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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무서운 여인 무조 무 태후는, 안으로 독을 잔뜩 품고서도 겉으로는 매우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인물일수록 자신의 감정과 본의를 잘 숨기고 위선과 외식外飾을 그럴듯하게 효과적으로 돋우는 법이다.
하지만 미시아가 만일 태평공주 세력에 의해 짓밟히면, 그것이 그녀의 조부 임장청이나 고조영, 고승, 이진영, 이해고 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무 태후 자신 곁에 진을 친 고조영, 이해고 등에 의해, 아니 어쩌면 미시아에 의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무 태후는, 그걸 모르는 어리석은 군주가 아니었다. 태평공주가 미시아에게 불순한 짓을 하려는 의도를 간파하고 그녀가 딸의 어리석은 짓을 말린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태평공주는 무 태후의 뜻을 거부하고 모험을 감행하고 말았다. 그 모험은 일단 실패했지만 말이다.
한편으로 호랑이 등에 올라 탄 듯한 느낌이었으나, 대담한 여장부 무 태후는,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여러 폭탄들을 품에 안고 일보一步 일보一步 우일보又一步,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런 모든 정황을 어느 정도 사려 깊게 파악하고 있던 미시아는 무 태후를 안심시키기 위해 고육지계를 써야 할 필요를 느꼈다.
미시아는 얼굴에 처량하고도 미묘한 웃음을 흘리다가 여미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그 괴한에게 당한 것처럼 꾸밀 것이다.”
여미아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조영공자님의 상심이 무척 클 텐데요? 그분이 상심한 나머지 엉뚱한 일이라도 벌이면 어떡해요?”
“내가 망가졌다고 해서 크게 상심할 분이 아니다. 너도 있고, 또 이루하 아가씨도 계시잖아?”
“하지만, 그 흑의복면인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될 터인데, 고육지계가 통할까요? 오히려 격분한 조영공자나 이해고, 우리 할아버지와 고승 대인 등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서 더 불안해할 텐데요?”
“네 말도 그럴 듯하지만,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거라. 내가 만일 그 놈에게 당한 척하고 풀이 죽어 있으면, 무 태후는 나에게 모든 것을 비밀로 하라고 엄포를 놓는 한편, 만일을 염려해 나와 관련된 사람들을 오히려 더 잘 대우하려 애쓰지 않겠느냐?”
여미아와 이루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중에 내가 고육지계를 쓴 것이 발각되면 어쩔 셈이냐고 너는 묻고 싶겠지?”
미시아가 여미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자의 신분이 특수하기 때문에, 절대로 대놓고 그에게 묻지 못할 것이다. 성공과 실패 여부를. 그들은 단지 내 태도만을 보고 판단할 거다. 내 말 이해하겠느냐?”
“네,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그걸로 얻는 게 무어죠?”
“내가 입을 다물겠다고 굳게 약속하고 더욱 충성스럽게 일하면, 무 태후는 안심할 거다. 적어도 나에 대해서만큼은 안심하게 된다 이 말이다.”
“하지만, 그분은 계산이 치밀하고 의심이 무척 많으므로 언니가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하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그 자에게 더 가까이 접근할 거다. 그러면 그들은 일이 잘 되어간다며 마음을 놓을 수도 있지.”
“하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아요. 거짓은 언젠가 반드시 탄로 나게 되어 있어요.”
여미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대답했다.
“괜찮다. 내게 맡겨라.”
날이 밝은 후, 자기 방으로 돌아온 미시아는 무 태후에게 몸이 몹시 아프다고 호소한 후 며칠 동안 두문불출했다.
이삼일이 지나자 무 태후가 그녀를 조용히 찾아와 물었다.
“일전에 적취지 선상에서 연회가 있던 날 무슨 일이 있었느냐?”
미시아가 울먹거리며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럼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 의녀醫女에게 몸을 보이라고 해도 보이지 않고.”
“괜찮아요. 며칠 지나면 나을 거예요.”
미시아가 계속해서 훌쩍거렸다.
“너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하구나. 나에게 숨길 게 뭐니? 난 너의 엄마와 같지 않느냐? 내게 자초지종을 말해다오.”
