서 패권을 독차지 하게 된 나라는 미국뿐이다. 전쟁이 끝나자 제국주의나라는 패전국 일・독・이 3개국은 물론이고 전승국일지라도 미제를 제외한 전승국은 전쟁으로 국내의 본질적인 모순을 우선은 덮을 수 있었지만 이 모순과 전쟁으로 피폐한 경제를 복구하는 일과 겹쳐 온 힘을 빼야 할 지경으로 되었다. 미제는 이번 전쟁으로 군수경기에 의한 자본축적이 집적되고, 제국주의 여러 나라에서 그것으로 패권을 독차지하게 되었다. 미제는 이 기회로 식민지재분할을 이룰 것이며 그밖에 제국주의나라는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는 독립되어 떨어져 나가고, 이로써 생긴 신생독립국의 얼굴은 패권을 가지게 된 미제로만 향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정세를 맞아 미제는 자본수출과 경제원조로써 이들 신생독립국을 예속시키며 지난날의 식민지와 는 별반 다를 것 없는 허울뿐인 독립국으로 되고 말 것이다. 지금 그러한 현상은 국제연합이라는 UN에서 그 회원국이라는 것들이 미제의 거수기 노릇을 충실히 하고 있는 데서 우리는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승국이라 할지라도 미제의 원조와 자본수입 없이는 전후 복구를 할 꿈을 버려야 할 처지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용해서 미제는 마셜계획이라는 것을 내세워 유럽 제국주의나라를, 패전국은 물론 전승국마저도 미제의 패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사회주의나라인 소비에트연방은 비록 전승국이기는 하지만 전쟁으로 엄청난 인적손실과 더불어 경제적 손실이 겹쳐 있어 이를 복구하는 동안, 소련 자신과 소련의 전승으로 해방된 나라를 수호하는 일밖에는 그 여력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조성된 세계정세에서 미제는 일제총독체제와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다는 명목으로 38도선 이남에 들어왔지만, 그 수여된 과업을 마쳤다고 해서 그냥 물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 명분으로 얼토당토않은 신탁통치문제를 내걸어 그들의 계속주둔의 명분으로 삼았고, 이것이 먹혀들지 않자 신탁통치의 명분인 모스크바3상회 결정을 짓밟아버린 다음, 이제는 남조선단독정권을 만들어 남조선을 식민지와 다름없는 괴뢰정권으로 해서 독립은 허울뿐이고 실제로는 전전의 식민지와는 다른 보다 새로운 형태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미제는 모스크바3상회의결정을 파탄시키자 소련이 제안한 ‘미・소 양군 동시 철수안’을 못 본채 하고 기어이 조선문제를, 그 헌장을 위배하면서까지 UN에 가지고 갔다. 그래서 ‘남조선단독선거’를 결의하고 「국련임시조선위원단」(UNTCOK)을 구성하여 지금 서울에 들어와서 장차 실시할 남조선단독선거를 감시한다고 설치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국련임시조선위원단」 안에서 벌써 한 성원국의 주일 오스트레일리아 사절단 쇼우는 1947년 11월 11일, 본국정부에 다음과 같은 보고를 했다. “실권이 잔인한 경찰의 손에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한국의 감옥은 지금 일본 통치시대보다 더 정치범으로 넘쳐나고 있다. 극우단체에 의해 정적에 대한 고문, 살육은 일상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으며, 이와 같은 불법행위는 널리 공인되고 있다. 미군의 G-2(정보부)는 좌익을 억압하는 데만 열심이고, 그들의 한국인 앞잡이들이 어떤 수단을 취하건 단속할 생각은 없다.” 이와 같이 우리들 두 사람은 일치된 정세분석을 나름대로 하고 지금 우리들에게 제시된 과업을 토론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해서, 미제에 의해서 조성된 ‘남조선단독선거를 반드시 파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호로써가 아니라 실제로 모든 방법으로, 실력행사로 이루어내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 둘이 동일한 정세관과 그에 토대한 결의를 일치시키고 그 다짐으로 굳은 악수로써 동지적 일치를 확인했다. 