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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 단군 벽화의 현장 탐사
1. 궐리(闕里)를 찾아서
창너머 빗소리에 풋잠이 드니,
그리던 얼굴은... .
차창 밖으로 보이는 역은 산해관(山海關)이었다. 만리장성이 시작하는 곳이 아닌가. 하룻밤을 자고도 만리성을 쌓아준다는 속담이 있다. 성 쌓으러 나갔다가 거기서 죽은 사람이 얼마였던가. 일하다 죽으면 거기다 묻어 인골을 골재로 삼았다니... .
“시황이여, 그리도 장성을 쌓고 싶었으면, 당신이나 일하다 죽어 묻힐 일 아닌가요.”
장성은 애먼 사람들의 원혼이 서린 무덤이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장성을 쌓으려다 저기서 생을 마감하였을까. 산해관은 대륙에서 동북지방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있던 곳, 청나라 시절에는 한족의 경우, 산해관을 지키는 통판(通判)의 통행허가증이었던 인표(印表)가 없으면 동북지방을 여행이나 벌이를 하러 갈 수가 없었다. 만주족들의 고향이자 조상의 망제(望祭)를 지내는 백두산이 있는 곳이라서.. . 그러니까 백두산을 돌아볼 염도 못 먹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한족들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자는 듯 졸면서 인표도 없이 산해관을 지나가고 있다. 마음대로 솰라거리면서... .
이와 관련, 중국 지리역사서의 가장 오래된 얼굴이라 할 산해경(山海經)에는 어떻게 올라 있을까. 동해 바다 안의 북쪽 바다 모퉁이에 나라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조선(朝鮮)과 천독(天毒, 천축) 천축은 곧 인도였다. 산동반도와 요동반도를 중심으로 하는 넓디넓은 대륙에 주인공이 조선이었다. 당시로는 춘추전국도 한-진-당-송-명-청도 없었던 시절. 끝이 보이지 않는 만주벌을 지나 개꼬리가 나온 옥수수의 바다, 하북 평원을 지나는 나그네의 가슴 속엔 회한이 뱀처럼 도사린다. 내 젊은 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50여 년 전 새로 들어온 옥수수 농사로, 우유 목장으로 나의 길을 걷고자 했던 열망으로 밤잠을 설치던 시절... . 제대 후 지붕에서 떨어져 꿈을 접어야 했던 가슴 시린 순간들이 구름처럼 떠오른다. 그 뒤 애들 엄마도 먼저 떠나보내고... 바람에 서걱대는 갈대 소리로 마음을 달래던 시절... .
만주벌의 흙은 검은색인데 여기는 다소 붉은 색을 띈 흙 마당이다. 필시 황하의 영향일 터. 모래가 많단다. 그래 산동의 고구마와 땅콩이 잘 된다고. 말하자면 동해 바다의 북쪽 바다 모퉁이니까 발해가 된다. 멀리 논이며 소금 농사를 하는 소금밭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속 성장의 깃발이듯 키 큰 미루나무들이 바람에 휘청거리며 여름날을 노래하고 있다. 열차 안내원의 방송, 여기는 진황도시(秦皇島市)라고 한다.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진황도 노룡현(盧龍縣)에 갈석산과 조선성이 있고 낙랑군이 있었던 곳이라고... . 중국의 한족들이 적어 놓은 기록도 마다하고 일본인들이 주장한 대동강(大同江) 낙랑설을 표방하여 우리의 역사와 강역을 좁혀 놓고 말았다. 이르자면 요서낙랑설이라야 옳을 것을... . 조상 대대로 뼈를 묻은 땅을 지키지 못한 못난이 후손이 되고 말았다. 남의 장단에 춤추고 놀아난 게 아닌가 말이다. 창밖에는 39도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장마철이라 습도가 높아서인지 매우 후덥지근 했다. 일행은 이윽고 곡부 동역에서 내렸다. 온통 공자(孔子, 전551-전479)의 형상,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으로 곳곳에 도배를 하였다.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而自遠方來不亦樂乎)를 여기저기서 쉽게 볼 수가 있다. 2천5백 년 전 살았던 공부자의 말씀이 아직도 형형하게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인생은 짧으나 그가 남긴 어록의 목숨은 길고 긴 것이라는... . 곡부 역사 중앙에 나무 병풍을 뒤로 하고 그 앞에 공자의 상을 생생하게 재현하여 세웠다. 이천년 전의 공자의 형상을 어찌 알까마는 아무튼 그렇다는 것이다. 진선생의 사돈이 마중을 나왔다. 동(董) 선생이라고 했다. 기아차를 몰고 나온 것이다. 우리가 한국 사람임을 고려했음인가. 곡부로 들어가는 길목에 공자의 옛 고향(故里)이라고 개선문처럼, 그 위에다 더러는 돌비에다 새겨 세워 놓았다. 해는 미루나무 숲 위로 지고 차츰 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저녁을 하자는 것이다. 차안에서 라면을 먹었는데 저녁 이야기를 하니까 입안에서 군침이 돈다.
