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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꽃 송수권
감꽃&
밝은 햇빛 속에
또록 또록 눈을 뜬 감꽃이 지고 있다.
아이들 두셋이 짚오리에
타래 타래 감꽃을 엮어 목걸이를 꿰면서
돌중 흉내를 내고 있다.
감꽃 속에 까치발 뒤꿈치도 묻히는 게 보이면서
또랑 또랑한 목소리도
크림색 밝은 향기에 실리면서
오월의 햇빛 속에
또록 또록 눈을 뜬 감꽃이 지고 있다.
감꽃 줍은 애들 곁에서
하나 둘 나도 감꽃을 주우면서
금목걸이를 목에 두를까
금팔지를 두를까
능구렁이 같은 나의 어두운 노래 끝도
실리면서
밝은 햇빛 속에
또록 또록 눈을 뜬 감꽃이 지고 있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꿈꾸는 섬 송수권
꿈꾸는 섬
말없이 꿈꾸는 두 개의
섬은 즐거워라
내 어린 날은 한 소녀가 지나다니던 길목에
그 소녀가 흘려 내리던 눈웃음결 때문에
길섶의 잔 풀꽃들도 모두 걸어 나와
길을 밝히더니
그 눈웃음결에 밀리어 나는 끝내 눈병이 올라
콩알만한 다래끼를 달고 외눈끔적이로도
길바닥의 돌멩이 하나도 차지 않고
잘도 지내왔더니
말없이 꿈꾸는 두 개의
섬은 슬퍼라
우리 둘이 지나다니던 그 길목
쬐그만 돌 밑에
다래끼에 젖은 눈썹 둘, 빼어 눌러 놓고
그 소녀의 발부리에 돌이 채여
그 눈구멍에도 다래끼가 들기를 바랐더니
이승에선 누가 그 몹쓸 돌멩이를
차고 갔는지
눈썹 둘은 비바람에 휘몰려
두 개의 섬으로 앉았으니
말없이 꿈꾸는 저 두 개의
섬은 즐거워라
우리 고향 민간요법으로, 눈에 다래끼가 나면 눈썹 두 개를 빼어 행인이 오가는 길의 돌 밑에 묻어놓으면 지나가던 사람이 차게 되고 그 돌을 찬 사람은 다래끼가 들게 되는데, 나는 중학교 때 20리 길을 통학하면서 한 소녀를 죽도록 사랑한 적이 있었고 다래끼가 나서 부끄러워 했던 적이 있었음.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대숲 바람소리 송수권
대숲 바람소리
대숲 바람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흐르는 게 아니라요
서느라운 모시옷 물맛 나는 한 사발의 냉수물에 어리는
우리들의 맑디맑은 사랑
봉당 밑에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대숲 바람소리만 고여 흐르는 게 아니라요
대패랭이 끝에 까부는 오백년 한숨, 삿갓머리에 후득이는
밤 쏘낙 빗물소리……
머리에 흰 수건 쓰고 죽창을 깎던, 간 큰 아이들, 황토현을 넘어 가던
징소리 꽹과리 소리들……
남도의 마을마다 질펀히 깔리는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흰 연기 자욱한 모닥불 끄으름내, 몽당빗자루도 개터럭도 보리숭년도 땡볕도
얼개빗도 쇠그릇도 문둥이 장타령도
타는 내음……
아 창호지 문발 틈으로 스미는 남도의 대숲 바람소리 속에는
눈 그쳐 뜨는 새벽별의 푸른 숨소리, 청청한 청청한
대닢파리의 맑은 숨소리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도라지꽃 송수권
도라지꽃&
도라지 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풋보리밥 한 술 된장국 말아 먹고
지름댕기 팔랑팔랑
올해 네 나이 몇 살이더냐
도래샘도 띠앗집도 다 버리고
눈 오는 날 주재소 앞마당 전남반(班)으로
너는 열여섯 정신대 머릿수건을 쓰고
고목나무 뒤에 붙어 참매미처럼 희게 울더니
오끼나와 테니안 라바울 사이펀
그 어디쯤 흘러가
한 초롱 여름산 더윗술을 걸러 주며
여적 그 섬 기슭 혼자 폈느냐
내 어려선 막내고모 같던 종(鐘)꽃
도라지 너를 보면
삼한(三韓)적 맑은 하늘
이슬 내리는 소리
호궁(胡弓) 소리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등꽃 아래서 송수권
등꽃 아래서
한껏 구름의 나들이가 보기 좋은 날
등나무 아래 기대어 서서 보면
가닥가닥 꼬여 넝쿨져 뻗는 것이
참 예사스러운 일이 아니다.
철없이 주걱주걱 흐르던 눈물도 이제는
잘게 부서져서 구슬 같은 소리를 내고
슬픔에다 기쁨을 반반씩 어무린 색깔로
연등날 지등(紙燈)의 불빛이 흔들리듯
내 가슴에 기쁨 같은 슬픔 같은 것의 물결이
반반씩 한꺼번에 녹아 흐르기 시작한 것은
평발 밑으로 처져 내린 등꽃송이를 보고 난
그후부터다.
