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영화의 역사와 정체
기따노 다께시와 이와이 지,
그리고 90년대 일본 영화의 정체성
만약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공약대로 일본 문화의
선별적인 수입 개방이 이루어진다면, 영화 매니아들에게는
한동안 씨네마 떼끄와 일부 영화제에서 밖에 만나지 못했던
영화 역사 백년의 일본 영화를 한꺼번에 접하는 엄청난
숙제가 생겨날 것이다.
일본 영화 역사는 영화의 역사 그 자체 만큼이나 길며,
인도나 프랑스같은 영화 왕국 못지 않은 깊이와 두께를
지니고 있다.
일본인들이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1896년이며, 현재 남아
있는 일본 최고(最古) 영화는 1899년에 만들어진 <단풍 구경>이다.
일본에서는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사들과 흡사한 시스템의
메이저 영화사들이
영화를 독점, 담합하여 만들던 시기가 있는데, 이시기(30∼60년대)의
대표적인
다섯개의 메이저 스튜디오는 닛까쓰(日活), 토호(東寶),
다이에이(大映),
쇼지쿠(松竹), 토에이(東映)이다.
일본 스튜디오 시스템의 특징은 모든 전권이 제작자와
감독에게 맡겨지며,
감독을 비롯한 모든 인력 관리가 철저한 도제 시스템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일본 영화를 대표한
감독으로는 널리 알려진 구로자와 아키라,
미조구찌 겐지, 오즈 야스 지로, 기노시다 게이스께 등이
있다.
메이저 스튜디오 시스템이 가장 전성기를 누린 시기는 50년대와
60년대 중반.
이 시기는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미 군사 점령군이 일본
영화의 파시즘적
요소를 배제하는 문화 정책을 폄으로서, 많은 재주있는 영화
감독들이 소재와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
구로자와나 오즈, 미조구찌등이 만든 일본 영화가 유수
영화제를 휩쓸고,
일본 영화의 독특함을 알린 시기가 이 때이다. 이 시기에는
일본 영화의
여러 가지 독특함이 형성되었는데, 문예 영화, 가족 영화,
시대극 등의
완성도가 뛰어나고 일본적인 정서와 문화를 담은 장르들이
여러 감독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스튜디오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한 60년대 말에는 영화
대신 TV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70년대가 되자 다섯개의 메이저 중에서 도에이가
도산했고,
닛까쓰는 극영화가 아닌 '로망 포르노'라는 B급 포르노
제작으로 명맥을
이어갔다. 그 덕분에 많은 신인감독들에게 기회가
주어졌는데, 이들이
80년대에 혜성같이 나타난 '80년대 뉴웨이브' 감독군이다.
◈ 실험 정신과 주제 의식으로 무장한
뉴웨이브
80년대 뉴웨이브 감독들의 자양분이 되었던 것은 70년대
닛까쓰의 로망
포르노와 오바야시 노부히꼬가 주도한 8mm 영화 운동이다.
닛까쓰 로망 포르노 제작 시스템은 전형적인 B급 영화 제작
시스템으로,
이전의 도제 시스템에 의해 감독을 키워내는 방식과는 달리,
신인 감독들에게
도제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화에 입문할 기회를 주었다.
모리따 요시미츠 역시 이러한 경로를 통하여 조감독 생활을
하지 않고
곧바로 감독 데뷔하였다.
8mm 영화 운동을 거쳤던 작가들 역시 대자본의
영화사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했다. 이들은 독립 영화군을 형성하여 일본 영화의 오랜
전통으로부터
벗어난 형식과 스타일을 실험했고, 산업 사회와 개인, 인간
내면의 갈등
등의 주제 의식을 공유했다.
이시이 소고, 스즈키 세이준, 오구리 고헤이, 야나기마치
미츠오, 오오모리
가즈끼, 그리고 배우에서 감독으로 전환한 이따미 주조 등의
감독들이 이
시기를 대표한 감독이며, 이들의 성과물로는 <미친듯이
피어나는 썬더로드>,
<지고이네르 바이젠>, <가족 게임>, <장례식>,
<태풍 클럽>, <전학생>,
<진흙의 강> 등이 있다.
