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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맛있다
이윤화 지음
나무위의책 / 2013년 9월 / 272쪽 / 14,000원
Part1 나의 SAN FRANCISCO, 구례
술이 아니라 주인장의 인심을 먹고 마신다 / 동아식당
구례에서 만난 진짜배기 선술집: 『맛있는 수다』의 저자인 구로다 가쓰히로는 일본 선술집을 의미하는 ‘이자카야’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반색은 아닐망정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이자카야는 진정한 이자카야라고 할 수 없다.’ 읽으면서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말이었다. 이자카야는 술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반갑게 맞으며 술을 한두 잔씩 팔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이자카야는 본디 술 한 잔 앞에 놓고 술을 마시는 이와 술을 파는 이의 구수한 입담과 정이 오가는 곳이었다. 그러다가 차츰 안주와 밥을 파는 오늘날의 형태로 발전했다. 입구에 들어가자마자 친근하게 반기는 주인장이 있고, 나와 엇비슷한 샐러리맨들이 퇴근 후 집 대신 이자카야에 들러 한잔 술과 맛있는 음식으로 하루의 피로를 푸는 곳이 일본 선술집의 유래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선술집은 어떤 역사를 지니고 있을까?
사람들에게는 끼니를 해결하고 쉬어 가는 장소이며, 말에게는 마른 목을 적시고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장소였던 주막 겸 여관이 우리 선술집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는 쉽사리 선술집을 볼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선술집을 찾는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나마 전통이 남아 있다는 인사동의 복고풍 선술집에 가 보아도 신문이니 성냥갑이니 하는 예스러운 소품들만 나열되어 있을 뿐 옛날의 그 선술집은 아니다. 인테리어야 흉내 낼 수 있지만 옛 분위기나 정감까지는 옮겨다 놓을 수 없기에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그런데 요행히 구례에서 내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복고 주점을 만났다. 그곳은 이미 구례 내에서 술 좀 마신다는 애주가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핫 플레이스였다. 심지어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곳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 구례군 봉동리 어르신들은 그곳을 ‘동아집’이라 불렀다.
부푼 기대감을 안고 동아집에 도착했다. 그런데 외관을 둘러보니 아주 가관이었다. 찌그러진 양판에 거뭇거뭇한 글씨의 흔적만 남은 간판을 보고 있자니 한숨부터 나왔다. 일단 온 김에 들어가 보자고 마음먹고 가게 문을 열었다.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부엌은 마치 20세기 시골 부엌을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가게 내부를 보고 또 한 번 적잖이 실망했지만 그래도 그 맛이 얼마나 기똥차기에 애주가들이 엄지손가락을 추켜들며 추천해 주시는지 궁금해서 음식 맛을 보려고 메뉴판을 찾았다. 그런데 가게 안을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메뉴판이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이곳 음식은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고 주인장이 그날그날 정해 주는 가격으로 합의 후 음식을 시키는 시스템이란다. 그리고 그렇게 해 온 역사가 자그마치 70년이나 된다고 한다. 70여 년 동안 이곳의 주인장은 세 차례나 바뀌었지만 주인장과 가격 합의 후 주문하는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는 동아식당만의 유구한 역사나 다름없다. 이런 색다른 시스템이 어쩌면 돈 없는 애주가들에게는 외상 술 먹기에 딱 좋은 장소가 아니었을까? 동아식당 하루 매출의 반 이상을 책임지는 것은 바로 가오리찜이다. 통째로 찐 가오리 옆에 삶은 부추가 가지런히 놓이고 양념장이 곁들여 나온다. 붕어의 잔가시는 목에 걸려 먹기 사납지만, 굵은 가오리 뼈는 신 나게 씹어 먹을 수 있다. 부드러운 가오리 살과 가오리 뼈를 오독오독 소리 내어 씹어 먹으면 그 맛이 참 일품이다. 들어갈지 말지를 고민하며 문 밖에서 머뭇거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어느새 가오리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 병을 뚝딱 해치운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달걀 프라이 위에 총총 썰어 얹어 놓은 당근 채와 파를 보고 있자니 그 색이 참 고와 차마 먹기 아까울 정도다. 가오리찜이 떨어질 때쯤 조기 매운탕이나 돼지 족탕과 같은 국물 음식을 시켜 보자. 인원이 많고 색다른 술안주를 원한다면 절대로 후회할 리 없는 돼지 족탕을 추천한다. 국물도 국물이지만 뽀얀 국물이 잘 스며든 버섯과 살코기를 묵은지에 싸 먹으면 사는 게 그리 흐뭇할 수가 없다. “아따, 나도 한 술 한다고 호언장담하는 애주가 아재들! 구례에서는 동아집에 가는 것이 통과의례라는디 그걸 알랑가 몰러?”
