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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카!
예나 지금, 언제 어디서나 인간사회에 발생하는 모든 다툼과 분규, 갈등과 전쟁은 근본적으로 이해가 갈리고 가치가 다른 것이 그 원인이다. 그것이 나와 적을 서로 원수로 여겨 싸우게 하고 그 싸움은 막판까지 가면 서로 죽고 죽이는 지경에 이르게 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이런 일이 천차만별의 양상으로 벌어진다 해도, 누군가의 그 이해와 가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근본 원인은 결국, 우리에게 각자 다른 ‘나’가 있고 그 나가 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이기적이고 저마다 일체에 대하여 자기의식 이해와 판단, 소견, 기호와 친소의 관계를 형성하고 지니기 때문이다.
‘나’라는 것이 무엇일까? 누구에게나 그것은 공연히 스스로 자기 마음 속에서 일으킨 하나의 생각, 분별, 망상에 불과하다. 그것이 있든 없든,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우리는 무심으로, 본래 자기로 진정한 내면의 평화로움 속에 존재한다. 그것을 열반이라 한다. 그 속에는 어떤 앎도 분별도, 구분도, 대립도 없다. 내 것이라 할 만한 그 무엇도 없다. 내 사랑도, 내 가정이나, 내 나라나, 나의 사상이나 종교, 그 무엇도…….
열반을 등지는 순간 모든 중생은 싸움터에 던져진다. 세상의 힘으로는 그 열반을 회복할 수 없다. 앎의 힘도, 신의 권능도, 우연적인 어떤 일도, 물리적인 힘도, 세상의 변혁이나 그 밖의 그 무엇도 뭇 생명, 중생으로 하여금 본래 있었던 내면의 평화, 열반을 거저 회복하게 해주지 않는다. 그 어떤 중생이라 해도 오로자 자기 스스로 ‘나’라는 미망을 깨뜨리고서야 그 영원한 열반의 땅에 입성한다. 자기 스스로 자아의 비어있음을 깨달은 자만이 영원한 행복에 이른다. 그런 사람을 진정한 장부요, 영웅이라 한다. 대웅大雄이신,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어떤 주장이나 도그마나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바로 그 열반에 이르는, 모두에게 열려 제시된 길일 따름이다.
누구든지 생사를 넘어선 자타의 영원한 행복, 열반을 향해 나아가려는 자는 세상을 향해 야심을 펼치려 해서는 안 된다. 상대를 죽이거나 패퇴시켜 모두를 이기고 세상의 그 무엇을 얻었다 한들 어디에 영원함이 있는가? 그 귀결은 언제나, 무지와 허무 속의 쓸쓸하고 아득한 죽음, 그리고 또 다시 벌어지는 고통에 찬 생사의 되풀이가 아닌가? 차라리 세상을 등지고 내면의 길을 떠나야 한다. 안에서 자아가 죽고 세상을 비칠 등불이 되어야 한다. 안에서 자기 광명을 얻지 못한 사람이 밖으로 남들의 길을 비춰주겠다는 것은 그 선의가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냉정하게 돌아보면 위선이거나 기만이다.
처음 세상에 크샤트리아가 생겨났을 때 그 계급 가운데는 일종日種이라고 하던 종족이 있었다. 어느 때 부터 그 일종의 한 왕은 고타마(구담)이라는 성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고타마 부처님의 조상 이야기다.
훗날 감자왕의 시대에 왕의 두 번째 비에게 네 왕자가 있었는데, 첫 번째 왕비는 이 왕자들의 뛰어난 점을 몹시 시기하고 구박하다가 왕에게 고자질하여 결국 나라 밖으로 쫓아내게 하였다. 이에 네 왕자는 멀리 왕국을 떠나, 히말라야 설산 아래 로히니강이 흐르는 곳에서 아름다운 터전을 발견하고 카필라라는 나라를 세워 잘 다스려 나갔다. 뒷날 감자왕은 슬하를 떠났던 아들들 소식이 궁금하여 카필라에 찾아왔다가, “샤카!” 하고 탄성을 질렀다. 샤카를 뜻으로 한역한 말은 ‘능인能仁’, 즉 유능하고 어질다는 뜻이다. 이 때부터 카필라국의 크샤트리아들은 샤카(석가釋伽)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민족의 뿌리를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샤카라는 말은 한국이나 일본에서 ‘삿’이라는 어근이 있었는데, 이로부터 사슴이라는 낱말이 나왔으며 이는 샤카족이 사슴을 토템으로 삼은 것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민족 가운데 특히 신라의 왕족은 샤카족과 혈연이 있다고 말한다. 그 근거의 하나로 삼국유사에,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 갔다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사리를 얻어올 때, 문수보살이 직접, ‘신라의 왕족은 석가족의 후예’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음을 든다. 아마 김알지가, 중인도 아유타국에서 불교를 전해온 오빠 장유화상을 따라온 허황옥과 혼인해서 왕조를 이어내려 왔음을 말하는 듯하다. 참고로, 허황옥은 아들을 아홉 낳았는데 수로왕 김알지는 그 중 장자에게는 왕위를 물려주고 둘째와 부인에게는 허許씨 성을 하사하여 가업을 잇게 했다. 왕비는 나머지 일곱 아들을 지리산에 머물던 오빠 장유 화상에게 보냈는데 이들은 모두 화상의 제자가 되어 도과를 얻었고, 그 결과 그 수행처에 생긴 절이 나중에, 일곱 왕자가 성불한 암자라는 뜻에서 칠불암七佛庵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네 왕자는 차례로 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는데 넷째 왕자가 왕이 된 후, 그로부터 다시 몇 대를 거쳐 사자협왕에 이르렀으며, 그 네 아들, 정반淨飯,백반白飯,곡반斛飯,감로반甘露飯 가운데 먼저 왕이 된 사람이, 성불하여 샤캬족의 성인 샤캬무니(釋迦牟尼)가 된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의 부왕 정반왕이었다.
