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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번지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元陵의 특징 조선조 최장수(最長壽; 83세) 임금이자 최장 재위(在位) 국왕인 英祖{이금; 1694-1776, 재위 52년}와 그의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 1745-1805)의 원릉은 쌍릉(雙陵)으로 조성되었으며, 역시 봉분(封墳)은 병풍석(屛風石)을 생략하고 난간석(欄干石)만으로 호위하고 있습니다. 특히 원릉은 주변의 자연 경관과 능원의 조화가 잘 이루어져 있어 동구릉 내에서 아담하면서도 장엄함을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능입니다.
英祖代의 사료(史料)
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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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재위 |
사 료(史料) |
1725 |
1년 |
1월, 왕 붕당의 폐해를 하교(下敎) |
1750 |
26년 |
7월, 양역(良役) 반감, 균역청 설치 |
3월, 4대신 등의 관직 회복 |
1752 |
28년 |
9월, 왕손(王孫;정조) 탄생 |
1726 |
2년 |
12월, 전국 호수1,614,598호 인구6,994,400명 |
1755 |
31년 |
2월, 나주 괘서(掛書)사건, 범인 윤지 죽임 |
1728 |
4년 |
11월, 효장세자{진종} 죽음{1719- } |
1757 |
33년 |
2월, 왕비 서씨{정성왕후} 죽음{1692- } |
11월, <숙종실록(肅宗實錄)> 이룩됨 |
3월, 대왕대비{숙종 비}죽음{1687-} |
1730 |
6년 |
5월, 수어청(守禦廳)에서 총(銃)을 만듬 |
1758 |
34년 |
10월, 황해.강원도 지방 천주교 크게 보급 |
6월, 대비 어씨{경종 계비}죽음{1705- } |
1761 |
37년 |
4월, 세자 몰래 관서(關西)에 다녀옴 |
1732 |
8년 |
2월, 관상감 청(淸) 만세력(萬歲曆) 가져옴 |
1762 |
38년 |
윤5월, 세자 폐하고 궤에 가둬 아사 |
2월, <경종실록(景宗實錄)> 이룩됨 |
윤5월, 세자 호 회복, 사도(思悼)시호 내림 |
3월, 현종때 만든 혼천의(渾天儀) 수리 |
1763 |
39년 |
12월, 일본통신사 조엄 고구마 종자 보냄 |
1733 |
9년 |
1월, 전국에 금주령(禁酒令) 내림 |
1764 |
40년 |
2월, 왕세손{정조} 효장세자 후사로 입적 |
1735 |
11년 |
1월, 원자{장헌세자}출생{ -1762} |
1770 |
46년 |
8월, 신간<동국문헌비고>100권 이룩 |
1737 |
13년 |
11월, 안동(安東) 석빙고(石氷庫) 둠 |
1772 |
48년 |
8월, 서자(庶子)를 등용케 함 |
1738 |
14년 |
8월,백의를 금하고 청의(靑衣)를 입게함 |
8월, 동색금혼패(同色禁婚牌) 문에 걸게함 |
1741 |
17년 |
9월, 난전(亂廛)을 엄금하게 함 |
1775 |
51년 |
12월, 왕세손에게 정사(政事)를 듣게 함 |
1742 |
18년 |
3월, 탕평비 반수교(半水橋)에 세움 |
1776 |
52년 |
3월, 왕 승하{1694- }/ 왕세손{정조}즉위 |
1744 |
20년 |
8월, <속오례의(續五禮儀)> 편찬 |
3월, 효장세자(孝章世子) 추숭(追崇)하여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함 |
1747 |
23년 |
3월, 사육신 묘비(墓碑) 노량에 세움 |
1749 |
25년 |
12월, 전염병 전국 만연, 사망 속출 |
3월, 사도세자를 장헌(莊獻)세자로 함 |
뒷 이야기 조선조 최장수 임금이자 조선 후기의 중흥기(中興期)를 이룬 영조(英祖)는 붕당(朋黨)의 폐해를 시정하는데 힘써, 공정한 인재 채용의 원칙을 지킨 "탕평지책(蕩平之策)"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숙종(肅宗)-경종(景宗)대를 지나면서 무수한 당쟁(黨爭)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영조였기에 더욱 탕평(蕩平)에 매진하는 기반이 되었던 것입니다. 영조의 치적(治績)은 사치를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며, 균역법(均役法) 확립, 신문고(申聞鼓) 재설치 등 민생(民生)의 안정에 힘쓴 것에서 크게 부각됩니다. 또한 서적을 편찬하고 예의도덕(禮義道德) 권장하여 인륜(人倫)을 바로잡는 등 문화. 산업 분야도 크게 부흥시켰습니다. 안타까운 점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들{사도세자(思悼世子); 장헌세자(莊獻世子)}을 붕당(朋黨)의 폐해 속에서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일입니다. 그 후 남인(南人)계통으로 사도세자 동정옹호 세력인 시파(時派)와 노론(老論)계통으로 사도세자 적대공격 세력인 벽파(僻派)의 싸움은 정조(正祖)-순조(純祖)대까지 이어져 조선조 말기의 혼탁한 정치적 기류의 단면을 보여주게 됩니다.
貞純王后 김씨(金氏) 약사(略史) 1745년{영조 21년} 경주(慶州) 김씨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김한구(金漢耉)의 딸로 태어난 정순왕후는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한 뒤, 1759년{영조 35년} 15살의 나이에 당시 66세였던 영조의 계비(繼妃)로 가례를 올립니다. 정순왕후는 특히 사도세자(思悼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 사도세자의 폐위(廢位), 아사(餓死)에 적극 동조했으며,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대립에서도 항상 벽파를 두둔해, 정조(正祖)를 이어 어린 순조(純祖)가 즉위하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면서 남인계 시파와 종교상의 신서파(信西派)를 배격하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특히 천주교도들의 대학살로 몰았던 신유옥사(辛酉獄事) 후에 사교(邪敎)의 뿌리가 뽑혔다고 축배까지 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역시 슬하에 소생은 없었고, 1805년{순조 5년} 6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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