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시골에서 많이 그랬듯이 부모님이 출생신고를 2년 늦게 하신 덕분에 동료들이 정년이 되어 모두 떠난 다음에도 계속 강의를 할 수 있는 운 좋은 교수 친구가 있다.
그런데 이것이 좋은 일만은 아닌 것은 주변에서 실제 나이를 다 알고 있는데 계속 버티기도 미안할 뿐만 아니라 최고참이 되다보니 자기들 딴에는 대우를 해준다고 신경을 쓰는 탓에 눈치가 보여서 될 수 있는데로 사람 많은 자리를 피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더 할 수 있는데 그 좋은 자리를 그만두기도 그렇고 해서 입장이 매우 곤란해서 적당하게 물러나려고 기회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2 년 여유가 오히려 부담이 되어 말년을 전전긍긍하는 친구의 모습이 그리 행복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원래 여유는 좋은 것이지만 잉여가 되면 의미가 전혀 달라진 듯하다. 최근에 온라인에 ‘잉여’라는 말이 새로운 뜻으로 쓰이고 있어서 ‘잉여롭다. 잉여로운...’의 뜻은 ‘외롭다. 심심하다..’의 표현으로 많이 쓰이고 있다.
여유가 능동적이라면 잉여는 수동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향이 있어서 잉여 인간은 남겨진 인간, 혹은 ‘남아도는’ 인간을 말한다.
무엇이 남아도는가? 돈이 남아돌면 좋겠지만 남아도는 것은 주로 시간이다. 즉, 잉여 인간은 자신이 가진 자본(시간)에 비해 할 ‘짓’이 없는 사람들을 비아냥거리거나 자조 석인 자기비하의 의미인 것이다. 스스로를 잉여로 칭해야 하는 젊은이들의 현실은 우울한 일이지만 좌절과 절망 보다는 낙천적이고 해학적인 표현이 초조함 보다는 오히려 여유를 느끼게 한다.
말을 바꾸어서 현대는 어떤 말 앞에 ‘자유’자가 붙으면 일단 의심을 해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자유시장경제’, ‘자유무역협정(FTA)’, '자유민주주의'. '자유'에다 'NEW'를 붙여서 '신자유주의' 등등. 너무 자유스러워서 주체할 수가 없어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다. 특히 맨 '민주주의' 로는 뭔가가 부족해서 '자유'를 앞에 붙여서 '자유민주주의'여야 한다는 사람들의 심리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 쉽다.
공산권 세계에서 자란 슬라보예 지젝이 소개하는 공산주의 시절의 재미있고 오래된 농담이다. 한 사람이 동독에서 시베리아로 일하려 보내졌다. 그는 그의 편지가 검열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의 친구에게 말했다. "암호를 만들자. 만약에 네가 나한테 받는 편지가 파란 잉크로 써졌다면, 내가 말하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에 편지가 빨간 잉크로 써졌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한 달 후 그의 친구는 첫 편지를 받았다. 모든 것이 파란 색으로 쓰여 있었다. 이 편지에 따르면, "여기에서 모든 게 훌륭합니다. 가게는 좋은 음식들로 채워져 있고, 영화 극장은 서구에서 나오는 좋은 필름들을 보여줍니다. 아파트는 크고 호화스럽더군요. 그런데 여기서 살 수 없는 유일한 물건이 빨간 잉크입니다."
위에서 말하는 자유가 바로 이런 자유인 것이다. 빨간 잉크가 없는 세상에서 파란 잉크만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여기서 파란잉크는 돈이다. 돈 많이 자유스럽다.
사실 '자유'라는 말 자체가 대단히 수상하게 등장했다. 역사 속에서 자유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자유, 평등, 박애’를 내 걸었던 프랑스혁명 때부터였다. 그러나 이때의 구호는 우리가 지금 상상하고 있는 의미와는 거리가 상당히 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때 부르짖던 자유와 평등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왕과 귀족, 성직자에 대한 부르주아 시민 계급의 자유이었기 때문이다. 하여간 역사적으로 볼 때 ‘자유’를 외치는 것은 수상한 것이어서 누구의 자유인지를 꼭 집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자유’가 누구의 자유인가를 따져보면 결국 강한 자의 자유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그의 책 ‘실재의 사막’에서 “자유민주주의는 무사건의 당이다.” 라고 쓰고 있다. 즉 자유민주주의 최대관심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며, 지금 우리 앞에 전개되고 있는 국정원 선거부정 사건 같이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마 하는 것이다.
지젝은 앞의 책에서 “이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는 바라는 ‘그저 그런 삶’에 비해서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삶의 과잉’이며, 기꺼이 생명을 걸 수도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자각이다. 이런 위협을 무릅쓸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물론 지젝이 말한 ‘삶의 과잉’이 지나치면 자살폭탄 테러범이 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극단적인 예이고 평범한 잉여로운 삶에서도 얼마든지 지젝이 말한 ‘삶의 과잉’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 자기 삶을 무엇에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서.
나와 함께 빈민운동을 하던 고 제정구 선생이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한 번은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못해서 갈 곳도 마땅치 않고 해서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가서 룸펜 생활을 하게 되었단다. 주변의 현실에 눈이 떠져서 빈민 활동으로 이어지면서 계속 룸펜 생활을 하는 탓에 방바닥에서 딩굴딩굴거리면서 한 주간에 최소한 책 한 권씩은 읽었는데 국회에 들어간 뒤부터 전혀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고. 그러면서 26살에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김영삼 씨가 왜 헛소리만 하는지 이해를 하게 되었다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하면서 ‘잉여가치설’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얻은 추가적 이익 분을 잉여가치라고 하는데, 이 잉여가치가 현재적 생산 한계를 벗어나 추가적 재생산이 가능하게 한다. 즉, 잉여가 새로운 것을 시도할 여력이 있다는 의미이며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친구는 여유가 잉여가 되어 버려 처치곤란한 입장이 된 셈이지만 나는 재고가 얼마 남지 않은 잉여로 어떻게 창조의 원동력을 삼느냐 하는 일로 날마다 고민하고 있다.
첫댓글 산업사회는 경쟁이 기본인데 강의를 쉽게 포기하는 것도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출생신고가 약 7개월 늦어져 한 살이 줄었지만 재판으로도 나이를 수정할 수 없습니다.
모친이 만 18세가 안되어 나를 낳는 바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