Part2 차오르는 생명력, 스토리의 고장, 남원
꿀맛 같은 밥맛과 조화를 이룬 추어탕 / 새집추어탕
밥이 맛있냐, 꿀이 맛있냐!: 한동안 밥상의 화두가 ‘꿀맛과 밥맛’이었던 적이 있었다. ‘왜 어른들은 맛있는 밥을 먹고 나서 “정말 꿀맛이네!”라고 말하는 걸까?’ 이 문제를 두고 우리 집 육남매는 어렸을 때 ‘밥이 맛있냐, 꿀이 맛있냐’에 대한 난상 토론을 벌였다. 내가 맞네 네가 맞네 하며 우기기를 며칠 동안 하다가 끝끝내 ‘꿀보다 밥이 맛있다’로 만장일치를 보았다. 밥심(?)으로 산다는 집안 내력 때문인지, 아이들마저도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결론이었다.
그날 이후 우리 육남매는 이웃집이나 친구 집에 갔을 때, 음식이 맛이 없으면 “꿀맛이다!”라고 말하고, 음식이 정말 맛있을 때는 “정말 밥맛이다!”라고 말하기로 모종의 약속을 정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한테 “쟤는 정말 밥맛이야!”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토록 맛있는 밥이 왜 천대받는 비유에 쓰일 수밖에 없는지 참 아이러니하다. 이제라도 밥 대변인 노릇을 하면서 ‘꿀맛 같은 밥맛’을 알리고 싶은 심정이다.
남매들끼리 모여 꿀맛과 밥맛에 대해 토론도 하고, “쟤는 정말 밥맛이야!”라는 말에 담긴 밥맛에 대해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꿀’은 살면서 만나게 되는 핸섬한 애인의 유혹으로, ‘밥’은 늘 변함없는 조강지처의 사랑으로 이해하는 나이가 되었다.
따끈한 밥에 추어탕 한 사발: 그 밥이다! 압력 밥솥이 ‘칙칙치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김이 빠지고 난 뒤에 이제 막 퍼 올린 따끈한 밥! 그 밥을 수저에 한 술 듬뿍 떠먹을 때 어울리는 걸쭉한 국물이 바로 새집의 추어탕이다.
‘새집’이라는 단어는 ‘억새풀집’의 순우리말로, 1959년 개업 당시 억새풀집으로 가게 지붕을 이은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지금은 미꾸리 요리 전문점이라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으리으리한 건물이 세워져, 규모에서나 전통에서나 지역 추어탕집의 선두임을 자랑하고 있다. 이곳은 가게 개업 때부터 줄곧 미꾸리 요리만 선보였다고 한다. 주로 추어탕, 추어 숙회, 추어 튀김 등을 만들어 파는데 오랜 역사만큼이나 미꾸리 요리도 다양하다. 요즘은 옛날처럼 자연산 미꾸리만으로 추어탕을 끓일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 그래서 새집추어탕에서는 대안으로 남원 내 조합에서 운영하는 미꾸리 양식장에서 미꾸리를 공급받고 있다. 그리고 시래기는 지리산 방향의 운봉면 시래기밭에서 조달받는다. 씹는 맛을 느낄 수 있는 마른 시래기와 소금에 절인 부드러운 시래기를 적절히 넣어 추어탕의 깊은 맛을 낸다.
