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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차 북한사찰순례 문화유적답사기 (1)
글/김형근(편집인)
순안공항에서 참가자들 기념촬영 (8월29일)
미주현대불교에서 추진한 제 3차 사찰순례와 문화유적답사단이 뉴욕에서 8월 28일 새벽 1시에 출발하여 인천항과 북경을 거쳐 8월 29일 오후 4시에 평양순안 비행장에 도착하여 11박 12일 일정에 들어갔다. 북한을 여행하는 방법에는 크게 2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국제고려여행사를 통하는 방법인데 이 여행사를 통해 북한 관광을 하려면 이 여행사와 함께 일을 하는 뉴욕 우리 여행사를 비롯하여 L.A., 북경, 그리고 유럽에 있는 여행사 등을 통하면 된다. 여행 전문이기 때문에 단순히 관광을 하려면 여행사를 통하면 좋다. 이산가족 상봉 등 다른 일은 일체 할 수가 없다.
또 하나의 방법은 해외동포들의 이산가족 상봉, 투자, 학술.문화행사, 관광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해외동포위원회를 통하는 방법이다. 이 해외동포위원회를 통하라면 뉴욕에 사무실이 있는 재미동포전국연합을 통하여야 한다.
미주현대불교 사찰순례는 2005년 22명이 참가했는데 해외동포원호위원회, 2차는 2013년 17명이 뉴욕의 북한전문 여행사인 우리여행사,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해외동포원호위원회를 통해 사찰순례에 나섰다. 그 이유는 우리 일정이 현지에서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해동’이 좋을 것 같고 또 앞으로 여행이 아닌 고려사경이나 고려불화를 북한에 소개하는 문화행사를 하려면 해외동포원호위원회를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순례는 참가 신청을 한 사람들이 막판에 신청을 철회하고, 또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10명이 출발하였다. 그 동안 북한 사찰순례를 하면서 겪는 어려움은 참가자 모집이었다. 참가한다고 신청한 사람들이 가족이나 주변의 만류로 포기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이유는 북한 여행은 위험하고 여행 중에 혹 북한 정부에 의해 잡히거나 억류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 정부에서 알게 되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것이다. 미국 시민권자나 영주권자의 북한 여행은 합법이다. 심지어 허가를 내고 영업을 하는 북한 전문 여행사도 미국에 몇 군데가 있다.
하지만 필자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라야 한다. 방문기간 동안 북한법을 잘 지키면 문제가 없다. 우리는 사찰순례와 문화유적 답사이니 정치적 행위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사진을 찍을 경우에는 군인이나 군대시설은 절대 찍지 말아야 한다”고 참가자들에게 사전에 교육을 시킨다. 그 결과 지금까지 참가자 모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사실 북한은 관광객에게 아주 친절하다는 것의 지금까지 필자가 4번 관광을 한 결론이다.
이번 3차 순례는 1차와 2차 순례에 신청했지만 가볼 수 없었던 구월산 월정사, 개성 안화사, 칠보산 개심사, 내금강 정양사를 꼭 방문하고 싶다고 특별히 부탁하였다. 이 사찰을 포함하여 20개 정도를 가보려고 했지만 참가자가 그룹여행에 필요한 15명도 안되고 또한 불교신자가 너무 적어 방문할 사찰을 대폭 축소할 수 밖에 없었다. 칠보산은 헬기로 가야 하는데 우리 참가자만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다는 것을 현지에 가서 알았다. 칠보산과 개심사는 갈 수 없었지만 월정사, 안화사, 정양사를 방문한 것은 이번 방문의 성과다. 이 3개의 사찰을 포함하여 평양의 법운암, 정방산 성불사, 외금강 신계사, 내금강 표훈사, 묘향산 보현사 등을 방문하였다. 원래 목적지는 아니었으나 사찰 방문 외에도 구월산에서 우리 민족의 단군과 환웅, 환인 세 성인을 모시는 사당인 삼성사를 방문하였다.