‘샤캬’라는 말이 뛰어나게 유능하고 성정이 어질다는 뜻이었던 것처럼, 대대로 석가족은 백성들을 큰 자비와 지혜로 감화하여 다스리던 크샤트리아였고, 당시 인도 평원에 할거하던 마가다나 코살라 같은 대국들에 대하여도 조금도 굴종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이 강했던 듯하다. 통치계급인 동시에 무사계급이었는데 이들은 전통적으로 창이나 칼보다 활을 아주 잘 다루었다. (부처님의 태자 시절, 아무도 들어 줄을 당기지도 못하던 궁중에 비전되어 오던 활을 들어 화살을 재어 쏘았을 때, 일렬로 늘어선 북의 가죽을 48개나 뚫고 화살이 날아갔다는 경전의 기록이 있다.)
어느 때 코살라의 프라세나짓 왕은 자신이 부처님이 나신 카필라국의 샤카족 명문가의 공주를 맞아 왕후로 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청혼을 받은 카필라국에서는 코살라가 대국이긴 하지만 감히 카필라의 양녀를 보내줄 수는 없다고 여겼으며, 당시의 왕 마하나마와 후궁 사이에 태어난 여자 하나를 공주처럼 단장하여 속이고 시집보냈다. 그리하여 태어난 프라세나짓의 왕의 아들이 비루다카였다.
후에, 비루다카는 외가인 카필라에 활을 배우러 가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본래 성질이 거칠고 제멋대로였던 탓에 곧 점잖은 카필라 사람들 눈에 나게 되었다. 한번은 한 궁녀가 그런 비루다카를 보고, “쳇, 종년의 자식이라 할 수 없구나!” 하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비루다카는 격노하여 그 궁녀에게 비루다카의 출신에 얽힌 비밀을 다 알려주고 말았다. 왕자는 큰 충격 속에서 이를 갈며 속으로 결심했다.
‘뒷날 나는 기필코 코살라의 왕이 된 다음, 전쟁을 일으켜 네놈들 샤카족들을 몰살시킬 것이다.’
비루다카는 코살라에 돌아간 즉시 어느 브라만을 시켜, ‘나는 기필코 샤카족 놈들을 도륙하고 말리라.’ 하는 노래를 지어 매일 하루에 세 차례씩 부르게 함으로써 그 결심을 상기시키도록 했다.
결국, 장성한 비루다카는 부왕인 프라세나짓의 왕위를 찬탈하고 이내 군대를 일으켜 카필라를 치기 위해 원정에 나섰다. 부처님은 이 사실을 알고, 군대가 지나는 길가 나무 밑에 앉아 계셨다. 잎이 다 말라 떨어진 죽은 니그로다 나무 아래.
바루다카는 뜻밖에 도중에서 부처님을 만나 말에서 내려와 예의를 갖춘 후, 왜 주변에 잎이 무성한 나무들을 두고 죽은 나무 아래 뙤약볕에 앉아 계시는지 여쭈었다. 부처님의 대답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왕이여, 친족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일은 잎이 무성한 저 니그로다 나무의 그늘처럼 시원하고 쾌적한 것이다. 그러나 출가한 나에게는 친족이 없노라.”
그 뜻을 알아차린 비루다카는 군사를 거두어 성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날이 가면서 왕은 매일 세 차례씩 듣는 그 브라만의 노래 덕분에 더욱 진심이 들끓어 또 한 차례 카필라를 향해 진군했다. 그렇지만, 도중에 다시 같은 모습으로 계시는 부처님을 뵙고는 속절없이 회군하고 말았다. 똑같은 일이 세 번째 되풀이 되었다.
그런데 네 번째 진군에는 부처님이 그 자리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왕은 이때다 싶어 단숨에 군사를 몰아 카필라성에 당도했다. 부처님은 샤카족이 거의 절멸하게 될 그 비극이 숙세의 인과에 의해 벌어지는 일이며, 비유리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을 거두지 않는 한, 끝내 막을 수 없는 일임을 아시고 그날은 기원정사에 머물러 계신 것이었다.
성벽을 향해 달려드는 코살라군을 향해 카필라의 병사들은 활을 겨누었으나, 처음에는 아무도 화살을 쏘지 않았다. 적군이 성문에 접근하자 비로소 활을 쏘기 시작했지만, 화살은 그냥 땅에 꽂히거나 비루다카와 군사들의 투구에만 맞았다. 모두가 부처님의 제자들이 된 카필라성의 사람들은 살생해서는 안 된다는 마하나마 왕의 명령을 따른 것이었다.
비유리는 카필라 사람들의 궁술에는 아무리 많은 군사라도 당할 수 없을 것 같아 다시 군을 철수할까 고민했다. 그때, 매일 그에게 카필라를 도륙하라고 노래 불렀던 그 브라만이 말했다.
“대왕이시여, 카필라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을 목숨처럼 지키기 때문에 아무도 대왕과 군사들을 쏘아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진군해서 성을 함락시키지 않으면 대왕이 오래 다짐해온 대업을 끝내 이루시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후회가 없도록 하십시오.”
이에, 비루다카와 군사들은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젊은 여자들은 포로로 잡고, 나머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포박한 다음, 큰 구덩이 속에 모조리 던져 놓고 코끼리를 집어넣어 밟아 죽이게 했다.
그 참상을 보다 못한 카필라의 마하나마 왕은 비루다카에게 나아가 한 가지 청이 있다고 말했다. 마하나마는 자신의 외조부이기도 했으므로 비루다카는 그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나는 내가 평생에 걸쳐 자비로이 살피기로 했던 백성들이 이렇게 처참히 죽어가는 것을 눈뜨고 볼 수가 없구나. 차라리 내가 먼저 죽고 싶은 심정 뿐이다. 지금 내가 저 해자의 물속에 뛰어들 터이니 내가 숨을 참다못해 물위로 떠오를 동안만이라도 살육을 중지하고 사람들이 성 밖으로 도망칠 수 있게 해다오. 이것이 내 마지막 부탁이다.”
왕은 물에 자맥질한 다음 자신의 머리를 풀어 물속의 바위에 묶고 그대로 죽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왕이 나오지 않고 물 위에 시신조차 떠오르지 않자, 비루다카는 군사를 시켜 물속에 들어가 보게 했는데, 마하나마왕이 그렇게 죽은 것을 알고 한편으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한편으로는 그런 왕의 부탁을 이기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포로로 잡은 여자들을 데리고 철군하려 했다.