추어탕을 주문하면 수저가 꽂히도록 시래기가 듬뿍 나온다. 아주 부드러운 시래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칠어서 씹기에 부담스러운 식감도 아니다. 곱게 갈려진 미꾸라지, 아낌없이 들어간 시래기, 구수한 된장 등이 한데 어우러져 걸쭉한 국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마치 조화를 이룬 국악 한 소절을 듣는 것 같다. 당기고 밀고 꽉 차고 비어 있는 균형이 아주 조화롭다. 반찬 없이도 한 그릇을 뚝딱 먹을 수 있는 진한 추어탕인데도 식탁에 맛깔난 반찬들이 줄지어 올라온다. 주인장의 후한 인심은 덤이다. 그중에서도 큼직하게 잘라 담은 깍두기와 슴슴한 맛의 냉콩나물국은 얼큰한 추어탕을 먹기 전과 후 입맛을 가다듬어 준다.
숯불에 구워 먹는 달달한 옛 너비아니 / 지산장
남원의 명물 숯불고기: 남원 지산장은 단맛이 나는 고기를 너무도 당당하게, 할머니의 자랑스러운 손맛을 담아 파는 곳이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나물을 비롯한 10여 가지의 밑반찬이 나오고 지리산 참숯이 지글지글 타고 있는 화로가 상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한다. 그리고 그 화로 위에 얇게 펼친 양념 쇠고기를 옹기종기 올려놓는다. 고기를 화로에 올려놓는 순간부터 달콤한 양념 냄새가 솔솔 풍기면서 군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달큰한 고기는 별로라고 말하며 생고기야말로 제대로 된 고기 맛이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지산장의 숯불고기를 먹어 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숯불고기가 화로 위에서 노릇노릇하게 익어갈 때 솔솔 풍기는 단내를 맡으면 내가 언제 단 고기를 싫다고 했냐며 시치미 뚝 떼고 단숨에 한 판을 먹어 치울 게 뻔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제 일흔이 다 되어 가니까 식당을 한 지도 45년은 됐지. 친정이 꿀 농사를 해서 그 꿀을 가져다 쓴 게 단맛의 비밀이야.”
지산장 고기는 식으면 육포처럼 말라 버리니 식기 전에 먹는 것이 좋다. 지산장의 숯불고기는 옛날에 궁중에서 먹었다는 너비아니의 맛을 떠오르게 한다. 말이 나온 김에 너비아니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면, 너비아니는 얄팍하게 저민 쇠고기에 양념을 해서 구운 요리이다. 쇠고기를 말 그대로 ‘너붓너붓하게’ 썰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음식 문화사를 살펴보면 오래전 우리 조상들은 고기를 미리 양념에 재워 두었다가 꼬챙이에 꿰어서 굽는 ‘맥적’을 먹었는데, 고려 시대가 되자 불교의 영향으로 채식을 많이 하게 되면서 고기 요리법은 점점 잊혀졌다. 그러다가 몽골의 침입으로 원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다시 육식을 즐기게 되었으며, 특히 몽골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개경에서는 ‘설하멱’이라는 고기 구이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이런 요리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궁중의 너비아니로 발전한 것이다.
지산장에서는 쇠고기를 석쇠에 구운 뒤 다져 만든 지산장 양념 고추장을 별도로 판매하다. 고기에 싸 먹어도 맛있고, 음식을 조리할 때 양념으로 넣으면 음식 맛도 달라진다. 그래서인지 지산장 고추장은 숯불고기만큼 유명세를 탔다. 밥 먹고 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은 ‘살까 말까’ 고민하며 고추장 판매 진열대 앞을 어슬렁거리니 이 정도면 양념 고추장이 지산장의 인기 스타 아닐까?
