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삼척시 성내동 3-1 소재. 1949년 10월 7일 춘천교구 소속 강릉(江陵, 현 임당동) 본당 관할 공소에서 삼척(三陟) 본당으로 승격되었다가 1965년 3월 22일에 원주교구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며, 1966년 10월 5일 사직리(史直里, 현 사직동) 본당을 분리하면서 본당 이름을 ‘성내리’로, 1988년 10월 18일에는 다시 ‘성내동’(城內洞)으로 바꾸었다. 주보는 천주 성삼.
1946년 강릉 본당 주임 갤라허(F. Gallagher, 葛) 신부에 의해 ‘삼척 공소’(삼척읍 사직 2리)가 설정된 후 신자수가 꾸준히 증가하자 강릉 본당에서는 삼척읍 남양 2리의 개인 주택과 부지를 사들여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하였다. 그 결과 1949년 10월 7일 삼척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매긴(J. Maginn, 陳) 야고보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매긴 신부는 1950년 7월 북한 공산군에게 피살되었고, 이듬해 2대 주임으로 부임한 버크(P. Burke, 表) 파트리치오 신부가 본당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그러다가 춘천교구장 스튜어드(T. Stewart, 朴) 주교가 매입한 현 성당 부지에 성당(133평)과 사제관(30평)을 건립한 후 1957년 11월에 이곳으로 본당을 이전하였다. 한편 본당에서는 1956년 3월 10일에 근덕(根德) 공소, 1958년 4월에 동막(東幕) 공소, 1959년 12월 4일에 궁촌(宮村) 공소, 그리고 이듬해 7월 4일에는 호산(湖山) 공소를 연이어 설정하였다.
1961년 11월에는 본당 구내에 ‘성 요셉 의원’(126평)을 개원하였고, 1963년 10월에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분원이 마련된 데 이어 이듬해 10월에는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또 1963년 11월 1일에는 근덕 공소 강당(35평), 이듬해 12월 22일에는 궁촌 공소 강당(30평)의 축복식을 가졌다. 그러던 중 1965년 3월 22일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가 분리되면서 성내리 본당은 새 교구 소속으로 이관되었다. 이어 1970년에는 본당 사목위원회가 발족되었고, 1972년 10월에는 평화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1988년 2월에 폐원), 같은 해 10월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였다.
이러한 변모 과정 속에서 성내동 본당은 ‘전교하는 공동체’라는 목표 아래 꾸준히 지역의 복음화와 소공동체의 활성화에 노력해 왔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성삼 장학회’를 발족하여 지역 내에 거주하는 불우 학생 돕기에 앞장서고 있다. [출처 : 이유림, 한국가톨릭대사전 제7권, 1999년]
성내동 성당은 동산 위에 있어 삼척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건립되었다. 지금이야 고층 아파트를 비롯한 높은 건물들이 많이 들어선 까닭에 시내에서 성당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시내 어디서든 고개만 들면 곧바로 성내동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또한 성당 구내는 넓으면서 나무로 잘 가꿔진 작은 공원처럼 고즈넉한 성당을 둘러싼 소나무들이 성당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성내동 본당은 1949년 10월 지금의 성당 자리가 아닌 인근 남양리에서 출발했다. 설립 당시 100여명에 불과했던 본당 신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3대 주임이었던 데니스(K. Denis, 姜) 디오니시오 신부는 성당 신축 부지를 물색했고, 여러 군데를 둘러본 끝에 지금의 자리에 성당을 짓기로 마음을 굳혔다. 돌이 거의 없는 밭이기에 성당을 짓는 데 어려움이 없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인근에서 가장 높은 장소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신축에 나선 이는 데니스 신부 후임으로 1955년 11월에 부임한 코너스(K. Conners, 高) 가비노 신부였다. 당시 25살의 젊은 나이에 매사 적극적이던 코너스 신부는 10명이나 되는 땅 주인들을 일일이 만나 설득하면서 땅을 구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선뜻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성당 부지에 주민들이 매년 섣달 그믐날 고사를 지내는 성황당 고목(古木) 두 그루가 있는데, 성당을 짓느라 이 고목들이 망가지면 동네에 큰 재앙이 온다는 미신 때문이었다. 이때 코너스 신부는 “고목에 제사 지내는 것보다 성당에서 매일 제사를 지내면 훨씬 더 큰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두려움에 떠는 주민들을 달랬다고 한다.
