コレア百景21
オンドル クヅル
060802
瓦の廃材と土で造形された杜の中の煙突。見た瞬間BOSEのスピーカーを想起した。本瓦を重ねたふたつ
の円筒が、目のようであり、耳のようでもあるが、冬になれば煙草の煙を吹く口になる。カメラは水平を保っ
ているのだが、地べたに逆らわず置かれた造形はかすかに傾く。瓦の大きさも幅もまちまちで背後にゆらぐ松
の木とよく似合う。コレアから茶碗を持ち込んだ日本人が、何故この煙突に目を向けなかったのか不思議でな
らない。大地の色を取り込んでゆらぐ愛嬌者は、茶室の脇に似合いそうだ。今夏の旅で見せてもらったサイコ
ーの(張さんの口癖)作品である。暮らしの中に遊びがある。
コレア式に座って煙草を吹く夏のアジュマ
左は冬の仕掛け
煙突の煙はクヅルで生まれる。夏場はゴミ捨て場だが、冬になれば、赤い火がゆらぎ、熱をもった煙が、亜
の字に配された床下の煙管を回って上部の小部屋を温める。さいごに上記の愛嬌者がうまそうに煙草を吹くと
いう仕掛けだ。
日本にはオンドルがない。寒い冬は囲炉裏と重ね着でやっつけろ。それでも寒ければ鍋でもつついて体の中
から温めろというのが日本の暖房で、お尻から熱を取るアイデアは電熱カーペットが生まれてからのことであ
る。中世の随筆=徒然草によると「家は夏をむねとすべし。(家は夏向きに造れ)冬はいかなるところにも住
まる。(冬はどんなところでも住める)」と言う。旧千円札の夏目漱石は「皮を脱いで、肉を脱いで、骨だけ
で休みたい」と書いた。蒸し暑い日本の夏を経験された地域大学の方々には納得されることではないだろう
か。大陸の乾いた風が吹く半島と、海の湿気がせめてくる日本との風土のちがいが暖房思想に差異を生んだの
だろう。
060801
全羅南道の新築家屋
中央は闖入者を温かく迎えてくださったご主人
背後にピカピカの煙突が見える
基礎工事が終わった翌日の風景。もう一日はやければ煙が亜の字に回わる床下の構造が見られたはずだ。隣
接する立派な旧宅を含めて、案内してくれるご主人のやわらかい眼差しが印象的であった。日本でいえば庄屋
にあたる、おそらく旧両班の屋敷には、広々とした庭がある。夏場は雪見障子を開けて風を抜き、冬はお尻か
ら暖を取る。
オンドルが床から熱をとるだけであれば、当節の建築はホットカーペットでも敷いた方が安上がりのはず
だが、熱だけの合理主義では生きられないのが人間だ。熱は生存のひとつの条件にすぎず、人間は四角い箱の
中で体さえ温まれば満足できるというわけでもない。五感を通じて風景を感じ、意識の中に歴史を確認しなが
ら、人は暮らしの全体として文化を享受する。目で見、耳で感じる空間のしつらいが必要なのである。コレア
の現代人は、日本人の目には極端に見える軒先のソリや石垣のゆらぎを愉しみつつ歴史を呼吸しているのだろ
う。時間に乗って風景が行く。風景の中で人間が生きる。ご主人は目前の空間と歴史の時間を生きている。
庭先のモスク?
まだ使われていない煙突
やがて土と瓦が色合いを変え
変わる形が歴史をつくる
060803
全羅南道のIターン農家
椎茸農家が900万W!で自作した家屋
「大工の心得があるのですか?」と尋ねたら
「いや全くの素人です。韓国では便所大工と呼ばれます」と謙遜した
キムチの瓶の脇に2基のクヅルが並ぶ
冬になれば白い煙がふたつ上がる
昇る煙が空間をつくり、
仕事を終えた主(あるじ)を煙が迎える
そのようにして人々は長く暮らしを立ててきた
都市が失ったコレアの原風景である
仮説(1)
コレアの中年世代はオンドルの記憶をもつ。
若い世代は絵と文字でオンドルを学習している。
農村の暖房には昔ながらのオンドルが合理的である。
都市のアパートには石油由来の熱源が合理的である。
都市住民は熱だけ取り込む現代の暖房に不足を感じている。
民族アイデンティティーの象徴としてオンドルがある。
仮説(2)
都市の高層アパートに歴史を取り込む動きが出る。
都市人口の一部が地方へ出る。
流入人口が地元人口を超えると農村に都市文化が置かれる。
都市文化とムラ文化は反発と融合を繰り返す。
仮説(3)
気象が変わり、農作物の価格が高騰する。
食べものを大切にする気風が生まれ、農業が見直される。
平屋ないし二階建ての農家が並ぶ。
都市的な直線文化と農村的なゆらぎの文化が融合する。
オンドルの煙突に都市的なデザインが持ち込まれる。
코리아 백경(22)
온돌과 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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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802
폐기와와 흙으로 만든 숲속의 굴뚝. 굴뚝을 보는 순간 BOSE스피커를 떠올렸다. 둥근 기와를 마주대어 만든 두 개의 원통은 눈 같기도 하고 귀 같기도 하지만, 겨울이 되면 담배 연기를 내뿜는 입이 된다. 카메라는 수평을 유지하고 있으나 실제의 조형물은 지면을 거슬리지 않고 약간 기울어져 있다. 기와의 크기나 폭도 다양해서 뒤 쪽의 소나무와 잘 어울린다. 코리아에서 밥공기 들여온 일본인이 어찌된 연유로 이 굴뚝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는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대지의 빛깔을 품고 흔들리듯 서있는 정겨운 이 물건은 茶室 옆이 잘 어울릴 것 같다. 올 여름 여행지에서 본 사이코(장 변호사의 표현)의 작품이다. 생활 속에 놀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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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식으로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아줌마
왼쪽은 월동장치
굴뚝의 연기는 온돌을 통해 탄생한다. 여름철에는 쓰레기장이 되지만 겨울이 되면 붉은 불꽃이 일렁이고 열기를 품은 연기가 亞자형으로 배치된 구들을 돌아 상부의 작은 방을 데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의 정겨운 굴뚝이 담배연기를 내뿜는 구조다.