이런 결의를 하고서 강성호는 말했다. “우리의 결의는 당과 「민애청」의 조직적 결의와 일치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동은 조직적 실천과도 일치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행동은 조직의 지시에 따라 집행할 것이고, 결과 또한 조직에 보고되어야한다. 오늘 우리 둘의 회합결과는 조직에 보고될 것이며 비준 받을 것이다.” 그리고나서 성호는, “재구, 이 일을 조직하고 실천하기 위해 대중과 결합할 방도를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밀양고등공민학교」에 편입하기로 하자는 것이다. 원래 네가 31일에 오면 그 이튿날 2월 1일에 황용주 교장 선생을 만나 입학을 허락받고 학생이 되어 이 학교의 조직핵심에서 일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31일이 토요일이라 2월 1일은 일요일, 바로 내일 교장 선생을 만나기로 하자. 내일 아침 일찍이 말이다.” 우리는 일을 이와 같이 결속하자 내려 왔다. 신작로로 내려오자 곧 버스정류소까지 왔는데 그 근처에 밀양에서 제법 이름 있는 중국음식점이 있어서 성호를 데리고 들어갔다. “성호야, 나 이번에 아버지한테서, 그리고 대구에서는 이모한테서 돈 좀 얻어왔다. 우리 마음 놓고 한 판 먹자.” “그래, 어찌 네게서 돈 냄새가 나더라니. 옛날부터 네 포켓에 돈 있으면 당장 표 안 나나. 네야 원래 대식가라서 나완 다르지만 나는 소식이라서 자장면 한 그릇이면 그만 아이가.” “많이 먹는 놈 하고 먹어야, 먹는 재미가 나지. ‘개병쟁이’처럼.” ‘개병쟁이’는 나의 초등학교 동기동창인데, 학교 다닐 때 하도 설쳐서 생긴 별명이다. 나는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서 ‘개뚜뱅이’였다. ‘개뚜뱅이’는 놋 양푼이 뚜껑을 말하는, 우리 고향 사투리이다. 이 뚜껑은 아무 그릇에 두루 쓰이는 뚜껑이다. 이 그릇 저 그릇 두루 쓰이다보니 이리저리 부딪쳐서 늘 젱그렁거리며 소리가 난다. 헤어져, 나는 바로 곁에 있는 연계소 고향집으로 갔다. 시간은 2시 좀 넘었다. 대문을 열고, “할매!”라고 부르며 축담에 올라서니, 할머니는, “네가 웬일고! 그쪽 식구는 모두 탈 없제.” “응. 할배는?”, “응, 잘 계시는가 보더라. 할배는 밀양이 모두 자기 집이지.” “편찮으신 데는 없고.” 할머니는 그저 “응.” 말소리에 힘이 없다. “할매, 무슨 일 있나? 목소리에 그리 힘이 없노?” “괘않다. 내가 무슨 힘이 있을 거고? 네 아재비 하고 둘만 사는데. 내사 너그 한테 가서 죽이면 죽, 밥이면 밥, 생기는 대로 먹고 너거 보고 살고 싶다.” 할머니의 이 말을 듣자 나는 눈시울이 젖어온다. “할매, 내가 할매캉 살라고 왔다 아이가.” “네사 와도 일 생길까봐 걱정만 생기지. 그래도 반가운데 우짜겠노. 그레 점심은 먹었나. 밥차려 주까?” “괘않다. 좀 전에 친구하고 점심 먹었다.” 그 이튿날, 9시 쯤 해서 「동사」에 있는 「밀양고등공민학교」에 갔다. 강성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성호는 어제 헤어지고 학교에 와서 교장 선생에게 말씀드렸다고 했다. 교장은 지금 학교에 와 계신다고 했다. 나는 성호를 따라 한 별실로 들어갔다. 거기가 교장실로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장이신 황용주 선생은 나의 소학교 같은 반의 동무인 황종진의 삼촌이다. 황용주 선생도 조카와 단짝인 친구라는 것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8.15 이후에는 처음 만났다. 나를 보더니 반갑다고 하시면서, “옛 어릴 때 모습보다는 훨씬 좋은데. 인자 헌헌장부가 다 됐네. 그래, 밀양중학교에 다니다가 퇴학당했다고 들었다.” 그러면서 곁에 앉은 나의 손을 잡고 “어른들이 신통찮아서 ......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퇴학이라니.” “맹자의 말씀에 이런 말이 있다. 『하늘은 장차 크게 쓰려는 사람에게 어려움을 주어 단련하신다.』 는 말이 있다. 자네를 크게 쓰려 하시는 것이니 기 죽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거라.” 그것은 「맹자」에 있는 말이다. 이 말이 황 선생의 말소리와 더불어 지금도 때때로 회상한다. 나는 이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고, 2.7구국투쟁으로 꼭 1주일을 다니고 그만두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