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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권 70
1279독, 복습
지난 번 편지는 “어려웠다”는 독자들의 반응이 전해져 왔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어려웠을 것이라 판단되었습니다.
이렇게 피드백을 주셔야, 제가 또 조절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아마도, 특히 어려웠던 부분은 오종종성설(五種種姓說)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저도 어렵습니다. 이번 편지에서는 복습삼아, 오종종성설을 아는 대로 설명 드려보겠습니다.
‘종성’에서 ‘種’은 ‘종자, 씨앗’이라는 말입니다. ‘성’은 ‘姓’으로도 쓰지만 ‘性’으로도 씁니다. 범어로는 ‘gotra’인데, ‘가계, 가문, 혈통’이라는 뜻입니다.
중국 역사에 보면, 옛날 어떤 민란을 일으킨 주모자가 하는 말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고 합니다. 왕, 왕비, 장군, 재상과 같은 높은 자리에 올라갈 종자, 씨앗이 따로 있나? 실제로, 그 당시에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이 신분제입니다. 인도에서도 카스트 제도가 있었고, 우리나라에도 반상(班常)의 차별이 있었으며, 일본에서는 같은 사무라이 안에서도 상급무사와 하급무사 사이에는 큰 차별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회이든지…. 사극(史劇)을 보면, 참, 이 신분의 한계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했는지 알 수도 없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물어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가 되는 씨앗이 따로 있나? ‘씨앗’이라는 말을 ‘근기’라는 말로 바꾸어 봅시다. 부처가 되는 근기가 따로 있나?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우리가 받아온 교육으로는 ‘따로 없다’고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대승불교 중에서도 <<화엄경>>과 같은 법성종 전통이 강해서입니다.
‘법성’이라 할 때의 ‘법’은 ‘것’의 뜻입니다. 모든 것, 모든 존재라는 말입니다. ‘성’은 ‘성품 성’이라고 하는데, 속이라는 말입니다. 성품은 속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법성의 차원에서 볼 때, 즉 인간존재를 속의 차원에서 고려한다면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 이렇게 답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는 법성종 전통과 함께 법상종 전통도 있습니다. ‘상’은 ‘서로 相’이라고 말하는데, ‘상호신용금고’라고 할 때는 ‘서로 상’의 뜻입니다. 하지만, ‘모습 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부처님의 얼굴을 ‘상호’라고 할 때는 ‘모습 상’의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법상은 모든 존재들을 겉모습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겉으로 생각해 볼 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지금 보이는 겉모습이 부처님 맞는지요? 우리 재가자들은 답하지 말고, 스님들만 답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과연 스님들도 ‘예’라고 손들고 나설 수 있을까요? 몇 분이나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런 맥락에서 볼 때, 법상종에서는 법성종과 답이 달라집니다. 어떤 근기의 사람들은 성문이 될 정도의 근기라고 해서 ‘성문종성’이라 하고, 어떤 근기는 연각(=독각=벽지불)이 될 근기라고 해서 ‘연각종성’, 어떤 근기는 비로소 보살이 될 수 있다고 해서 ‘보살종성’이라 합니다. 이 보살종성이 나중에는 부처가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부정(不定)종성’입니다. 성문이 될지, 연각이 될지, 보살이 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떤 사람들은 아예 그 어떤 수행도 할 수 없고, 불보살은 물론, 연각이나 성문도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를 ‘무종성(無種性)’이라고 합니다. 아예, 가능성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법성종의 관점에서 볼 때, 법상종에서 무종성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보일까요? 말도 안 되는 것 아닐까요? 또 반대로 법상종의 관점에서 법성종을 바라볼 때, 어떻게 보일까요? 무종성을 말한다는 것은 용납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중국에서나 일본에서나 법상종과 법성종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법상종은 오늘날 불교학의 범주로는 유식(唯識)이라 말하고, 법성종에는 천태종과 화엄종이 들어갑니다. <<대승기신론>>이나 선불교도 다 법성종입니다.
그렇다면 정토종의 입장은 법성종일까요? 법상종일까요? 정토불교에서 보는 인간존재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고 비극적입니다. 그런 점에서 법상종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성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성불할 수 없는 ‘무종성’을 인정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법성종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정토종의 불교는 법성종의 측면과 법상종의 측면을 둘 다 갖습니다.
