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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서 예절대학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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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레저, 여행) 스크랩 독일음악을 방랑하다
휘목 추천 0 조회 29 13.05.30 15: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기차를 타고 독일의 남북을 가로질러 베를린에 도착했습니다. 숙소는 서베를린의 명동에 해당하는 쿠담 지역에 잡았습니다. 원래는 티어가르텐 쪽을 생각했어요. 최근 새로 생긴 호텔이 있는데, 옛 덴마크 대사관 건물을 개조해 만든 아주 격조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한 이틀 푹 쉬면서 앞으로 드레스덴-바이로이트-암스테르담 등으로 숨가쁘게 이어질 결전의 날(?)을 대비하자는 생각이었는데, 결국은 마지막에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숲 속의 고요한 대저택에서 보내는 시간들이라 - 그건 전혀 베를린적이지 않거든요. 그래서 사람들 속으로, 저잣거리 속으로 다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날은 5월 19일이었고, 뙤약볕이 내려쬐는 초여름 날씨였으며, 성령강림절을 하루 앞둔 연휴의 첫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엔 베를린필하모닉의 공연이 기다리고 있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21세기 뉴 베를린의 상징과도 같은 곳. 포츠담 광장의 현대적인 모습)
베를린하면 독일의 수도이니 우리에게 꽤 익숙한 도시이지만, 독일 내에서의 위상은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습니다. 서울보다 규모가 큰 메가폴리스인데다가, 2차 대전 탓에 옛날 건물들이 다수 파괴된 후 지금은 현대식 건축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습니다. 유럽의 전통 있는 도시들이 모두 옛 구도심과 비즈니스 지구인 신도시로 나눠져 있는 것과 달리, 베를린은 신구의 구분 없이 현대건물만 있는 그런 도시입니다. 게다가 독일 통일 이후 상대적으로 낙후되었던 동베를린 지역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서유럽권 도시로써는 거의 유일하게 ‘대규모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를 진행시켰습니다. 그 덕에 21세기에 지은 새 건축물들도 꽤 많은데, 그들 모두 독일인들답게 하나같이 깔끔하고 세련된 모더니즘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러니 파리나 밀라노, 로마 등을 주유하며 수백 년 된 옛 대리석 건물이 주는 거무튀튀함에 좀 질려버린 우리로서는 베를린의 말끔한 이 모습에서 은근히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익숙함이 주는 묘한 친근함이라고 불러도 좋겠습니다. 생각해보면 1930년대 초만해도 세계 3대 대도시로 손꼽히며 파리를 위협할 정도였으니, 그때 이후 제2의 전성기가 다시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 내에서의 반응은 사뭇 다릅니다. 독일 최고의 메트로폴리스이며, 수도이기도 하니 다들 선망의 눈초리로 보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외려 한심하게 봅니다. ‘에휴, 쯧쯧쯧’ - 뭐 이런 게 독일 대다수 사람들의 베를린에 대한 반응입니다. 특히 부유하고 세련된 역사도시들, 뮌헨, 함부르크, 뒤셀도르프 등에서는 아예 대놓고 베를린을 무시하곤 하는데요. 첫째 이유는 경제적으로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비유하자면 집안의 큰 형이긴한데 직장이 없고, 가진 돈이 없는 것이지요. 요즘도 세수(稅收)가 부족해 베를린시의 살림이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긴 프리드리히 거리에 있는 이 도시 최고의 극장, 슈타츠오퍼 운터 덴 린덴(Staatsoper unter den Linden)은 아직도 보수공사 중이더군요. 예산이 없어 몇 년째 손을 놓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니 서쪽의 ‘동생 도시’들이 형을 우습게 볼 수 밖에요. 또 하나의 이유는 - 사실은 이게 더 근본적인데, 도시의 정체성이 아직도 모호하다는 것입니다. 1930년대처럼 들뜨고 화려한 문화는 당연히 사라진지 오래이고, 그저 지금 베를린하면 생각나는 건 사람들의 축 처진 어깨, 무덤덤하지만 순박한 표정, 길거리를 날아다니는 휴지들(이건 서베를린 부자도시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죠)이 전부입니다. 이렇다 할 ‘도시의 속살’이 없는 것입니다. 유럽의 명문 대도시들은 여행객들에게 그들이 가진 매력을 쉽사리 보여주지 않습니다만, 그 속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바퀴 휘 둘러보기만 하면 뭐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뮌헨이 사실은 오스트리아 빈보다 한 차원 높은 대접을 받기도 하는 이유도 이 도시가 지닌 ‘내공’ 혹은 ‘속살’이 워낙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를린은 이 점에서 아직은 좀 안타까운 수준입니다.