그러나 90년대에 이르러 현재까지 그 에너지를 유지하고
있는 감독은 이미
'기성' 이 된 모리따 요시미츠와 얼마전에 사망한 이따미
주조뿐이고, 나머지 감독들은 이따금씩 작품을 발표하지만
그다지 큰 반향은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있다.
80년대말부터 뉴웨이브의 침체와 노장 감독들의 노쇠로
인하여 자체적으로
'사망 선고'를 내렸던 일본 영화의 회생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95년
경부터의 일이다.
뛰어난 신인 감독들이 한 두 편씩 작품을 내놓으며 데뷔하기
시작했고,
무엇보다도 이와이 지와 몇몇 영화 감독들이 관객을 다시
극장으로
끌어들였으며, 기따노 다께시와 같이 독특한 인물들이 세계
영화제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90년대 감독들의 성향은 이전 일본 영화의 오랜
전통이나, 80년대
뉴웨이브와는 다소 다른 점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80년대
뉴웨이브
선배들처럼 대자본의 영화사들이나 방송국의 자본을
두려워하거나 거기에
포섭당하지도 않으면서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으며,
주제 의식 면에서도 그렇게 강박적이지 않다.
이들을 대표하는 두 가지의 다른 경향인 이와이 순지와
다께시의 영화 세계를
잠시 들여다보자.
◈ 무국적적인 정서와 상상력이 주는
아름다움, 이와이 순지
현재 우리나라 영화 매니아들에게 일본 영화 선풍을 몰고온
주인공인 이와이
순지는 1963년생. 요코하마 국립대학에 재학하던 시절에 영화
서클에 가입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상 제작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가 가장 관심을 보였던 것은 뉴웨이브 감독들처럼 무겁고
진지한 주제의식
이나 파격적인 스타일로 걸작을 찍어내는 것이 아니라, 처음
접한 영화
기자재들을 '가지고 노는 재미' 쪽에 가까웠다.
필름이라든가 조명, 카메라 등의 기자재들이 만들어내는
영화의 질감과 느낌에 이끌렸던 그가 영화 서클에서 주로
만들어냈던 것들도 아주 단순하고 쉬운
주제를 가지고 마음껏 조명을 치거나 색조를 그려낼 수 있는
소품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가 프로로서 뛰어든 곳은 영화계가
아니라 케이블 TV와
광고, 뮤직 비디오였다. 그의 특징 중의 하나는 영화뿐만
아니라 아주 다양한
영상 매체를 다루는 것에 능하다는 점인데, 뮤직 비디오
클립이나 광고, 드라마, 영화 등의 모든 매체에서 자신의
고유한 정서와 느낌을 균일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강점이다.
순지는 뛰어난 서양 영화나 전통적인 일본 영화를 보고
영화를 동경하게 된
뉴웨이브 선배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을 갖고 있다.
그는 스스로도
'영화보다는 TV' 쪽이 자신에게 더 영향을 미쳤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
순수하게 영화만을 고집하는 영화파가 아니라, '영상'
이라고 묶을 수 있는
모든 매체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쪽이다.
따라서 그의 영화나 드라마에서 광고나 뮤직 비디오적인
편집이나 앵글이
엿보이는 것, 혹은 그 반대로 뮤직 비디오나 광고에서
드라마나 영화적인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지 지 뿐만 아니라 데이빗 핀처나 왕가위와 같은 90년대의
다른
영상파 감독들이 공유하고 있는 특징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와이가 왕가위와 다른 점? 그에게는 '왕가위표(와이드
렌즈나 스텝 프린팅
같은)'라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정해진 시각적 스타일들이
없다. 기껏해야 동선을 살짝 생략하는 가벼운 핸드헬드
카메라라든가 뮤직 비디오의 느낌이 풍기는 필름의 질감이
전부다.
그의 스타일은 한눈에 베낄 수 있는 그러한 정해진 스타일이
아니라 조명이라든가, 색조, 이야기의 정서와 결합된 화면의
호흡등에 묻어 있으며,
개별적이기보다는 통합적이다. 누구나 그의 영화가 '이와이'의
영화라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어느 장면 때문이라든가, 어느
기법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의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정서의 흐름과 그것의 부드러운
연결이다.
