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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마드리드 길,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 보아라
사아군은 마드리드 길의 종점(순진행)이자 시발점(역진행)이다.
마침내 프랑스 길과 결별하고 귀국 비행기가 대기중인 마드리드를 향해 유쾌한 출발을
하려는 시점인데 클루니의 벽에 부착된 홍보 포스터가 초를 치는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밖에 나갔다가 일본 시코쿠 섬(四國島)의 88개사찰 일주 1.200km
헨로(遍路)를 걸으러 오라는 안내판을 다시 보는 순간 그랬다.
2006년, 84명 :282명으로 한국의 3.5배였던 일본에 449명 : 327명으로 대역전한 한국의
순례자는 2008년에는 915명 : 412명으로 일본의 배를 훌쩍 넘겼다.
2009년에도 1.079명 : 526명으로 일본은 한국의 반이 되지 못하면서도 양국의 우호관계
수립은 물론 대문짝 같은 홍보판을 부착하고 있다.
대학인순례자 협회에도 소위 학위증이라는 순례자 증명서에 집착하고 있는 우리와 달리
그 프로그램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어쩌면 부러움이 지나쳐 시샘하고 있는 것 아닐가.
새벽에 배낭 정리를 했다.
마드리드 길과 무관한 것들은 모두 소외감을 느꼈을 것이다.
시르가의 안스와 클루니의 여직원(recepcionista)으로부터 받은 스페인어판 책자들만
최고의 대우를 받고 있으니까.
레디고스의 1 여인이 새벽같이 일어나 끓인 누룽지를 함께 먹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누룽지가 내 마드리드길 첫 식사요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 한식
아침식사라니!
고마운 그녀에 대해서는 함부르크의 딸네 집으로 갈 것이라는 것 외에는 아는 게 없다.
내 카페 주소를 주었지만 그녀가 방문하지 않아 헤어질 때 디카에 담아온 사진도 보내
주지 못하고 있다.
e-mail 주소쯤은 받아올 수 있었으련만 주변머리 없는 늙은이의 한계인가.
클루니의 육중한 문을 열고 나오는 족족 서쪽 행이고 남쪽 길에 홀로 들어설 때 스스로
택한 길인데도 어이없게도 황량한 벌판에 내몰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구나 늦잠 꾸러기 나라의 사람 귀한 시골 새벽길에서 누구를 만날 수 있겠는가.
흔했던 황색 화살표와 가리비, 지팡이와 표주박, 어떤 것도 눈에 띄지 않는 길이다.
사아군 발 5.2km, 그라할 데 캄포스(Grajal de Campos)마을이 모습을 드러내는 지점
에서 온 길을 뒤돌아보았을 때 도로변에 4각 가리비와 화살표 간판이 서있지 않은가.
데 마드리드 아 산티아고(from Madrid to Santiago) 길이라 마드리드에서 오는 사람만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순(順)진행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역(逆)진행의 애로다.
역 마드리드 길 제1칙(則)은 시도 때도 없이 돌아다 보아라.
늙은이에게 펀치를 많이 날린 길
사아군에 진입할 때 건넜던 발데라두에이 강(rio Valderaduey) 앞에 당도했다.
마드리드 길에서 최초로 만난 사람은 다리 앞에서 작업차량들 교통을 정리하는 젊은이.
나의 마드리드 길 최초의 길 안내자도 된다.
그가 가르쳐준 길은 마을을 통과하지 않는 대신 도로와 교량공사로 몹시 어지러웠다.
개울 둑을 따라가는 길도 지름길이기 때문인지 인적 없는 구간이 많았다.
공사를 하고 있는지 중단한 건지 장비들만 있을 뿐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공사판 개울로 누가 낚시하러 온다고 낚시 금지구역 표시라니.(coto de pesca)
간단없이 오가는 거리의 무법자(덤프트럭)를 어렵사리 세워 물어보면 카미노를 모르겠
다는 것인지 내 질문을 이해못하겠다는 뜻인지 손만 저었다.
시작부터 온통 난관이다.
순례자 외에는 지나갈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되어 신발 자국과 자전거바퀴 자국 살피
느라 전전했다.
마치, 토말 길에서 이태리노 조반니의 말발굽 자국 찾듯이.
이러는 내 꼴이 스스로 한심했으나 순례길 표석을 발견했을 때의 환희를 뭐라 설명할까.
감히, 난파선이 구조선을 만났을 때의 감격에 비해 본다면?
제대로 왔다는 자신감과 안도감에 취해 있을 때 중년 자전거 한쌍이 앞에서 왔다.
마드리드 길이 맞다는 확인만 해주고 가던 그들이 되돌아와 장황하게 말을 했으나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 건성으로 듣기만 했다.