궐리(闕里)에 자리한 산동의 향토 음식이 나왔다. 약간 삭힌 두부란다. 마치 돼지고기 비슷해 보이나 먹을 만하였다. 탕추위라고 하여 공자가 자주 찾아갔던 니구산을 감도는 사수(泗水)에서 잡은 물고기를 튀겨서 설탕으로 요리를 한 것이다. 더불어 산동의 옥수수 전병을 먹어 보라고 권한다. 동선생과 인사를 나누고 공자가 어머니를 따라서 궐리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물어 보았다. 상대방은 내 짧은 중국말을 알아들었는지 의문이고 나는 상대의 이야기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산동 지방의 방언이라 그렇다고, 진 선생이 귀띔을 해준다. 시간이 가면서 차츰 한 두 마디를 더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옆에서 진 선생이 거들어 주었다.
내 집 같은 숙소라는 루쟈(如家) 빈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차를 마시며 약간의 담소를 나누었다. 궐리(闕里)와 곡부(曲阜)와 니구산(尼丘山)의 유래에 대하여 다시 물었다. 여기서 일백 킬로 쯤 떨어진 제녕시 가상현의 무씨사 석실과 맹자(孟子, 전372-전289)의 고향에 대하여도.. . 자기는 과학을 한 사람이라 잘 모르겠다고. 한국의 화성이나 오산이, 또는 논산 등지에 궐리가 있다고 했다. 이는 아마도 공자의 마을을 사모해서 그리 적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더니, 그렇겠다고 했다. 문화혁명 때 많은 공자 관련 시설들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근년에 들어 저네들은 새로 공자학당(孔子學堂)을 만들어 세계적으로 널리 홍보하고 사업을 펴고 있다. 한국의 향교나 서원에서 궐리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럼 여기 무슨 대궐 터가 있었던가. 아니면 공자를 문성왕이란 존호를 받으면서 그렇게 부른 것인가. 그럼 곡부는 어떠한가. 공자가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서 니구산에서 제사를 돕던 것과 관련이 있는 듯. 설문해자(說文解字)를 보면, 곡(曲)은 구슬 옥(玉)이 두 개가 있는 글자이다. 구슬옥의 옥기(玉器)로 만든 홀(笏)을 통하여 신과 제사장인 임금이 교감한다고 믿었던 징표였다. 요즘 홍산(紅山) 문화에서 씨자 형 옥기가 바로 그 얼굴이다. 곡부의 부(阜)는 언덕 곧 산기슭이니 산이라면 니구산 곧 니산(尼山)이었을 것이다. 그럼 니산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니(尼)는 중을 말한다. 니구산의 현장을 보면 바윗돌로 둘러서 마치 중의 머리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공자의 어머니 안징재(顔徵在)가 무녀였음을 고려하면 상당한 걸림이 있을 것이라고.. . 동 선생은 재미가 없는지 바로 일어나 집으로 갔다. 진선생과 둘이는 내가 적어온 무씨사당 그림 자료를 보면서 내일 석실로 가는 길이며 벽화(壁畵)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에 대한 궁금함과 날씨에 대한 걱정을 하며 우리는 잠을 청했다. 진 선생의 코골이는 자장가 정도였다. 코골이 깊은 잠을 맛있게 자는, 그림 속 얼굴이.. .