그러나 카필라의 여자들은 아무도 비루다카와 적군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비루다카는 다시 진노하여 여자들의 옷을 다 벗기고 밧줄로 묶은 채, 또 흙구덩이를 파서 던져 놓고는 카필라를 떠나 코살라로 돌아왔다.
비루다카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다. 나중에 기원정사를 지은 터, 제타림을 원래 소유하고 있던 태자였다.
먼저는 수닷타 장자가 그곳에 절을 지어 부처님의 교단에 바칠 생각을 했었다. 부처님이 니그로다 동산에서 처음 법륜을 굴리신 이래, 부처님과 그 법을 따르는 남녀노소의 출가자들이 몹시 늘어나자, 우기에라도 악천후를 피하여 부처님과 제자들이 머물러 수행할 공간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항상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 돕는 것을 업으로 삼아 살아오던 수닷타 장자는 불법을 만나 만중생의 생사고를 건질 길이 거기에 있음을 알고 부처님께 귀의한 마당에, 교단의 그런 사정을 알고, 좋은 곳에 스님들이 안거할 수 있는 절을 하나 지어드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리저리 물색한 끝에 가장 적합한 터로 떠오른 것이 바로 제타림이었다.
그러나 제타태자를 만나 보니 기대와 달리, 태자는 그 터를 팔 의향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이 땅에 황금을 가져다 다 덮기 전에는 팔 수 없습니다.”
그만큼 분명하게 말했으면 깨끗이 포기하고 물러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 수닷타라는 장자가 다음날부터 어디선가 금박을 실어와 제타림 한쪽 구석부터 땅을 덮어나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겠다고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금으로 바꾸었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제타태자가 수닷타 장자를 방문했다.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이렇게까지 해서 이 땅을 사시려는 겁니까?”
“절을 지으려는 겁니다.”
“절이라고요? 절이 뭐 하는 곳인데요?”
“부처님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제자들이 머물며 수행하는 도량이지요.”
장자로부터 부처님과 그 가르침과 승단에 대해 더 자세한 내막을 듣게 된 태자는 전격적인 제안을 했다.
“그런 뜻이라면 당신 말대로 이곳에 도량을 만듭시다. 더 이상 땅에 금을 깔 필요 없습니다. 나는 이 제타림을 부처님의 승단에 희사하겠습니다.”
그 뒤부터 제타는 부처님을 만난 기쁨으로 살았다. 부왕 프라세나짓도, 왕가의 모든 권속들도 이미 부처님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불행이 그를 피해가지는 않았다. 배다른 동생 비루다카는 야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침내 부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리고는 외가인 부처님의 샤카족을 정벌하겠다고 떠났다.
비루다카가 군사들을 돌려 코살라국에 돌아왔을 때, 제타는 음악을 들으며 가슴을 덮은 슬픔을 달래고 있었다. 비루다카는 문지기를 죽이고 제타의 방에 난입했다.
“왕은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형이라는 사람을 도울 생각도 없이 여기 앉아 풍류나 즐기고 있습니까?”
“나는 생명을 헤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비루다카는 칼을 내리쳐 형을 죽이고 말았다.
밧줄에 묶인 채 구덩이에 내동댕이쳐져 있던 샤카족의 젊은 여인들은 부처님께 기도했다. 부처님은 비구들을 이끌고 전화가 휩쓸고 간 성에 나타나셨다. 여인들이 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자 제석천왕은 하늘의 옷을 내려 저절로 입히게 됐다. 사천왕 가운데 하나인 비사문천왕은 천공(天供; 하늘의 음식)을 내려 배고픔을 달래게 했다.
부처님은 설법하셨다. 태어난 모든 생명들은 죽을 때가 있고, 일어난 모든 것은 쇠하여 사라지는 법임을, 몸뚱이는 애욕에서 난 것이며, 거기에 집착하는 것은 욕망과 결과인 괴로움을 키울 뿐임을……. 다들 장차 생노병사의 되풀이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를 마음을 일으키도록 하셨다.
여인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새기고 편안히 목숨을 거두었다. 곧, 천상이나 다른 선처에 환생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루다카와 그 대군은 강가에서 야영하다가 밤새 폭우로 범람한 강물에 휩쓸려 일시에 전멸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비구들은 나중에 부처님께 카필라성의 참극이 전생의 어떤 인연으로 말미암은 것인지 여쭈었다. 부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옛날 왕사성에 가뭄과 흉년이 들어 성 사람들은 물이 줄어들어 가는 성 밖의 못에서 물고기들을 잡아먹었다. 물고기들이 때로 잡혀 나가자 그중에 두 마리는 사람들에게 앙심을 품고 보복을 다짐하며 죽었다. 그중 한 마리는 이생의 비루다카가 되었고 다른 한 마리는 그 곁에서 카필라족을 몰살하도록 부추긴 그 브라만이 되었으며 그때 잡아먹힌 물고기들은 코살라의 군사들이 되었다. 그때의 왕사성 사람들은 카필라의 백성들이 되었다.
그 때 부처님은 8살의 어린 아이였는데, 사람들이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보고 놀다가 장난삼아 나뭇가지로 물고기의 머리를 몇 차례 때린 적이 있었다.
부처님은 세상 모든 일이 인과에 의해 벌어지는 것임을 다시 환기시키셨고, 신이든 인간이든 미물이든, 삼계 안에 있는 한, 인과의 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으며, 당신의 색신조차 반열반에 들기 전에는 그 인과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이라고 하셨다. 실제로 부처님은 그때의 일로 이레 동안 두통이 시달리셨다.
꿈, 각覺,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세상과 중생의 생노병사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법은 곧 인과법이다.
중생이 살아가는 세계는 근본 무명에 덮인 마음이 스스로 공연히 꿈꾸어 낸 환幻의 세계다. 일체가 환이지만, 그 환의 세계에서 생노병사가 되풀이되는 윤회의 길에 들어선 모든 중생은 자작자수自作自受한다. 스스로 뿌린 씨앗의 열매는 모두 스스로 거둬야 한다.
중생의 다른 말은 유정有精이다. 정식精識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시공간이나 물질계에 몸뚱이를 가지고 있든, 아니면 정신만으로 있든, 살아있든 죽어있든, 사람이든 신이든 미물이든, 감정과 알음알이가 있는 존재를 통틀어 유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중생이 몸담고 사는 세계 자체와 그 세계 안의 유정들을 제외한 것들, 그러니까 정식이 없는 것들은 무정無精, 혹은 무정물이다.
