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에 영제국의 수상이 되었던 윌리엄 피트, 26세에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 5세때 오페라를 작곡한 모차르트, 초등학교 때 이미 가우스 이론을 발표한 수학자 가우스 등. 어린 나이에 어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란 분명 어려운 일이지만, 역사 속에 상당한 수의 예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학문과는 달리 신학에서는 20대에 천재가 나올 수 없다고들 한다. 이 분야만큼은 오랜 세월 속에서 다듬어지는 영성이 더해지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 특별한 경우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1906년 독일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본회퍼는 21세에 베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당시 너무 어려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었기에 그는 미국의 유니언 신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을 이수하였으며, 다시 독일로 돌아온 25세에, 그는 이 젊은 나이에 베를린 대학의 강단에 서게 된다. 하지만 이 젊은 천재가 역사에 남는 인물이 된 것은 그의 지식 때문만이 아니었다. 1933년 히틀러의 나치가 정권을 잡고, 유태인을 탄압하기 시작하였을 때, 이 신학자는 자신의 목소리와 펜을 사용해 나치 정권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처음에는 설교를 금지당했고 그 다음에는 교수자격을 박탈당하였으며, 전쟁 직전에 이르면 어떠한 대중 연설도 금지당하게 되었다. 독일교회 지도자들이 나치에 협력하거나 침묵하고 있을 때에 이에 반대하는'고백교회(Confession Church)'가 만들어지자 본회퍼 목사는 미래가 보장된 자리에서 나와 이 탄압받는 교회에 가담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마침 미국을 여행 중이었던 그에게는 망명의 기회가 주어졌지만, 지금 자기가 여기에 있다면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에게 할 말이 없을 거라며 고국으로 돌아간다.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3년, 본회퍼 목사는 일부 독일 장교들이 세운 히틀러 암살음모에 연관되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약 1년 반의 옥고를 치룬 후 결국 1945년 4월 9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에서 처형 당하였다. 처형 당할 때, 그는 벌거벗은 채로 처형장에 끌려가 피아노 현으로 만들어진 올가미에 목이 걸려 반쯤 기절한 상태로 한 시간 이상을 발버둥 치다가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이는 나치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기 불과 한 달 전이었다. 본회퍼의 논문과 글들이 지금도 뛰어남을 인정받는 것은 그것이 책상 위에서 쓰여진 것이 아닌 순교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내린 결단 가운데 쓰여진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내려놓고 박해와 고문과 죽음이 기다리는 길을 택해 가는 과정에서 쓰여진 글이 어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사회에 부족한 것은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닌 자신이 알고 믿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행동하는 지성과 실천하는 신앙을 보여주었던 그의 생애가 한없이 높아 보이는 요즘이다. P.S: 본회퍼 목사가 순교한지 70주년(4월 9일)을 맞이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