2. 수수께끼, 단군의 벽화
바람도 없는 조용한 새벽이면 산동에서 닭 우는 소리가 제물포에서 들린다고 했다. 그럼 거꾸로 제물포 쪽에서 우는 닭소리가 들릴 법도 하건만.. . 그만큼 산동 반도가 가깝다는 말이다. 희부연 하늘을 보며 숙소에서 나와 궐리(闕里) 공림이 있는 쪽으로 산책을 나왔다. 오마사로(五馬祠路) 길에는 이른 아침이라 사람도 안 보인다. 얼마쯤 가다보니 길 가운데 조그만 정자가 하나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우물이 있는 정자 곧 정정(井亭)이라는 현판을 달아 놓았다. 언제 쯤 만들어 세웠는지 우물가에 놓은 돌들이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은 듯.
그러나 오마사로 곧 말 다섯 마리와 관련한 큰 길이었을 터. 공자묘(孔子廟)에 제향을 올리러 가던 관원들이 다니고,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오가는 관원들을 환영하거나 환송하였을 것이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침으로 먹는 꽈배기 같이 생긴 튀김(油條)을 만들고 콩국(豆漿)을 파는 중씰한 부부가 포장마차에서 차비를 하고 있다.
비를 들고 마당을 쓰는 청소원에게 물었다. 저기 보이는 우물이 언제 생겼으며 거기서 무슨 행사를 하는가 물었다. 몰라서 미안하다는 것. 미안하기는 마찬가지. 성곽처럼 생긴 궐리 큰길 옆 도랑에 아침부터 먹이를 찾는 작은 잉어 떼들이 무리를 지어 다닌다. 더러는 아침부터 태공들이 낚시를 드리우나 눈먼 고기는 없어 보였다.
산책길을 되짚어 숙소로 돌아와 아침을 들고 떠날 채비를 하였다. 곡부 사범의 이 선생이 차를 갖고 찾아왔다. 궐리를 떠나 서남쪽으로 한 삼십분쯤 갔을까. 쌍곡선같이 큰 도랑물이 보인다. 저게 뭐냐고 물었다. 이 선생의 산동 사투리는 그닥지 않았다. 세계 제일의 인공운하인 경항운하(京杭運河, 1,794km)라고 했다. 물길로 북경에서 항주까지 갈 수 있다. 여기는 노운하(魯運河) 구간으로 임청(臨淸)에서 대아장(台兒庄)까지를 이르는 산동성 곧 노(魯) 나라의 강역이란다. 대아장은 대추로 이름난 조장(棗庄) 지역. 오가는 배들은 안 보인다. 그냥 커다란 용이 움직이는 듯. 기회가 되면, 배로 운하 여행을 하며 옛 정취를 느끼고 싶었다. 제녕으로 들어간 차는 얼마 뒤 가상현(嘉祥縣)으로 발을 옮긴다. 지방진(紙方鎭)이란 마을에 군사적인 진영이 있었고, 아울러 종이가 나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어디서나 위성 지도로 길을 찾으니 토를 안 다는 안내인이 우리와 함께 하는 셈이다. 조금 있으니 낡은 표지판에 무씨사당이라는 갈색 바탕의 빛 바랜 글자가 보인다. 최근에 건 듯한 북경대학한화연구소실습장이란 간판이 걸려 있다. 입장료는 젊은 이선생만 내란다. 60이 넘은 노인들이라 내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 문 앞에서 함께 묵념을 하고 들어갔다. 말이 석실이지 실은 무씨(武氏) 들의 무덤인 셈. 천팔백 년 전 한나라 위종황제 건화 연간(147-149)에 만들었다는 석실, 세월 속에 묻혀 전혀 모르다가 청나라 건륭 51년(1786) 황역(黃易)이라는 사람이 발견, 프랑스의 샤반느의 발굴 보고서(1907에서 석실을 소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보고서에서는 무적산(武翟山) 아래 무진리에 있다고 하였다. 그 석실 벽면의 돌에 단군을 비롯한 공자 등의 그림이 새겨져 있기에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이 선생의 설명이다. 안내표지판을 따라서 제2석실 쪽으로 갔다. 언제 풀을 깎았는지 장마 탓인가 쑥대밭이다. 풀섶 외길이 나 있었다. 석실은커녕 석실을 파헤친 듯한 석실의 네모진 돌들만 덩그러니 나뒹굴고 옆으로는 비닐로 덮은 서너 개 돌무더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럼 석실이 없어졌단 말인가. 낭패도 이런 낭패, 그래 4천 수백 리를 찾아온 게 이 모양이나 보러 왔다니... . 사당 앞뒤로 우거진 풀밭이며 가지와 오이를 심은 밭을 휘둘러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석실의 벽화는 보일 것 같지 않았다. 벽화를 보러 찾아온 누군가 벽화를 어딘가로 다 실어 갔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림으로나 보고 우리말로 본 단군신화(1994)를 쓴 내가 아닌가. 당시 그 책이 국제도서전시회에 출품했다고 명문당 발행인이 알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내 언젠가 현장을 꼭 보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아, 이를 어쩌나... .