자, 여기서 정리를 해봅니다. 인간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점은 수행법의 제시와 깊이 관련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나는 부처다’라는 점을 ‘나는 중생이다’라고 하는 것보다 더 깊이 수긍한다면, 그런 분은 대단히 근기가 높은 분이고 참선과 같은 수행법이 적절할 수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잠들어 있는 불성을 바로 보는 것, 즉 견성(見性)을 지향하는 것이 선불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나는 중생이다’라고 하는 점이 ‘나는 부처다’라고 하는 인식보다 더 크고 깊다면, 당장의 견성이나 돈오(頓悟)는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더 오랜 시간 가열 찬 참회정진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법상종에서는 중생이 성불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3아승지겁이라 말합니다. ‘겁’만 해도 무한대의 시간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거기에 ‘곱하기 아승지’를 합니다. ‘아승지’는 ‘헤아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다가 다시 ‘곱하기 3’입니다. 그렇게 성불이 어렵다고 봅니다. 이를 점수(漸修) 내지 점오(漸悟)라고 말합니다.
저는 일찍이 이런 생각을 해왔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존재는 그 두 측면을 다 갖고 있는 것 아닌가. 겉과 속, 두 측면을 다 갖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불교사상이 곧 여래장(如來藏)사상입니다. ‘장’은 ‘냉장고’의 ‘장’입니다. ‘감출 장’이라고 하는데, 범어로는 ‘garbha’입니다. 이 ‘가르바’는 ‘태(胎)’라는 말입니다. 앞서 ‘gotra’가 ‘씨앗, 혈통, 가문’의 의미라고 했습니다만, 양자의 의미가 통하는 바 있습니다.
여래장은 여래가 될 가능성을 감추고 있다고 하는 사고입니다. 감추고 있다는 말은 아직 드러나지는 않았다는 것이지요. 부처가 될 가능성은 있지만, 아직은 중생이다. 겉과 속을 동시에 인식합니다.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양면성을 다 인지하는 것이지요. 저는 이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래장사상에 입각해서 불교를 생각해왔습니다. 그것이 인간존재에 대한 타당한 인식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정토불교의 자리는 어디인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을 죄업이 극심한 범부라고 보는 점에서는 법상종과 견해를 같이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불하기까지 3아승지겁이 걸린다고 보아서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죄업중생인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수행해서 성불하려고 한다면, 3아승지겁이 걸린다는 법상종의 이야기가 맞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더 오래 걸릴 것이고, 영원히 성불할 수 없다는 ‘무종성’의 시점(視點) 역시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토불교에서는 법상종과 같은 점법(漸法)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불교와 같은 돈법(頓法)의 입장을 취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은 바로 자력으로부터 타력으로의 전환 덕분입니다. 저의 용어로는 중생주의로부터 아미타주의로의 전환 덕분입니다. 그러한 아미타주의 덕분으로 범부인 채로 성불하는 길이 열려버립니다. 우리가 여러 번 공부했던 횡초(橫超)라는 말이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정토불교의 철학적 배경은 바로 여래장 사상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래장 사상은 부처와 중생 사이의 이중구조라고 할까요? 부처의 측면도 있지만, 중생의 측면도 있다고 하는 인간관 위에서 성립하는 성불론이 바로 아미타주의의 불교입니다.
정토불교 안에서 이러한 점은 두루 확인할 수 있겠으나, 특히 신란스님의 진종불교에서는 법상종적 측면과 법성종적 측면을 둘 다 내보입니다. 범부라는 죄업중생의 자각이라는 측면에서는 법상종과 같으나, 그 성불의 메커니즘은 선불교와 같이 돈적(頓的)이라는 점에서 법성종과 같습니다.
이렇게 오종종성설에 대한 복습을 하면서, 말이 나온 김에 대승불교 전반에 걸치는 이야기를 더 보태어 보았습니다. 이제 지난 번 편지를 다시 한번 더 읽어서 복습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이제 ‘오늘의 「정신게」’를 한번 읽어보기로 합니다.