내게 도움을 주려고 그랬겠지만 무력감을 느끼게 했을 뿐이다.
인구 50명 쯤인 작은 마을 아레니야스 데 발데라두에이(Arenillas de Valderaduey)는
진입로와 달리 나가는 길이 분산되어 있어 어느 길로 가야할지 난감하게 했다.
역방향의 문제점이 당장 또 드러났으나 50명주민이 다 어디에 숨었는지 만날 수가 없어
TV소리가 요란한 골목집 창문에 대고 디스쿨페(disculpe/excuse)를 연발했다.
다행히도 초로의 영감이 영어를 조금 했으나 우측(right)과 좌측(left)의 기준이 우리와
반대인 것을 깜박 잊어 엉뚱한 길로 들기도 했다.(프랑스 길에서 한번 경험했는데도)
그의 설명도 얼마 가지 않아 효력을 잃었고 또 헷갈리게 하는 길 앞에서 멈췄다.
화살표 위치가 순방향 위주로 있기 때문에 역방향에서는 전혀 쓸모 없는 안내표다.
너른 들을 마냥 방황할 수는 없지 않은가.
두 갈래 길에서는 50%의 확률이지만 세 길에서는 33%밖에 되지 않는 적중률이다.
다리 위에서 식사(빵)하며 트랙터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광활한 들판에서 만날 확률이 가장 높은 트랙터는 사람이 운전하니까.
오래지 않아서 꼬마 딸과 함께 트랙터를 몰고 온 중년남의 안내로 한동안은 태평스럽게
걸었으나 레온(Leon) 주에서 바야돌리드(Valladolid) 주로 넘어가는 들판 2갈래 길에서
결국 헛짚었다.
멜가르 데 아리바가 빤히 보이는 지점에서 발데라두에이 강쪽길로 듦으로서 좀 돌게 된
것인데 멜가르를 거치지 않는 지름길 임을 한참 후에 확인했다.
트랙터의 중년남이 '멜가르'냐 '산테르바스냐'고 자꾸 반문했던 까닭도 비로소 알았다.
그라할 데 캄포스~ 아레니야스 데 발데라두에이~멜가르 데 아리바 13.5km는 첫날부터
무모(無謀)의 대가라는 듯 늙은이에게 펀치를 많이 날렸다.
해발800m대 ~700m대 고원의 드넓은 들판 길들이 땡볕 알바를 많이 하게 했으니까.
사도 야고보의 여러 길에서 첫날 이처럼 많이 얻어맞아 보기는 처음이다.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의 자부심은 후안 폰세 데 레온
잠자리(宿所)가 미지의 마드리드 길에서 현안으로 자리잡고 있었던가.
그래서, 멜가르 데 아리바의 마드리드 길 알베르게가 평정(平靜)을 되찾게 했는가.
알베르게를 보는 순간 자욱하게 끼어있던 안개가 말끔히 걷히는 듯 했다.
갖은 불안을 모두 떨쳐버림으로서 여느 루트와 다르지 않은 길이 되었다.
놀랍도록 빠른 적응이다.
세아 강(rio Cea)가에 위치한 멜가르 데 아리바(Melgar de Arriba)는 카스티야 이 레온
(Castilla y Leon) 지방에 속한 바야돌리드 주의 마드리드 길 마지막 마을이다.
이름이 생소하지 않으면서도 머릿속에서만 맴돌은 세아 강은 프랑스 길 사아군을 벗어
날 때 건넜던 사아군 서북쪽으로 흐르는 강임이 뒤늦게 떠올랐다.
INS(Instituto Nacional de Estadistica/ National Institute of Statistics) 조사에 의하면
2004년에 271명이었던 주민수가 가까스로 200명선에 걸려있는 멜가르다.
대부분의 농촌처럼 기울어가고 있는 마을이다.
단지 전시용일 뿐 사용하지 않는 디딜방아가 문화적 친근감을 갖게 했는지 낯설지 않은
시골길을 걷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의 목적지인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 길이 훤한데도 무료한 시간이 버거운 듯 처마밑
벤치에 넋 없이 앉아있는 늙은이에게 길을 묻기도 했다.
무료한 노인에게는 말상대가 되어 주는 것이 부조다.
스페인의 늙은이들도 오랜만에 돌아온 죽마고우라도 만난 듯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오죽 사람이 그리우면 말이 잘 통하지 않으면서도 그럴까 측은지심이 들기도 한다.
6km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 길은 포장 차로는 물론 오솔길도 헤맬 염려 없는 길이다.
남쪽 어느 지역에 쏟아붇고 있는 소나기가 다가올 기세에 걸음을 재촉하여 도착한 마을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Santervas de Campos)도 인구가 날로 감소해 가고 있단다.