망연자실, 가건물 같은 긴 회랑에 벽화를 전시해놓은 데가 있으니 한번 가보자는 이선생의 제언, 전시해 놓은 화상석 머리 맡 중앙에 탁본을 두어 장 붙여놓았다. 얼핏 보매 단군 그림 같아 너무 반가웠다. 가까이 가서 보니 당나라 사람들 두건에 복장이 단군신화가 아니었다. 이제 허탕을 친 셈인가. 그냥 건성으로 보고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 빨리 와보라는 것이다.
“정 선생님, 어서 오시라요. 여기 벽화가 있답니다.”
“알겠습니다.”
나그네는 허둥대며 달려갔다. 나를 오라고 한 사람은 남편과 함께 산동의 사돈 만나러 따라서 나섰던 이 선생이었다. 마치 반가운 손님이라도 만난 듯이 나를 불러댔다. 반신반의, 사당의 본 전시실 서편 쪽에 어두컴컴한 데서 후석실 제2-3실을 보자는 것이다. 물론 진 선생이 물어물어 찾아낸 것이다. 그 때 사당과 같은 마을에 산다는 중씰한 장씨 노인을 만나서 수소문한 것이다. 확연하게는 볼 수 없으나 가장 선연히 알 수 있었던 것은 후석실(後石室) 2실 벽화였다. 반원형의 무지개 그림에 두 개의 머리가 아래로 달린 용 그림이다. 다시 3실 1층, 환웅을 맞이하는 듯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큰 절을 하는 게 아닌가. 신들의 이야기를 그린 것은 3실-1층과 2층 그림이었다. 비, 구름, 바람, 벼락, 벌과 명을 다스리던 신들의 합창소리가 들리는 듯.. 아 그렇다. 그래 맞아... . 3실 3,4층은 단군의 세상이다. 그의 출생에서부터 농사짓고 짐승을 기르며 잡고, 잘못한 사람을 벌을 주고 상을 주는 신들의 세상이 아닌가. 가장 이상적인 그리움이 깃든 홍익의 누리, 신시(神市)이다. 아무래도 잘 변별이 안 되는 그림이 가장 중요한 2실 그림이다. 환인과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손강림 그림이다. 동그라미로 구름을 상징, 날개를 달고 내려오는 신선들과 하단에는 날개가 없는 신선들의 그림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두 번 사진을 찍었다. 나도 모르게 사진을 찍기 전에 벽화 앞에서 큰 절을 네 번하였다.
“고맙습니다. 부끄럽습니다. 후예로서.. 올바로 지키지 못한 못난이일 뿐입니다요. 송구합니다.”
향이 없어 분향을 못하고 절만 했다. 주변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곡부로 돌아오는 길섶 미루나무 숲에 매미가 울고 있다. 단군 매미의 울음소리인가. 먹구름은 몰려들고... . 내가 구름을 탄 신선이 된 듯 했다.