(포츠담 광장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물 Holocaust-Mahnmal. 재개발 프로젝트가 많았던 베를린에는 독일의 어느 도시보다 공공 설치미술 작품이 많은 편인데, 이들 모두 오랜 숙고기간을 거친 후에 고도의 예술성과 심오한 지성을 담아 제작된다.)
꽉 짜여진 도시가 아니기에 은근히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치고, 우리에게 익숙한 대도시형 건물들도 점점히 박혀있고, 조금만 큰 거리를 벗어나면 적당히 더럽고 낡은 이면거리들이 정겨운 자유로움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리고 이 도시가 비록 수중에 돈은 좀 없어도 예민한 지성까지 퇴색한 건 결코 아닙니다. 베를린의 거리들을 감도는 인텔리적인 분위기는 참으로 인상적이지요. 그래서 언뜻보면 온 도시가 뉴욕의 이스트빌리지 같은 분위기를 주기도 합니다. 자유롭고, 지성적이고, 조금은 풀어헤진 듯한 삶을 사는 듯한 뭐 그런...문제는 그게 딱히 원해서 된 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무슨 칼럼에, 무슨 답사기 등에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베를린이야말로 유럽의 숨은 보석같은 문화도시’라며 구구절절이 쓰는 글들이 가끔 보이는데, 저 또한 베를린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의 한 명으로써 제발 그런 글 이제 그만봤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돈이 궁해 집에 있는 잔반으로 김밥을 말았더니 ‘시크한 대도시인의 다이어트식’으로 해몽하는 격이니까요. 누구를 사랑하려면 먼저 자기부터 내려놓아야 하는 법 아닐까요. 멀리 여행지까지 와서도 자기만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건 좀 안타깝습니다. 그것이 칭찬이나 찬사라해도 말입니다.