무 태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미시아가 눈물을 닦으며 마침내 고백했다.
“서원의 춘락원에서 자고 일어나니 아랫배가 몹시도 아파서 걷기도 힘들었어요.”
“갑자기 복통이 일어났단 말이냐?”
“아니, 그게 아니고 아랫배가···.”
미시아의 진의를 알아들은 무태후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니, 어떤 놈이냐?!”
미시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고얀 놈이 있나? 아니 그래, 그런 일을 당했어도 넌 그 놈이 누군지 몰랐단 말이냐?”
“그 자가 갑자기 급소를 치는 바람에 정신을 잃고 말았어요.”
무 태후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감히 황궁에서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내가 샅샅이 조사해서 엄벌에 처하겠다.”
무 태후는 우선 태평공주를 불러서 물었지만 모른다는 답변뿐이었다.
“네가 시녀들을 시켜 술 속에 미혼약을 탄 것도 내가 알고 있다. 이실직고해라.”
“그건 사실이에요. 그러니 생각해보세요. 모두 다 미혼약을 먹고 혼절했는데, 어느 놈이 정신을 차리고 밤중에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겠어요? 그 약의 효과는 아주 독해서 적어도 여섯 시진 이상 지나지 않으면 스스로 깨어나지 못한단 말이에요.”
“하지만 네가 술에 미혼약을 탄 이유가 있을 게 아니냐?”
“처음에는 뭐··· 하지만 실수로 나까지 죄다 미혼약을 마시는 바람에··· 실패···.”
그녀가 말을 더듬거렸다.
“그럼 야경꾼들의 소행이란 말이냐?”
“그럴 지도 모르죠.”
“이놈들이 간덩이가 태산처럼 부어올랐든지, 아니면 목이 갑자기 세 개로 늘어났든지 했는가보다. 그날 밤 순찰을 돈 놈들은 모조리 잡아들여야겠다.”
결국 엉뚱하게도 애꿎은 순찰꾼들만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무 태후는 내준신을 불러 가만히 일렀다.
“내 비녀 가운데 하나가, 잠을 자다가 야경을 도는 놈들에게 당했네. 은밀히 처리해주게.”
지옥의 사자인 내준신에게 그들을 붙이자, 그들은 모두가 사시나무 떨 듯 떨며 한 결 같이 내가 했노라고 자백했다. 주동자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도 모두 다 자신이라고 대답했다.
하는 수 없이 내준신은 그 중 힘깨나 쓸 수 있는 자를 주동자로 점찍고 무태후에게 보고했다.
“최소한 두 놈 이상이 윤간輪姦을 한 모양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들을 모조리 처단할까요?”
“이 일을 비밀에 부치고 일단 감옥에 가두어 두게. 내가 그 일을 당한 비자의 의견도 물어보겠네.”
무 태후는 아무래도 모두가 자신의 죄로 자백했다는 게 미심쩍어 일단 그들의 목숨을 살려두었다.
미시아만이 곁에 있을 때 무 태후가 물었다.
“네가 그 날 밤에 당했다면, 어째서 다른 여인들은 온전할 수 있단 말이냐?”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그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사정이 있어서 저 혼자만 당하게 되었는지.”
“그럴 테지. 그놈들이 감히 여러 여자를 건드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운 나쁘게도 네가 표적이 되었고.”
무 태후가 수긍하며 미시아에게 물었다.
“그들이 모두 다 자기가 한 짓이라고 자백했다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미시아는 그런 대화가 몹시 수치스럽게 느껴졌으나 참고 대답했다.
“야경꾼들은 이인일조로 움직이지 않나요?”
“그렇다.”
“그렇다면 그 중 두 사람 다거나 아니면 둘 중에 선임자일 거예요.”
이어서 미시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들은 죽게 되나요?”
“상대가 여염집 여자라면 몇 년 감옥살이로 끝날 수 있지만, 너는 특별한 내 사람이고 그들의 직위가 특수직이다. 그들을 사형시켜야 하겠다.”
“하지만 그들이 나를 해쳤어도 죽이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 같아요. 그들을 몇 년 동안 감옥살이만 시킨 후 석방할 수 없나요?”
“너, 그 말이 진심이냐?”