성당 신축 공사는 1957년 3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설계도는 춘천교구장 퀸란(Quinlan, 具) 토마스 주교가 보내왔고, 시공은 강릉 임당동 성당과 묵호 성당을 시공한 경험이 있는 중국인 신자 가(賈)씨가 맡았다. 공사는 쉽지 않았다. 공사에 들어간 지 4개월 만에 인부 몇 명만 나오고 대부분 나오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 알고 보니 돈이 많은 외국인 신부가 공사를 하니까 공사를 지연시키면 노임을 더 받을 수 있겠다는 욕심에 단체 파업에 들어간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공사는 재개됐고, 공사 막바지에 자금이 모자라게 되자 교구장 퀸란 주교는 갖고 있던 승용차를 팔아 공사비에 보탰다.
성당 봉헌식을 가진 것은 착공 9개월 만인 1957년 11월 5일이었다. 건평 133평의 성당과 30평의 사제관은 당시 춘천교구에서는 가장 큰 규모였다. 성당 안에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는 퀸란 주교와 친분이 있는 서울의 한 교우가 기증한 것이다. 입체감을 살린 14처는 지금도 외지에서 일부러 사진을 찍으러 올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다. 코너스 신부는 성당을 지으면서 “높이 올라갈수록 하느님과 가까워지기에 성당은 무조건 높은 것이 좋다”고 농담처럼 말했다고 한다.
성내동 성당은 1950년대 후반의 지방 건축기술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아 2004년 12월 3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41호로 지정되었다. 대부분 성당이 구내에 들어서자마자 정면의 종탑을 바라볼 수 있는 데 반해 성내동 성당은 후면으로 들어와 성당을 돌아야 종탑이 있는 정면 출입구에 들어서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종탑이 성당 입구가 아닌 시내 쪽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멀리 있는 사람들도 금방 성당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성내동 성당은 1999년 10월 7일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성당 뒤편에 진 야고보 신부 순교기념비를 건립해 축성식을 가졌다. 2009년 본당 설립 60주년을 준비하면서 삼척시의 지원을 받아 성당 정면에 시내와 연결되는 계단을 만들고, 계단과 시내가 맞닿은 곳에 광장도 조성하였다. 성당 정면 마당 끝에는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는 예수성심상이 자리하고 있다. 2009년 11월 15일 본당 설정 6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고, 2010년 6월 15일에는 성당 옆 마당 끝자락에 2009년 12월 2일 준공한 진 야고보 신부 순교 60주년 기념 성삼 교육관에 대한 축복식을 가졌다. [출처 : 평화신문, 2007년 4월 22일, 남정률 기자의 기사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1년 11월 8일)] [전경 사진 출처 : 성내동 성당 홈페이지]
원주교구 소속 본당.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 2리 719-2 소재. 1904년 5월 원주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분리 ·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루르드의 성모. 관할 구역은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전 지역과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관할 공소는 황둔, 학산 2개소.
전사 및 공소 시대 용소막에 천주교가 전해진 시기는 병인박해 무렵부터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 멀리 수원 지방에서 피난 온 몇몇 신자 가족들이 강원도 평창 지역에 살다가 박해가 뜸해지자 뿔뿔이 흩어져 그 일부는 용소막에서 멀지 않은 황둔(黃屯)으로 내려와 거기서 얼마를 살았다. 그 후 그들은 1890년경에 황둔에서 멀지 않은 충북 제천군 송학면 오미(五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최씨와 백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곳 신자들의 지도자는 최도철(崔道澈, 바르나바)이었다.
그는 병인박해 때 이곳저곳 숨어 다니며 신앙을 보존하다가 1893년 제천 길마돈 공소(현 영월군 주천면 금마리)에서 푸아넬(Poisnel, 朴道行) 신부를 만나 17년 만에 성사를 보았고, 풍수원 본당의 르 메르(L. Le Merre, 李類斯, 루도비코) 신부로부터 전교 회장으로 임명되어 각처로 다니며 전교하였다. 그러던 중 1893년부터 한두 집씩 오미에서 용소막으로 이사 오기 시작하였으며, 1898년에는 최도철도 용소막으로 이사하였다. 최도철은 1898년 1월 13일 5-6명의 교우들과 신부 방이 포함된 초가 10칸의 아담한 경당을 짓고 원주 본당 관할의 용소막 공소를 설립한 뒤 초대 공소 회장을 맡았다. 공소가 개설된 다음해인 1899년에 오미에 살던 백(白)씨네와 행주(幸州)에 살던 선병로(宣秉魯, 베드로) 일가가 용소막으로 이사해 옴으로써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1900년 10월 24일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가 이곳을 방문하여 새 경당을 축복해 주었다.