1991년에 199명이었는데 현재 130명대로 줄었다니까.
그래도 마을의 자랑은 이 마을 출신으로 스페인의 탐험가, 정복자인 후안 폰세 데 레온
(Juan Ponce de Leon/1474~1521)이란다.
후안 폰세 데 레온이 없는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는 팟소 없는 찐빵에 비유된다 할까.
그의 입상, 흉상과 그가 총독으로 통치하였던 땅 이름인 푸에르토 리코 광장(Plaza de
Puerto Rico)까지 작은 마을의 상징이다.
최초로 푸에르토 리코를 발견, 정복한 그를 스페인 국왕은 최초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또 플로리다와 미 대륙을 최초로 발견했다.
유럽 원정대를 이끌고 최초로 플로리다에 상륙했으며 부활절(스페인어로 Pascua de
Florida/또는Flores) 기간에 상륙했다 하여 라 플로리다(la Florida)라고 명명했단다.
또한 플로리다를 스페인 왕실소유로 공식화 했고 플로리다의 유명한'젊음의 샘'은 그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란다.
플로리다는 지하 석회암 동굴에서 솟는 연중 상온 20도의 샘물로 유명한 땅이다.
후안 폰세 데 레온은 불로장생의 샘을 찾아 플로리다 전역을 헤맸으나 실패했는데 지병
인 성적 장애를 치유하기 위해 찾아다닌 것이라는 설이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단다.
잊히지 않는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 알베르게의 여인
산테르바스 데 캄포스의 알베르게 찾는데는 아무 도움도 필요치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마을 중심부 길가에서 교회와 알베르게를 묶은 안내판이 방향을 제시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안내가 끝나는 푸에르토 리코 광장에는'순교자 산 헤르바시오 와 산 프로타시오
교회'(Iglesia de los martires San Gervasio y San Protasio),'푸에르토 리코 최초의
총독이며 플로리다의 발견자 후안 폰세 데 레온의 입상'만 있고 알베르게는 없다.
책자에 전화번호가 있으나 내게는 휴대폰이 없다.
교회주변을 맴돌며 사람 나타나기만 기다리다 진입하는 승용차를 세우고 물었다.
젊은 운전자는 바로 옆 2층 건물의 출입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어딘가에 전화했다.
곧 문이 열리고 나는 2층의 벙크 숙소로 안내되었다.
각종 프로그램의 타임 스케줄들이 벽에 부착되어 있고 관련 도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 종합회관으로 보이는 건물이다.
업은 아이 삼년 찾는다더니....
지자체는 이 건물 2층 일부에 마드리드 길 순례자 숙소를 마련한 듯.
한데, 일부 스페인어 가이드 북은 왜 순례자 숙박소에 알베르게(Albergue)와 아코히다
(Acogida)라는 두 단어를 혼용하고 있을까.
책자 이용 첫날이라 '아코히다'가 무슨 뜻인지를 몰랐으나 "(자선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빈민, 의지할 곳 없는 사람, 수용된 사람" 등을 뜻하는 단어라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고통과 고난을 기꺼이 김수한다 해서 순례자가 빈민,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인가.
시설이 미약하고 작은 간이 숙소를 지칭하는 듯 한데 그래도 순례자가 이용하는 숙소다.
아무튼, 마드리드 길 첫날 나는 몇개의 홀에 24명이 묵게 되어있는 2층을 독점했다.
역방향은 물론 순방향까지 종일 만난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당연한 독점이다.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 첫 경험이기 때문인지 좀 얼떨했으며 순례자들로 부터 이다지도
냉대받는 길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탓인지 적잖이 당혹스러웠다.
공교로운 하루였을 뿐 내일 부터는 순방향 순례자를 종종 마주하게 될까.
참으로 외로운 길이 될까.
늙은이를 위한 진심이었지만 오히려 불안을 증복시키는 역할을 한 여러분의 염려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현실이다.
샤워를 마치고 세탁까지 하는 동안에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준비한 빵이 충분하므로 밖에 나갈 일이 없는데 무얼 먹겠느냐는
여인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얼마 후에 애프론(apron)을 두른 젊은 여인이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한 채 주문한 베이컨
보카디요(bocadillo/sandwich)와 물, 요구르트, 캔디를 함께 담은 쟁반을 들고 왔다.
여느 에스파뇰라(espanola)와 달리 아주 상냥하고 날씬한 여인은 영문을 몰라 당황할
수 밖에 없는 내게 편히 쉬십시오(buenas noches/good night) 인사하고 나갔다.
잊히지 않을 이미지만 남기고.
이후, 아침까지 아무도 얼씬하지 않았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