내금강 정양사
이번 참가자 중에는 3명의 북한이 고향인 사람이 있었다. 이들 고향은 평남 룡강, 평양시, 함경북도라고 한다. 3년 전에 방문한 사람들도 2명 있었다. 우리 일행은 오후 4시경에 도착하였다. 순례기간 중에 날씨는 내금강을 표훈사를 방문하던 2시간 정도를 제외하고는 대체적으로 쾌청하였다. 우리는 양각도 호텔이 숙소였다. 고려호텔과 더불어 북한에서는 특급 호텔이라고 한다. 이 3명을 포함하여 북한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도착 첫날 잠을 설친 것 같았다. 평양에 도착한 날은 29일은 음력으로는 아마 보름이 조금 지난 날인 것 같았다. 아침 새벽 3-4시 양각도 호텔에서 본 달은 마치 보름달 같았는데 잠을 설친 참가자들은 호텔 창가에서 새벽 달을 보면서 동심에 젖었다.
필자는 1995년 4월에 조선불교도 연맹의 초청으로 첫 번째 북한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불교계에서 하와이 대원스님, LA 평화사 정산스님, LA진각종 지현 정사 등을 비롯하여 미국 각지에서 수 백명이 평양에서 하는 청년 축제에 참가하였다. 그 후 10년 후인 2005년에 미주현대불교 주최로 LA 관음사 도안스님을 단장으로 모시고 1차 순례를 다녀왔고, 2013년에 17명이 2차 순례, 그리고 이번이 3번째 순례이다. 단체로 3번, 개인으로 한 번 총 4번 다녀왔다.
사찰순례를 하는 목적
필자가 북한사찰순례를 시작한다고 할 때 좋은 계획이라고 찬성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첫째 이유는 북한이 위험한 지역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북한 순례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이런 일을 하면 주위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나 친북한 사람이라고 오해를 받는다고 걱정을 해 준다. 이러한 반응을 통해서 북한은 아직까지도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먼 나라’라는 사실을 주변에서 생생하게 실감한다. 미주현대불교 독자들 중에도 북한이라는 말만으로도 거부감이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필자는 1995년 방문시에는 금강산에서 신계사 터만 보았고 사찰은 평양의 광법사와 룡화사, 정릉사, 그리고 황해도 정방산 성불사와 묘향산 보현사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방문한 사찰의 스님들로부터 북한에 많은 절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방문한 사찰들 중 정릉사는 고구려 폐망과 더불어 사라진 절을 1993년에 복원한 사찰이라고 하였다. 6.25 전쟁 중에 파손된 절을 다시 복구한 사찰들도 많았지만 다행이 전쟁 때 파손되지 않은 사찰들도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사찰들을 방문하여 미주현대불교에 소개하고 싶었다. 또 남한에서 북한을 자주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가 자주 방문해야 북한에서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찰순례를 시작하였다.
북한의 여러가지 변화 모습
1995년 첫 번째 방문을 시작하였는데 4번째 방문인 2015년인 올해와는 무려 20년 세월의 간격이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북한이라고 예외일 수가 없다. 북한의 변화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여행기를 통해 언급한 것을 본적이 있다. 20년간의 북한의 변화에 대해 필자는 매년 북한을 방문한 것도 아니고 북한 연구가도 아니어서 사회 전반 변화에 대해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불교계의 변화를 중심으로 사회변화에 대해서는 필자의 기억에 의지해서 서술해 보고자 한다.