“네, 마마.”
무 태후는 한참 숙고하더니 대답했다.
“네 의견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마.”
결국 최종적으로 자정과 묘시 사이에 서원으로 순찰을 돈 이들 여섯 명 가운데, 두 명이 범죄자로 낙인찍혔다. 둘은 누명을 쓰고 옥으로 들어갔다.
며칠 후 미시아는 무 태후 앞에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 제가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요, 어차피 전 이제 혼인도 하지 못할 몸이에요.”
“아니, 남자에게 한 번 당했다고 왜 혼인을 못한단 말이냐?”
“우리 고려인들의 관습과 사고방식은 그래요.”
미시아는 그 때, 말갈족으로 알려져 있었다.
말갈인은 진조선 곧 숙신의 후예라는 사실을 앞에서 밝힌 바 있다. 어찌 보면 단군조선의 정통 혈통은 바로 그들이었다. 단군조선의 삼조선 중, 태왕(즉 중국의 황제와 같은 존재)이 친히 다스리던 나라가 진조선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이 우리민족 중에서 소외계층으로 밀려난 것은, 단군왕검의 넷째아들 부여의 자손에게 태왕의 정권을 빼앗겼던 단군조선 후기부터다. 단군조선 전기의 왕조는 단군왕검의 장남 부루 혈통이었으나, 부여혈통이 정권을 찬탈한 서기전 13세기 이후부터를, 우리는 후기 단군조선이라 칭한다.
그 후 고구려와 대진발해국에서도, 북방의 호족虎族과 혼혈되었던 숙신 즉 진조선의 후손들은 늘 전쟁에서 선두에 서고 피지배의 설움을 받았다.
단군왕검의 장남 부루의 혈통에서 읍루가 태어나고, 이 읍루족은 북방 호족을 받아들여 그들과 혼혈되었으며, 이들은 훗날 말갈족, 여진족, 만주족으로 불리게 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들은 고구려시대와 대진발해국 시대, 그리고 김나라(금나라) 때 우리 부여민족과도 많이 혼혈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DNA를 분석해볼 때, 우리 한민족, 부여민족, 대한민국 백성과 혈통이 가장 가까운 이들은 만주족으로 나타난다. 특히 그들은 함경도 사람들의 혈통과 극히 가깝다.
원래 단군왕검은 조선을 건국할 때, 단군신화에도 암시되어 있듯이, 정책적으로 우리 환족과 웅족熊族을 하나로 아울러서 두 민족이 완전히 서로 동화되게 만들었다.
환족, 웅족과 함께 본래부터 만주지방에 터를 잡고 살던 호족虎族은 그 이전 신시배달국의 환웅임금 시대부터, 인류대홍수 이전 혹은 직후에 근동지방으로부터 이주해온 우리민족의 원류인 환족과, 그리고 웅족과 융화되지 못한 채 송화강 이북으로 밀려나 있었는데, 단군조선 시대, 특히 단군조선 후기에 이들을, 진조선의 후예들이 적극 수용해 그들과 통혼함으로써, 숙신 - 읍루 - 말갈 - 여진 - 만주족이라는 혈통을 생성하게 된 것이다.
“고려인들은 여자의 정조를 무척 중시하나 보구나.”
“그래요. 제가 이런 수치를 안고 어떻게 살 수 있겠어요?”
미시아는 잠시 묵묵히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우리 고려에서는 시집가지 않은 여자가 이런 일을 당할 경우, 그녀를 범한 남자가 미혼이고 또 당한 여자가 원할 때, 둘이 혼인할 수 있어요.”
“그래? 그것 참 재밌구나. 그렇다면 너도 그 중 한 사람과 혼인할 수 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가 미혼이라면.”
“둘 중 누구냐?”
“물론 아마도 나를 먼저 건드렸을 선임자입니다.”
“네가 그것을 원한다는 뜻이냐?”
“폐하께서만 허락하신다면.”
“하지만 나를 평생 모시다가 내가 죽은 후 비구니가 되고 싶다는 염원은 어디로 갔느냐?”
“전에는 확실히 그랬어요. 하지만 이제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요. 수치스런 목숨을 연명하느니, 차라리 그 자와 혼인하겠어요.”