밑 뿌리야 절제없이 뻗어 있겠지만
아랫도리의 두어 가닥 튼튼한 줄기가 꼬여
큰 둥치를 이루는 것을 보면
그렇다 너와 내가 자꾸 꼬여가는 그 속에서
좋은 꽃들은 피어나지 않겠느냐?
또 구름이 내 머리 위 평발을 밟고 가나보다
그러면 어느 문갑 속에서 파란 옥빛 구슬
꺼내 드는 은은한 소리가 들린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매향비 송수권
매향비(埋香碑)
천년 세월이 가고 또
천년 세월이 저물어도 썩지 않고
다시 살아서 돌아오는 것이 있다
몸도 향기도 물에 젖어서 고스란히
돌아오는 것이 있다
누가 이르기를 땅 속에 묻지 말고
물 속에 묻어라
참귀목 하나가 우물 깊숙히 묻혀서
불타고 남은 진신사리(眞身舍利)
침향(沈香)이여, 침향이여
고요한 시간에 손을 씻고
극락강에 지는 노을 보며 찻잔을 들면
노을도 그새 삼십년인가 사십년인가
저 노을도 자고 나면 이 세상 무엇이 남는가
우리 육신 꽃이 되는가 별이 되는가
날로 떡갈나무 잎새들 그림자 엷어가니
타는 듯 끓는 절벽 위에
영혼의 불 켜고 앉아
나는 한밤중 홀로 비비새 되어 운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면민회의 날 송수권
면민회(面民會)의 날
우리 청산포 사람들
죽지 않고 살다 보면 꼭두 일년에 한 번씩은
이렇게들 만나는군.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라는데
우리 죽지 않고 살아 만나는 게 이게 어딘가
철수, 용복이, 상철이, 또 내 아는 국민학교 동창들
갓 20대 안팎으로 여드름을 달고 와서
어른이 되고 호주가 되고
대물림 끝에 외톨박이로 떠돌던 놈들,
이젠 제법 출세도 했다.
희끗한 머리에 장군이 되고 사장이 되고
과장, 계장, 주사 하다못해
교회당 종지기 노인의 아들이었던
끝남이도 어엿한 목사가 되었다.
우리 청산포 사람들,
창경원의 벚꽃이 함빡 구름처럼 피는 날
명함을 박지 못한 놈들만 구석지에 모여
언제나 기가 꺾였다.
저희들끼리 키득거리고 술잔을 엎었다.
가설무대에서 마이크가 울고
삼류 가수보다 못한 굳세어라 금순이가 울고
흥남 부두에 눈발이 쳤다.
새로 바뀐 전화번호를 적고 번지수를 건네 받다 보면
새로 끼인 얼굴도 한둘,
산 속의 댕댕이넝쿨처럼 모진 인연들만 얽히고 설켰다.
이잣돈에 차용증 재판건이 나오고
저희들끼리 치고 받았다.
우리 청산포 사람들
막판엔 면장이 나서서 인사말에
우리 청산포 아바이들, 힘주어 수십 번도 더 들먹거렸고
언제나 그랬듯이 총무란 작자가
회관건립기금 기부자 명단을 호명하면
코빼기도 안 보인 장군이다 사장이다
출세한 놈들의 이름자만 거드름을 피웠다.
이 모임도 이젠 시들해졌군
누가 탄식을 했고
변질됐어 종간나새끼들!
누가 맞받아 응수를 했다.
아, 결국은 조금씩 취해서 돌아오는 길
못난 놈들만 고향냄새를 풀어 놓고 돌아오는 밤길
해마다 이맘때면 구로공단 막바지 언덕길엔
하늘 높이 둥근 달이 떠서
내 고향 성천강 물소리만 귀에 부서졌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산문에 기대어 송수권
산문(山門)에 기대어
누이야
가을산 그리메에 빠진 눈썹 두어 낱을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정정(淨淨)한 눈물 돌로 눌러 죽이고
그 눈물 끝을 따라 가면
즈믄 밤의 강이 일어서던 것을
그 강물 깊이깊이 가라앉은 고뇌의 말씀들
돌로 살아서 반짝여 오던 것을
더러는 물 속에서 튀는 물고기같이
살아 오던 것을
그리고 산다화 한 가지 꺾어 스스럼 없이
건네이던 것을
누이야 지금도 살아서 보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그 눈썹 두어 낱을 기러기가
강물에 부리고 가는 것을
내 한 잔은 마시고 한 잔은 비워두고
더러는 잎새에 살아서 튀는 물방울같이
그렇게 만나는 것을
누이야 아는가
가을산 그리메에 빠져 떠돌던