어린 공자가 다녔다는 니구산이 바라다 보이는 산기슭에서 허름한 밥집에 들어갔다. 겉 볼 안인데 차린 음식이 산해진미. 산동의 특산인 옥수수 전병과 배갈이 한잔이 꿀맛이었다. 벌써 현지 시간으로 오후 1시 반이니 배 시계가 가리켰을 것이다. 작은 성의라는 이선생... . 늦은 점심을 마치고 곡부로 가는 마을은 맹자(孟子)의 옛 고향(孟子故里)인 추향(鄒鄕)이었다. 흔히 공자와 맹자의 고향을 합하여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함을 실감하게 된다. 곡부와 바로 붙어 있으니까 그렇다. 공자에 묻혀, 그러나 바로 옆에 있으니 관광의 효과는 배가 될 듯하다. 약 2백년 뒤에 공자에 버금하는 성선설(性善說)의 현인을 길러 낸 곳이다. 공자 난 데 맹자가 났다. 약 2백년 사이로. 한국어에서 큰 개구리를 맹꽁이라 한다. 저네들이 울 때 맹하면 꽁하고,, 타령에도 나온다. 이는 필시 맹자와 공자의 글을 읽는 학동들의 소리를 그렇게 갔다가 붙인 것인데... . 집으로 가는가 싶더니 다시 공자의 제향을 모시는 공자묘(孔子廟) 앞에 차를 세운다. 찜통더위에도 공자묘를 보러 오는 이들이 장사진이다. 하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으로 되었으니... . 한 오백년 되었을 법한 향나무들의 군락이 숲을 이루고, 매미들의 메아리가 한창이다. 한-당-송-명-청대 황제들이 세웠다는 대성전(大成殿) 들어가는 길목에는 문들의 성을 이룬다. 열두 대문도 아닌 바에.. 정치나 잘 하지.. . 향을 피운 대성전 앞에서 위대한 스승이자, 사상가이며 혁명가인 공자 신위 앞에서 묵념과 예를 올렸다. 논어(論語)에 보면 공자는 동이(東夷)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동이란 말은, 산스크리트말로는 지혜로운 민족, 뛰어난 민족이란 말이다. 동이의 나라를 그리워했던 공 선생은 누구의 후예란 말인가.
사제는 간데없고 매미소리만, 인의예지신을.
3. 돌아갈 길의 어려움
홍수에 길이 막혀 차가 가려나,
궂은 비 내리고... .
숙소에서 짐을 챙겨 일찍이 곡부 역으로 서둘러 나왔다. 장마가 질지 모른다는 진 선생의 예견. 예의 이 선생이 다시 우리를 데려다 주었다. 저렇게 이틀이나 어버이를 모시듯이.. . 어, 공자님의 고향이라 모두가 예의범절이 놀라웠다고.. . 나중에 안즉 자신의 친지 부탁으로 왔단다. 실인즉 올해 9월 입학에 대학입시를 본 아들의 입학에 대한 자문이며 끝까지 도와주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고 한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에... . 어쨌든 보고 싶어 했던 단군 벽화를 보고 가니 행복한 여행이었다. 경비는 상당액 들었지만... . 역사에 들어서니 사람의 성을 이룬다. 날씨는 덥지, 사람은 많지, 얼마 만에 역무원에게 표를 낸 진 선생이 황당한 얼굴로 돌아왔다. 홍수로 열차의 통행이 어려워 표 값을 되돌려 주더란다. 이렇게 난감할 데가.. . 우여곡절 끝에 내린 결론은, 북경으로 돌아서 가는 길밖에 방법이 없다는 것. 북경 가는 오후 4시 표를 가까스로 샀다. 그것도 진선생의 딸 설란 선생이 차 시간이 되었다며 먼저 북경으로 떠났다. 두어 시간 지났을까. 설란에게 전화를 하니 벌써 북경에 도착했다는 전언. 빨리 서둘러 내일 장춘 가는 표와 오늘 저녁 묵을 수 있는 숙소를 마련하라고. 얼마 뒤에 문자가 왔다. 겨우 예매를 했다는 소식, 얼마나 다행인가. 아니면 오늘 다시 곡부에서 쉬고 내일 산동까지 가는 기차를 타고 가서 배로 요동의 대련으로 가야 한다.