이 세계에 한번 생겨난 중생은 존재계와 즐거움을 끝없이 탐착하고, 괴로움은 한사코 피하려고만 드는 근본적인 성향을 지닌다. 그 충동과 증오와 권태에 떠밀려 온갖 업을 짓는다.
업은 밖으로는 현상을 변화시키고 안으로는 습관적 패턴이나 경향성을 형성한다. 우리의 마음을 조건화하는 이 내적 경향성을 업력業力이라 한다. 업력에 사로잡힌 마음이 짓는 정신적, 언어적, 육체적 행동 모두가 업이다.
그런 행동이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중립적인 것이든, 결과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그에 정확히 상응하는 결과를 시간 속에서 불러온다. 중생이 생사의 길에서 겪고 피할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모든 희로애락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물론 세상에 태어나고 죽는 중생은 자기 혼자가 아니므로, 업은 천차만별의 다른 수많은 중생과 더불어 얽히고설킨 속에서 짓고 받는다. 하나의 시공간, 같은 상황에서 다른 중생과 함께 짓는 업은 공업共業, 똑같이 지은 업은 동업同業이라 한다.
중생의 마음은 그 씨앗을 뿌리는 과정에서도, 열매를 스스로 거두는 과정에서도 철저히 업력과 업보에 지배당한다. 그 업의 장애와 결박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업장에서 벗어나고 업의 결박에서 벗어나, 무한히 되풀이될 수 있는 이 업의 부림에서 놓여나려면 스스로 자신의 업을 거슬러 그 근원의 원인을 뿌리 뽑아야 한다.
무엇이 그 근원의 원인인가? 마음이 지어낸 환을 실제로 여기는 착각이다. 본래 공한 것을 존재로 잘못 아는 것이다. 나와 남, 나와 세계, 안과 밖, 이것과 저것이 모두 본디 없는 것인데, 본래의 반야가 홀연히 일어난 무명에 가리는 바람에, 마음의 바다에서 일어난 이 모든 파도와 일렁임, 그 무상한 모양들을 실재로 잘못 여기게 된 것이다.
우리가 몸담은 우주는 인과의 법계다. 자연계의 꿰뚫어 총괄하는 유일한 법도 인과율이며 실재하는 것도 이 인과의 법뿐이다. 그 어떤 것도 이 인과의 법을 벗어나 있지 않다. 일체의 유정들과 그 몸담은 세계가 모두 이 인과 속에 있고 인과의 법에 의해 움직여간다. 유정이 무명에 덮인 눈으로 실재로 착각하던 세계와 자아를 반야로 꿰뚫어 직시하면, 그것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비어 있다. 그 공성이 곧 존재의 실상인 것이다. 그 비어있음을 보는 것이란 곧 존재의 공성, 그리고 그 얼개인 인과를 꿰뚫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이 위없는 깨달음을 통하여 증득한 진리를 중생에게 두루펴 베푸신 가르침도 법(法, 다르마(達磨, Dharma))이라 한다. 이것이 참 진리, 진제眞諦이다.
그러나, 진정한 법은 부처님이 깨달아 설하심으로써 비로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진제란 깨달은 자의 교설이라기보다는, 깨달음 이전에 본래 존재하는 진리 자체다. 그것은 언어 이전에 있으므로, 말로 설해지는 것은 벌써 진리 자체는 아닌 것이다. 이를테면 무아無我니, 공이니, 연기緣起니 하는 말이나 설명은 이미 진제를 벗어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설 이전의 진제를 제일의제第一義諦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은 입 열기 이전, 32상 80종호를 나투기 이전의 부처님의 참 존재, 法身이라고 할 수도 있다. 대승, 일불승, 선으로 나아가면서 불법은 언어문자적 분별과 한계를 깨뜨리고 이 구경의 진제를 향해 더욱 깊이 직입할 것을 요구한다. 성불의 길을 제시하는 것이다.
세상에도 ‘법’이라는 것이 있다. 크고 작은 인간 사회의 어느 구석에도 보편의 규범이 있고, 인류 전체 사회를 제외한 가장 큰 단위의 사회인 ‘국가’에는 매우 강제적이고 실체적인 실정법이 있다. 전제군주에 의해 정해진 것이든, 근대민주주의가 태동한 이래 인권이 차츰 신장되어오면서 정비된 민주적 과정을 거쳐 입법된 것이든, 이 실정법은 실제의 인간사를 광범위하게 지배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지탱하는 논거가 절대적이라든지, 존재적 차원의 진리성을 함의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을 속제俗諦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진제에 대비해서 쓰는 용어로서 속제란, 가장 낮은 의미에서는 세속에서 통용되는 법을 의미하고,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면서는, 보다 높고 궁극적인 진리 그 자체에 비하여, 보다 방편적으로 설해진 진리라는 뜻이다.
법계를 통틀어서 보면,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진제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진리이며, 거기엔 시비도 선악도 따로 있지 않다. 세상에 난무하는 온갖 거짓도 그대로 옳은 것이며, 한 폭군이 나타나 천 사람 만 사람을 죽인다 해도 악이라 할 것이 없으며, 지구가 당장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해도 재앙이라 할 것도 없다. 모두가 인과의 소산일 뿐이요. 일심이 벌인 한바탕 꿈일 따름이다. 꿈이 꿈임을 안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그러나 그것이 꿈이라는 것은 꿈 깬 자에 의해서 확인될 뿐이다. 무량한 중생은 꿈을 꾸고 있다. 꿈속의 중생은 그것이 꿈인 줄을 알지 못한다. 꿈속에는 꿈속의 법이 있다. 이것이 속제이다. 배고프면 꿈속의 밥을 먹어야 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면 따지고 싸워야 분이 풀린다. 꿈속에서도 시비가 있고 장단이 있어, 온갖 중생이 그 시비 장단에 얽혀 다투기도 한다. 이에, 꿈 속의 정의나 꿈 속의 실정법이 생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좁은 의미의 속제이다.