1995년 개인 방문과 2005년 방문시에는 조선불교도 연맹에 아는 스님들이 있었다. 1991년 LA 관음사에서 ‘조국통일 기원법회’가 열렸는데 이 법회는 남북불교계가 공식적으로 처음으로 만난 아주 큰 행사였다. 필자는 이 행사를 맨 처음 제안하였고 미국의 국무성에서 북한 스님들의 비자발급을 허락받는 등 행사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결국 행사는‘한국불교종단협의회’주최가 되고 말았다. 이 행사에 참가한 ‘조선불교도 연맹-이하 조불련의 표기’의 박태호 위원장과 심상련 서기장을 LA에서 처음 만났다. 이후 미주현대불교를‘조불련’사무실로 보냈고 연말에는 연하장도 주고 받았다. 1995년 방문과 2005년 순례 때는 박태호 위원장과 심 서기장을 만났지만 현재는 박태호 위원장은 입적하였고 심 상련 서기장은 은퇴하였다고 한다. 미국에서 16번을 북한을 방문하면서 남북화해와 평화를 위해 노력하던 LA 관음사 도안스님도 1차 순례를 다녀온 다음 해인 2006년 입적하였다. 1차 순례시에는 묘향산 보현사에서 최형민스님은 만났는데 2차순례와 이번에도 만나지 못했다. 최형민 스님은 일제시대에 출가한 스님으로 아직 생존해 있으나 고령으로 인해 절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이번 방문에는‘조불련’사무실을 방문하지 않았다. 20년 전에 방문한 사찰에서 만난 스님들중에서 삭발한 스님들은 만나지 못했는데 이번 3차 순례에서 만난 스님들은 모두 삭발한 스님들이었다. 2005년 1차 순례 때는 대부분 머리를 길렀고 가끔 삭발한 스님들을 만날 수 있었다. 2013년 2차 순례시에도 모두 스님들은 모두 삭발하고 있었다.
북한 사찰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1995년 개인 방문 때 금강산을 방문하였는데 당시에는 금강산 4대 사찰이었던 신계사는 전쟁으로 파괴되고 터와 탑만 있었다. 하지만 조계종에서 2007년에 사찰 건물 복원 공사를 마쳤다. 필자는 방문하지 못했지만 천태종에서는 개성의 영통사 건물을 복원하였다. 역사속에서 큰 흔적을 남겼던 사찰들을 복원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터만 있는 상태였다. 평양의 중심가에 있던 룡화사는 1935년에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큰 규모의 사찰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나 대웅전을 비롯해 2채의 건물이 있었다 1차 순례 때 방문한 사찰인데 2013년 2차 순례 때 방문하고자 했을 때 이 사찰이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철거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스님 두발과 사찰 건립과 철거 외에도 변한 것은 많다. 사찰주변의 풍경도 많이 변했는데 묘향산 보현사 입구에서 돌로 만든 상원암 이정표를 보았다. 2013년에도 없던 이정표였다. 보현사 풍경도 변한 것이 많다. 보현사는 북한의 가장 큰 사찰이고 관광객이 많아서인지 큰 매점이 있다. 여기에는 목탁을 비롯하여 불구를 팔지만 묘향산 특산품과 그림, 보현사 사적비 탁본, 찻잔 등 아주 다양한 물건을 팔고 있다. 2013년에는 한복을 팔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한복도 팔았다. 또한 여기에는 전쟁중에 파괴된 큰 사찰이었던 유점사의 종을 옮겨다 놓았다. 이 종은 요청하면 타종을 할 수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타종하려면 아주 귀중한 종이기 때문에 돈을 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순례자들은 돈을 주고 타종을 했다. 구월산 월정사에서는 즉석 사진을 찍어준다는 간파도 있었다. 필자가 깜짝놀란 것은 평양의 숙소였던 양각도 호텔의 기념품 가게에 있었던 요령이었다. 젊은 판매원 아가씨는 이 요령을 ‘종’이라고 했다. 필자가‘요령’이라고 알려주면서 물어보니 그 가격이 무려 $80 였다. 북한은 직장마다 또 같은 직장의 각 부서마다 자체적으로 장사를 하여 재정을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양각도 호텔만 해도 서점과 갤러리, 그리고 기념품 가게에서 저마다 그림을 판매하고 있다. 같은 호텔에서 3군데에서 그림을 판매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만수대 창작사를 비롯하여 양각도 호텔, 조선미술박물관, 묘향산 보현사 등에서 그림을 7-8장 샀다. 만수대 창작사 작품은 유화도 있다. 필자가 산 그림은 조선미술박물관에서는 원본을 사실대로 그린 모작을 샀고 나머지는 대부분 한국화 계열이었다. 북한 작품들중 그림에 글씨를 써 놓은 화제에 때로는 한자로 쓰는데, 많은 작품들이 글씨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리는 것 같아 작품을 망치는 경우를 보면 안타깝다.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을 했지만 필자는 그동안 북한 방문할때마다 7-8개의 사찰을 방문했는데 일반인들을 별로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방문에는 묘향산 보현사에 지도교사의 인솔로 단체로 방문하는 수 많은 학생들을 보았고 구월산 월정사에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에도 20명 이상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스님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이들은 문화재나 역사적 관점에서 사찰을 방문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다.
