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 갔던 강원도 갔을 때 걸린 시간이 걸려 여길 오다니......” 미현씨는 농장의 들머리까지 마중 나온 나에게 초행길이고 빨리 올 수 있는 경로를 몰라 수원에서 농장까지 오는데 무려 세 시간 삼십분이나 걸렸다고 말한다. 제대로 길을 찾아 왔으면 한 시간 30분이면 충분한데 너무 고생을 했다. 지치고 짜증이날만도 한데 그런 기색도 없이 사들고 온 음료수와 물을 들어주겠다는 내 제안에 무겁지 않다고 사양하며 또각또각 씩씩하게 걷는다. 냉큼 빼앗아 들고 앞장서 가며 농장 가는 길을 설명했다. 미현씨가 작업화로 챙겨온 운동화 가방이 달랑달랑 흔들리는 모습이 팔랑팔랑 봄 나비 같다.
이 생기 넘치는 아가씨는 검색 사이트에서 ‘귀농’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고 Enter친 후 좌르르 펼쳐진 검색결과에서 내 블로그에 있는 글을 찾아 읽고 주말농장에 자신도 동참하고 싶다는 댓글을 달아서 나의 초대를 받아 우리귀농카페에 가입했다. 가입 첫날부터 글을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진 솔로방 번개에 나와 함께 강원도 누나 집을 다녀온 충성도 높은 신입회원이다. 오늘도 오겠다고 했거나 올 것이라 예상했던 몇 명의 회원들로부터 못 온다는 통보를 받고 낙심해있던 나에게 힘을 주고 있다. 도시 아가씨라 농사일에 얼마나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미현씨가 오기 전에 나는 작년에 모종과 씨앗을 샀던 공항시장 할머니네 가게에서 미현씨가 부탁한 밀짚모자와 장갑, 고추모종과 가지모종, 호박모종, 콩 씨앗, 호박 밑거름으로 쓸 계분퇴비를 사왔고 우리가 사용할 구역의 땅을 쇠스랑으로 파면서 돌을 골라내고 배수로를 팠다. 그 사이 주말농장을 분양받고 싶다는 어르신이 이것저것 물으시기에 농장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통화를 하게 해드리고 기계로 밭 가는데 얼마냐고 꼬치꼬치 묻는 치매기가 있는 할머니의 말 상대가 돼주었으며 분양가를 묻는 아주머니 세분에게 시세를 알려 주는 일도 했다. 주말 농장 1년에 농부의 기운을 풍기는 경지에 도달한 것일까? 아니면 오랜 연륜이 느껴지는 낡은 밀짚모자 덕을 본 것일까? 농장과 농사에 관한 질문을 왜 이리 많이 받는 거여?
“점심 먹고 하죠?” 원두막에서 미현씨가 부른다. 하긴 세 시간 30분을 차에 시달렸으니 피곤할 것이다. 대충 손을 털고 시장에서 사온 김밥을 사이다와 함께 먹는다. 탁 트인 평야라 바람이 거침없이 닥쳐온다. “그늘에 있으니까 참 시원하네요. 그런데 진짜 날라 다닌다.” 뭐가 날아다닌다는 이야기인지 해서 고개를 빼고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밥알이 날라 다닌다고요.” 한다. 김밥의 밥알에 물기가 거의 없고 메말라서 딱딱하게 씹히고 맛도 별로라는 이야기 같다. “김밥이 참 독립심이 강하네요.”라고 둘러댔다. 누가 이런 김밥을 판 거야! 일꾼을 든든하게 먹여야 제대로 부려 먹을 텐데 시작부터 “삐꺽” 이다.
모종을 살피는 녹두씨
점심을 먹고 잠시 쉰 다음 일을 계속했다. 잔돌을 골라내고 단단한 흙덩어리를 부수고 배수로를 더 깊이 파고 흙을 평평하게 고른 다음 모종과 씨앗을 심을 준비를 했다. 단단한 흙덩이까지 다 걷어내고 심자는 미현씨의 제안을 받아 들여 흙덩어리들을 밖으로 퍼낸 다음 미현씨가 콩을 심고 가지모종과 고추모종은 함께 심었다. 각자 한 줄씩 맡아서 심었는데 나더러 “그 쪽에 심은 고추가 죽거나 잘 안자라면 책임지세요.”한다. 주말농장 경력 2년차의 베테랑 방장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참 당찬 신입회원이다.