좁은 의미의 속제로는 진실한 시비가 가려지지도 않는다. 그나마 진제 쪽으로 접근해 가야 시비가 바로서고 꿈속에서 배고팠던 사람이 꿈속의 밥이라도 먹고 배고픔을 면한다. 부처님이 인과응보를 가르치고 선업을 권하여 닦고 익히게 하는 것은 이러한 차원에서 베푸는 방편이다. 그렇지만, 속세의 도덕률이나 관행에 매어있거나 그 속에서 안락을 구하는 일은 덧없을뿐더러, 실답게 선악시비나 그런 세계에 대한 집착을 아예 버리고 출가하기를, 꿈속의 삼계에서 해탈하기를 가르친다.
그러나 궁극에 알고 보면 이 모두가 꿈속의 논리다. 진실로 꿈에서 벗어난 자가 되고 보면, 꿈은 본래 없었던 것이고, 꿈 밖의 참 사람은 본래 그대로 꿈을 꾼 적이 없고 꿈에서 깬 적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제일의제인 진제이다.
왜 꿈을 꾸게 되는 것일까? 법계는 왜 일심一心에서 벌어져 나오는 것일까? 왜 중생은 본래 부처이면서 공연히 꿈을 꾸어 꿈속의 온갖 중생놀음, 그 고락에 시달리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밑도 끝도 없고, 누구를 탓하고 원망할 수도 없는 것이, 요는 중생이 스스로 문득 꾸게 된다는 것이다. 꿈은 분명 무명의 산물이지만, 그렇다면 그 무명이 어디서 기인하는가 살펴보면 거기에는 어떤 원인도 없고 그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무명은 ‘홀연히’ 일어났다고 한다. 신비하다고 보면 신비하지만, 생사고를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원통하고 억울한 노릇이다. 그러나 원통해 해서 무엇 하겠는가? 억울하면 꿈에서 깨는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일심이 홀연히 무명에 가려 꿈속의 세계가 벌어졌다 해도, 벌어진 법계가 부조리하고 맹목적인 것은 아니다. 본래의 일심은 선악시비를 초월한 성품이되, 그 덕이 본래 지혜롭고 자비로운 까닭에, 법계 안의 중생을 이끌어 법에 눈 뜨게 하여 고통으로부터 건지는 합목적성과 한결같은 지향성을 지닌다. 이 본래의 일심이 본각本覺 혹은, 법신의 부처님이라 할 수 있다. 이로부터 화신化身의 부처님이 나투어져 오랜 인행因行과 그 결과로서 무상정등정각을 구현해 보이는 바, 이는 시각始覺이라 한다. 그리고 일심이 법신의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환화幻化에 불과할지라도 이렇게 화신을 나투는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나아갈 길과 구경의 목적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꿈밖에 있던 본각의 부처님이 꿈속에 들어와 꿈꾸는 중생을 깨워 중생 스스로가 본래 부처임을 일깨우는 것이다. 이것이 일심법계의 오직 한 가지 일,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다. 이 일대사인연으로 하여, 중생의 꿈은 그냥 헛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 꿈밖의 열반을 회복하기 위한 성불의 길이 되는 것이다.
얼마나 눈물겨운가!
풍혈연소風穴延沼 선사가 어느 날 상당하여 말하였다.
“세존이 푸른 눈으로 가섭을 돌아보신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말씀 없이 말씀하신 것으로만 본다면 그것도 부처님을 매장하는 것이다.”
불은이 망극이다.
성군聖君과 영웅
부처님이 어느 날 왕사성에 탁발을 나가셨다가 모래밭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시고는 그곳으로 다가가셨다.
그중 한 아이는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더니 문득 공양할 마음을 일으키고는, 소꼽놀이하다 밥이라고 담아놓았던 모래를 들어 올려 부처님의 발우에 담아드렸다.
부처님은 시자 아난을 시켜 그 모래를 소똥에 개어 부처님이 경행하시는 땅에 바르라고 이르신 다음 말씀하셨다.
“이 아이는 지금 심은 선근으로 말미암아 여래가 열반에 든 지 몇 백년이 지나 파탈리푸트라의 왕으로 태어나 아쇼카(阿育)라는 전륜왕이 되어, 정법을 믿고 8만 4천의 불사리탑을 세우며 불법을 널리 펴 많은 사람들을 건지고 풍요롭게 할 것이다.
복잡한 권력다툼 속에서 형제들을 죽이고 마우리아 왕조의 3대 왕이 된 아쇼카왕(BC265~238 혹은 BC273 ~232 재위)은 처음에는 무력을 통하여 이웃나라를 정복해 나갔는데 인도대륙 동남 해안에 있던 칼링가국을 정벌하면서 무려 10만 명이 죽고 15만 명이 부상한 참혹상을 몸소 둘러보면서 큰 충격에 휩싸였다고 한다. 시체도 시체지만 수많은 전쟁고아나 미망인들이 울부짖고 미쳐버린 사람들로 부지기수였다. 그런 전장에서 정복자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는 결코 그려질 수 없었다. 만일 그런다면 그 역시 극악무도한 미친놈의 웃음일 듯했다.
‘이 많은 사람들의 아비규환 같은 고통이 모두 나의 야심에서 벌어졌다!’
참담해질 대로 참담해진 그의 망연자실한 눈길에 멀리 지평선을 가로질러 가는 한 스님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사문의 걸음걸이와 아우라에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평화로움과 행복감이 깃들어 있었다.
‘천하를 얻은 나에게 없는 것이 가사와 발우 외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저 탁발승에게 있다!’
아쇼카는 그 스님을 급히 쫓아가 법을 물었다. 왜 우리가 살고 있는지, 왜 싸우고 왜 죽어가는지, 어떻게 살고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모든 것을 진심으로 듣고 바르게 알게 된 아쇼카는 더 이상의 침략전쟁을 완전히 접었다. 나라에 살인과 살생을 금하고 다른 종교에도 관용을 베풀면서 백성들이 안락하고 평화롭게 살도록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다. 스님들로 하여금 경전을 결집하도록 하는 한편, 인도 전역과 주변의 만방에 부처님이 남긴 사리를 나누고 보내어 8만 4천의 보탑을 세우고 불법을 전하였다.
