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시인 소개
1903년 전남 강진 출생. 본명 김윤식(允植), 영랑(永郞)은 아호, 13세에 첫 결혼 (23세에 두 번째 결혼)
1915년 강진 보통학교 졸업
1917년 휘문의숙 재학 : 홍사용, 박종화, 정지용, 이태준 등과 함께 수학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 6개월 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름.
1920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 1922년 청산(아오야마)학원 영문학과에 진학
본격적인 문학세계를 열어줌.
시인 박용아와 교류. 청년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박열을 통해 사회주의에 접합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돌아와 정지용 등과 더불어 박용철 주재의 <시문학> 동인으로 참가
1945년 강진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결성, 단장 역임. 대한청년 단장 역임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 취임, 6개월 만에 사임
1950년 9.28 수복 당시 서울에 머물러 있다 유탄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짐.
작품세계
1. 시문학기(1930년-35년)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내 마음을 아실 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2. 저항문학기(1938년-40년)
거문고. 독을 차고
3. 광복문학기(1946년-50년)
바다로 가자 (해설 포함)
일제의 탄압과 그로 인한 문학의 탈정치화가 뚜렷한 흐름으로 이어지던
1930년대 우리 문학은 순수문학이라는 이름 아래 문학의 길을 계속 이어 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시론이 체계화 되고
모더니즘시가 본격적으로 대두하는 등
우리 문학은 한층 성숙한 양상으로 이 땅에 튼실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문학기교의 성숙과 주제의 다양화, 새로운 기법의 등장이라는
1930년대 우리 시의 모습 속에는 김영랑이라고 하는 한 시인이 그 독보적 위치를 올곧게 차지하고 있다.
시문학파의 동인으로서 섬세하고 아름다운 ‘언어의 조탁자’로 알려진 김영랑은
그로 인해 우리의 인식 속에는 현실과는 배제된,
시대의식을 상실한 문인으로 왜곡되어 알려진 측면도 없지 않다.
하지만 그가 지닌 강한 저항 정신과 인간의 문제를 고뇌로 담아내는 시세계를 접한다면
김영랑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이른바 극심미주의로 소개되기도 하는 초기
그의 시조차 강한 현실인식에 그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임도 이해할 수 있다.
한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은 평가와 다양한 그의 면모들을 살펴보는 것은
한 시인의 문학적 가치를 계량하는 차원을 넘어서
한국 문학이라는 큰 흐름과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황 속에서
우리의 문학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바로 볼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해 줄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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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을 아실 이 / 김영랑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디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 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 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 맑은 옥돌에 불이 달아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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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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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성터 / 김영랑
무너진 성터에 바람이 세나니
가을은 쓸쓸한 맛뿐이구려
희끗희끗 산국화 나부끼면서
가을은 애닯다 속삭이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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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 김영랑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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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 김영랑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 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맞어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아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는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덕터―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요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가오
자네 소리하게 내 북을 치지.
영랑시선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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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 / 김영랑
큰칼 쓰고 옥에 든 춘향이는
제 마음이 그리도 독했던가 놀래었다
성문이 부서져도 이 악물고
사또를 노려보던 교만한 눈
그는 옛날 성학사 박팽년이
불지짐에도 태연하였음을 알았었니라
오! 일편단심
원통코 독한 마음 잠과 꿈을 이뤘으랴
옥방(獄房) 첫날밤은 길고도 무서워라
설움이 사모치고 지쳐 쓰러지면
남강의 외론 혼은 불리어 나왔느니
논개! 어린 춘향을 꼭 안아
밤 새워 마음과 살을 어루만지다
오! 일편단심
사랑이 무엇이기
정절이 무엇이기
그 때문에 꽃의 춘향 그만 옥사하단 말가
지네 구렁이 같은 변학도의
흉칙한 얼굴에 까무러쳐도
어린 가슴 달큼히 지켜 주는 도련님 생각
오! 일편단심
상하고 멍든 자리 마디마디 문지르며
눈물은 타고 남은 간을 젖어내렸다
버들잎이 창살에 선뜻 스치는 날도
도련님 말방울 소리는 아니 들렸다
삼경(三更)을 세오다가 그는 고만 단장(斷腸)하다
두견이 울어 두견이 울어 남원 고을도 깨어지고
오! 일편단심
깊은 겨울밤 비바람은 우루루루
피칠 해 논 옥창살을 들이치는데
옥(獄)죽음한 원귀들이 구석구석에 휙휙 울어
청절 춘향도 혼을 잃고 몸을 버려 버렸다
밤새도록 까무러치고
해 돋을녘 깨어나다
오! 일편단심
믿고 바라고 눈 아프게 보고 싶던 도련님이
죽기 전에 와 주셨다 춘향은 살았구나
쑥대머리 귀신 얼굴 된 춘향이 보고
이도령은 잔인스레 웃었다 저 때문의 정절이 자랑스러워
`우리 집이 팍 망해서 상거지가 되었지야'
틀림없는 도련님 춘향은 원망도 안 했니라
오! 일편단심