물론 소재의 독특함들도 드라마 연출 시절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매력이지만,
이것은 뉴웨이브들의 소재주의적 경향과는 다르다.
<스왈로우 테일>이나 <운도>, <피크닉>, <고스트
스프>의 '이상한' 세계가 주는정서는 비교적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는 <러브 레터>나 <불꽃놀이, 아래서
볼까, 옆으로 볼까>에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소재가 주는 특이함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것을
엮어내는 이와이 특유의 방법 때문인 것이다.
이와이 순지 영화의 정서는 한마디로 무국적적이다. 그의
영화들은 하나하나
'이와이 나라' 라고 불러도 좋을, 일본 현실과는 유리된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근미래 SF인 <스왈로우 테일>은 말할 것도 없고, 실험
영화적인 <운도>나
<드래곤 피쉬>, 그리고 비교적 현실적인 배경에 세워져
있지만 현실의
고단함으로부터는 담백하게 격리되어 있는 <러브레터>가
그러하다.
<스왈로우 테일>의 '엔타운' 이나 전체주의적인 일본
사회 시스템의 묘사는
일본이라는 사회 자체를 현실로부터 떼어내어 하나의
이국적이며 유리된
기호로 느껴지게 만든다.
그의 영화들은 디테일에 치중하면 할수록 일본의 역사,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멀어진다. 이렇게 유리된 정서의 기호들은 일본 뿐만 아니라
홍콩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젊은 대중들에게 부담없고 쉽게 어필한다.
물론 그의 영화에서 일본 특유의 것이라고 부를 정서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각적 디테일에 충실한 일본인 특유의
꼼꼼하고 치밀함이나,
단아하고 아담한 이야기 구조는 일본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의 토대는 동아시아 일본이라는 현재
주소를 떠나, 외부인의 시각에서 보는 듯한 일본을 그려내고
있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아시아인'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어떤 통계 자료는
이와이 영화의 폭발적인 인기를 역으로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 코미디×학살, 혹은 폭력의 엘레지,
기따노 다께시
기따노 다께시는 일본 영화의 '사생아'다. 같은 코미디 배우
출신인 이따미
주조가 '일본의 국민 감독'으로 추앙받았던 것과는 달리,
동료 일본 영화인
들에게 그다지 진지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점은 이를
증명한다.
그가 <하나비>로 베니스 그랑프리를 수상했을 때에도
일본 영화인들은 '그깟
베니스에서 상탄 게 뭐라고 그렇게 난리냐'라고 냉소를
보냈다고 한다.
이들이 다께시를 반기지 않는 이유는 우리식으로
해석하자면 이렇다.
스스로 '진지하다'고 생각하는 영화인이라면, 만약
이주일이나 이경규같은
코미디언이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서고, 심지어 대단히 잘
만들고, 거기다가
해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기까지 했다면 그다지
반가울 리가 없는 것이다.
기따노 다께시는 47년 동경 태생으로, 71년에 코미디 듀오 '투비트'로
연예인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별명인 '비트'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후 그는 일본 코미디계에 독특하고 과격한 감각의
코미디붐을 일으켰고,
포복절도의 유머 감각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일본 방송계의
만능 엔터테이너로
군림한다.
코미디 뿐만 아니라 스포츠 코멘트, 쇼, 드라마, 소설, 시 등
여러 분야에서 두루두루 재주를 보이던 그가 영화에 출연한
것은 1983년에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전장의 메리 크리스마스>에서였다.
영화의 매력에 눈뜬 그가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해는 1989년.
그는 <그 남자, 흉폭하다>로 데뷔했다.
다께시는 만능 탤런트 기질을 영화 제작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여, 주연, 각본,
연출, 편집을 혼자서 다 해냈다. 이후로 이어진 작품이 <3-4×10월>
(해외 제목은 <비등점>), <나의 여름, 조용한바다>,
<소나티네>,
<모두 모였습니까>, <키즈 리턴> 그리고 <하나비>이다.