그의 치세는 거의 동시대에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행적과 극적으로 대비된다. 진시황이 아방궁을 짓고 불로초나 구하며 초라하고 나약하며 그다지 실망스러울 뿐인 한 인간의 말로를 보인 데 반해, 전쟁을 접고 마음을 돌이켜 후에 스스로 아라한이 된 이 인도의 성군이 살아간 그의 마지막 생은 인도 역사상 가장 눈부신 황금시대를 불러왔고 20여 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세계불교는 그의 존재를 빼고는 말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인도대륙 전역과 아프가니스탄 땅까지 그의 영토였던 곳은 물론이고, 시리아, 마케도니아, 이집트, 키프러스 등에까지 그에 의하여 불법이 전해졌다. 오늘날까지 곳곳에서 발견되는 아쇼카 석주에 새겨진 바대로, 자비심으로 이기는 것은 무력으로 적을 정복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특히 스리랑카에는 출가한 왕자와 공주를 보내어 불사리와 불법을 전파하였다. 더불어 부처님이 그 그늘 아래서 성도하신 보리수의 아들에 해당하는 나무를 옮겨 심게 했는데, 오늘날까지 그 보리수는 2,300여 년을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인도 대륙에서 이슬람의 침공으로 불법이 사라지고 보리수까지 베어진 다음에 역으로 부다가야 성도지에 다시 그 아들 나무를 옮겨 심게도 되었다.
이 나무가 상징이라도 하듯, 스리랑카는 오늘날까지도 불법이 살아 지켜지는 대표적 불교국가가 되었고, 또 다른 불교국가들인 태국이나 버마의 불교 역시 스리랑카에서 전해진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스리랑카의 불교에도 위기가 닥치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었다.
포르투갈(1505 ~ 1658), 네덜란드(1658 ~ 1796), 영국(1796~1948)의 식민통치를 차례로 거치는 동안 수많은 사원들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교회가 들어섰으며, 스님들이 살해되거나 환속당했고, 사람들은 개종을 강요당하거나, 어려서부터 받는 학교교육을 통하여 기독교적 세계관이 주입되었다. 그 결과 캔디왕조의 비말라 담마 수리야 2세(1687 - 1707재위), 시리 비자야 라자시하 왕(1739-1747)나 킷티시리 라자시하 왕(1747-1781재위)시대에는 과거에 불법을 전해준 나라에서 역으로, 버마나 타이에서 고승을 초빙하여 새로 불법을 배우거나 전계화상傳戒和尙을 초빙하여 새로 계맥을 이어야 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불법이 스리랑카에서까지 사라져갈 위기에 처했을 때 제국주의가 앞세운 기독교를 극복하고 반전을 이룬 계기가 마련되었으니, 저 유명한 파아마두라 대논쟁을 위시한 다섯 차례에 걸친 기독교와 불교 사이의 공개적인 토론이 그것이었다. 논쟁을 처음 제안한 것은 기독교계였으나 결과는 그들의 기대와는 전혀 딴판으로, 논쟁을 지켜본 수많은 스리랑카인들이 자국의 전래 종교인 불교에 대하여 한결 분명한 자긍심을 가진 불자들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논쟁은 대외적으로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예컨대, 이에 참가한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이자 미국 기독교 신지학회의 창설자인 헨리 스틸 올코트(Henry Steele Olcotte)대령으로 하여금, 불교계의 대론자로서 압도적인 논쟁을 펼친 구나아난다 스님을 통해 5계를 받고 불교도로 개종하게 만들었다.
그의 존재는 다시, 메이지유신(1868~1912)으로 불상이 파괴되고 불교가 경시되던 일본에서 불교가 부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더불어, 나중에 미국의 원폭 투하로 일본이 패망하고 2차대전이 끝났을 때, 패전국이었던 일본의 전후처리를 두고 장개석 등은 루즈벨트에게 조언할 기회가 있었는데, 일본을 효과적으로 미국의 영향 하에 두기 위해서는 일본의 천황제와 불교를 없애지 않고 존치하면서 일본 국민들의 호감을 얻는 것이 낫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일본의 불학佛學과 선불교는 명맥이 끊이지 않고 나중에는 구미歐美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구미 열강은 근대화과정에서 과학기술문명을 앞세워 동양사회와 제 3세계를 식민지화하고 끝없이 서구화해가고 있지만, 동양사상,특히 불교의 고금을 꿰뚫는 진리체계와 가르침은 역으로 근대 이후 거의 모든 서양의 철인과 지성들에게 끝없이 막대한 직·간접의 영향을 미쳐왔다. 칸트, 쇼펜하우어, 바그너, 톨스토이, 헤르만 헤세, 프로이트, 융, 베르그송, 야스퍼스, 니체, 토인비, 하이데거, 사르트르, 막스 베버, 버트런드 러셀, 에리히 프롬……. 오늘날의 정치, 사회, 학계, 과학 기술, 산업, 문화 예술계의 수많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불교에 심취하여 그로부터 자기 분야에 최고의 영감을 얻으며, 불교적 문화나 생활방식을 배우는 것은 물론, 수행과 명상을 실천하고 있다.
서양사회에 더욱 빠른 속도로 보급되고 있는 현대불교는 대강 세 갈래의 전통적 흐름을 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의 상좌부 불교, 대승불교의 교학과 수행의 현대적 해석과 실천에 탁월한 성공을 이루고 있는 티벳 불교, 공산화로 중국에 사라지다시피 했으나 한국과 일본을 통해 세계로 전해지고 있는 선불교가 그것이다.
달라이 라마, 틱낫한 스님, 마하 고사난다 스님, 숭산 스님은 서구에서 현대 서양에 불교를 알리고 가르쳐온 위대한 스승들로서 세계 4대 생불로 알려졌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네 분 모두의 이력에는 한결같이 시대적 비운이 숨어있다.