귀명무량수여래(歸命無量壽如來) ⟶ 나무불가사의광(南無不可思議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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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장보살인위시(法藏菩薩因位時) ⟶ 재세자재왕불소(在世自在王佛所)
도견제불정토인(都見諸佛浄土因) ⟶ 국토인천지선악(國土人天之善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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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무상수승원(建立無上殊勝願) ⟶ 초발희유대홍서(超發希有大弘誓)
오겁사유지섭수(五劫思惟之攝受) ⟶ 중서명성문시방(重誓名聲聞十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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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방무량무변광(普放無量無邊光) ⟶ 무애무대광염왕(無碍無對光炎王)
청정환희지혜광(淸淨歡喜智慧光) ⟶ 부단난사무칭광(不斷難思無稱光)
초일월광조진찰(超日月光照塵刹) ⟶ 일체군생몽광조(一切群生蒙光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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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명호정정업(本願名號正定業) ⟶ 지심신요원위인(至心信樂願爲因)
성등각증대열반(成等覺證大涅槃) ⟶ 필지멸도원성취(必至滅度願成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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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소이흥출세(如來所以興出世) ⟶ 유설미타본원해(唯說彌陀本願海)
오탁악시군생해(五濁悪時群生海) ⟶ 응신여래여실언(應信如來如實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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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발일념희애심(能發一念喜愛心) ⟶ 부단번뇌득열반(不斷煩惱得涅槃)
범성역방제회입(凡聖逆謗齊回入) ⟶ 여중수입해일미(如衆水入海一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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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취심광상조호(攝取心光常照護) ⟶ 이능수파무명암(已能雖破無明闇)
탐애진증지운무(貪愛瞋憎之雲霧) ⟶ 상부진실신심천(常覆眞實信心天)
비여일광부운무(譬如日光覆雲霧) ⟶ 운무지하명무암(雲霧之下明無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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획신견경대경희(獲信見敬大慶喜) ⟶ 즉횡초절오악취(卽橫超截五惡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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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선악범부인(一切善惡凡夫人) ⟶ 문신여래홍서원(聞信如來弘誓願)
불언광대승해자(佛言廣大勝解者) ⟶ 시인명분타리화(是人名分陀利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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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타불본원염불(彌陀佛本願念佛) ⟶ 사견교만악중생(邪見憍慢悪衆生)
신요수지심이난(信樂受持甚以難) ⟶ 난중지난무과사(難中之難無過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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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서천지론가(印度西天之論家) ⟶ 중하일역지고승(中夏日域之高僧)
현대성흥세정의(顯大聖興世正意) ⟶ 명여래본서응기(明如來本誓應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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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여래능가산(釋迦如來楞伽山) ⟶ 위중고명남천축(爲衆告命南天竺)
용수대사출어세(龍樹大士出於世) ⟶ 실능최파유무견(悉能摧破有無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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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설대승무상법(宣説大乘無上法) ⟶ 증환희지생안락(證歡喜地生安樂)
현시난행육로고(顯示難行陸路苦) ⟶ 신요이행수도락(信樂易行水道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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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념미타불본원(憶念彌陀佛本願) ⟶ 자연즉시입필정(自然卽時入必定)
유능상칭여래호(唯能常稱如來號) ⟶ 응보대비홍서은(應報大悲弘誓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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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조론설(天親菩薩造論說) ⟶ 귀명무애광여래(歸命無碍光如來)
의수다라현진실(依修多羅顯眞實) ⟶ 광천횡초대서원(光闡橫超大誓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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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유본원력회향(廣由本願力廻向) ⟶ 위도군생창일심(爲度群生彰一心)
귀입공덕대보해(歸入功德大寶海) ⟶ 필획입대회중수(必獲入大會衆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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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지연화장세계(得至蓮華藏世界) ⟶ 즉증진여법성신(卽證眞如法性身)
유번뇌림현신통(遊煩惱林現神通) ⟶ 입생사원시응화(入生死園示應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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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담란양천자(本師曇鸞梁天子) ⟶ 상향란처보살례(常向鸞處菩薩禮)
