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션1> 로뎀나무>
용기
MK 목장 박명숙 권사
유난히 길었던 여름이 지나고 뜨거운 햇볕에 타들어 가던 나뭇잎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가지 끝이 조금씩 물들 준비로 분주하다. 오늘은 부슬부슬 가을비가 내려서 우산을 들고 노란 물이 들까 말까 고민하는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걸어간다. 비가 와도 좋고 맑아도 좋은 나의 마음 날씨는 마음속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찬양을 들으며 걷고 있다.
다이소에 사야 할 것이 있어서 가는 길에 버스정류장 부스 안에 종이상자가 쌓여 있다. '뭘까?'하고 가까이 가서 보니 초라한 행색의 야윈 아저씨가 주워 온 종이상자를 가득 실은 수레를 들여놓고 비를 피해 버스정류장 부스 안에 앉아 있었다. 근처에는 떨어진 상자도 많아서 주위가 어수선했다. 떨어진 상자를 밟을까 봐 조심하면서 가던 길을 걸어 지나가려던 순간, 그 아저씨가 뭐라고 소리치면서 나에게 빈 페트병을 던졌다. 페트병이 내 몸에 살짝 맞고 젖은 보도블록 위로 떨어졌다. 나는 당황했다.
그 사람은 예전부터 동네에서 아주 가끔 마주치던 분이었고, 지적장애가 있어서 안쓰럽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폭력성을 가지고 모르는 나를 노려보며 고함을 지르는데 분명 좋은 말은 아닐 것 같고 버스정류장 칸막이 유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억울한 마음과 무서운 마음에 멀찌감치 떨어져서 항의하듯 잠시 노려보다가 가던 길을 재촉했다.
어느새 마음속 라디오가 꺼지고 생각의 촛불이 켜졌다.
'왜 저 불쌍한 아저씨가 나에게 페트병을 던졌을까? 왜 화가 났을까?'
그러다 보니 문득 촛불이 꼬마전구로 탁! 켜지며 머릿속이 환해졌다.
'오호라! 배가 고프신 거로구나! 갑작스러운 비가 내리자, 상자는 젖었고, 집에도 못 가는데 배까지 고프니 이유 없이 화가 날 만도 하겠네!' 확신이 들자 나는 다이소 옆 김밥집에 들러 김밥을 사기로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한테 화를 낸 사람에게 김밥을 사주다가 해코지를 당할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나는 김밥 사는 것을 당연하게 포기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꾸만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저녁을 먹고 나왔지만 어디선가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못 들은 척 집 앞까지 갔다가 나는 발걸음을 홱 돌렸다. 그리고 빵집으로 가서 도넛과 딸기우유를 사서 정류장 부스로 향했다. 그런데 수레만 있고 그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길래 반대 방향 인도로 걸어갔더니 그 아저씨가 어느 식당 앞에서 물끄러미 식당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역시 배가 고픈 것이 맞구나.' 나는 용기를 내고 뚜벅뚜벅 걸어가서 쭈뼛거리지 않고 빵과 우유를 드리며 "이거 드세요."라고 했더니 그분은 함박 웃으며 "네!"라고 아주아주 착하게 대답했다. 마치 4살 아이처럼!
나는 마음속에 기쁨이 몰려왔고, 나에게 '잘했어.'라고 속삭였다.
'용기는 이럴 때 내는 거야.'
가을바람이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며 말했고, 단풍이 들까 말까 망설였던 은행잎도 결심한 듯 노랗게 웃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