(그 모습만으로도 우리를 설래게 하는 베를린 필하모니홀)
그나저나 클래식 음악애호가에게만은 누가 뭐래도 베를린이 최고 도시입니다. 독일 내에는 당연히 수많은 도시에 수많은 명문 오케스트라들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뮌헨 등에 도시별로 2~3개씩 세계적인 특급 오케스트라들이 있고,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 쾰른, 하노버, 만하임, 바덴바덴 등도 빼놓으면 섭섭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역시 베를린을 선택하는게 예의(?) 아닐까요. 악단의 음색, 기획능력, 운영철학, 홈그라운드인 콘서트홀의 수준까지 어느 하나 빠짐없이 모두 당대 최고이며, 사실은 1위라는 수식어를 넘어서서 시대를 선도하는 오케스트라입니다.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관현악단, 베를린 필하모닉은 우리가 베를린을 찾는 가장 큰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초현대식 외관과 과학적 설계로 유명한 베를린 필하모니홀. 좌석의 위치와 가격에 상관없이 균질한 사운드를 들려주기에 ‘음향 민주주의’를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예전에 알고 지내던 일본인 친구의 오랜 지론이 하나 있는데, 오케스트라는 반드시 그 오케스트라의 홈그라운드 공연장에서 연주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은근히 딴지를 걸어도 요지부동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베를린필만은 ‘정말이지 반드시(!)’ 필하모니홀에서 들어야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던 게 그였습니다. 이야기의 옳고 그름을 떠나 여기엔 나름 이유가 있는데, 필하모니홀의 어쿠스틱이 워낙에 특이하기 때문이고, 베를린필의 사운드 철학과 연주 스타일 또한 이 홀에 딱 맞춰 발전해왔기 때문입니다. 건축가 한스 샤로운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자문을 얻어가며 만든 이 콘서트홀은 사실 생김새는 뮌헨의 가슈타이그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사운드의 질은 상대가 안 되지요. 베를린이 한 수 위가 아니라 아예 비교대상이 아닐 정도로 뛰어납니다. 필하모니홀은 극도로 섬세한 전달력을 자랑하는데, 전 세계 콘서트홀만 수십 군데를 가본 저도 바이로이트와 함께 가장 특이한 곳으로 꼽는 곳입니다. 마치 흐르는 음악 속의 수많은 음표들을 낱낱이 분해하여 하나씩 다 붙들어매 우리 귀에 쏙쏙 넣어준다고나 할까요. 빈의 무지크페라인잘이나 암스테르담의 콘세르트허바우,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베를린 겐다르멘마크트의 콘체르트하우스 등 옛날 스타일 콘서트홀들의 그 빵빵 터지는 드라마틱한 어쿠스틱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극도로 섬세한 대신, 공명이 주는 어떤 부스터 효과가 전혀 없지요. 완벽에 가까운 정교한 앙상블을 빚어내지 못한다면 여기엔 아예 서지 않는게 좋습니다. 단원 한 명의 실수, 앙상블의 작은 부조화, 지휘자와 악단 간의 미묘한 호흡의 엇갈림 등이 객석에 낱낱이 포착되는 홀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1960년대에 벌써 이걸 다 알고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살짝 진땀이 날 정도입니다. 이 특이하고 멋진 홀에서 베를린필의 연주를 듣는다는 건 역시나 엄청난 행운이겠지요. 게다가 그날따라 더욱 행운이었던 건 프로그램이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었다는 것입니다. 천상의 궁합, 다시 없을 환상의 마리아쥬란 과연 이런 걸 말하는 걸까요. 아바도 - 베를린필 - 필하모니홀의 ‘삼합’에, 거기다 <환상교향곡>입니다. 표는 오픈하자마자 매진이었는데, 간신히 두 장을 구했습니다. 오늘은 일행들과 함께 세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이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이날 연주는 영화관 등에서도 라이브 생중계 되었다.)


(영원한 마에스트로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당일 커튼콜 사진. 그는 한 명의 지성으로서도, 또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도 가장 완성된 형태의 고결한 신사이다.)
새삼 감동했습니다. <환상교향곡>은 정말이지 이 홀에, 이 악단에 헌정이라도 된, 맞춤복처럼 딱 맞춰서 작곡이라도 된 작품인가요?! 인트로의 섬세한 현악합주부터 실로 전율적이었습니다. 세상에나, 저렇게 작은 약음의 떨림 하나하나까지 다 잡히는 홀이 도대체 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이제 각 파트에 포진된 수석들은 완벽에 가까운 비르투오조를 발휘하며 저나마 각개 약진에 나섭니다. 현란한 연주들이 연이어 여기저기서 터지는데, 마치 황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알알이 흩어지는 그 음들이 그저 황홀하기만 합니다. 개인기를 만발하면서도 일체의 흐트러짐이 없이 단정한 모양새를 유지하는 건 더욱 놀랍습니다. 강력한 유대감으로 총력질주하는 스타일은 독일의 모든 악단이 비슷하지만, 유독 베를린필은 여기에 댄디함을 더해놓아 더욱 절묘합니다. 전임 음악감독인 아바도는 베를린필의 이런 기능성을 너무도 잘 아는 지휘자입니다. 복잡한 음악 사이를 절묘하게 들어갔다 나갔다하며 중요 맥락만을 집어 지시를 내리는데, 마에스트로의 그 우아한 뒷모습 만큼이나 음악은 절로 천의무봉의 모양새를 띱니다. 말문이 막히는 연주였습니다. <환상교향곡>이 이처럼 멋진 작품이었다니. 새삼 여기서 다시 한번 감동에 몸을 떨게 됩니다. 옆자리의 동행이 외칩니다. ‘미쳤어 정말! Wahnsinnig!' 앞자리 할머니들이 깔깔거리며 화답합니다. 하긴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연주가 가능하겠습니까!