눈썹 두어 낱이
지금 이 못 물 속에 비쳐옴을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석남꽃 꺾어 송수권
석남꽃 꺾어
무슨 죄 있기 오가다
네 사는 집 불빛 창에 젖어
발이 멈출 때 있었나니
바람에 지는 아픈 꽃잎에도
네 모습 어리울 때 있었나니
늦은 밤 젖은 행주를 칠 때
찬 그릇 마주칠 때 그 불빛 속
스푼들 딸그락거릴 때
딸그락거릴 때
행여 돌아서서 너도 몰래
눈물 글썽인 적 있었을까
우리 꽃 중에 제일 좋은 꽃은
이승이나 저승 안 가는 데 없이
겁도 없이 넘나들며 피는 그 언덕들
석남꽃이라는데……
나도 죽으면 겁도 없이 겁도 없이
그 언덕들 석남꽃 꺾어 들고
밤이슬 풀 비린내 옷자락 적시어 가며
네 집에 들리라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아그라 마을에 가서 송수권
아그라 마을에 가서
□ 1
원숭이떼들의 울음소리
캄캄한 숲 속에서 새어나오고
원주민촌에서 타오르는 저 밝은
모닥불 한 줄기
스콜이 퍼붓는 황혼 나절
나는 저려드는 온몸을 말리며
물소뿔에 독수리 문장(紋章)을 새겨 넣은
아그라 마을의 초입에서
추위에 떠는 거러지 하나를 만났다
콜록콜록……
산울림도 콜록콜록……
메아리도 없더라 콜록콜록……
가도 가도 긴 터널 콜록콜록……
세계는 외로운 송유관뿐이더라 콜록콜록……
얼마나 이 참회의 길을 걸어가야 콜록콜록……
저 끝없는 천국의 문에 이르는 것이랴 콜록콜록……
□ 2
우리의 신(神)은 콩꽃 속에 숨어 있고
듬뿍 떠 놓은 오동나무 잎사귀
들밥 속에 있고
냉수 사발 맑은 물 속에 숨어 있고
형벌처럼 타오르는 황토밭 길 잔등에 있다
바랭이풀 지심을 매는 어머니 호미 끝에
쩌렁쩌렁 울리는 땅
얼마나 감격스럽고 눈물 나는 것이냐
캄캄한 숲 너머
모닥불빛 젖어 내리는 서북항로
아그라, 아그라
내 사는 조그만 마을
왔다메!
문둥아 내 문둥아 니 참말로 왔구마
그 말 듣기 좋아
그 말 너무 서러워
아 가만히 불러 보는 어머니
솥단지 안에 내 밥그릇 국그릇
아직 식지 않고
처마끝 어둠 속에 등불을 고이시는 손
그 손끝에 나의 신(神)은 숨쉬고
허옇게 벗겨진 맨드라미
까치 대가리
장독대 위에 내리는 이슬
정화수 새로 짓고
나의 신(神)은 늙고 태어나고
새 새끼처럼 조잘댄다.
아도, 창작과비평사, 1985
아도 송수권
아도(啞陶)
아도*란 무엇이냐
질그릇이다.
인사동 골짜기의 고물상 같은 데 가서 만나보면
입은 기다랗게 찢겨져 있고 두 귀는 둥글게
구멍이 패어 있는
입이 있어도 벙어리고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못생긴 우리네의 질그릇이다.
유언비어를 날조하거나
겁쟁이 지식인들의 입을 누르는
그것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은밀히 건네는
유가풍의 금서(禁書)와 같은
질그릇이다.
사화가 극심했던 시절엔 서울의 아도상(商)은
짭짤한 재미를 보았고
외세가 판을 치던 시대엔
주먹만한 아도를 사들고 관직에서 떨려난 선비들은
줄을 이어 낙향했다.
우리들의 입에 재갈 물리고 귀에 자물쇠 채우는
이 희한한 물건은
이태조가 서울의 땅 기운을 끄기 위해
간신배 정도전을 시켜 고안해 낸 물건이었다.
또한 수상기가 오른 입의 뻗세디 뻗센 집 문간엔
아도 일백 개를 사서 쌓아 두기도 했다.
신라 때 복두장이는
하루 아침 임금의 귀가 당나귀 귀로 변해 버린 것을 보고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
도림사 대숲가에 가서 외치다
아무도 듣는 이 없어 복장이 터져 죽었다지만
나는 오늘 이 도시의 어디선가
목을 조르며 도둑고양이처럼 오는 최루탄 가스에
재채기 콧물 눈물 범벅이 되면서
잎 핀 오월의 가로수 밑에 비틀거리면서 비틀거리면서
그 시대에서 한 발짝도 더 깨어나지 못한
또 하나의 아도가 되어가는 내 모습을 본다.
아도 아도 아도 아도 아아아아 아도
이 땅의 시인이여 만세.