모진 춘향이 그 밤 새벽에 또 까무러쳐서는
영 다시 깨어나진 못했었다 두견은 울었건만
도련님 다시 뵈어 한을 풀었으나 살아날 가망은 아주 끊기고
온몸 푸른 맥도 홱 풀려 버렸을 법
출도(出道) 끝에 어사는 춘향의 몸을 거두며 울다
`내 변가(卞哥)보다 잔인 무지하여 춘향을 죽였구나'
오! 일편단심
시집 ; 영랑시선 / 정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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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五月) / 김영랑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진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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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ㅎ게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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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하늘 / 김영랑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영랑시집 / 시문학사,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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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김영랑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 날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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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풀 아래 작은 샘 / 김영랑
수풀 아래 작은 샘
언제나 흰 구름 떠가는 높은 하늘만 내어다 보는
수풀 속의 맑은 샘
넓은 하늘의 수만 별을 그대로 총총 가슴에 박은 작은 샘
두레박이 쏟아져 동이 갓을 깨지는 찬란한 떼별의 흩는 소리
얽혀져 잠긴 구슬손결이
웬 별나라 뒤 흔들어 버리어도 맑은 샘
해도 저물녘 그대 종종걸음 휜듯 다녀갈 뿐 샘은 외로와도
그 밤 또 그대 날과 샘과 셋이 도른도른
무슨 그리 향그런 이야기 날을 새웠나
샘은 애끈한 젊은 꿈 이제도 그저 지녔으리
이 밤 내 혼자 내려가 볼꺼나 내려가 볼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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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明 / 김영랑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 아침
취어진 청명을 마시며 거닐면
수풀이 호르르 벌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 머리속 가슴 속을 젖어들어
발끝 손끝으로 새여 나가나니
온 살결 터럭끝은 모두 눈이요 입이라
나는 수풀의 정을 알 수 있고
벌레의 예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도 이 아침 청명의
가장 곱지 못한 노래꾼이 된다
수풀과 벌레는 자고 깨인 어린애
밤 새여 빨고도 이슬은 남았다
남았거든 나를 주라
나는 이 청명에도 주리나니
방에 문을 달고 벽을 향해 숨쉬지 않았느뇨
햇발이 처음 쏟아지면
청명은 갑자기 으리으리한 관을 쓰고
그 때에 토록하고 동백 한 알은 빠지나니
오! 그 빛남 그 고요함
간밤에 하늘을 쫓긴 별살의 흐름이 저리했다
왼 소리의 앞소리요
왼 빛깔의 비롯이라
이 청명에 포근 취해진 내마음
감각의 시원한 골에 돋은 한낱 풀잎이라
평생을 이슬 밑에 자리잡은 한낱 버러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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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늘한 내음
내 가슴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해 고요히 지는 제
머-ㄴ 산허리에 슬리는 보랏빛
오! 그 수심 뜬 보랏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 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얼결에 여읜 봄 흐르는 마음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는 날
뻘 우에 철석 갯물이 놓이듯
얼컥 이-는 홋근한 내음
아! 홋근한 내음 내키다마는
서어한 가슴에 그늘이 도나니
스심뜨고 애끈하고 고요하기
산허리에 슬리는 저녁 보랏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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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 눈결에 쏘이었소
뉘 눈결에 쏘이었소
윈통 수집어진 저 하늘빛
담 안에 봉숭아꽃이 붉고
밖에 봄은 벌써 재앙스럽소
꾀꼬리 단둘이 단둘일로다
빈 골짝도 부끄러워
혼란스런 노래로 흰구름 피여올리나
그 속에 든 꿈이 더 재앙스럽소
*뉘 눈결에 쏘이었소
윈통 수집어진 저 하늘빛
어쩌면 이런 시구절이 나오는지
새삼 또 새삼스럽게도 그 감성의 풍부함에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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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견(杜鵑)
울어 피를 토하고 뱉은 피를 도로 삼켜
평생을 원한과 슬픔으로 지친 작은새
너는 넓은 세상에 설음을 피로 새기려 오고
네 눈물은 수천 세월을 끊임 없이 흐려 놓았다.
여기는 먼 남쪽땅 너 쫓겨
숨음직한 외딴 곳.달빛 너무도 황홀하여
호젖한 이 새벽을,송구한 네 울음
천길 바다 밑 고기를 놀래고
하늘가 어린 별들 바르르 떨리겠구나...
너 아니 울어도 이 세상 서럽고 쓰릴것을...
아니 울고는 차마 죽어 없으리오
불행의 넋이여!
우지진 진달래 와지직 이 삼경의 네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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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앞 맑은 새암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머-ㄴ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영랑시집 / 시문학사,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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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위에 맺혀지는
풀 위에 맺혀지는 이슬을 본다
눈썹에 아롱지는 눈물을 본다
풀 위엔 정기가 꿈같이 오르고
가슴은 간곡히 입을 벌린다
영랑시집 / 시문학사,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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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하늘
사랑은 깊으기 푸른 하늘
맹세는 가볍기 흰구름쪽
그 구름 사라진다 서럽지는 않으나
그 하늘 큰 조화 못 믿지는 않으나
영랑시집 / 시문학사,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