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보성가는 길, 대로가 시원하게 뚫리고 아파트 단지가 우람하게 들어서 있어 그다지 농촌 냄새가 나지 않는 곳에 자리잡은 화순읍 벽나리2구. '서라실'이라는 세련된 자연마을 이름을 갖고 있는 이곳은 농사짓는 분이 많고 광주로 출퇴근하는 인구도 꽤 된단다.
*마을에 들어서자 "효부들이 많다"는 이야기들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아니나 다를까 한복 곱게 차려입은 할머니들 사이로 며느리들이 마실 것을 날라댄다. 단결력이 있는 마을에 가면 볼 수 있는 정경이 그렇다. 서로 덕담을 해주고 남을 먼저 생각한다.
*이 마을에서 들은 명곡(名曲)은 고붕순(73) 여사의 <시집살이 노래>다. 12-13세때 친정 언니들에게 배웠다는데 총력(聰力)이 좋아 아침에 한번 들으면 노랫말을 기억했단다. 우리 소리에 취미가 있어서 판소리책을 사다가 뚜덕뚜덕 배워서 <백발가><쑥대머리>도 외워봤단다. 그런 내공이 있어선지 시집살이 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쩌렁쩌렁한 성음이다.
*돔방돔방 떠가신 구름/우리 땅에 가신 구름/ 우리 땅에 가시거든 편지나 한 장 전해주소/
편지라서 무슨 편지/ 동지섣달 설한풍에 맨발벗고 물길은다고/신죽이나 보내라소/
이삼사월 긴긴 해에 점심 굶고 베짠다고/쌀말이나 보내라소/
울아버님 듣조시면 받으신 밥상을 밀쳐두고/대성통곡을 하실레라/
울어머니가 들으시면 업었던 손자를 내려놓고/대성통곡을 하실레라/
우리 오빠 들으시면 보시던 책을 밀쳐두고/대성통곡을 하실레라/
우리 형님이 들으시면 씻던 그릇을 잦쳐놓고/ 살강 다리를 마주잡고 궁뎅이춤만 추실레라/
아랫방에 하인아야 어느 때나 되았는가/새우잠도 못되았소/
실러 가세 실러 가세 우리 동상 실러 가세/ 대문 앞에 들어서니 거둥보소 거둥보소/
우리 형님 거둥 보소/ 까만 창은 어따가 두고 흰창으로 날만 보네/
고초 같이도 매운 년아 반하같이도 독한 년아/ 너도 간께로 그러더냐 나도 온께로 그러더라/
너도 삼년을 살어봤냐 나도 삼년 살고났네/ 형님 형님 그리 마오 뜨건 국에도 눈물났소
*길지만 <긴 육자배기> 한 절 시간쯤밖에 안된다. 노랫말이 기가 막히지 않은가? 정형시(定型詩)를 노랫말로 옮겨놓은 듯한 이 서사민요의 스토리인즉슨 시집온 올케를 호되게 고생시켰던 시누이도 시집가서 똑같이 당한다는 내용이다. "대성통곡을 하실레라"같은 대목에 시김새만 좀 넣어서 부른다면 정말 서럽게 들릴 노래다. 단 한 호흡도 쉬지 않고 이런 노래를 토해낸 고봉순 여사의 정체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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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읍 벽나리2구의 소리꾼 고봉순 어머니.
*칠남매의 막둥이로 태어났는데 세살때 어머니가 작고하셨는데 올케의 구박을 심하게 받았다고 한다. 어려서 남의 집에 다니면서 베짜기를 배우면서 이런 노래를 몸으로 체득했다. 자식이 홑남매인 이유가 궁금했는데 남편이 군대가서 첩을 얻었다고 한다. 가슴에 담긴 한을 밭메면서 노래를 지어부르면서 삭였다. 우리 소리가 그렇게 창의적이면서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고봉순 어머니에게 노래는 그렇게 해방구였으리라.
*'그늘'이 있어야 깊은 소리맛을 낼 수 있다고 한다. 한이 있어야 소리의 울림이 크다는 것이다. 허투루 들리지 않는 <시집살이 노래>를 절창하고는 "언능 죽어서 다시 태어나 판소리를 배와 소리꾼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고봉순 어머니는 지금도 출중한 소리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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