일본에는 온돌이 없다. 추운 겨울은 화로와 두터운 의복으로 견뎌냈다. 그래도 추우면 뜨거운 음식을 먹고 뱃속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일본의 난방이다. 엉덩이를 통해 온기를 얻는 아이디어는 전기장판이 탄생한 후의 일이다. 중세의 수필=즈레즈레구사에 의하면「집은 여름용으로 지어라. 겨울은 어떤 곳에서도 살 수 있다」고 했다. 옛 천 엔짜리의 나츠메쇼세키는「살가죽을 벗어던지고, 근육도 벗어던지고, 뼈만 남은 채 쉬고 싶다」고 썼다. 무더운 일본의 여름을 경험한 지역대학 여러분에게는 충분히 납득이 되는 말이 아닐까? 대륙의 건조한 바람이 불어오는 반도와, 바다로부터 습기가 공격해 오는 일본과의 서로 다른 풍토가 난방사상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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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801
전라남도의 신축 가옥
가운데는 침입자를 따뜻하게 맞아준 집주인
뒤 쪽에 새 굴뚝이 보인다.
기초 공사가 끝난 다음날 풍경. 하루만 일찍 왔더라면 亞자 형태의 구들 구조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인접해 있는 멋진 고택을 포함, 안내를 해 준 주인의 부드러운 눈길이 인상적이었다. 일본의 庄屋에 해당하는, 구 양반가에는 아마 널찍한 마당이 있었을 것이다. 여름철에는 장지문을 열어 바람을 통하게 하고 겨울에는 엉덩이를 통해 온기를 얻었다.
온돌이 방바닥에서 열기를 얻는 기능뿐이라면, 요즘 건축은 차라리 전기장판을 까는 편이 싸게 치일 것이다. 하지만 열뿐인 합리주의로는 살아 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열은 생존을 위한 하나의 조건에 지나지 않을뿐더러, 인간은 사각의 상자 속에서 몸만 따뜻하다고 해서 만족할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오감을 통해 풍경을 느끼고 의식 속에서 역사를 확인하며 인간은 생활의 전체로서 문화를 향수한다. 눈으로 보고 귀로 느끼는 공간 장치가 필요한 것이다. 코리아의 현대인들은, 일본인의 눈에는 극단적으로 보이는 지붕의 곡선이나 돌담의 여유를 즐기면서 역사를 호흡하고 있는 것이리라. 시간을 타고 풍경이 흘러간다. 풍경 속에서 인간이 살아간다. 이 집 주인은 눈앞의 공간과 역사의 시간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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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의 이슬람사원?
아직 사용되지 않은 굴뚝
마침내 흙과 기와의 색이 변하고
형태의 변형이 역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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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803
전라남도의 I턴 농가
표고버섯 재배농가가 900만원으로 손수 지은 가옥
「목수에 소질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아니오. 완전히 초봅니다. 한국에서는 변소목수라고 불립니다.」며 겸손해했다.
김칫독 옆에 두 개의 아궁이가 있다.
겨울이 되면 두 줄기의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피어오른 연기는 공간을 만들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도시가 잃어버린 코리아의 원풍경이다.
가설(1)
코리아의 중년 세대는 온돌에 대한 기억이 있다.
젊은 세대는 그림과 문자를 통해 온돌을 배운다.
농촌의 난방으로는 옛날식 온돌이 합리적이다.
도시의 아파트에는 석유를 바탕으로 하는 열원이 합리적이다.
도시 주민들은 열만 얻는 현대 난방에 불만을 느끼고 있다.
민족 아이덴티티의 상징으로서 온돌이 존재한다.
가설(2)
도시의 고층 아파트에 역사를 수용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도시 인구의 일부가 지방으로 나간다.
유입 인구가 토박이 인구를 넘어서면 농촌에 도시문화가 형성된다.
도시문화와 시골문화의 반발과 융합이 반복된다.
가설(3)
기상이 변하고 농작물의 가격이 급등한다.
먹을거리를 소중히 여기는 기풍이 탄생하고 농업이 재평가 된다.
단층 내지는 2층 농가주택이 들어선다.
도시적인 직선문화와 농촌적인 유라기문화가 융합된다.
온돌의 굴뚝에 도시적인 디자인이 도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