* 아도(啞陶): 조선 건국시 이태조가 정도전을 시켜 만든 주먹만한 질그릇. 입은 찢어져 있고 눈이 감겨 있는 얼굴 모양이었는데, 이 질그릇을 지식인의 대문간에 하룻밤새 100개씩 쌓아 놓으면 `말조심'하라는 요시찰 인물임을 표시했고 그래도 입이 빳빳하면 끌어다 고문을 가했다고 함.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여승 송수권
여승(女僧)&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뒤돌아 뛰어 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 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 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우리 나라 풀이름 외기 송수권
우리 나라 풀이름 외기
봄날에 날풀들 돋아 오니 눈물난다
쇠뜨기풀 진드기풀 말똥가리풀 여우각시풀들
이 나라에 참으로 풀들의 이름은 많다
쑥부쟁이 엉겅퀴 달개비 개망초 냉이 족두리꽃
물곶이 앉은뱅이 도둑놈각시풀들
조선총독부 식물도감을 펼치니
구황식(救荒食)의 풀들만도 백오십여 가지다
쌀 일천만 섬을 긁어가도 끄떡 없는 민족이라고
그것이 고려인의 기질이라고
나마무라 이시이가 서문에서 점잖게 게다짝을 끌고 나온다
나는 실제로 어렸을 때 보리 등겨에 토면(土麵)국수를 말아 먹고
북어처럼 배를 내밀고 죽은 늙은이를
마을 앞 당각에 내다버린 것을 본 일이 있었다
햄이나 치이즈 버터나 인스턴트 식품이면
뭐나 줄줄이 외워대는 어린놈에게
어서 방학이나 왔으면 싶다
우리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센인바리[천인침(千人針)]를 받으러
이 마을 저 마을 떠돌았듯이
나 또한 이 나라 산천을 떠돌며
어린것의 식물 표본을 도와주고 싶다.
쇠똥가리풀 진드기풀 말똥가리풀 여우각시풀들
이 나라에 참으로 풀들의 이름은 많다
쑥부쟁이 엉겅퀴 달개비 개망초 냉이 족두리꽃
물곶이 앉은뱅이 도둑놈각시풀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우리들의 사랑 노래 송수권
우리들의 사랑 노래
남풍 불어 미루나무밭 물 푸는 소리 나거든
직녀여, 그대 산 아래 오두막 짓고
그 미루나무 가지들 몸을 굽혀 북쪽 산마루에까지
허옇게 허옇게 속잎새 날려 오는 날
나는 그곳에 초막을 짓세
하늘 두고 맹세한 우리들의 사랑……
철따라 부는 남풍과 북풍
남풍에 미루나무 속잎새들 몸을 굽혀 오거든
그대 오는 걸음새 내 마중 나가고
북풍에 미루나무 겉잎새들 팔팔거리며
남쪽으로 몸을 굽혀 가거든
직녀여, 그대 내 발걸음 마중 나오게
하늘 두고 맹세한 우리들의 사랑……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우리들의 즐거운 집짓기 놀이 송수권
우리들의 즐거운 집짓기 놀이
이 탁자를 보십시오. 흰줄로 그어진 중앙선에 박혀 있는 UN기와
붉은 깃발이 조금씩 높아지며 펄럭이는 것을 ― 이 선을
연장해 나가면 똑바로 휴전선이 되는 게지요? 그럼, 이 집을 설계할 때
이 중앙선만는 신성불가침의 절대적인 사명감으로 단 0.1mm의 오차도
없이 완벽한 설계를 했다 이 말 아입니껴. 오, 언제나 즐거운 나의 손님
커다란 딸기코를 흔들며 오 땡큐 하면 언제나 저쪽도 쎄쎄 이렇다
아입니껴. 팔에 빨간 완장을 두른 쪽은 언제나 북쪽 강냉이 수염들이구
넥타이를 풀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쪽은 언제나 이쪽 아이들 아입니껴.
아 지금 ××차 무슨 정전위원회가 시작되나 봅니다. 무쇠 테이블이
셋, 무쇠 스프링 의자가 똑같이 중앙선을 마주보며 한쪽씩이
여섯, 이 탁자 위에 올려진 유일 품목, 오늘 글쎄 어떤 상품이
진열될지요. 납북어부? 무차별 사격? 다단추식의 지뢰? 아웅산 사건으로 인한
테러근성? 인도주의 교습? 88 올림픽 교류? 우리 솔직히 터놓고 합시다.
그래, 그 말버릇 여전하시구레. 뭐라구? 갓댐!(죄없는 무쇠탁자 흔들흔들)
두 개의 판자문 열고 닫고. 남문과 북문. 허 이거 왜 이래? 노동자 농민들 피땀 빨아 이젠
낯가죽이 뻔뻔해졌다 이거 아입니껴? 만나자마나
또 공세로군! 공세? 디게 무서워하네.
정초부터 떨긴? 그 성깔 여전하시다레.
담배 피기라요. 담배 피기라요. 개성시 남단, 문화회관이 섰던 자리
아니, 문화회관의 변소, 우리 지금 앉아 있는 이 자리
그 변소간이란 것, 동무나들 알기나 하갔수레. 이 똥자리를 깔구서라도
우리에게 필요한 건 까꾸로든 옳게든 통일이우다. 아, 우리들의 즐거운 집짓기놀이.
저는예, 이 문을 자유로이 남문으로 빠지려다 영웅적으로
귀쌈을 맞을 뻔한 적도 있지만예, 지금은 철이 들어
노크(에취! 이게 부르조아 무슨 냄샌데?)도 할 줄 알고
급하면 우리 중앙어로 `탕! 탕!' 두 번, 이렇게. 그러나 익숙해진 게 아니라예.
