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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단법석(野壇法席)
야단법석(野壇法席)이란 말은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모습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다. 불교대사전에는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그만큼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석가가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할 때 최대 규모의 사람이 모인 것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로 무려 3백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게 된다. 이처럼 생활속에서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쓰이던 말이 일반화되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게 되었다.
아래의 글은 도올 김용옥의 『나는 불교를 이렇게 본다』중에서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소개한 내용이다.
『불교는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쳐야한다. 야단법석을 친다함은 무엇인가?
“야단법석”이란 원래 불교용어로, 우러나라 신라불교 그리고 고려불교의 모습을 매우 잘 나타내주는 말이며, 중국의 당대(唐代) 그러고 오대(五代)의 불교의 대중화과정을 매우 잘 반영하는 언어개념의 지식고고학적 한 기층이다.
야단은 야단(野壇)이며, 사찰내의 성스러운 영역(sacred region)이 아닌 세속도시의 야한 들판 즉 사람들이 부담 없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공간에 설치된 단(壇-forum)을 의미한다. 야단이란 곧 세큐라포럼(secularforum)이다. 법석이란 "법석(法席)"이며, 곧 야단에 설치된 법어(法語)를 설(說)하는 자리(席)이다. 이 야단법석에는 옛날에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어중이떠중이 다모여 야단법석을 떤 것이다.
야단법석에는 요새처럼 양아치큰스넘들이 무시무시한 가사를 입고 굵은 염주알 굴리며 지팡이 들고 그 물쌍식한 법어를 내뱉었던 것이 아니다. 옛날의 야단법석에는 주는 잡예(雜藝)가 등장했다. 씨름 ·재주넘기 ·접시돌리기 남녀 데이트등 온갖 잡예가 들끓었다. 바로 야단법석에는 난장(亂場)이 섰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말에 요란스럽게 뭔가를 해대는 것 즉 부지런하게 일상적 행위를 하는 것을 "야단법석을 친다" 야단법석을 떤다" "야단법석이다"(야단)법석 대다"야단법석거리다" 등등으로 표현하는 일상 언어가 파생되게 된 것이다.
불교는 야단법석을 쳐야 한다. 야단에 법석을 친다는 것은 곧 불교가 밀폐된 공간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야단법석을 떤다는 것은 곧 대중의 목소리를 회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야단법석을 치는 것은 성의 속화며 속의 성화이다. 그것은 곧 세속도시에 법석을 치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곧 사원이 곧 야단법석 화하는 세속화운동이며 사원화운동이다. 첫날의 승려들, 특히 야단법석꾼들(기독교로 말하면 부흥전도사 같은 사람들)은 단순히 심오한 경학(經學)을 강론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림과 노래와 춤과 장끼와 웅변의 귀재들이었다. 그들은 화가였으며 성악가였으며 무용가였으며 무예인이었으며 연설가였다. 이 모든 기능을 한 몸에 지닌 천재들이었던 것이다. 이들로부터 중국문학사(中國文學史)에는 "강창지학(講唱支學)"이 등장하는 것이니 이 야단법석의 언어와 예술이야말로 바로 강창문학의 효시였던 것이다. 우리가 요즈음 경험하는 "판소리"라는 예술장르도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러한 "야단법석"과 무관하지 않다. 이 야단법석장소에서 스님이야기꾼이 비파를 타면서 노래와 이야기를 섞어 이야기 하는 것을 "제궁조(諸宮調)"라고 불렸는데, 바로 후의 원대(元代)의 잡극(雜劇) 즉 경극(京劇-平劇)의 출발이다(나의 『루어투어 시앙쯔」 윗대목, 163-167쪽에 있는 중국통속문학사(中國通俗文學史)에 대한 해설을 참조할 것). 그리고 스님들이 대중들을 모아놓고 불교 교리를 재미난 이야기로 꾸며서 하는 것을 보통 "속강(俗講)" "설경(說經)"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부터 설화문학(說話文學)이 잉태되게 되고 이 설화문학의 잉태는 곧 중국의 소설(小說)문학의 새로운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중국문명은 당대(唐代) 불교의 대중화운동을 기축으로 통속화되기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새로운 문체와 언어가 탄생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잠깐 『유사(遺事)』에 실린 원효의 기사를 보자.
曉旣失戒生聰, 已後易俗服, 自號小姓居士. 偶得優人舞弄大努, 其狀瑰奇.
因其形製爲道具. 以華嚴經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 命名日無旱. 仍作歌流于世. 甞持此, 千村萬落且歌且舞, 化詠而歸. 使桑樞瓮牖玃猴之輩, 皆識拂陀之號, 咸作南無之稱, 曉之化大矣哉! 其生緣之村名佛地, 寺名初開. 自稱元曉者, 蓋初輝拂日之意爾. 元曉亦是方言也, 當時入皆以鄕言稱之始旦也.