달라이 라마는 모택동 중공의 티벳 침공으로 승왕 치하의 나라가 망하면서 수많은 스님들과 국민들이 고통을 어쩌지 못하고 인도로 망명하여 다람살라에 망명정부를 세워야 했다. 틱낫한 스님은 동서냉전 구도에서 강대국들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베트남전과 그 적화 과정에서 스승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을 지켜보아야 했고 나중에 프랑스에 불교수행공동체 플럼빌리지를 만들었으며, 마하고사난다 스님 역시 저 킬링필드로 알려진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의 불교탄압을 피하여 해외로 피신했다가, 가족들이 다 죽고 6만 명에 달하던 승려 수가 3,000여 명으로 줄어든 고국에 돌아가 난민구호활동을 벌여야 했다. 숭산스님은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렀고, 해방 이후에는 역시 이념적 대립과 강대국의 영향권 다툼으로 벌어진 한국동란을 겪으며 세계평화에 대한 의문을 안고 용맹정진한 끝에 깨달음을 성취한 후, 일본과 미국에 건너가 서양의 지성들에게 살아있는 선을 전하였다. 모두 난세가 낳은 영웅이요, 민족적 원한을 민중생에 대한 대자대비심으로 바꿔 인류를 건진, 시대의 지남指男이었다.
달마대사는 옛 인도 향지국香至國의 왕자였다.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은 문종의 넷째 아들이었으며, 그리고 누구보다, 이 사바세계 현세의 위없는 본사本師이신 고타마 싯다르타는 카필라국의 태자로 태어나셨다. 그분은 장차 전륜성왕이 되어 사천하를 통일하고 인류 역사 최대의 태평성세를 이룰 위업을 뒤로 하고, 진정한 법을 구하여 머리를 자르고 맨발로 다니며 걸식으로 살아가는 출가수행 끝에서 몸소 부처가 되는 길을 걸어 보이셨다.
중국 청나라의 3조 순치황제(1643~1661재위)는 만년에 황궁의 쾌락을 버리고 입산하면서 다음과 같은 출가시를 남겼다고 한다.
천하총림반사산 天下叢林飯似山 천하의 총림마다 밥걱정 할 일 없이
발우도처임군찬 鉢盂到處任君餐 발우 하나 지니고서 되는 대로 먹고 사네
황금백벽비위귀 黃金白璧非爲貴 황금 백옥인들 어찌 귀히 여길 손가
유유가사피최난 惟有袈裟被最難 가사 법복 얻어 입기 무엇보다 어려워라
짐내대지산하주 朕乃大地山河主 내 비록 중원천하 산하대지 주인이되
우국우민사전번 憂國憂民事轉煩 나라와 백성 걱정 일마다 번다하여
백년삼만육천일 百年三萬六千日 한 세상 백년 세월 삼만 육천 날이라도
불급승가반일한 不及僧家半日閒 승가의 한나절 한가함만 못하여라
회한당초일념차 悔恨當初一念差 아차 하는 순간 단 한 번 망념으로
황포환각자가사 黃袍換却紫袈裟 자색 가사를 벗고 누런 곤룡포 걸쳤구나
아본서방일납자 我本西方一衲子 내 전생 본래는 서천축(西天築)의 납자러니
연하류락제왕가 緣何流落帝王家 여하한 인연으로 제왕가에 떨어졌나
미생지전수시아 未生之前誰是我 태어나기 전에는 그 무엇이 나였으며
아생지후아시수 我生之後我是誰 태어난 뒤에는 내가 과연 누구런가
장대성인재시아 長大成人裳是我 성장하여 사람 되니 겨울 잠깐 나라더니
합안몽룡우시수 合眼朦朧又是誰 눈 한번 감은 뒤엔 깜깜하니 이 누군가
백년세사삼경몽 百年世事三更夢 백년의 세상일은 하룻밤 꿈속이요
만리강산일국기 萬里江山一局碁 만 리의 이 강산은 한판 두는 바둑이라
우소구주탕벌걸 禹疏九州湯伐桀 우왕이 9주를 나누나 탕왕이 걸을 치며
진탄육국한등기 秦呑六國漢登基 진이 6국 통일하나 한이 그 터 차지했네
아손자유아손복 兒孫自有兒孫福 자손들은 스스로 제 살 복을 타고나니
불위아손작마우 不爲兒孫作馬牛 자손들을 위한다고 마소 노릇 하지 말라
고래다소영웅한 古來多少英雄漢 예로부터 오늘까지 크고 작은 영웅들이
남북동서와토니 南北東西臥土泥 동서남북 진흙 되어 망연히 누워 있네
내시환희거시비 來時歡喜去時悲 올 때는 기쁘다 하고 갈 적엔 슬프다 하나
공재인간주일회 空在人間走一回 속절없이 인간세상 한 바퀴를 돌다 갈 뿐
불여불래역불거 不如不來亦不去 애당초 오고 감이 없는 일만 못하나니
야무환희야무비 也無歡喜也無悲 기쁨이 어디 있고 슬픔인들 어디 있나
매일청한자기지 每日淸閑自己知 나날의 한가로움 내 스스로 누리면서
흥진세계고상리 紅塵世界苦相離 티끌 세상 괴로움은 멀리 멀리 여의없네
구중흘적청화미 口中吃的淸和味 맛보니 모두 맑고 향기로운 선열미(禪悅味)라
신상원피백납의 身上願被白衲衣 몸뚱이는 원을 담아 누더기나 걸치노라
사해오호위상객 四海五湖爲上客 사해(四海)와 오호(五湖)에 드높은 선객 되어
소요불전임군서 逍遙佛殿任君棲 마음대로 불도량에 오고 가고 깃드노라
막도출가용이득 莫道出家容易得 세속을 떠나는 일 하기 쉽다 말을 말라
석년루대중근기 昔年累代重根基 숙세(宿世)에 쌓은 선근(善根)없이 아니 되네
십팔년래부자유 十八年來不自由 황궁의 18년에 자유라곤 없었나니
산하대전기시휴 山河大戰幾時休 산하마다 큰 전쟁에 몇 번이나 쉬었던가
아금철수귀산거 我今撤手歸山去 나 이제 손을 털고 산 속으로 돌아가니
나관천수여만수 那管千愁與萬愁 천만 가지 근심 걱정 이제야 사라지네
마오쩌둥은 청년기에 중국의 고전을 탐독하고, 특히 당시를 좋아하여 자신이 평생 시작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손자의 병법에도 탐닉했는데 대장정에서 그가 쓴 16자 전법은 손자에 나오는 저 유명한 명언, ‘지피지기 知彼知己 백전백승百戰不殆’의 적용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시대를 읽어 대의를 추구하고 천하를 제패할 꿈을 키워 그것을 실현했음에도, 결국 자신의 자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불연佛緣이 없었던 아쉬움이 크다.