수도에 전기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모종에 물을 주기 위해 물 조리개 물을 퍼 나를 때 물 조금만 주면 안 되냐고 잠깐 투정을 부리긴 했지만 못들은 척 하는 방장을 보고 자기도 물 조리개 두 개를 들고 나서는 방법을 선택한다. “무거울 텐데 하나씩만 날라요.” 했더니 “하나도 안 무거워요.”한다. 다시 보니 진짜 하나도 안 무거워 하는 것 같다. 정말 참한 일꾼이다. 모종을 심을 때는 비닐포트를 도랑에 버리는 나에게 “쓰레기를 왜 거기다 버리느냐?”며 나를 책망했다. 어차피 치울 건데 뭘 그러느냐고 반박을 하려 했는데 모종을 포트에서 뽑는 즉시 빈 포트를 차곡차곡 바로바로 정리해 놓은 모습을 보고 할 말이 없더라. 끙
먹을거리를 다 심은 다음에는 볼거리를 심었는데 저 멀리 악양에서 보내준 꽃씨들이다. 당귀, 수세미, 매발톱, 맨드라미가 작은 비닐봉투마다 예쁜 글씨로 이름이 쓰여 있었다. 덩굴이 원두막 지붕으로 타오르게 심자는 미현씨의 의견에 따라 원두막의 두 귀퉁이에 수세미 씨앗을 심고 ‘수세미 씨앗 심은 곳’이라는 표시를 했다. 혹시라도 씨앗을 심은 줄 모르고 물건을 쌓거나 밟는 일이 없도록 방지하는 조치다.
모종 심기
가톨릭 신자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만약 <주말농장의 神>이 있다면 나를 조금은 살펴주는 것 같다. 솔로주말농장 농사를 혼자 다 지어야하는 위기(?)에서 나를 구해줄 참한 일꾼을 잊지 않고 보내주는 걸 보면 안다. 작년에는 은숙씨였고 올해는 미현씨를 보내줬다.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야 신에 대한 예의인가? 아무튼 그렇다 치고 만약 당신이 있으시다면, “주말농장의 신이시여, 감사 합니다.” 보배로운 일꾼 미현씨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일을 다 마칠 때 쯤 ‘네비 찍고’ 원종 I.C를 찾아 온 상천이 형이 도착했다. 솔로주말농장과 미현씨와 내가 해놓은 일을 둘러보다니 좀 더 하자며 의견을 내고 미현씨도 동의해서 농장을 더 넓히기로 했다. 농장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허락을 구하고 미현씨가 돌을 골라내는 동안 상천이형과 나는 모종과 씨앗을 사러갔다. 추가로 심을 것은 쌈채, 얼갈이배추, 열무, 대파다. 부추와 고구마는 다음에 심기로 했다.
“힘쓰는 일은 내가 하고, 섬세한 일은 숙녀가 하시고 녹두 니는 기술적인 일을 하자.”는 상천이 형의 제안과 달리 힘쓰는 일은 나와 상천이형이 하고 미현씨는 고랑을 파고 씨앗을 심고 모종을 심는, 섬세한 일과 기술적인 일 모두를 해냈다. 경기도 출신이지만 어렸을 때 엄마가 농사짓는 것을 봤고 굳이 우리농장 까지 버스타고 와서 회비 내면서 농사일 하는, 친구들이 ‘특이한 인간’이라고 한다는 미현씨는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 농사꾼이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주말농장의 신이시여, 감사 합니다!”다. 비록 모종을 심는 속도에서 주말농장 2년차 베테랑 농부(?)인 내게 속도에서 밀리긴 했지만 귀농카페 가입 몇 달차 신입회원 치고는 엄청난 실력이다. 자기는 힘쓰는 것 밖에 할 줄 모른다던 상천이형도 금방 일을 배워서 너무 잘한다. 덕분에 상추모종 60주, 케일 모종 15주, 대파 모종 40포트, 열무와 얼갈이배추 씨앗 한 봉지를 심는데 두 시간도 안 걸렸다. 더구나 돌을 골라내기, 고랑을 파기, 배수로를 파기를 한 다음에 심었는데도 이렇게 일찍 끝난 것이다.