원효가 이미 승가의 계율을 저버리고 설총을 낳은 후에는 속복(俗服)으로 갈아입고 자기를 스스로 일컬어 호칭하기를 "작은 마을에 거하는 사나이"(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하였고 속세간에 딩굴며 살았다. 어느 날 아주 우연한 길에 어떤 광대가 큰탈박아지를 가지고 춤추고 회롱하는 것을 보고, 그 형상이 너무들 수려하고 기발하여 보는 이의 눈길을 끌었다. 거기서 옳다 ! 이거다 ! 라고 원효는 기발한 힌트를 얻게 되었다. 그 탈박아지의 모습을 따라 여러 기물을 만들어 불도(佛道)를 전파하는 불구(佛具)로 삼았다. 그러고 『화엄경』에 쓰여져 있는"이 세상 삼라만상의 일체는 나에게 장애가 되지 아니한다. 큰 도(길)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초월하느니라"라는 말을 따서, 그 불구들을 "장애가 되지아니하는 그릇들"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찬불가를 지어 세상에 널리 유포시켰다. 는 이 불구들을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노나주기도 하고 또 천촌만락 동네방네 구석구석 아니 다니는 곳이 없이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기 도하고 탈춤을 추기도하였다. 이렇게 쉬운 언어와 예술로서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 제도(化度)시킨 후에 그는 또다시 환승(還僧)하여 깊은 철리를 가르치는 저작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행각은 뽕나무집 느릅나무집 깨진 항아리집 찌그러진 문짝집의 모든 빈민들, 그리고 꼭 원숭이 같아서 사람 같지도 않은 무지몽매한 사람들, 즉 프로레타리아(애만낳는) 무산(돈없는) 계층(배-輩)까지도 모두 전혀 몰랐던 "불타"라는 이름을 알게 하였고, 또 기회만 닿으면 일제히 "나무아미타불"하고 염불을 외울 수 있게 만들어 놓았으니, 원효의 대중화운동이 거둔 성과야말로, 지고하고 지대하다 아니할 수 없도다 !
이러한 원효의 위대함을 사람들이 기리어 그가 태어난 마을(밤골, 율곡-栗谷)을 "부처님땅"(불지-佛地)이라 하였고, 그 동네에 세운 절을 "불법을 처음 연 절"(초개사-初開寺)이라고 이름하였던 것이다. 원효가 자기 자신을 자칭하여 "원효(元曉)"라 한 것은 대저 자기야말로 "첫새벽 온 누리에 비친 부처님해"라는 프라이드를 나타내는 뜻으로 그렇게 작명한 것이다. 원효(으뜸새벽)라고 하는 것은 또한 토속 말에서 온 것인데, 당시 신라 사람들은 신라 말로 원효를 가리켜 새밝(시단-始旦) 즉 새벽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원효야말로 야단법석의 대가였다. 원효가 가는 곳마다 떠들썩했으며 노래가 있었고 춤의 예술이 있었고 중생을 제도하는 격조 높은 언어가 있었다. 그가 "무애불구"를 가지고 탈춤과 노래를 지으며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다닌 것은 그가 곧 당대 화랑(花郎)의 세속화정신과 그들 집단의 삶의 스타일의 한 유형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의 이런 화랑과의 관계는 그가 결혼하는 과정에서 경험한 풍기(風氣-바람끼)의 기록에서도 완연히 드러나고 많은 사람이 『원효불기(元曉不覊)』라는 『유사(遺事)』의 기사를 제대로 해석하질 못해(시중에 나와 있는 이병도, 이민수의 번역은 전혀 한문을 해석하고 있지 않은 인상적 번역들임으로 그린 역본에 의존하여 .『유사』를 이해하는 것은 자기의 무지를 심화시킬 뿐이다), 원효가 마치 신라왕실의 요석공주』와 눈이 맞어 파계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여기서 "공주(公主)"라는 말은 단순한 어느 토호의 말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이며 우리가 조선조에서 생각하는 경복궁속의 공주가 아니다. 요석궁(瑤石宮)이라는 것 자체가 무슨 중앙의 궁궐이 아니요, 지금 시골의 "정(亭)"이 붙은 집들과 같이 어느 토호의 격조를 갖춘 집의 일반명사다(귀족계열임에는틀림이없을 것이다).
그리고 원효의 파계는 이미 앞에서 쎌리바시의 문제에서 충분히 검토했듯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파계"가 아니며 방편적 삶의 전환이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적 선택"(Entscheidung)의 문제다. 그의 결혼의 동기를 나타내는 기사는 다음 구절이다.
師甞-日風顚唱街云,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
원효대사는 일찍이 어느 날 갑자기 "풍전(風顚)"을 느끼고 길거리에 다음 과 같이 노래를 크게 부른 것으로 되어 있다 : 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수허몰가부, 아작지천주). 여기서 풍전(風顚)이란 "바람끼" 즉 "신끼"를 말하는 것이며 특수한 영감의 상태에서 얻는 몸이 부르르 떨리는 광끼를 할한다. 풍전(風顚)에다가 모두 병질안을 씌우면 풍전(瘋癲)이 되는데 이는 광끼를 나타나는 한의학 술어이며 기실 풍전(風顚)은 풍전(瘋癲)의 약자이다.
