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내가 세상 빛을 봤을 때는 시골 형편은 대체로 어려웠다. 가족계획이 없었던 때인지라 집집이 예일곱 자식은 보통이었다. 입에 풀칠하게 어렸웠던 시절이었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을 걷이 후, 곳간에 벼는 바로 동이 나고 바로 춘궁기다. 밥상엔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쌀밥은 제삿날이나 명절이 아니면 구경하기 힘들었다. 간혹 쌀밥을 볼 때면 목 울대가 아래 위로 분주히 움직였다.
나는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날 때는 우리집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남부럽지 않았게 살았다. 아버지는 성품이 인자하시고 성실하셨다. 그러나 술을 워낙 좋아해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다. 농번기가 끝나면 친구들과 주막에 살다시피 했다. 해질 무렵이면 할머니는 아버지를 데려오라 하셨고, 나는 어머니 손에 끌려 만취 상태인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주막에 계시는 아버지 모습이 심각했다. 우리 모자를 늘 미소로 반겼는데 그날은 술잔을 든 채 허공만 바라보고 계셨다. 황망한 모습이 역력했다. 맘씨 좋은 아버지는 친구 분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채, 여러 곳에 빚 보증을 선 것이 화근이었다.
아버지의 잘못된 빚 보증은 전 재산을 한 방에 고스란히 날아갔다. 우리는 고향을 떠나 성주군 용암으로 쫓기든 이사를 가야 했다. 당시 할머니는 아흔이 넘었다. 할머니 토해 내는 한숨 소리는 명주실 보다 더 질겼다. 할아버지와 함께 평생을 일구어 놓은 전 재산을 허공에 날려버렸으니. 할머니는 실의에 빠져 음독을 시도하기까지 이르렀다. 다행히 큰 사고는 면할 수 있었지만, 할머니 상심이 오죽했으랴! 철없는 초등학교 2학년이던 나까지 아버지를 원망했으니 말이다. 그날 부터 우리는 셋방살이에 들어갔다.
그런 와중에도 할머니는 유독 나를 사랑했다. 칠 남매중 맏이로 아들인 나를 낳았으니. 할머니는 나를 어머니 품에 넘기기 싫어했다. 당신은 나를 끼고 살다시피했다. 할머니 넓은 치마폭은 나의 놀이터이며 큰 그늘이었다. 먹을 것이 있으면 의당 큰손주 몫부터 챙기셨다. 잔치집, 돌잔치에 돌아오실 때면 손수건에 뭔가를 싸서 치마폭에 감춰왔다. 집안을 두루 살피며 동생들 몰래 나를 먼자 챙겼다. 할머니는 밥소쿠리에 한켠에 쌀밥 한 주걱 담고 그 위에 꽁보리밥으로 위장했다. 끼니 때가 되면 무슨 보석을 캐내듯 쌀밥을 파내어 나의 밥그릇에 넌지시 얹어주었다.
아버지는 새경을 먼저 받기로 하고 머슴생활에 들어갔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술과 담배를 모두 끊었다. 그 결심을 실행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여태 아픔으로 다가온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도와 이 동네 저 동네 행상을 했지만, 아홉 식구 건사하기엔 턱 없이 부족했다. 초등학교 시절, 점심 도시락을 싸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처음엔 친구들이 애처롭게 생각하고 도시락을 나눠 주었고, 때론 내 도시락까지 챙겨주곤 했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그 이상 도움은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느 점심시간었다. 반장이 자기 집에서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 그의 부모님은 학교 앞, 슈퍼와 문방구를 운영하는 후덕한 분이었다. 친구 어머니는 따뜻한 쌀밥과 멸치 볶음, 계란말이를 해주었다. 춘궁기가 지난 여름인데도 따뜻한 쌀밥을 먹는 게 신기했다.
“잘 먹겠습니다” 하얀 쌀밥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가족들 얼굴이 떠올랐다. 배고픔에 시달리실 할머니, 어린 동생들, 혼자 쌀밥을 먹는다는 게 미안했다. 어떻게 밥이 식도를 통과했는지....
“잘 먹었습니다.” 부랴부랴 뛰쳐나왔다. 꽁보리밥, 갱죽에으로 땜질하던 나로선 그 때의 쌀밥을 잊을 수 없다. 그 날 이 후 점심시간이면 친구들 몰래 슬며서 뒷산에 올라 죄 없는 소나무 껍질만 벗겼다. 껍질 속에는 말랑말랑한 송기가 나온다. 달짝지근한 송기는 허기를 채울 수 없었다. 허기진 속을 물로 채웠다. 졸업할 때까지 나의 점심은 소나무 껍질과 수돗물이었다.
한창 성장할 나이에 굶기를 밥 먹듯 했으니 얼굴은 항상 누렇게 떠있었다. 키도 자라지 않았다. 늘 비실 거렸다. 영양실조에 걸려 쓰러지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신세를 한탄하며 남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으리라. 가끔 학교에서 옥수수 빵과 분유를 지급했다. 배고픔이 나를 강하게 유혹했지만, 한 번도 마음 껏 먹어본 적 없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먹고 싶다. 먹고 싶다.’ 마음의 소리가 들려도 참았다. 배고픔에 시달린 어린 동생들이 있기에. 동생들을 생각하며 빵과 분유를 내 뱃속이 아닌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학교가 파하기 바쁘게 쏜살같이 집으로 향한다. 동생들은 활짝 웃는 나의 모습을 보고 바로 눈치를 채고 환호한다. 신나게 빵과 분유를 먹는 동생들을 볼 때면 배가 고프지 않았다. 어린 내가 이럴 진데, 배가 고프지 않다며 식사를 거르곤 했을 할머니,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린다.
“따뜻한 쌀밥 먹게 해줄게.”
동생들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른 채 멍하니 나를 쳐다본다. 이러한 동생들을 바라보며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가난이라는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고, 가난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도 모를 나이였다. 하지만 동생들이 굶지 않기를 바랐고, 할머니와 어머니가 울지 않기를 바랐다. 이러한 결심이 밑거름 되어 크게 성공은 못했지만, 가족들을 건사하고, 가끔은 이웃을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하라.'는 말이 새삼 뇌리를 스친다. '진인사대천명'이란 만고의 진리를 좌우명으로 삼고 싶다. 따뜻한 쌀밥 한 그릇, 하늘에 계신 할머니께 대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