다께시 영화의 요소를 한데 모아본다면 다음과 같다.
오키나와와 동경, 야구와
권투, 형사와 야꾸자, 중년과 청년. 그가 야꾸자와 형사의
이야기를 자주 다루는 이유는 이들이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야구와 권투는 일본의 표준 남성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이며,주 배경이 되는
오키나와는 일본 최남단에 위치한 휴양지로, 일본의 많은
야꾸자 세력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중년과 청년의 대비되는 이미지는 중년의
캐릭터들이
나타내는 '허무'와 '죽음'의 세계, 그리고 청년 세대들의 '약함(패자의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많다)'과 '순수함'을 나타낸다.
<그 남자, 흉폭하다>의 연출을 다께시가 맡게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영화가 처음에 기획되었을 때 그에게 주어진 것은 주연 배우
역할뿐이었는데,
감독이 도중 하차하자 그는 직접 각본을 쓰고 카메라 뒤에
섰다.
단순한 야꾸자 갱스터 영화로 만들어질 이 영화의 운명은
그가 개입하면서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더티 해리' 뺨치는
폭력 형사역을 맡은 다께시는 돌발적이고 도발적인 유머와
선혈색 폭력이한데 모인 기묘한 영화를 만들었다.
차기작인 <3-4×10월>은 <그 남자 흉폭하다>의 아직은
불완전한 스타일에서
한걸음 진보하여 과감한 점프 컷과 독특하기 이를 데없는
캐릭터를 선보인
'야구' 폭력 영화다. 그의 모든 영화에는 '죽음'을 하나의
결단으로 받아들이는
냉엄한 자세와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함께 엿보이는데,
다께시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죽음'에 가까운
캐릭터이며, 그의 영화에 꼭 한 명씩은 반드시
등장하는 청년들은 후자를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그의 영화의 화두라고 할 수 있는 죽음에 관한 그의 자세는
다음과 같다.
"나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각각 그 자체로서는 의미나
차이가 없다.
다만 죽음에 접근하는 자세에 따라 삶의 관점이 달라질
뿐이다. "
이는 일본 불교의 오랜 전통을 차지해온 '선(禪)'의 자세이며,
이러한 죽음의
정서는 하드보일드 액션의 화려하고 잔인한 세계와
기묘하게 결합된다.
서구 평론가들이 그의 영화를 오우삼과 오즈 야스지로,
타란티노와 브레송의
결합으로 보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그는 영화의 아름다운 시각적 스타일이나 효과에는 별
관심이 없다.
가장 아름다운 영화로 꼽히는 <나의 여름, 조용한 바다>
역시 일본인들이
선호하는 '귀엽고 예쁜' 여름 영화가 아니라, 귀머거리이자
혼혈아인
아웃사이더 주인공을 통해 보여주는 죽음과 침묵의 세계다.
그의 영화가 서구 평론가들의 관심을 모으는 이유는 뛰어난
카메라 워킹
이라든가 앵글 때문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지속적 주제를
관통하는 그의
이러한 특유의 선적인 자세이다. <모두 모였습니까>
이후 그의 영화 세계는
조금 달라졌다.
이는 영화 완성후에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심각한 교통
사고를 당한 뒤에,
'죽음'을 보는 그의 관점이 조금은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를 증명하는 <키즈 리턴>과 <하나비>는 이전의
영화 세계보다는 조금 덜
비정하고, 조금 더 따뜻하다.
이와이 지가 현재 젊은 일본 영화의 '경향'을 보여주는
대표적 현상이라면,
기따노 다께시는 맥락과 산업적 위치는 달라도 한동안
단절되었던 오즈나
겐지로부터 시작되는 일본 작가주의 계보의 후손이다.
이들 두 사람의 행보로부터 우리는 일본 영화의 징후와 주제
의식을 읽어낼
수 있다. 그들의 영화는 단순한 영화 매니아의 호사로 끝날
것이 아니라, 같은
동아시아 권의 토태를 형성하고 있는 우리나라 영화
지형과의 차이와 유사성을
되짚어낼 수 있는 숙제로 읽어내야 할 일본 문화의 '첨병' 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