Part3 지리산 천왕봉에서 이어진 청정백리, 산청
경호강 엄마와 아들 / 늘비식당
손맛 좋은 어머니와 손힘 좋은 아들의 합작, 어탕 국수: 지방을 여행하다가 맑은 강이 보이면 근처 어딘가에서 어죽이 팔팔 끓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실제로 그 길을 계속 따라가다 보면 강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생선 국수 전문점들이 즐비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생선 국수는 대개 하천 근처에 살면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 가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 생선 국수는 어죽, 어탕 국수 등 제 나름의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 바다에서 잡은 큰 생선은 뼈에서 우러나는 국물이 진하고 구수해서 매운탕이나 지리(맑은 국)로 많이 먹는데, 작은 민물고기들은 비린 맛이 심해서 끓이는 노하우와 어떤 양념을 넣느냐에 따라 생선 국수의 맛이 달라진다. 백이면 백, 집마다 장맛이 다르듯 같은 생선을 가지고도 내는 맛이 천차만별이니, 먹는 사람 입장에서야 무척 반가운 일이다. 지리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경호강의 맑은 물에서 민물고기를 잡던 아들과 동네에서 손맛 알아주던 어머니가 10여 년 전 함께 가게를 차려 알려진 곳이 있다. 아들이 잡아 온 물고기로 어머니가 국수를 만들어 팔고 있는 ‘늘비식당’이 그 주인공이다.
한가한 오후에는 가게 앞에 앉아서 중년의 아들과 노년이 된 어머니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그날 잡은 물고기의 내장을 손질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매일 잡히는 고기가 다른 까닭에 식당 입구 수족관에는 철따라, 그날의 상황에 따라 물고기 종류가 달라진다. 아들이 고기잡이 담당이라면 어머니는 잡은 고기를 요리조리 손질해 맛깔난 음식을 만드는 담당이다. 어탕 국수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생선을 오랫동안 고아 내는 것이다. 고아 낸 생선뼈는 채로 건져 버리고 남은 국물에 양념을 가미한다. 된장, 고추장을 기본으로 산초가루, 들개가루, 방아 잎 등 각종 향이 있는 잎과 가루를 넣어 민물고기의 비린 맛을 입맛 당기는 맛으로 바꾸어 놓으면 비로소 어탕 국물이 완성된다.
생선 한 마리가 어탕 국수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있자면 마치 어머니의 손에서 펼쳐지는 음식 마술을 보는 것 같다. 이 집에서 ‘어탕국수’라 부르는 음식에는 무척 걸쭉한 국물에 소면이 들어가 있다. 소면 대신 두꺼운 면이 들어간 ‘어탕 칼국수’도 있으니, 든든히 먹고 느긋하게 강 구경도 나서 보자.
Part4 논개에서 이어진 시골 뚝심, 장수
닭살 부부의 장수 비결 / 장수밥상
밥만 먹어도 금실 좋아지는 ‘장수밥상’: 장수의 한자 뜻을 살펴보면, 장수(長壽)가 아니고 장수(長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소 의외가 아닌가? 물이 맑아 마을 이름이 장수(長水)가 되었다는 이곳은 이름 그대로 물이 참 맑다. 맑은 물을 먹고 살아서일까? 실제로 장수군에는 장수(長壽)하는 분들이 많기로 소문난 용암마을이 있다. 그리고 그 용암마을에는 농부가 농사를 지으며 운영하는 맛집, ‘장수밥상’이 있다. 장수밥상은 음식점이라기보다는 시골 집 아담한 별채 쉼터에 가깝다. 그곳은 언제 가도 바람이 멎은 듯 평온하다.
장수밥상의 주인장 부부는 여느 맛집 주인장들과는 조금 다르다. 농사라는 게 보통 고된 일이 아닐 텐데 지친 표정은커녕 수더분하니 여유 있는 모습에 은근히 놀라게 된다. 살림집 건너편에 마련한 농가 별채에는 통창을 달아 놓았고, 방 안에는 여사장이 손수 만든 커튼을 깔끔하게 쳐 놓았다. 그리고 원목 테이블 옆에는 평소에 모은 수석과 정성껏 만든 분재가 놓여 있었다. 밥을 먹는 공간에 내 집 거실처럼 익숙한 것들이 놓여 있어서 그런지 장수밥상 별채에 가면 마치 지인의 집에 놀러 가 거실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하다가 이런 맛집을 차리게 되셨어요?” “실은 제가 젊어서 큰 병으로 고생을 했어요. 병 진단을 받고 난 뒤 스트레스 안 받고, 오염된 환경에서 벗어나면 좀 나아질까 싶어서 이곳에 오게 되었죠. 손수 농사지어 밥상 차리고, 밥 먹고 동네 한 바퀴 쉬 돌아다니면 좋은 공기가 후식 아니겠습니까. 자연을 먹고 화목한 가정생활을 하다 보니 저절로 병이 나았지요. 그리고 이 맛과 경치를 혼자 만끽하기 아까워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자 밥집을 열게 되었습니다.”