즉 원효는, 사도바울이 다마스커스(다메섹)로 가는 길거리에서 갑자기 눈이 멀고 주님의 음성을 듣듯이(사도행전 9장) 갑자기 한낮의 거리에서 광끼를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외친 소리는 』시경(詩經)』의 빈풍(豳風)에 나오는 "벌가이장장사구(伐柯二章章四句)"의 인용을 통해서 자기에게 계시된 소망을 토로한 것이었다. 이 때 "가(柯)"라는 것은 '도끼자루이지만 시(詩)에서는 결혼을 하는데 꼭 거쳐야만 하는 중매쟁이와 중매쟁이로 상징되는 모든 번거로운 의식절차를 의미한다. 원효가 외친 말, "누가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준다면 난 그 도끼로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잡으리라"라는 말은 모든 의식절차가 필요 없이 한 여자를 얻고 싶다. 그 여자와 난 하늘을 치받을 그렇게 거대한 사명을 성취하리라 ! 라는 어떤 계시적 상징어인 것이다.
원효는 요석공주와 결혼하지 않았다. 그냥 자고 애기만 낳았을 뿐이다. 이것은 신라인의 어떤 풍교(風敎)적 관습의 한 양태를 나타내는 생활사와 관련되는 것이라고 나는 본다. 그러한 바람끼적 계시 속에서 그는 요석공주와 묘합(妙合)되었을 뿐이고 설총을 낳았을 뿐이었으며 그것은 그의 성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속행(俗行)은 아니었던 것이다 !
그리고 그는 과연 지천주(支天柱)를 깎은 후에 다시 승문에 들어가 학업에 몰두했면 것이다("화영이귀(化詠而歸)'의 "귀(歸)"를 모두 잘못 새기거나 새기지 않았다. 귀(歸)는 저자 석일연의 입장에서 보면 승문으로. 되돌아오는 것이 다).
야단법석의 최대의 성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변문(變文-삐엔원)의 발생이다. 변문(變文)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야단법석의 속강승(俗講僧)이 불교의 교리를 무지한 대중, 즉 전혀 제도적 교육을 받지 못한 민중에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설명하기 위하여 불전(佛典)의 본문(本文)을 "변경"(變更)시켰다는 의미에 그들이 쓸 문체를 변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변문의 발생은 변상도(變相圖)와 관련이 있는데, 변상도라는 것은 우리나라 절깐벽화에 그려져 있는 '심우도"(尋牛圖)와 같이, 불교이치를 터득시키는 그림을 그린, 요새아이들의 "그림동화책"과 같은 화본(畵本)인데, 속강 중들은 이 변상도를 민중들에게 보여줘 가면서 재미있는 불교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우리 어릴때도 시장바닥에서 그림책을 펴가며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여 사람을 꼬이게 해놓고 돈을 받거나 약을 파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을 잘 기억할 것이다(이들을 중국문학사에서는 "설화인(說話人)이라고 함). 바로 변문이란 이런 변상도밑에 써놓은 그림책이야기 언어가 발전한 것이다.
이 변문은 청말광서(淸末光緖)』33(1907)년 이후 감숙성(甘肅省)의 돈황(敦煌)(뚠후앙, 돈황)의 천불동(千佛洞)에서 발견되어 그 대부분이 반출되어 지금은 불란서 국립도서관, 영국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돈황용록(敦煌鎔錄) 돈황영습(敦煌零拾)』『돈황변문휘녹 (敦煌變文彙錄)』돈황변문집(敦煌變文集)』등에 수록되어 있다). 변문의 내용은 직접 불교에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불교에 관계없이 일반풍속 습속이야기들도 많다.
그문장의 형식은 운문과 산문이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것은 이 변문이 노래로 불러지는 부분과 말로 해설하는 부분이 공존(共存)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가창(歌唱)에는 당시의 곡조(曲調)가 들어가 있으며 이는 후대의 "보권(寶卷)" "탄사(彈詞)"등의 강창문학(講唱文學)의 원류를 이루는 것이며 이는 또 이러한 문학인(文學人)들이 대부분 스님들이 중옷을 벗고 대중으로 속화(俗化)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효의 행각은 이미 당대(唐代)의 승려에게서는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닌 보통 가능한 추세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변문의 내용이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변문의 유입은 조선과 일본에서 국문학(國文學)의 탄생을 가져오게 한 것이며 "이두"의 발생도 이러한 당대(唐代)의 변문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문이야말로 20세기에 개화한 언문일치운동의 기치인 백화문학운동(白話文學運動)의 효시를 이룬 것이다.
즉 순 구어가 문자로 기록된 것은 변문을 효시로 하는 것이며 이 변문의 발생이야말로 중국문명사에서 불교라는 종교조직의 대중화의 덕택에 얻은 가장 소중한 획기적 발전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변문의 발생이야말로 곧 내가 말하는 야단법석른의최대 성과인 것이다.』
※위의 내용은 도올 김용옥의 『나는 불교를 이랗게 본다』에서 발췌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