팔에 완장을 두르고 사타구니에 개짐을 처박고 피양에서
내려오는 날은 아침부터 동무들에게 시집 간 것처럼 괜히
기분이 좋아라예. 뭐라꼬? 퇴폐적이라꼬예? 이래봬도
내 처녀성은 우리 아바이 동무나도 알고 있다는 것
이거이 동무나들 알기나 하갔수레.
아도, 창작과비평사, 1985
위인의 집 송수권
위인의 집
나는 오늘 빠리 `위인의 집' 무덤들 앞을 지나가며
우리에게도 이런 무덤의 광장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관광 안내원에게 나뽈레옹의 무덤이 거기 있느냐고 물었더니
지성(知性)을 칼로 다스린 자는 거기 묻힐 수 없다고 한다.
나뽈레옹은 키가 작아 유럽 정벌을 감행하면서도
일곱 번 저격을 받아
차례로 여섯 마리의 말이 죽고도 살아 남았다고 한다.
드골 대통령도 자기의 죽을 때를 알아
거기 묻히도록 의회에서 정식 발의를 했지만
드골리즘은 난폭성이라고 딱지가 붙어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는 것이다.
전유럽을 경영했던 나뽈레옹도
레지스땅스의 아버지라 불리던 드골도
끝내 그 무덤을 비집고 들어 갈 수만은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면 드골의 코가 높고 뾰족하기로는
에뺄탑보다 더하지만
드골의 코보다 더 뾰족한 것은 빠리 시민들의
지성이라는 것이다.
나는 잠시 소르본느 대학의 우중충한 건물을 뒤로 돌아
이 무덤에 줄을 이어 선 주검들을 생각하며
우리에게도 이런 무덤의 광장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서울에 이런 광장이 하나 들어선다면
도대체 여기 묻힐 위인은 몇 명이나 되느냐고 생각했다.
그리고, 역겨움을 느꼈다.
나뽈레옹이나 드골이 거기 묻히지 못한 것처럼
우리를 잘못 길들이고 잘못 가르친 역겨운 인물들,
나는 오늘 이 무덤 앞을 지나가며 어려서
시골집 마당에 횟배를 앓으며
배고파 잦아진 목소리로 불러대던
우리 건국의 위인 제1호 리승만 대통령 할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는 하와이로 쫓겨 갔다가 거기서 죽고, 후에 다시 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그분을 처음으로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독재를 쓴 것보다 정치를 잘못한 것보다 이제,
나는 그의 시작이 더 잘못되었다고 믿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아도, 창작과비평사, 1985
임진강 오리떼 송수권
임진강 오리떼
오는구나 잘들 오는구나
해마다 이맘 때면 저희들끼리
재잘거리며 훨훨 산을 넘어 강을 건너
임진강 너른 벌판에 털썩털썩 주저앉는구나.
와글와글 재잘재잘
와글와글 재잘재잘
함경도 낯익은 아바이 사투리같고
평안도 낯익은 에미나이
감자밭 감자 캐는 소리같고
내 살던 칠성문 밖
보통학교 하급반 시절
조선어독본 글 외는 소리같고
보통강이 얼면 보통강에 나가
썰매 끌며 얼음 끄는 소리
와글와글 재잘재잘
와글와글 재잘재잘
개성 뒷산을 넘어 임진강을 건너
해마다 이맘 때면 국경선도 휴전선도
귀쌈을 패버리고
오는구나 잘들 오는구나
한 철을 살다 훌쩍 떠날
아, 우리는 오리떼만도 못한
네 아비 내 어미 원통하게
살다 죽은 땅
(오리떼는 산비탈 등성이에 그림자를 떨구고 세찬 하늘 여울물 휘감던 날, 아배는 오리치를 놓으러 논으로 내려가고 나는 기다리던 아배 오지 않아 아배 버선목 뒤집어 시악이 나서 물어뜯던 날)
오는구나 잘들 오는구나
휴전선도 국경선도 밀어붙이고
귀쌈을 패버리고
아도, 창작과비평사, 1985
자수 송수권
자수(刺繡)
어머님 한 땀씩 놓아 가는 수틀 속에선
밤새도록 오동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매운 선비 군자란 싹을 내듯
어느새 오동꽃도 시벙글었다
태사(太史)신과 꽃신이 달빛을 퍼 내는 북전계하
말없이 잠든 초당 한 채
그늘을 친 오동꽃 맑은 향 속에
누가 당음(唐音)을 소리 내어 읽고 있다
그려낸 먹붓 폄을 치듯
고운 색실 먹여 아뀌 틀면
어머님 한삼 소매 끝에 지는 눈물
오동잎새에 막 달이 어린다
한 잎새 미끄러뜨리면 한 잎새 받아 올리고
한 잎새 미끄러뜨리면 한 잎새 받아 올리고
스르릉스르릉 달도 거문고 소리 낸다
어머님 치마폭엔 한밤내 수부룩히 오동꽃만 쌓이고…….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저승꽃 송수권
저승꽃&
어느 노옹(老翁)의 벽에서였던가
수묵색으로 떠 오른 수락산 비탈길을
고깔 쓴 늙은 비구니 하나가 오르고 있었다.