장수밥상은 처마 밑에 가지런히 매달이 말린 무청시래기에 장수 한우를 넣고 거기에 구수한 집 된장을 풀어 맛을 낸 ‘장수 한우 시래기 전골’로 손맛을 자랑한다. 게다가 이곳에서 마시는 물은 일반 생수가 아니다. 삼백초, 어성초 등 7가지 약재를 달인 약선 물을 늘 준비해 두어 그곳을 지나가는 행인들도 언제든지 목을 축이고 갈 수 있도록 했다. 각종 장아찌와 시원한 김치는 일 년 내내 변함없는 그 맛 그대로다. 사람들이 붐비는 식사 시간을 피해서 가면 장미, 국화 등으로 만든 야생 꽃차와 쑥개떡, 수수망생이 등의 디저트도 맛볼 수 있다. 밑반찬이 늘 같지 않아 갈 때마다 오늘은 어떤 반찬을 맛볼 수 있을지 기대하게 되는 곳이 바로 장수밥상이다.
약재 주머니 두둑하니 그 닭 속내 한번 옴팡지구나 / 옛터가든
한국 토종닭의 명품화를 꿈꾸다: 닭고기처럼 친근한 고기가 또 있을까? 옛날에는 ‘백년손님’이라 불리는 사위가 오면 장모가 씨암탉을 잡아 대접했다. 그만큼 닭고기를 귀하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은 닭고기만큼 평범하고 흔한 고기가 없지 않나 싶다. 오늘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서민들의 피곤한 일상을 다독여 주는 것은 다름 아닌 ‘프라이드치킨’과 ‘시원한 맥주 한 잔’일 때가 많다.
요즘은 프랜차이즈의 끝은 ‘닭으로 하는 사업’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튀기고 구운 닭 요리 전문점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고 있다. 물론 닭 요리 시장은 넓지만, 그만큼 치열하다. 치열한 닭싸움을 피해 영계로 살짝 눈을 돌릴라 치면 인삼 잔뿌리와 함께 끓인 삼계탕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영계 시장도 진출하기에 녹록지 않음은 마찬가지이다.
한동안 ‘한국토종닭소비진흥협회’에서 일을 하며 토종닭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국내에 종계(종가의 혈통)를 가지고 있는 육류는 소도 돼지도 아닌 바로 토종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재 국내에서 사육하는 닭의 90퍼센트가 수입 종계를 들여와 내놓는 수입육이니, 우리 토종닭은 고작 10퍼센트가량인 셈이다. 수입 육계는 30일이 지나면 상품성을 갖추지만, 토종닭은 70여 일이 걸린다고 한다. 사육 기간과 사료비 등을 생각하면 양계업자들이 토종닭을 사육하기로 마음먹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닭 브레스나 일본의 지도리처럼 토종닭도 하나의 상품으로 브랜드화 시킨다면 토종닭의 명품화를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다른 자태로 남다른 맛과 향을 선보이다: 옛터가든에 처음 방문했을 때 간판에 예식장이라고 쓰여 있어서 이곳이 밥집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예식장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건물을 자세히 보니, 본채를 정면으로 하고 왼쪽으로 보면 뒤채 한옥을 아담한 예식 홀이 되고 오른쪽 옛 가옥은 식당인 셈이었다. 이곳은 독특하게도 툇마루가 있는 한옥 방이 줄지어 있다 보니 어떤 방에서 식사를 하더라도 자연히 개인 별실에서 식사하는 것과 다름없다.