무 태후가 아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그게 사실이렷다?”
“네. 하지만, 혼인 후에도 지금처럼 폐하를 모실 거예요. 그리고 두 번 다시 그 자에게 내 몸을 주지는 않을 거예요.”
무 태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몸을 주지 않다니. 그럼 혼인의 의미가 없잖아?”
“네, 그렇게 그를 평생 괴롭힐 거예요. 만에 하나,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댔다가는 내게 혼쭐 날 거예요. 어차피 저는 결혼하지 않으리라 작심했거든요.”
“너, 참 무서운 여자로구나. 하지만, 그 자가 첩을 얻어 산다면, 너의 보복이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느냐?”
“흥! 만일 첩을 얻는다면, 그녀는 내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거예요.”
“호호호호호! 하지만 네가 말했으니, 나에게는 숨기지 못하겠구나.”
무 태후는 무엇이 우스운지 연달아 폭소를 터뜨렸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마.”
하지만 그로부터 며칠 지난 후 미시아가 무 태후에게 말했다.
“폐하, 지난번에는 너무 분이 나서 제가 성급한 얘기를 한 것 같아요. 폐하, 그 자와 혼인하겠다는 얘기, 취소할 수 없나요?”
“왜, 그새 생각이 바뀌었느냐?”
“나는 당했지만, 화가 좀 풀리고 보니, 그 자들이 너무 불쌍해요. 단지 폐하께서 제 일을 비밀로 부쳐주신다면, 저도 모든 것을 잊고 그들을 용서하고 싶어요.”
“그래? 그래도 형벌은 면할 수 없다.”
미시아는 여미아의 말을 듣지 않고 괜한 짓을 했다가 생사람 둘만 잡았구나 생각하며 속으로 후회했다.
“그들이 너무 불쌍해요. 용서해주실 순 없나요?”
“안 된다. 나라에는 법이 있다. 임의로 용서할 수가 없어.”
“제게 보상금을 주면 그들이 감형을 받거나 석방될 수는 없나요?”
“돈을 받고 싶으냐?”
“네.”
“얼마나?”
“금 다섯 냥이면 어떨까요?”
“너무 적지 않느냐?”
“괜찮아요. 그 정도면 제게는 충분해요.”
“내, 고려해 보마.”
무 태후는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속전贖錢으로 순금 닷 냥씩 내게 하고 그들을 은밀히 석방했다.
금 열 냥을 받은 미시아는, 그 두 사람에게 미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관직을 삭탈당한 그들에게 무엇으로 보상해야 좋을지 몰랐다. 우선 은밀한 경로를 통해 그 둘에게 금 열 냥을 되돌려 주었다.
이번 사건에서 큰 교훈을 얻은 미시아는 더욱 더 자중하며, 특히 동생 여미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어느 날 비번일 때, 미시아는 여미아를 찾아가 둘이 내밀한 대화를 나눈다. 둘만 있는 자리에서 여미아가 속삭였다.
“언니, 난 언니가 태후 마마를 따라온 중요한 목적들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어요.”
“뭐라고 추정하는데?”
“몇몇 사람을 회유해 아군으로 끌어들이려는 게 아니에요?”
“누구를?”
“말하지 않아도 뻔하죠. 이다조 장군, 연헌성 장군, 흑치상지 장군···.”
“쉿! 목소리를 낮춰라.”
“하지만 언니, 그건 비겁한 행위예요.”
“왜?”
“그들은 이미 당나라에 귀순해서 주군主君을 바꾸고 아주 당나라 사람이 되었는데, 그들을 다시 포섭한다면, 그들이 또 다시 자신의 나라와 주군을 배반하게 되는, 딱한 입장에 처하는 거 아닐까요?”
“저번 고육지계에 관한 일은 네 생각이 옳았을지 모르나, 이 일만큼은 내게 맡겨다오. 그리고 저번 일도 그렇다. 적어도 태후마마나 태평공주가 태자전하(고조영)를 두고는, 나를 경계하지 않겠지. 나와 태자전하 사이가 이제 아주 틀어졌다고 생각할 터이니까.”
미시아는 남이 없을 때 고조영을 대개 태자전하라 불렀다.