수락산 아래 적막한 들길에도
난향(蘭香)이 그윽하였다. 뒷짐지고 올라 가는
그 여승의 발걸음에도 무릿돌들이 굴러 내리며
맑은 향 그득하니 퍼졌다.
사람이 오래 살면 몸에서도 절인 향기가 저렇듯
온 들판 하나를 다 적시는 것일까.
또 한번은 소월시문학상 식전에서
박두진(朴斗鎭)선생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조브장한 어깨를 배경으로 이마와 얼굴에
올라 붙은 살이 주름살로 영글고 그것들은
잘 마른 가죽끈처럼 절로 소리 울려 올 듯했다.
북을 메었으면 저 가죽끈으로 두루두루 우리 산천
잘 울리는 북을 메었으면…… 아니 검은 돌에
새겨진 그것은 몇 가닥의 무늬석이었다. 아니
그것은 잘 피어가는 저승꽃이었는지도 모른다
저승꽃에서도 향기가 나다니! 꼬장한 키가
우리집 앞, 해마다 수도 없이 많은 대추알을
떨구고 선 그 대추나무였다.
사람이 얼마나 오래 살면 깡마른 치수에서도
물에 젖은 참귀목 같은 향이 저어나는 것일까
저승꽃이 만발한 이 세상 많은 꽃 중에서
얼굴과 얼굴이 스쳐 이루는 모진 세상, 아들아
너는 이 다음에 크면 네 선 자리가 바로 그
저승꽃자린 줄 알고 이 세상 온갖 말들이
바로 그 저승새의 서러운 울음인 것을 알아라.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전설 송수권
전설(傳說)&
바닷가 오두막집에 늙은 양주 내외 살았다.
옛날에 할멈은 풀무잡이 윙윙 바람을 풀고
옛날에 영감은 망치집이 쉬지 않고 불꽃을 쳤다
낮과 밤을 이어 끝없는 노동이 시작되고
마을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날 때
타는 불 보고 불 같은 아이를 낳고 싶었다
먼 데 있는 도시의 집들을 꿈꾸고
망치야 날아라 망치야 날아라
새들처럼 가볍게 떠가는 꿈을 꾸었다
폭풍이 치고 온 산과 들 바다에 쿠렁쿠렁
망치소리 울릴 때
길 잃은 배들이 망가진 닻을 풀고
고개 너머 마을 사람들이 연장과 도구를 찾아 갔다
할멈은 풀무잡이 윙윙 바람을 불고
영감은 모루 위에서 쇠집게로 물통 속에 불을 던졌다
물과 불이 만나 싸늘하게 식은 쇳덩이를 토해 내고
이제 우리는 알았다
그것들이 맹수처럼 덤벼 들어서
어떻게 우리를 사냥하고 물어뜯는가를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정든 땅 정든 언덕 위에 송수권
정든 땅 정든 언덕 위에
낯선 곳 낯선 풍경을 지치도록 달리다 보면
예 살던 징검돌 하나라도 이리도 마음에 맺히는 거
물방아는 처릉처릉 하얀 물잎새를 쳐내고
달맞이꽃이 환한 밤길은
솔솔 어디선가 박가분 냄새가 코를 미었다
나는 지금 남부 이탈리아 롬바르디 평원을 달리며
이 평원을 다 준다 해도
내 편히 쉴 곳 없음을 안다
베르디가 노래한 아침 태양도
내 가슴을 적셔 내리진 못한다
어디에선가 거대한 성곽에서 종이 울리고
진군의 나팔소리 따라
천국이 하늘 위에 있다고 일러 주지만
아무래도 내 깃들일 수 있는 곳은
이 대평원이 아니라 대숲 마을을 빠져 나온 저녁 연기들이
낮게 낮게 깔리는 그러한 들판이었다
시냇물이 좔좔 흐르고 몇 개의 징검돌이 놓이고
벌떡벌떡 살아 뜀뛰는 어린 날처럼
물방개라도 만나보고 싶은 곳이다
이틀이나 사흘쯤 낯선 곳 낯선 풍경을 달리다 보면
이리도 흙냄새 그리운 거
징검돌 하나라도 이리 마음 속에 떠오르는 거
아아 문둥이 장돌뱅이처럼 내 가슴에 닳아지는 얼굴들
지금쯤 흙담집 앞뒤란을 캄캄하게 겨울눈이 내리고
햇빛이 맑은 아침나절은 앞 마당
참새 발자국도 깝죽거리겠다
구석진 골목길 왕거무가 집을 짓다 말고
따뜻이 등을 기대이겠다
멀리 보리밭 들판을 청둥오리떼 날아 내리고
보리싹 밀싹 파 먹느라
또 남녘벌 끝 시끄럽겠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제ㅅ날 송수권
제(祭)ㅅ날
천 길 눈구렁 속에 까마귀 울음 파묻히고
고비나물 한 두름 장바구니에 담아 오고
큰고모 작은고모 장바구니에 기별 통지하고
길등(燈)을 따라 길등(燈)을 따라
호롱불 그리메 크던 귀신아
닭이 울면 돌아가던 귀신아
대추나무 연이 걸린 자리, 지금도
대추는 붉어 소리치는가
대추 한줌 놓고 울고, 빈 물 떠 놓고 울고.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지리산 뻐꾹새 송수권
지리산 뻐꾹새
여러 산봉우리에 여러 마리의 뻐꾸기가
울음 울어
떼로 울음 울어
석 석 삼년도 봄을 더 넘겨서야
나는 길 뜬 설움에 맛이 들고
그것이 실상은 한 마리의 뻐꾹새임을
알아냈다.