옛터가든 삼계탕의 뱃속에는 찹쌀이 들어 있지 않다. 대신 다리가 제대로 오므려지지 않을 만큼 약재로 가득 찬 주머니가 들어 있어 그 맛이 남다르다. 그 안에 품고 있는 약재 주머니 덕에 걸쭉한 명품 찹쌀 국물을 만들어 낸다. 뚝배기에 가득 담긴 삼계탕과 죽을 보면 그 양에 입이 쩍 벌어지는데, 이내 그 뚝배기 속을 깨끗이 비워 내는 자신의 모습에 한 번 더 놀라게 될 것이다.
Part5 맛으로, 멋으로 흐르는 하동
고흥 피굴 못지않다 / 강변할매재첩국
고흥 남자들 해장의 비밀: 술 마신 다음 날이면 사람마다 찾는 해장 음식이 각양각색이다.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은 남편이 술 먹고 온 날이면 다음 날 아침 단단하게 마른 북어를 다듬잇방망이로 두들겨서 뽀얀 북엇국을 끓여 주셨다고 한다. 요즘 시대에 그렇게 얻어먹을 수 있는 남편이, 속된 말로 그만큼 가장의 가오(허세, 있는 척을 지칭하는 속어)가 살아 있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한국 남편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나는 해장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나도 지고지순한 마누라를 둔 남편으로 살아 봤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해장 국물을 이야기할 때면 옛 남자들 말고도 부러운 남자들이 또 있다. 바로 고흥 남자들이다. 전남 바닷가에는 지역별로 나름의 자랑거리가 있다. 그래서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서 돈 자랑, 순천에서는 미인 자랑, 그리고 고흥에서는 힘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소싸움으로 유명한 동네인 청도 남자가 아니라 고흥 남자가 힘이 좋다니, 다소 의아했다.
몇 해 전에 고흥 해산물 메뉴 개발을 맡게 되면서 일 년 동안 열 번도 넘게 고흥을 드나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만나는 고흥 남자 대부분이 소주를 맥주처럼 마시곤 했다. 내가 주당들만 골라 만났는지는 몰라도 군수님부터 시작해서 다들 기본 주량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보다 이상한 것은 다음 날 숙취로 골골거리는 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바다 공기가 워낙 좋아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분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저절로 고흥 주당들의 해장 음식을 알게 되었다. 그 음식은 다름 아닌 ‘피굴’이었다.
한겨울에 먹는 차가운 굴국이라니! 상상이 되는가? 게다가 피굴은 주당들만 먹는 게 아니라 누구나 즐겨 먹는 고흥의 겨울 음식이었다. 시장에 가면 집에서 직접 끓여 와서 파는 할머니도 계시고, 식당에 가서는 메뉴에 없더라도 말만 잘하면 한 대접 먹을 수 있다. 피굴의 진국은 굴 자체보다도 굴 껍질에서 나온다. 굴 껍질을 은근한 불에 끓여 찌꺼기를 가라앉힌 뒤 윗물을 다시 끓이고 식히기를 여러 번 하면 밝은 회색빛 진국이 우러난다. 가부장적인 고흥 남정네는 아내가 미리 만들어서 얼려 둔 냉동 피굴 덕분에 여름에도 해장국으로 피굴을 먹는다고 하니, 부러울 따름이다.