밤 7시 반이나 되어 저녁도 먹은 둥 만 둥 북경 남역 부근에 있는 수파(速8) 리이에(立業) 호텔에 들었다. 아마도 수퍼를 중국어 표기로 한 듯. 계산대에서 진 선생 내외의 신분증과 돈을 주니 바로 접수를 한다. 그러나 외국인은 안 된다는 것이다. 진 선생이 뭐라고 설명을 한다. 그래도 안 된다. 산 넘어 산이다. 이런 낭패가... 방문교수의 공자증인 식당 출입 카드를 다시 더 내밀었다. 책임자인 듯한 여자 복무원이 왔다. 직원들이 물어 보았다. 그럼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조용히 쉬고 가라는 것이다. 하여 돈을 주고 수속을 마쳤다. 문제는 내일의 날씨였다. 만일 홍수가 더 져서 천진이 막히면 당분간 갈 수가 없다는 거다. 우여곡절 보낸 이야기로 잠을 청한 다음 날 시간을 맞춰 역사로 들어갔다. 고온다습한 날씨, 역사는 넘쳐나는 사람의 물결, 말 그대로 인산인해. 영화두장(永和豆漿)에서 간이식으로 새우를 넣은 국수를 주문, 다른 이들과 함께 점심을 했다. 먹고 나니 더워서 부채를 부쳤다. 옆에 앉았던 유럽 사람인 듯 중국인 부인과 함께 무슨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 부채를 자꾸만 본다. 얼핏 부채를 보여 주었다. 부채 앞면에 공자와 맹자, 그리고 자사와 증삼을 그린 그림 부채를... . 혹시 산동성에 가본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 그럼 공자를 아느냐고 물었다. 이래도 저래도 잘 모르겠다고. 콩푸(confucius)라 하였더니 안다고 했다. 나는 한국 사람인데 엊그제 공자의 고향에 갔다가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계속해서 부채 그림을 들여다보곤 한다. 내가 선물로 당신에게 주고 싶다고 했더니, 팔라는 것이다.
“부채 값이 얼마입니까?”
“그건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주는 나의 선물입니다.”
가방에서 무슨 돈인가를 꺼내더니 나한테 뭔가를 건네주었다. 자기는 스페인 사람이라면서,
“이건 돈이 아니라 나의 마음이고, 선물입니다.”
이를 어찌 하랴. 반대만 할 수도 없고 하여 받았는데 받고 보니 5유로였다. 중국 돈으로 40위안 한국 돈으로 7-8천원 정도였다. 그의 앞에 앉은 부인은 웃고만 있었다. 매우 고마웠다. 나의 이야기에 보충설명을 해준 진선생의 딸 설란 선생에게 5유로를 건네주었다. 유로화를 처음으로 본다며 기념이라고... . 나의 모자란 영어를 보충해준 값이라니 많이 웃는다. 그는 상해외대의 전임 교원으로 있다가 박사과정에 들어가면서 직장을 내놓고 9월 신학기부터 연구생이 되었다고 한다. 서로의 정을 주고받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실상 그 부채는 공자묘에 갔던 첫날 진 선생 부인 그러니까 설란의 어머니가 나한테 선물로 5위안에 사준 것이었다. 웃으면서 장사를 잘 했다고... . 우리는 그녀와 작별 인사를 하고 열차를 탔다. 행복한 연구와 결혼 생활을 빌며 꼭 좋은 결과 있기를 빈다고... .
산해관 쯤 오니까 해는 지고 창경에 부딪히는 빗방울이 흘러내린다. 여정의 고단함을 씻기라도 하는 듯. 조는 듯 잠을 이루며 열차는 얼마 만에 심양을 지나 철령(鐵嶺)을 지나고 있었다. 철령이라, 요사(遼史)를 보면, 철령을 철주(鐵州)라 하였으며 본디는 안시(安市)현이라 하였다. 그럼 여기가 안시성이었단 말인가. 고구려 보장왕 3년(645) 당 태종은 이세적 대장군을 앞세워 요하를 건너 안시성(安市城, 현 해성의 동남쪽 영성자 산성 혹은 철령)으로 쳐들어 왔다. 끝내 이기지 못하고 많은 군사를 잃고 눈물의 요하를 건너갔다. 압강행부지(鴨江行部志)에는 철령의 영현에 탕지현(湯池縣)이 있는데 본디는 철주라 하였다. 철령이 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발해 시기에 철주라 했다는 것이다. 나그네는 오늘날의 철령이라고.