지리산 하(下)
한 봉우리에 숨은 실제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 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 중(中)
저 연연(連連)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남해를 흘러 들어
남해 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 하(下)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細石) 철쭉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징검다리 송수권
징검다리
햇빛은 산과 들에 부드럽게 빛나고
물결은 풀어져 물방아는 쿵쿵
바둑이가 든 그림책 한 권을 잘도 넘기도 갔다
바둑이 대신 어머니는 자꾸 나를 부르시고……
지금도 물방앗간 앞을 가로 지른 서른 몇 채의
어느 징검돌 위에 서서
나의 다릿심을 풀어 내느라
어머니는 손을 내밀고 서서 나를 부른다
아마 그때가 입학하던 첫날이었을 게다
물방아도 봄이 되자 더 힘을 내어 돌고
내 이웃의 소녀들처럼 뒷머리채를 흔들어대며
징검돌들은 흐젓이도 물 속에 처박혔었다
낄낄낄 웃음소리를 내고 도령아 이도령아
내 뒷머리채 못 밟아준 것도 죄지……
이 날은 해가 꼴딱 지도록 어머니와 그 짓을 되풀이하여
내 다릿심이 반남아 풀리는 것을 보았다
팔짝, 팔짝, 쿵, 쿵, 물방아는 돌고 세월은 가고……
어른이 된 지금에도 아주아주 슬픔에 발을 적시어
내가 영 일어서지 못하는 날은
조약돌 몇 개로 물낯바닥을 마구 흐려 놓고
어머니는 그 돌들 위에 서서 나를 부른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춘향이 생각 송수권
춘향이 생각
앞산머리 자주빛 구름 옥색빛이 섞갈려 휘돌더니
그 빛 연한 솔잎마다 그늘지는 소리
산봉우리들도 수런수런 잔기침을 놓아
보기 좋은 달 하나 해산(解産)하고
몸을 푼다.
선한 눈, 코, 입, 짙은 숱, 눈썹
처음 눈 맞춘 죄로
옥사장 큰 칼을 쓰고 창틀을
넘어다볼 줄이야!
진개내 앞냇가에 개가 짖어 개가 짖어
은장도 날을 갈아
눈물에 띄운
달하
귀기서린 앞산 그리메
밤부엉이 울어쌓는데
구리 동전 녹슨 상평통보
몇 바리쯤 동헌 마루에 져다 부려야
이 몸 하나 평안하겠느냐? 평안하겠느냐?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평사리행 송수권
평사리행(平沙里行)
평사리의 섣달 어두운 하늘에 떠서
갈갈 울고 오는 기러기떼
쓸쓸한 바람 따라 이 들녘 끝
일렬횡대로 내리는 것 보니
그날, 봉준의 서상대(書床臺) 위에 떨어진
육효점괘 한번 보는 듯하군
진 날 갠 날 마른 땅을 골라
언제고 태평한 세월 평사낙안(平沙落雁)이야
따로 있었을까마는
이곳 촌로(村老)들의 말에 따르면
육효점괘 하나는 늘 입성이 나
경천, 경천을 조심하라고
그래서 봉준은 공주성을 칠 때도
노상 비실거리며 경천점(敬天店)을 겉돌기만 했던가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십이월 막소금 같은 눈발에 쫓기어 오다
피로리(避老里)의 한 주막집에 들러
그 경천(敬天)에게 참말 목을 졸릴 줄이야
피로리(避老里) 또한 피로하게 작부나 얻어 끼고
한세상 목마른 술이나 얻어 마실 땅인 것을
오늘 평사리 이 넉넉한 들을 빠져 나오며
역사는 이긴 자의 힘이고
패배자의 군소리라는 것을
저 들녘 끝 떠도는 쓸쓸한 바람이 일러 주었네.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풍장 송수권
풍장(風葬)
오늘은 할아버지 고향 가는 날
차마 성한 육신, 백발로도 가지 못하고
혼백으로 바람 타고 가는 날
살아서는 산도 옮길 듯한 한이
삭아서는 한줌의 재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바람아 불어다오
추석 달이 뜨면 갈거나
임진각 누마루에 올라 함부로
북녘땅 여기저기 손가락을 디미시던 할아버지
어느 날은 채송화며 봉숭아
꽃씨 주머니를 풍선 끝에 매달아
바람도 없는 날
우우우우……
입으로 불어올리시던 할아버지
조선호텔 로비에서 웬수 같기만 하던 얼굴이
TV화면에 불꽃처럼 스치던 날
예수당이 강냥욱인 지금도 살아 있었수구레
동갑내기라고 좋아서 껄껄 웃으시며
여기 땅문서가 있다고 고의춤 풀어 놓고
손바닥을 흔들던 할아버지
임진강 나루목을 건너 저기 저
개성 뒷산을 넘어서
황해도 해주 근처 옹진반도 안악골까지
바람아 불어다오
오늘은 할아버지 물길 따라 바람 따라
고향 가는 날.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한국의 강 송수권
한국의 강(江)
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
돌무지에서도 어린 느티나무 싹이 자라듯
처음은 가느다란 가느다란 풀무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것이 귀또리 울음처럼 잎을 달고 제 날기뼈를 쳐서
저 깊은 골짝으로 막 밀어낼 때는, 가지는 휘늘어져
검은 구렁이처럼 운다. 이제는 융융하다 소리가 없다.