어린 시절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의 박치기를 보려고 텔레비전 앞에 옹기종기 모여든 마을 사람들 사이로 고개를 비집고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이 박치기 왕의 고향도 고흥군 끝자락에 있는 섬 거금도다. 고흥 사람들은 일찍이 피굴에서 미네랄을 얻는 지혜가 있었으니, 김일 선수의 박치기의 위력도 그 피굴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시원하기로야 피굴에 지지 않는다: 이제껏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한 피굴 못지않게 맛있고 밝은 회색빛을 띠는 국물이 하동의 재첩국이다. 고흥의 피굴은 가정에서 늘 먹을 수 있는 냉국인 데 반해 하동의 재첩국은 여느 식당에서나 먹을 수 있는 온국이다. 따뜻한 국물에 부추를 넣어 먹으면 제격인지라 부추를 잔뜩 넣어 재첩국을 먹는 관광객을 쉽게 볼 수 있다. 하동에서는 재첩국을 대표하는 맛집이 여럿 있지만, 하동 IC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오랜 전통의 할매재첩국은 재첩 반 국물 반이라 할 만큼 재첩의 양이 넉넉하며 제대로 된 뽀얀 국물을 자랑한다. 싱그러운 부추가 가득 얹어 나오는 이 재첩국은 국물 맛이 깔끔하고 개운하다.
Part6 천연 숲과 공존하는 귀한 맛, 함양
지리산 석이버섯과 방목 흑염소의 마리아주 / 두레박흙집
지리산 숨은 맛집에서 진정한 마리아주를 만나다: 바닷가재로 만든 부드러운 무스로 농어 배를 채운 뒤, 생선 모양 파이로 싸서 오븐에 구운 요리가 있다. 말만 들어도 요리의 주인공이 바닷가재인지 농어인지 혼란스럽지 않은가? 답부터 말하자면 이 음식의 주인공은 농어이다. 이를 만든 프랑스 리옹의 셰프 ‘폴 보퀴즈’는 겉을 감싸는 파이는 농어의 향을 유지하기 위함이고, 생선 속을 채운 바닷가재 무스는 농어가 마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기에 파이나 바닷가재 무스는 굳이 먹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적잖이 손이 가는 이 과정이 오로지 농어를 맛있게 먹기 위함이라니!
그동안 먹어 왔던 프랑스 요리가 지닌 무거움에 반해 ‘재료 존중’ 또는 ‘재료 보존’이라는 새로운 요리 장르를 개척한 폴 보퀴즈의 ‘파이로 감싼 농어’는 그의 이름을 내건 레스토랑이라면 어디서든 맛볼 수 있는 인기 메뉴이다. 바닷가재 향이 밴 촉촉하고 야들야들한 농어, 과연 어떤 맛인지 상상할 수 있는가? 수많은 남녀가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 사랑을 속삭이듯이, 요리사들은 새로운 음식 개발을 위해 한 가지 식재료를 정하고 그에 걸맞은 또 다른 식재료를 찾아 나선다. 이렇게 하나의 식재료가 다른 식재료와 어울리는 궁합을 ‘마리아주’라고 부른다.
알코올 도수가 40도가 넘는 진도 홍주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살던 이덕영 셰프는 어느 날 진도 홍주와 의성의 항아초(자연 사과시초)와의 마리아주를 찾아내 큰 파티의 식전 음료로 사용했던 적이 있다. 또 윤정진 셰프는 연하게 간을 한 한국식 쇠고기 육회에 트러플 오일 몇 방울을 떨어뜨리고, 거기에 얇게 썬 트러플까지 몇 쪽 얹어 주면 더없는 마리아주라며 새로운 음식을 선보였다.
그런 보기 드문 마리아주를 함양에서 만났다. 두레박흙집을 찾아 자리한 칠선계곡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과연 이런 산골짜기에 밥집은 고사하고 사람이 살기는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수차례 든다. 인내하고 가다 보면 필히 숨은 맛집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막다른 골목에 가서야 목판 상호가 나왔고, 골목 안으로 들어간 기대했던 것보다는 큰 흙집이 보였다.
그런데 흑염소를 직접 키운다고 들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까만 짐승은 보이지 않는다. 알고 보니 염소를 기르지 않고 방목하기 때문에 지리산 높은 곳에 있다고 한다. 그 녀석들 팔자 한 번 좋다. 제아무리 방목이라도 사람 손이 닿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도시에서 사는 나보다 행동반경도 넓고 훨씬 쾌적한 환경에서 자라니 부러울 따름이다.