사회적인 변화
필자가 북한을 방문한 1995년 4월인데 북한에서 절대적인 존재인 김일성 주석은 1994년 7월 사망하였다. 김주석의 뒤를 이어 1995년 개인방문과 2005년 1 차 사찰순례 때에는 김 정일 국방위원장이 북한을 이끌었다. 하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2011년 12월 사망하였다. 2013년 2차 사찰순례 때에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 위원장이 북한을 지도하였다. 2005년 1 차 사찰순례 때에는 북한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들이 김일성 동상에서 헌화를 하였지만 2013년 2 차 순례시에는 김일성 주석 동상 오른쪽에 김정일 국방 위원장의 동상도 함께 있었다. 2005년에는 김일성 주석의 동상만이 북한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으나 이제는 함께 서 있는 두 사람의 동상을 많이 볼 수 있다. 김일성 주석과 아들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 주민들에게 거의 동급으로 존경받는 것 처럼 느껴진다.
이번 방문중에는 북경에서 고려항공을 타기 위해 수속을 하면서부터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전에는 북경 공항에서 고려항공 탑승 수속을 하는 사무원은 북한 여성들로 미인들이었다. 한데 이번에 수속을 하는 여성 직원들의 미모는 어딘지 이상해서 물어보니 한족인 중국사람들이라고 했다. 중국인들은 이곳에서 뿐만 아니라 여행객으로도 북한에서 많이 볼 수 있었다. 아마도 북한의 여행객 주력 부대는 중국사람들 같았다. 이들은 사찰도 방문하였다. 내금강 표훈사 방문을 마치고 나오는 길은 많은 비가 내리던 때였다. 우리 일행이 표훈사를 나오고 중국 관광객들은 표훈사를 향해 들어갔다.
북한 변화의 물결은 평양 순안 비행장 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지난 7월 1일 개장했다는 새 청사는 현대식으로 깔끔하게 완공된 건물이었다. 방문할 때 마다 올림픽에서 여러 개의 금메달을 따는 나라의 공항으로는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평양 시내에는 창전 거리를 비롯하여 30-40 층 건물이 많이 들어섰는데 2013년 2차 순례때 부터 확연히 다른 변화를 볼 수 있었다. 2년 만에 가서 본 평양은 양각도 호텔 부근만 해도 2년 전에 볼 수 없던 건물들이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대동강에서 모래를 채취하는 선박들이 많이 보였고 양각도 호텔 부근에서도 전에 볼 수 없던 모래와 자갈을 분리하는 공장이 돌아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군복을 입고 있었다. 평양 시내 길거리에서도 군인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증가했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총 대신 삽과 쟁기 등 연장을 들고 단체로 건설현장에 투입되는 군인들이 많았다. 평양 시내에는 곳곳에 새로운 건물들을 건설하였는데 중장비는 별로 없었고 대부분 사람의 힘으로 하는 수공업으로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택시를 포함하여 트럭, 승요차 등 차량도 많아졌는데 전에는 승용차는 대부분 밴츠였는데 이제는 북한에서 만드는 평화자동차 차를 비롯하여 일본의 토요타, 닛산, BMW 등 독일차, 중국차, 이태리 피아트 등 다양한 종류의 차량이 보였다. 한국의 현대차와 미국제 차량만 없는 것 같았다. 택시는 별로 없었는데 이제는 평양 시내에서 많이 볼 수 있었고 또 개성에서도 볼 수 있었다.