씨앗 뿌리는 두 사람
나름대로 일이 재미있었는지 상천이형이 앞으로 정기적으로 농장에 오자고 한다. 미현씨는 시간이 될 때마다 들러서 살피고 수확할 것은 수확하겠다며 이번에 쌈채 중에 상추를 너무 많이 심었으니 다음에 와서 상추를 뜯어 먹고 솎아 낸 다음 다른 종류의 쌈채를 다양하게 심자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양상추가 노지재배가 가능한지 알아보고 가능하면 양상추도 심고 쑥갓도 심고 대파와는 맛이 다른 부추도 심잔다.
일꾼이 셋이 되니 일만 느는 게 아니라 말도 는다. 재미있다. 약 두 배로 늘어난 솔로주말농장의 영역표시를 위해 말뚝을 박고 줄은 친 다음 농장의 좌우에 <솔로주말농장> 명패를 박는 영광은 상천이 형에게 줬다. 조직에 대한 자부심과 충성심과 높이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우린 주말농장 분양을 원하는 사람들과 3건의 상담을 해줬고 다른 주말농장과 시세를 비교하는 상담을 한차례, 아이들의 소꿉놀이의 조연 역할을 한차례, 오전에 상담해준 어르신과 그 마나님의 2차 상담 및 감사인사에 답례 한차례를 했다. 아, 바쁘다. 바빠.영역표시를 마치고 명판까지 박은 우리솔로주말농장을 보니 왠지 뿌듯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닌지 상천이형도 “야야, 해 놓고 보니까 좋다. 야”한다. 벌써 충성심 발동, 역시 명판을 박게 만든 효과가 바로 오는 구나.
오늘의 성과를 정리해 보면 대충 이렇다. 몇 건의 주말농장 분양문의에 대해 성실하게 답해준 결과 받은 고맙다는 인사 몇 번, 아이들을 데리고 온 젊은 아빠에게 처음본 사이지만 “안녕 하세요”라고 밝게 인사한 결과 일하는 곳까지 와서 따라주며 먹어보라고 해서 얻어 마신 차가운 냉커피 두잔(한잔은 미현씨 몫), 주말농장 분양 문의에 대한 친절한 응대가 효과가 있었는지 추가로 분양 받은 농장 임대료를 기존의 50% 가격에 임대 받은 것은 일차적인 성과다.
여름까지 뜯어 먹을 수 있는 쌈채, 찍어 먹고 넣어 먹을 매운 고추, 그냥 고추, 쪄 먹고 넣어 먹고 볶아 먹을 콩, 김치 담아 먹을 열무, 얼갈이배추, 나물해 먹을 가지, 국 끓이고 전 부칠 호박, 눈과 코를 즐겁게 할 꽃 확보는 2차적인 성과이며 2주일 후에 새로운 작업이 끝나면 전부치고 겉절이하고 김치 담아 먹을 부추, 나물 만들고 쪄먹고 구워 먹을 고구마도 확보된다. 40평이 조금 안 되는 좁은 땅에서 이렇게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가히 “솔로주말농장 만세!”라 할 수 있다.
일을 마치고 농장에서 멀지 않은 쌈밥집에서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수고를 치하했다. 상천이형도 미현씨도 농장을 찾아오는 경로를 확실히 알았으니 다음에는 수월하게 찾아오리라. 주말농장에서 처음으로 농사일을 한 두 사람이 피곤할까 걱정했는데 피곤하고 정작 힘든 사람은 주말농장 농사 2년 차의 베테랑(?)인 나다. 아침에 일어나니 오른쪽 팔과 오른쪽 다리의 오금이 아프다. 아이고~팔다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