두레박흙집의 특징 하나를 꼽자면 바로 흑염소가 사는 곳보다 더 높은 암벽에서 채집한 얇고 검은 석이버섯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흑염소 불고기를 주문하면 석이버섯과 양파, 대파를 넣고 약하게 소금 간을 한 청정 자연의 흑염소가 돌판에 나온다. 고기를 다 먹은 후에는 흑염소 사골을 푹 고아 낸 뽀얀 국물과 밥이 나오는데, 이때 곁들여 나오는 2년 묵은 제피장아찌부터 곰취장아찌, 뽕잎나물 등 지리산표 나물들이 개운한 뒷마무리를 돕는다. 두레박흙집은 지리산 초입에 위치해 맑은 공기도 음식 맛에 한몫하니 식당 자체부터 진정한 마리아주인 셈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맛 / 대성식당
50년 손맛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밥상: 요리를 처음 배울 땐, 그날 배운 것을 집에 와서 다시 해 보고 싶어 안달이 나곤 했다. 파운드케이크를 배운 날에는 기본적인 파운드케이크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를 응용한 케이크도 만들어 보고 싶었고, 탕수육을 배운 날에는 같은 돼지고기로 만들 수 있는 유산슬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나는 열정적인 요리 초년병 시절에 시간의 흐름을 시계가 아닌 대추로 측정하곤 했다. 요리 시작, 하고 외치는 순간 커다란 냄비에 물을 붓고 대추 한 주먹과 감초 한 쪽을 넣은 뒤 아주아주 약하게 가스 불을 켠다. 그리고 요리에 열중하다 보면 어디선가 은은한 향이 몰려온다. 약불이라 쉽게 우러나지 않을 것 같은 냄비 속에서 대추의 단 향내가 솔솔 풍겨 오는 것이다. 요리하는 동안 계속해서 대춧물을 끓인 뒤 음식이 끝나면 대춧물의 맛을 본다. 물맛의 농도에 따라 그날 요리하는 데 걸린 시간을 측정하면 된다.
나는 이 분야에 첫발을 내딛는 후배들에게 주방에서 꼭 필요한 빠른 손놀림을 단련하라고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음식이 완성되기까지의 기다림을 즐겨 보라고 말한다. 오래 익혀서 수준급의 맛을 내는 식당에서 밥 먹는 사람들의 표정을 한번 보시라. 표정들이 어찌나 만족스러운지.
오래 끓임의 맛으로 소문난 맛집을 함양에서 만났다. 개업한 지 50년도 더 된 대성식당은 입구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묵은 때의 흔적이 느껴졌다. 방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울퉁불퉁하고 낮은 천정의 방은 옛집 구조를 변경하지 않은 허름한 모습 그대로였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천정을 제외하고는 깔끔하게 정돈된 모양새를 갖추었다. 엽차로 나오는 숭늉은 추운 날에는 따뜻하게, 더운 날에는 시원하게 나온다고 한다. 계절에 맞게 물의 온도까지 맞춰 나온 숭늉 한 컵을 쭉 들이키면 구수함에 절로 감탄사가 나오고, 이제 곧 나올 요리 역시 그 맛이 범상치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곳은 오로지 쇠고기 국밥만 판매한다. 스지(힘줄 부위)를 포함한 양질의 쇠고기와 토란대, 콩나물 줄기가 들어가 푹 무른 쇠고기 국밥은 은은하고 깊은 맛을 낸다. 국밥 속의 고기는 물론, 국물마저 그 맛이 부드럽다. 동치미 무를 채 썰어 무친 생채, 고추장에 박힌 마늘장아찌, 실고추가 얌전히 올라간 콩조림과 김무침 등 모든 반찬이 정갈하고 맛깔 난다. 경상도 음식답게 다소 짭짤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조화는 나무랄 데가 없다. 사전에 특별 예약주문을 하면 간장 맛이 감도는 수육을 맛볼 수 있는데, 미리 예약해서 먹을 가치가 있다. 그 맛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맛이랄까?
첫댓글 맛깔나게 잘 읽었어요..
대성식당은 가본듯~~ㅎㅎ
지리산은 맛집 투성이네요~
맛집투어도 해볼만 하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