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 詩와 만나다
김동원 시인
천지 서법(天地書法)
천지의 본성은 상형으로 나타난다. 공(空)을 찍어 색(色)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색의 붓질로 공에 숨기도 한다. 해와 달의 운행은 그 자체가 기운생동의 명필가이다. 밤낮으로 오행으로 썼다 지우는 운필을 한다. 서예술(書藝術)은 ‘빔’의 미학이다. 삼라만상은 몸을 통해 서체로 드러나는 천문(天文) · 지문(地文) · 인문(人文)의 문장이다. 초서는 들녘의 여백을 통해 풀(草)이 쓰는 바람체이다. 점획의 변화와 의태가 무궁무진하다. 한시의 생략과 압축의 묘는 초서와 빼닮았다. 움직이는 사물의 생리야말로 행서의 좋은 본보기다. 자연스레 물의 흐름을 좇아, 천지사방에 그 붓을 맡긴다. 예서는 추사의 말을 빌면 “모지고 굳세며 예스럽고 졸박한 것으로 으뜸을 삼”는다. “가슴 속에 맑고 드높으며 고아한 뜻”의 서체다. 필의(筆意)는 문자향과 서권기에 절실하게 스밀 때 풍격이 높다. 해서는 자신을 속이지 않는 무자기(毋自欺)의 필정(筆正)이다. 바름과 곧음의 본보기다. 천하 서법의 일가를 이루려면 미쳐야 미친다.
하여, 서법은 천지 만물을 생사(生死)의 붓질로 본다. 사계는 사물의 형상을 창조와 파괴를 그려내는 시서화(詩書畵)이다. 봄의 붓을 통해 연두와 온갖 다채로운 꽃으로 채색한다. 여름은 태풍과 번개를 빌어 빗물의 문장이 된다. 때론 먹의 물을 쏟아 일필휘지가 되고, 불의 춤을 통해 시의 상징과 선율이 된다. 구상과 추상은 가을 단풍의 시각 속에 스며든다. 하여, 서(書)와 시(詩)는 공(空)과 색(色)을 빌어, 겨울 흰 눈의 여백에 지수화풍토(地水火風土)의 오체로 발묵한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법’이다. 하여, 동양에서는 서예의 필법을 통해 그 화취(畫趣)를 운용하였으며, 시의(詩意)를 통해 공간 미학을 극대화하였다. 그 여백에 제발(題跋)과 인장(印章)까지 더하였으니, 시서화의 필법과 의경은,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품이 된다.
말이 있어 천하가 열리고, 서법이 있어 천지인의 말이 산다. 붓질의 있고 없음을 통해 세상이 열리기도 닫히기도 한다. 하여 사람의 말은, 한 번 붓질로 의미가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표음 문자인 한글 서체는 천지인 삼재(三才)를 점획의 근본으로 삼았다.보이는 사물의 원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담는다. 표어 문자인 한자와 성격이 다르나, 그 제자법은 육서법이며, 그중에서도 상형과 지사(指事)가 기본이다. 한글 서체는 ‘이응과 히읗을 제외하고는, 직선으로 이루어진 획이 전부이지만, 초성과 중성의 운용은 무궁무진하다.『훈민정흠』의 원점과 방획은,『용비어천가』,『석보상절』의 방획과 고졸미를 거쳐 판본체를 이뤘다. 이후 판본체에서 필사체로의 변화는, 궁체에 와서 전아미(典雅美)와 내간체의 아름다움을 흡수한다. 정자와 흘림(진흘림)의 변화는, 현대 한글 서체의 다양한 미적 감각의 바탕이 된다.
書, 詩와 만나다
수운(水雲) 김정숙의 세 번째 한글서예 전시회의 주제는「書, 詩와 만나다」로 정했다. 일찍이 시도된 바 없는, ‘현대시와 한글 서체’의 새로운 조합과 디자인은 독특한 개성적 세계를 펼친다. 점(點)과 선(線)의 대담한 필선은, 기존 서법을 한 단계 더 깊이 치고 들어간 미학이다. 그녀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행서(行書), 해서(楷書)의 필획을 관통하여, 한글서예의 뛰어난 조형미와 농묵의 묵중함을 얻었다. 특히 작품「한글」(69×43)은, 먹의 농담을 대담하게 쓴 방필의 제목과 세로로 흘려 쓴 서간의 묘는 절묘하다. 필(筆)의 느낌은 살리되 시의 맑음을 버리지 않는 경계의 운필이다.