그러나 잘 들어 보면 한밤중 그것들은 저 벌판,
늑대들처럼 몰려 서서 짖는다. 어떤 창이 와도 이 옆구리
찌를 수 없고 어떤 대포알이 와도 이 심장 죽일 수 없다.
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
창창한 어린 잎을 달고서는 계룡산 연봉을 보며
우쭐거리던 처녀시절 ― 부여(扶餘), 참 좋은 숲 하나를 이루었다.
백마를 타고 강폭을 미끄러지던 범선의 돛대를 향하여
화살을 날리는 꿈 같던 백제의 청년은 죽었다.
시들해지고 그후 밑뿌리까지 다 보일 듯하더니
강경에 이르러 장꾼들의 멸치젓 새우젓 어리굴젓 독에서도
왁자지껄 진딧물 같은 물벼룩들이 툭 툭 떨어진다.
강물은 뿌리로 보면 한 그루 나무와 같다.
그것들은 모이고 오여 밑둥까지 꺼머진 채 숲을 이루며
어깨와 팔다리의 근육을 우그려뜨려서는 금산사의 미륵보살
흰 눈썹에도 어진 손 얹고 지나가는 것을, 그러고도
논산 제2훈련소 앞을 서서남으로 빗밋이 에두르고
휘두르다가는 이제는 그 숲속에서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에 얼려 이제는 더 어쩔 수 없이
전라도 사투리가 열매들처럼 툭 툭 불거진다.
아, 저 보아라 저무는 강둑 착한, 젖먹이 소를
앞세우고 가는 농부의 뒷모습, 서해 짠물 속에
머리를 처박고 들어가 이제는 멸치떼고
세우떼고 마구 퍼 올리는 한국의 강을, 저
이끼 슬은 관촉사의 저녁 종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러고도
이 벌판 가득 떠 오르는 저 찬란한 별들을.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해빙기 송수권
해빙기(解氷期)&
며칠째 쌓이던 눈이
다시 녹으면서
대성동(大成洞) 마을 움집들의 추녀 끝을 둘러
고드름발을 쳤다.
우리 고숙(姑叔)은
삼동(三冬)내 눈사태 속을 흐르는
물소리도 싫어지고
마른 산약(山藥) 뿌리를 다듬으며
달장깐이나 막힌 화개(花開)장길이 못내 서운타.
지리산(智異山)을 겉돌면서 살아온
고숙의 한평생
이 봄은 심메마니 어린 싹이라도 볼까
삼동(三冬) 허연 꿈 속에서도 만나지는 떡애기.
아장아장 걸어오는 부리시리 산삼
한 뿌리라도 만나질까.
유마경(維摩經) 한 구절 같은 햇빛 하나가
고드름발에 엉기면서
지리산(智異山)일대의 산봉우리들을
거느리고 왔다.
산맥들이 풀리면서 돌아가는
엇둘 엇둘 소리…….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
향전매 송수권
향전매(梅)
유도화(柳桃花)가 만발하여
제주도의 여름은 서늘하더니
어느덧 풍설 속에 향전매* 한 그루 피어
그 향기 물길 천 리를 타고 간다.
애랑아 이 겨울날
너는 어디에 나비같이 숨었느냐
너를 찾아 해변 곳곳 마을 다 뒤져도
불 같은 사랑 퍼부을 계집 하나 없더니
정분으로 말하면 이 세상 마지막
내 시린 이빨 네 쪽집게로 모두 뽑아 놓고
닛뮤윰 하나로 사랑한다 사랑한다
네 입술 위에 찍고 싶었는데
비장놈들 줄줄이 허리에 꿰차고
한번 뭍으로 가선 소식 없던 너
이젠 금니빨 몇 섬이나 짊어지고 와
저 모슬포 쪽 바다에 뿌려대며
동박숲에서 지저귀는 동박새가 되어 우느냐.
나는 향전매 독한 향기에 코피를 쏟으며
천년을 살아 도는 장승이 되어
너를 찾아 눈발 속을 헤매는데
애랑아 이 겨울날
너는 어디에 나비같이 숨었느냐.
* 향전매: 제주도에만 자생하는 매화로 눈 속에서 봄을 알리는 꽃.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지리산 뻐꾹새, 미래사,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