철령은 장령자로 이어진다. 만주어로 합다링(哈達嶺)이라 한다. 하다(哈達)는 길다(長)는 말이다. 고구려 사략(高句麗史略) 산상왕 조에서 장령(長嶺)은 곧 철령(鐵嶺)으로 나오기에 그렇다. 그래 어쩌다 요 모양 요 꼴이 되었는가를 생각하면 편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남의 나라 역사를 비틀고 자르고 날조를 하였는데도 저네들의 제자니 무슨 선비니 하면서 자신들의 뿌리가 잘려 나간 것도 모르고 식민사학에 심취되었다니.. . 지난 일은 뒤로 하고 이제 앞으로 빛나던 초원의 영광을 되찾아 가야 한다. 안시성은 보이지 않고 어둠 속 창경에 어리는 한족의 얼굴만 보이고 후두기는 빗방울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이제 곧 사평(四平)이다. 사평 또한 장령산맥으로 이어지는 평원에 자리하였다. 하북-만주 평야를 지나면서 이나마 살아있음을 조상께 고마워하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다보니 차는 벌써 장춘 역에 다다랐다. 밤은 열시 반, 진 선생의 졸업생이 차를 갖고 나와 일행을 마중하여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 그런데 이게 웬일, 자동차 발동이 안 걸린다. 한식경이나 되었을까 졸업생의 아버지가 나오고 일행은 택시(出租)로 빗속에 잠든 성시를 지나 정월담 숙소로 돌아왔다. 빛나던 옛날이여 앞길은 멀어, 빗소리 들으며... .
4. 고맙다 에 대하여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고 우리가 물이라면 옹달샘이 있습니다. 부모 없는 자식 없이 없고 조상이 없는 후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민족의 뿌리는 단군왕검이시고 우리들의 말미암음이요, 거룩한 숲입니다. 그 숲속에서 단을 모으고 조상 대대로 하늘과 땅과 조상에 경건한 제사를 모셨고 나라와 겨레의 안녕과 번영을 빌어 왔습니다.
단군이란 이러한 제사를 모시던 제사장이요 황제를 뜻합니다. 왕검이란 제사를 올리던 하늘의 환인과 환웅이며 땅에서는 고마 곧 웅녀가 됩니다. 앞의 환웅은 단군의 아버지와 조상신이며 뒤의 고마는 어머니요, 조상신이 됩니다. 이러한 우리겨레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문화전통은 아직도 우리 역사 문화 속에 남아 있습니다.
“고맙다”가 바로 그 화두입니다. 이 말에 단군왕검에 대한 경건한 정신이 담겨 있지요. 이 화두는 고마(熊)에 -ㅂ다(如)가 붙어 이루어집니다. 이 말은‘당신의 은혜가 고마와 같다>당신의 은혜가 어머니(조상신)의 은혜와 같다>당신의 은혜가 단군왕검의 은혜와 같다>당신의 은혜가 하느님의 은혜와 같다’는 뜻입니다. 경천과 애족, 조상숭배의 홍익 정신이 갈무리되어 있습니다.
곰(고마)은 경건하게 삼가서 흠모해야할 대상이었습니다(고마 敬 고마 虔 고마 欽<신증유합>). 고마(熊津, 용비어천가)는 뒤에 공주로 바뀌었습니다. 지금도 고마(곰) 나루가 있고 곰신을 모시는 웅신단(熊神壇)이 있습니다. 곰골이 공골로, 다시 공주(公州)로 굳어져 쓰인 것입니다. 금강도 본디 웅천하(熊川河)였습니다. 오늘날의 진해도 옛날에는 웅신현(熊神縣)이었다. 한마디로 산악지역에 살던 곰과 함께 살아왔던 겨레들이 우리의 조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웅(熊)-계의 지명이 30여 개나 된다.