작품「시인」(69×43)은, 훈민정음 해례본체(訓民正音 解例本體)에 바탕을 두면서도, 광계토대왕비문의 고체의 대범한 직선과 이응의 곡선 미학은 절제와 조화미의 극치를 이룬다. 마치 한지(韓紙) 위에 붓칼로 글자를 새긴 듯한 먹색의 묵중함은 압권이다. 이런 치열한 작가 정신의 실험의식은 수운 김정숙의 이전 전시에서는 볼 수 없던 진일보이다. 예술은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不狂不及)’ 죽기 살기로 쓰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붓이 알고 종이가 알고, 마침내 몸이 안다”고 하였다. 운필은 멈출 때 멈추고, 감을 때 감고, 힘을 줄 때 주고, 마침내 중봉에서 매듭이 나온다.
주역과 음양체의 토대 위에 온갖 획의 강약과 고저장단을, 예측 불가능의 필획으로 일필휘지한 작품이「봄 한 놈」(140×70)이다. 특히 그 기괴한 누운 장법과 한지에 막힘없이 써 내려간 흘림의 율동미는 기가 막힌다. 수운은 일찍이 일중(김충현, 1921~2006)의 한글체(판본, 궁체, 정자, 흘림)를 흡수하였다. 이후 김태정, 송하 백영일, 백천 류지혁으로부터 고졸미와 방필, 현대적 구도와 독창적 선(線)의 미학을 녹여내었다. 그녀의 가는 획과 굵은 획, 긴 획과 짧은 획, 강한 획과 약한 획, 둥근 획과 각진 획들은, 대범하고 섬세하고 아름답다. 달리는 듯한 흘림의 느낌은, 수운 서법의 특징이다. 하여, 서예술(書藝術)은 쓰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나아가는 법이다.
서書의 절묘는 흑백의 여백미에 있으며 일필휘지 기운생동의 예술이다. 실험은 시대의 가능성을 연다. 현대 서예는 이미지와 메시지가 심플하다.법고(法古)를 깨부수고 파격(破格)으로 직진한다.우선, 작품「밥」(44×34)은 구도가 멋지다. 읽고 보는 세계에서, 그리고 느끼는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고정된 문자 예술의 틀을 깨고, 점과 획, 선과 면을 휘어, 화(畵)의 격조로 끌어올렸다. 이런 곡선 미학은 형태의 변화를 통해 독창적인 아름다움을 낳는다. 이 작품은 서예가에 따라, 작품의 조형미와 표현의 가능태를 변화무쌍하게 변주할 수 있음을 잘 보여 준다. 하여 서법계(書法界)는, 무궁무진한 법첩(法帖)의 세계를 타고 넘어, 새길을 내는 자를 칭송한다. 명필을 만나면 명필을 죽이고, 신필(神筆)을 만나면 신필을 죽여야, 천하 붓질에 걸림이 없다. 하여, 격조는 서법의 갈등과 충돌을 통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예술 세계를 연다.
서시불이(書詩不二)
작품「깍지」143×144)는, 앞으로 수운 서법이 나아가야 할 중요한 표지다. 한지의 공간 분할과 운필의 고저장단은 묘를 얻었다. ‘깍지’의 ‘ㄲ(쌍기윽)’의 대담한 역발상적 구도는 독창적이다. 여백의 적절성과 글자 ‘지’의 기막힌 배치는, 참으로 시적(詩的)이다. 어쩜 ‘書와 詩’는 이미지를 형상으로 그려낸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인지 모른다. 동굴벽화에서부터 고대의 상형 문자를 거쳐, 오늘날 영상 속의 다양한 서체 실험은, 인간 무의식의 진화과정인지도 모른다.
궁극으로수운(水雲) 김정숙의「書, 詩와 만나다」전(展)은,서(書)와 시(詩)가 다르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대작「산」140×350)과「대구십경」200×700)은, 수운 서예의 폭과 깊이를 가늠케 한다. 먹색의 오채가 정신의 무늬라면, 붓은 서예가의 신령스러운 기운의 요체이다. 서(書)가 붓과 종이의 접(接)의 예술이라면, 시는 사물의 기미와 기척을 언어로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천지창조 그 자체가 ‘서법(書法)이자, 시법詩法’이다. 하여, 신품을 만나려는 자는 고행만이 길이다. 동양 예술에서 시서화(詩書畵)는 한 뿌리다. 시의 상징과 은유가 그렇듯, 붓 또한 시대마다 다르게 운필 되었다. 수운의 서예술은‘근대와 현대’의 경계선에 맞물려 있다. 전위적 파격을 통해현대 사회의 허虛와 실實을, 붓 속 깊이 찔러야 한다. 사물의 절규를 놀라운 필체로 전복顚覆해야 한다. 고정된 상징체계를 버리고, 자신만의해체와 실험의식을 부단히 한지 위에 행하여야 한다. 현대는 그 자체가 ‘낯선’ 풍경이다. 현대인의 외론 고독과 실존을 붓 속에 품을 때, 수운만의 독보적 한글 서체가 열릴 것이다. 매순간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을 향해, ‘새로움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또 물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