 


(이날 완벽한 합주력으로 최고의 음악을 들려준 베를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필하모니홀 로비의 모습. 베를린필의 디지털콘서트홀 서비스를 체험해 볼 수 있다.)
공연 다음 날입니다. 어제 그 음악의 여운이 아직도 몸 속에 남아 있는 걸까요. 멍하게 오전을 보내고 나니 벌써 점심입니다. 일행들과 겐마르멘마크트에서 만나 남부 독일식 음식을 먹었습니다. 바이스부어스트(흰 소세지), 레버케제, 학세 등등. 아무리 남북 독일이 서로 사이가 안 좋더라도, 그리고 저희가 북독일인 베를린에 있더라도, 역시 음식은 남독일 것이 좀 더 낫지 않나요. 푸짐한 한상 차림에 뮌헨식 라들러(맥주에 레몬에이드를 섞은 것)를 곁들이니 우리가 제대로 독일을 만나고 있다는 뭐 그런 근거없는 자족감도 느껴졌습니다.

(아우구스티너에서 독일 남부 바이에른식 한상차림 식사를 했다.)
그날은 월요일이었지만 하필이면 큰 명절인 성령강림절이라 온갖 가게와 카페, 밥집들이 다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온 시내에 관광객들이 바글바글한데, 백화점인 카데베(KaDeWe)와 갈레리 라파예트, 심지어 카슈타트(Karstadt)까지 문을 꽁꽁 닫아버린 상황. 거기에 여행객의 마음의 고향(?)인 서점 두스만(Dussmann)까지 문을 걸어 잠궜습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이리 걷고 저리 걸으며 혹시나 문을 연 가게들을 찾아 다녔지요. 결국 생수 조달 프로젝트를 위해 다시 초(Zoo) 역 인근으로 갔습니다. 베를린을 좀 안다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랜드마크 슈퍼(?)인 울리히(Uhlig)로. 휴일에도 문을 여는 이 슈퍼에 가면 전세계에서 베를린으로 몰려 온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을 다 만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생수를 고르며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고, 또 치이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티어가르텐 숲 속의 한적한 대저택 호텔 대신 도심 한가운데 숙소를 고른 이유는 이렇게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베를린 여행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유명 관광지나 랜드마크를 찾아다니는 여행도 물론 즐겁겠지만, 베를린에서만큼은 딱히 특별한 무얼 하지 않고도, 그저 사람들 사이에서 일상을 보내는 것만으로 즐거운 여행이 성립합니다. 하긴. 어제 베를린필의 공연을 이미 봤으니, 거사를 끝낸 후의 여유가 이런 데서 반영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한때 잠시 살았던 곳으로도 걸어 가봤습니다. 초(Zoo)에서 도이치오퍼로 올라가는 길 쪽에 있는, 에른스터-로이터 광장에 면한 쉴러 테아터 뒷길의 주택가입니다. 쿠담에서 한 30분 걸으면 되는 곳이지요. 한적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유명한 지역인데, 제 살던 집은 벌써 세월이 한참이나 지났지만 페인트칠만 한번 하고는 옛 모습 그대로이더군요. 뭔가 옛 것이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다는 건 은근히 큰 위안을 줍니다. 늘 변해가고,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세상인데 이렇게 제자리를 버텨주는 존재가 하나라도 있다는 건 왠지 정겹고 든든하지 않습니까. 제가 살던 그 집, 그 방은 지금 누가 살고 있을까요? 몇 년 후에 다시 베를린을 찾아도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을까요? 그런 궁금증을 품은 채 베를린을 떠났습니다. 다시 볼 그날까지 안녕. Auf wiedersehen, Berlin!



 
다음 주는 올해로 탄생 200주년을 맞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찾아 드레스덴, 바이로이트 그리고 암스테르담으로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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