다시 단군에 왕검(王儉)이란 말이 붙어 단군왕검이 되었습니다. 왕검을 이두로 읽으면 님검(님금)이 됩니다. 님-니마/곰(검)-고마이니 니마-하늘-환웅-아버지이요, 고마-웅녀-땅-어머니라는 문화기호론적인 풀이가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단군왕검이란 환웅과 웅녀에게 제사를 모시는 제사장이란 말이 됩니다. 뒤에 고유명사로 통용이 되었고 정교분리가 되면서 단군과 왕검-임금이 따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일부 함경도 방언에서는 무당을 스성, 스숭이라 하며 전라도 방언에서는 단골, 단골레미라고도 하고, 몽골에서도 뎅골, 뎅그리라 합니다. 여기 왕검의 검은 뒤에 신(神萬物引出者검也<신자전>)이었다. 신이 고유어로 검임을 아는 이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삼국유사》고구려 부분에서 백두산을 일명 웅신산(熊神山)이라고 합니다. 웅신산은 고유한 말로 곰뫼가 된다. 태백의 백(伯)은 맥(maek)으로도 읽습니다. 예맥의 맥(貊)과 같은 뜻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백제는 맥제라고 해야 옳습니다. 비류와 온조도 고구려 동명왕의 후손으로서 마한을 정복하고 맥제를 세운 것입니다. 고마(곰)의 소리가 약해져 떨어지면 고마(곰)-호마(홈)-오마(옴)이 됩니다. 이르자면 구물구물-후물후물-우물우물이나 곰패다-홈패다-옴패다도 같은 얼안에 드는 낱말들입니다. 언어질서로 보아도 기역이 약해져서 떨어지면 히읗이, 다시 소리 값이 없는 이응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하면 오늘의 어머니(엄마, 옴마)는 고마(곰)에서 비롯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군에 대한 이러한 역사를 기술함에 커다란 흠결이 있습니다. <삼국사기>만 보면 단군성조에 대한 사연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고작해야 신라가 기원전 57년에 세웠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야사니 무슨 일사니 더러는 대안사서니 하지만, 오로지 <삼국유사>에만 단군성조에 대한 사적이 실려 있습니다. 따로 국밥인 셈입니다. 정통한 정사에는 없는 게 현실이었습니다. 엄청난 역사 기술의 잃어버린 고리가 됩니다. 너무나 궁색했지요. 최근 저는 <삼국유사의 상상력>이란 책에서 두 사료를 이을 고리를 찾아냈습니다.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사적이 있는 부분을 기이(紀異)라고 합니다. 여기 기이의 기(紀)를 <삼국사기> 본기(本紀)의 기(紀)로 보아 그 실마리를 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삼국사기>의 본기와 다른 <삼국유사>의 기이를 통합한 것입니다. 또한 단군 치세 1,500년 동안을 <단군세기>에 나오는 47분 열성조를 그 자리에 넣음으로써 우리 역사 기술의 잊혀진 고리를 이으려 했습니다. 유사와 사기는 둘이 아닌 한 몸입니다. <삼국유사>의 꿈인 홍익인간의 잊고 있었던 역사의 물꼬를 터 보았습니다. 단군의 신시에 소담스런 무궁화가 피고 튼실한 열매 맺는 올 날을 기원합니다. “홍익의 꽃이 피면 봉황이 울고, 온 누리에 열매를” 건강하시고 행복하소서.
첫댓글 길고긴
역사의 강
눈물로 불어
땀으로 흘러
후손의 가슴에...
**역사 탐구와 어원 탬색의 사명감으로 후손에게 널은 길을 열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요즘 씨앗 심고 밭이랑 다듬는 일로 땀 흘리고 있습니다. 계곡을 정원처럼 꾸미고 싶어 그곳에도 꽃과 나무를 심고 있습니다. 풀과의 전쟁도 시작되었고요.^^
바람에 쟈스민 향 봄의 노래로,
물소리 그윽한...
시루봉에 올라봤으면 하오만.... 성원 고맙고. 언제 차 한 잔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