세계인 여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중국인이라하는데, 그 때문에 지금 13억 중국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바야흐로 중국은 다시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도 중국 사람들을 존경하거나 좋아하지 않는다. 중국 사람들이 만든 물건은 우선 싸니까 쓰긴 쓰지만, 써보다가, ‘아, 메이드 인 짜증나!’ 하며 투덜거린다. 역시 세계인 여섯 사람 가운데 거의 한사람이 인도인이라지만 그 인도인들이 부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거의 관심 두지 않는 것처럼, 중국인들은 혜능, 마조, 백장, 조주, 황벽, 임제 등, 기라성 같은 옛 성현들에 대하여, 옛날에 간 날에 세상 싫다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린 사람들 정도로 여기는지, 이름이나 들어본 적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입만 떼면 시끄러운데 눈동자들을 보면 공허하다.
인도의 국가에는 아쇼카 석주의 사자상에서 딴 법륜이 들어가 있고,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은행이 발행한 새 지폐에는 1위안부터 100위안까지 온통 마오쩌둥의 얼굴만 박혀있다. 참, 한국 은행권에는 알다시피, 온통 유교왕조 조선의 대왕, 장군, 두 大儒, 그리고 그 중 한 유생의 어머니뿐이다. 본래 1만 원권에는 석굴암 불상과 불국사의 전경이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종교 편향이라고 당시 기독교계가 거세게 반발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한다. 서산대사나 사명대사의 존영이 들어가게 됐다면 난리라도 났을까.
세종대왕은 왕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승하하자 그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전기를 엮게 하였다. 석보상절釋譜詳節이었다. 뒤에 세종은 석보상절을 보고 몸소 한글로 시가를 붙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다. 월인천강月印千江이란 달이 일천 강물에 그 그림자를 드리운다는 뜻이다.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이 사바세계에 인연 따라 몸을 나투신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당시의 유학들과 신료들은 세종이 그 출판에 직접 간여하지도 않고 국가의 공적인 비용을 들이지 않겠다고 공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상소를 올려 극력 반대했다.
북경유감
바람도 불지 않고 대기는 미세먼지가 가득 차 움직이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 봐야 바다 건너 삼천리 강산으로 날아가겠지. 돌담에 속삭이는 영랑의 봄 햇발만 가리겠지.
황사가 시작된 것은 모택동 대약진 운동 때, 중국 농촌의 나무란 나무를 다 베어 농촌에 철을 생산한다고 연료로 써버리는 바람에 온 땅이 벌거벗고 황폐해져서라고 한다. 그때 중국 공산당은 수확기의 볍씨를 축내는 참새 떼를 쫓아 식량을 증산한다고, 날을 잡아 온 인민을 동원하여 여기저기서 온갖 방법으로 새떼가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게 함으로써 결국 참새가 거의 다 지쳐 죽게 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해 중국 벼농사의 작황은 예년에 없는 대흉이었고, 그 바람에 그 많은 사람들이 굵어 죽었다고 한다. 이유는 참새가 잡아먹는 해충들이 천적이 전멸한 들판에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막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궐하는 바람에, 벼 수확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황사보다도, 황사가 심하여 사람들이 아무 데나 퉤퉤 뱉어내는 가래침보다도, 베이징 시내에선 여기저기 무지막지하게 많은 꽃가루가 날려 숨 쉬기가 어렵다. 포플러 비슷한 나무를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심어 어마어마한 인공 숲을 이루었는데 그 방품림으로 곳곳에서 날아오는 황사가 베이징 시내에는 아예 접근을 못하게 막으려 했다던가.
이제 세계 어디에서 사는 사람들도 정치라는 것을 과히 믿지 않는다. 나라의 이름마다 내거는 민주주의에도 더는 희망을 걸지 않는다. 이제 다들 희망을 버리고 이기심과 동물적인 본능만으로 살아가는 듯하다. 정신없이 밥줄만을 놓치지 않으려고 버둥대다가 때가 닥치면 더 정신없이 죽어갈 것이다.
진짜 세계를 농단하는 놈들은 이제 정치의 무대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이제 알차채지 못한다. 헛된 이미지와 온갖 교활한 미끼로 사람들의 정신을 빼어놓고, 정보 공작과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수단으로 무섭고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면서 그들은 장막 뒤에서 살고 있다. 인류사에서 ‘신’ 이라는 이미지가 자행해온 일들을 지금은 그들이 대행하고 있다.
아! 산에는 꽃만 만발하여 무심히 겁외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멀리서 봤을 때는, 한반도 산하처럼 봄이면 꽃불을 지르는 산벚꽃인가 했더니, 코끝에 스쳐오는 향기가 아니다. 이건 분명 매향梅香이다. 성벽 안쪽까지 가지를 내민 가지에 맺힌 꽃송이들, 송이송이 매화였다.
진로형탈사비상 塵勞逈脫事非常 티끌 세상 괴로움 벗어나는 일 예삿일 아니니
긴파승두주일장 緊把繩頭做一場 줄 끝을 단단히 잡고 한바탕 공부를 지어야 하리
불시일번한철골 不是一番寒徹骨 한번은 추위가 뼛골에 사무쳐야지
쟁득매화박비향 爭得梅花撲鼻香 달리 어찌 매화의 코끝 찌르는 향을 얻으랴
법을 묻는 제자 임제를 세 차례나 두들겨, 만고에 다신 감기지 않는 벽안碧眼을 눈 띄운 황벽희운黃蘗希運(? ~850) 선사 게송이다.
그대는 진리의 꽃 法華법화 2015 / 5
첫댓글 인과로 받는업은 피할수없군요
~~휴~~
어마무시한 분량과 범위를포함한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이제야 겨우 부처님 만나뵈온 지 1년이라 뭐가뭔지 모르겠지만 그저 믿음 하나로 한걸음 한걸음 자신을 찾아가는 불자가 되겠습니다.
눈이 아프도록 열심히 읽고갑니다.
월인천강지곡 또한 부처님이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인연따라 몸을 나투신다는 뜻을 담고있었군요.
스님의 법문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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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