“언니 의사도 모르는 바는 아니에요. 하지만 이번 일로, 언니가 갈팡질팡하는 것을 보고, 폐하와 태평공주는 언니를 더욱 무시할 수 있어요. 무시당하면 몸값이 떨어지고, 그렇게 되면 언니가 뜻한 바를 이루기가 더 어려워져요.”
“아무래도 괜찮다. 난 그들을 반드시 내 편으로 만들 거다. 만일 우리 편이 되어주지 않는다면···.”
그 때 헛기침 소리가 나며 이루하가 문을 열고 들어와 미시아는 불가불 말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두 자매가 무슨 재미있는 밀담을 그렇게 두런두런 나누고 있나?”
이루하가 웃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미시아가 얼른 대답하며, 속으로 헤아렸다.
‘내가 점찍은 이상 너와 너의 부친 이진영, 너의 외삼촌인 귀성주자사 손만영도 우리에게 협력하지 않고 당나라 편에 붙으면 제거 대상이다.’
그 무렵 무 태후의 부름을 받고 회의가 입궁한다. 그가 용무를 마치고 나가는 길에 태평공주가 그와 단둘이 만나 웃는 낯으로 은근히 물어보았다.
“일전에 적취지 연회가 파한 후, 대사님은 그녀들을 잘 지켜드렸나요?”
회의도 웃으며 대답했다.
“아미타불, 부처님의 공덕으로 다행히 잘 지켜드렸소.”
“근데 좀 이상하네요.”
태평공주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뭐가요?”
“미시아라는 계집이 야경꾼들에게 당했다지 뭐예요.”
“그럴 리가. 내가 공주마마의 명을 지키려 잠을 자지 않고 그들을 돌보았소.”
“그럼 당했다는 게 거짓이란 말인가요?”
“그럴 공산이 크오.”
“그들이 안전했다는 말이군요.”
“야경꾼들이 도대체 목이 몇 개나 달렸관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이오?”
“그것도 일리가 있는 말이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태평공주가 곧장 무 태후를 찾아가 종알거렸다.
“엄마, 이번 일은 뭔가 석연치 않아요.”
“무슨 일이?”
“그 야경꾼들이 도대체 간덩이 얼마나 부었길래 서원에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어요?” “그러면 귀신이 올라와 그 짓을 자행했단 말이냐?”
“회의대사님 말씀은, 자신이 뜬 눈으로 그 밤을 지새며 서원의 춘락원 주위를 거닐었는데, 야경꾼들은 그 곳에 오지도 않았다는군요.”
태평공주가 말을 좀 보탰다.
“너 그 말이 사실이렷다? 그 때 모든 사람이 네 술수에 걸려 잠에 곯아 떨어졌는데, 어떻게 회의대사는 멀쩡했단 말이냐?”
무 태후가 딸을 노려보았다.
“그 분은 득도한 고승이라 약이 잘 듣지 않았던 것 같아요.”
“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실은···.”
태평공주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 알았다. 그건 그렇다 치자.”
“근데, 어머니도 생각해보세요. 전에 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있는지를”
“궁 안에서도 불륜 사통 사건이 가끔 일어나긴 했지. 자기 외조모를 겁탈하고 심지어 태자비로 간택된 양사검의 딸까지 강간한, 저 추악한 하란민지 같은 놈도 있지 않았느냐?”
무 태후가 말한 사건은 십육 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그 일로, 꽃미남 하란민지는 자신의 이모姨母인 무 태후에 의해, 유배 가는 길에 죽음을 당했고, 그와 친하게 사귄 조정의 관리들 다수가 유배형을 당했다.
“그 자는 자기 지위와 폐하의 총애를 믿고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나, 아무래도 저는 납득이 안 가요.”
“나도 석연치 않지만, 설마 미시아가 거짓으로 그런 치욕을 스스로에게 입히겠느냐? 설사 그런 일이 있었더라도 오히려 감추려 하지 않겠느냐?”
“그건 그래요. 고려 여인들은 정조를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긴다던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태평공주 이영월이 뭔가를 깊이 깨달은 듯 큰 소리로 말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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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4. 9. 13. 초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