북한산 평화자동차
평양 순안 공항
이번 순례 기간중에는 온천은 2곳을 방문하였다. 금강산 온정리 온천과 평안남도 룡강 온천장이었다. 룡강온천장에는 없었지만 온정리 온천에는 전문 맛사지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신 마사지는 1시간에 $50 정도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20대 초반으로 대학교에서 3년 동안 지압을 전공한 사람들이었다. 몸을 눌러보면서 마삿지 받는 사람의 신체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알아냈다.이 사람들은 외국에서 관광을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람들이지만 관광객과 함께 온 안내인들에게도 마사지를 해 주었다. 호텔에서도 항상 이 맛사지를 받을 수가 있다. 이러한 맛사지를 온천에서 받으려면 안내인에게 사전에 예약을 해야한다. 호텔에 비치되어있는 텔레비전도 전에 아날로그 식 텔레비전이 아니고 디지털 식으로 바꾸어져 있었다. 방송도 24시간 나왔고 일본 NHK, 중국 CCTV, 영국 체널 등 몇 개의 체널이 들어왔다. 많은 변화라고 생각되었다. 북한의 에너지 상황은 여전히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전에 비해 자전거와 우마차 모습이 많아졌는데 평양, 개성, 원산 등 도시에서 자전거는 교통수단과 운송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남성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자전거 뒤에 커다란 짐을 싣고 달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시골에서는 자전거는 중요한 운송수단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라이트도 없는 자전거에 짐을 싣고 달리는 모습은 불안하게 보였다.
평양의 밤거리
평양의 전기 사정은 전에 보다 훨씬 나아졌다. 방문기간 중에 정전 사태는 거의 없었다. 밤에 보는 야경도 멋졌다. 하지만 개성에서는 밤이 깊어지자 전기가 꺼졌고 아침 5시 무렵에 들어왔다. 개성의 아파트와 단독 주택 그리고 길거리에 태양열을 전기로 만드는 집적판을 많이 볼 수 있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별로 없었다. 평양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평양에서 묘향산을 가려면 청천강을 끼고 많이 달린다. 이번에 보니 청천강 주변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현장이 여러 군데 보였다. 4-5군데 되는 것 같았다.
청천강에 건설중인 수력발전소
옷차림은 전에 비해 화려해졌다. 특히 여성들이 입는 한복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디자인도 다양해졌고 화려한 무늬의 한복을 많은 곳에서 팔고 있었다. 우리 안내인에 의하면 한복 디자인 쇼를 매년 큰 규모로 한다고 한다. 1995년 20년 전에는 원불교 정녀들 옷차림과 흡사한 하얀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성들의 모습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런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고 하얀 저고리에 감색 치마는 자주 볼 수 있었다. 이 의상의 변화와 더불어 이번 방문기간 중에 느낀 큰 변화중의 하나는 북한 상품이 다양화되고 자본주의적으로 사회가 많이 변화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를 증명하는 것 중의 하나가 마시는 차였다. 2013년 방문할 때 차를 좋아하는 필자는 은행나무 차를 몇 통 구입하여 마신적이 있다. 그때 마셔본 차는 마치 한약 같은 맛으로 아주 좋았다. 이번에 기념품을 파는 상점을 가보고 깜짝 놀랐는데 2년전애는 2-3 종류 차만 있었는데 이번에는 10 종류가 넘었다. 아주 많은 종류의 차가 생산되고 있었다. 2년 전에도 이 차들을 판매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양각도 호텔 판매소에서는 종류가 많지 않았다. 이번에도 은행나무 잎 차를 사왔는데 생산한 곳이 달라서 인지 그 맛이 2년 전에 사온 은행나무 잎 차와는 맛이 달랐다. 2년 전 차가 더 좋았다고 생각된다. 이런 변화는 느낄 수 있었지만 며칠 동안의 여행으로 북한 실정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번 참가자 중에서 전문가용 카메라로 사진을 많은 찍는 사람이 AA 배터리를 사려고 금강산과 평양에서 며칠 동안 노력을 했지만 결국 사지 못했다. 안내인이 사온 배터리는 약해서 카메라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배터리는 우리에게는 생활에서 많이 사용되는 물건인데……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다른 북한의 현실은 아마도 휴대폰(북한 에서는 손전화)일 것이다. 북한의 도시 성인들은 대부분 휴대폰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이 휴대폰은 백두산을 가는 산 속에서도 금강산 산 속에서도, 원산 가는 도로에서도 아무런 문제없이 신호가 잘 잡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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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히 읽습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