삼장류지수정교(三藏流支授淨教) ⟶ 분소선경귀락방(焚燒仙經歸樂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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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친보살론주해(天親菩薩論註解) ⟶ 보토인과현서원(報土因果顯誓願)
왕환회향유타력(往還廻向由他力) ⟶ 정정지인유신심(正定之因唯信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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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염범부신심발(惑染凡夫信心發) ⟶ 증지생사즉열반(證知生死卽涅槃)
필지무량광명토(必至無量光明土) ⟶ 제유중생개보화(諸有衆生皆普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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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작결성도난증(道綽決聖道難證) ⟶ 유명정토가통입(唯明浄土可通入)
만선자력폄근수(萬善自力貶勤修) ⟶ 원만덕호권전칭(圓滿德號勸專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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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삼신회은근(三不三信誨慇懃) ⟶ 상말법멸동비인(像末法滅同悲引)
일생조악치홍서(一生造悪値弘誓) ⟶ 지안양계증묘과(至安養界證妙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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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도독명불정의(善導獨明佛正意) ⟶ 긍애정산여역악(矜哀定散與逆惡)
광명명호현인연(光明名號顯因緣) ⟶ 개입본원대지혜(開入本願大智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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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정수금강심(行者正受金剛心) ⟶ 경희일념상응후(慶喜一念相應後)
여위제등획삼인(與韋提等獲三忍) ⟶ 즉증법성지상락(卽證法性之常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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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신광개일대교(源信廣開一代教) ⟶ 편귀안양권일체(偏歸安養勸一切)
전잡집심판천심(專雜執心判淺深) ⟶ 보화이토정변립(普化二土正弁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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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악인유칭불(極重惡人唯稱佛) ⟶ 아역재피섭취중(我亦在彼攝取中)
번뇌장안수불견(煩惱障眼雖不見) ⟶ 대비무권상조아(大悲無倦常照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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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원공명불교(本師源空明佛敎) ⟶ 연민선악범부인(憐愍善惡凡夫人)
진종교증흥편주(眞宗教證興片州) ⟶ 선택본원홍악세(選擇本願弘惡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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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래생사륜전가(還來生死輪轉家) ⟶ 결이의정위소지(決以疑情爲所止)
속입적정무위락(速入寂靜無爲樂) ⟶ 필이신심위능입(必以信心爲能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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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대사종사등(弘經大士宗師等) ⟶ 증제무변극탁악(拯濟無邊極濁悪)
도속시중공동심(道俗時衆共同心) ⟶ 유가신사고승설(唯可信斯高僧說)
(『교행신증』 제2권)
지난 번 편지에서 출제한 ‘<<무량수경>> 퀴즈 – 4’는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답변을 보내주신 분은 대 여섯 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모두 정답을 보내주셨습니다. ‘바를 正’입니다. 감사합니다. 제11원은 한문으로 ‘부주정취필지멸도자(不住定聚必至滅度者)’인데, 우리말로 옮기면 ‘(정)정취에 머물러서 반드시 멸도에 이르지 않는다면’이라고 옮겨야 합니다.
정정취는 ‘정성(正性)에 결정되는 무리’라는 뜻입니다. 그런 정정취에 머문다는 것은 그러한 무리들 속의 한 멤버가 된다는 것입니다. 정성은 위없이 높고 올바른 깨달음이니, 곧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결정되었다는 말은, 깨달음은 시간 문제일 뿐 다시 중생의 경지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원효스님은 ‘무퇴자(無退者)’라고 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부산에 가는 사람이 있다 합시다. 서울역에서 ‘부산행 KTX’를 탔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부산에 도착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일 것입니다. ‘부산행 KTX’는 ‘부산에 가는 것이 결정되어 있습니다.’ 극락에 가는 것, 즉 정정취에 들어가는 것은 깨달아서 성불하는 것이 결정되는 사건입니다. 이제 더 이상 후퇴는 없습니다. 그래서 극락에 가는 것은 서울역에서 ‘부산행 KTX’를 타는 것과 같습니다.
‘<<무량수경>> 퀴즈 –5’를 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의 작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 선생님은 ‘민예(民藝)’라는 말을 만든 분이고, 민예의 미학을 정립하신 분입니다. <<미의 법문>>, 이런 책도 지었습니다.(우리나라에서 번역된 책입니다.) 그 미학의 기초를 불교에서 갖고 갔기에 불교미학의 정립을 시도했고, 정토사상에서 미학의 기초를 정립했기에 정토미학을 정립한 것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작업에 큰 기여를 한 것이 법장보살의 48원 중에 어떤 원입니다. 이 원은 몇 번째 서원일까요?
오늘은 ‘복습’이 주제였으므로, 「정신게」 내용 공부는 안 하겠습니다. 다음 편지에서는 ‘사람 人’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무더운 여름입니다. 다들 건강하시길 빕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2024년 8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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