본당 설립과 발전 당시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백낙훈이 신부가 사제관으로 사용할 집 한 채를 마련하자 최도철 회장은 용소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켜 줄 것을 원주 본당에 청원하였다. 그러자 원주 본당의 르 메르 신부는 이웃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鄭圭夏, 바오로)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하여 협의하여 뮈텔 주교에게 건의하였고, 마침내 1904년 5월 4일 뮈텔 주교가 이 건의를 허락함으로써 용소막 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임으로는 1903년에 입국한 프와요(V. Poyaud, 表光東) 신부가 임명되었다. 프와요 신부가 부임할 당시 신자수는 864명에 지나지 않았지만 관할 구역은 원주군, 영월군, 평창군, 제천군, 단양군 등 5개 군에 걸쳐 있고 사방 3백 리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프와요 신부가 최도철 회장, 선병로 회장, 최도철 회장의 셋째 아들 최영식(바오로) 등의 도움을 받아 열심히 전교한 결과 수년 후에는 교세가 1,000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1910년 프와요 신부가 서울로 전임될 때에 이르러 용소막 본당은 교세가 1,238명에 달하는 큰 본당으로 발전하였다.
2대 주임으로는 용산 신학교 교수이던 기요(J. Guillot, 吉) 신부가 부임하였다. 기요 신부가 부임한 지 한 달 만인 1910년 11월 12일에 뮈텔 주교가 본당을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견진 · 혼배 · 고해 등 여러 성사를 주었다. 기요 신부는 1913년 새 양옥 성당 건립 계획을 세우고 우선 장마철을 이용하여 성당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운반해 오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기요 신부가 1914년 4월 용산 신학교로 전임되고 시잘레(P. Chizallet, 池士元)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시잘레 신부는 그 해 가을에 묘재(山尺, 현 충북 제천시 봉양읍 학산리) 공소의 이석연 회장의 알선으로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공사를 담당하게 하는 등 성당 신축 공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장티푸스에 걸려 앓고 있던 최도철 회장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모든 신자들이 적극 나서서 성당 신축 공사의 일을 열심히 도운 결과, 착공한 지 3년 만인 1915년 가을에 100평 규모의 아담한 벽돌 양옥 성당을 완공하였다. 이 새로 지은 성당 지붕의 경사가 상당히 가파르게 된 것은 당시 건축 기술자였던 중국인이 도면대로 짓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기둥의 길이를 2자씩 잘라내고 지었기 때문이다. 이 당시의 총신자수는 2,081명에 달하였다. 6대 주임으로 부임한 백남희(白南熙) 베드로 신부는 1938년 봄에 학산 공소의 강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1939년 4월 25일 춘천교구가 서울교구에서 분리 · 신설됨에 따라 용소막 본당은 서울교구에서 춘천교구로 이관되어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관할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7대 주임으로 부임한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갤라거(F. Gallagher, 갈) 프란치스코 신부는 1940년 7월에 관할 구역 안에 있던 제천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여 분리시켰으며, 1941년에는 지역 주민들의 문맹 퇴치와 전교를 위해 4년제 학교인 명덕국민학원을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한 결과 5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43년에는 대동아 전쟁을 벌이던 일본군에 의해 성당의 종을 공출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10대 주임으로 부임한 주재용(朱在用) 바오로 신부 때는 6.25 전쟁이 발발하여 본당이 크게 피해를 입었다. 성당은 공산군들의 식량 창고로 전락되었고, 성당 내부의 성모상이 총탄을 맞아 목과 전신이 파손되었으며, 성당 천장도 총탄의 세례를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아울러 명덕국민학원 교사와 본당 사목 문서도 모두 불에 타 버렸고, 회장들이 공산군들에게 끌려가 숱한 고초를 당하였으며, 일반 교우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성당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게 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이 끝난 뒤 이종흥(李鍾興) 크리산도 신부가 1952년 10월에 11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종흥 신부는 성당과 사제관을 원상 복구하고 강당을 신축하는 한편, 1953년 10월경에는 무염 시태 성모 마사비엘 성모상을 완공해 신자들의 신심을 성모님께 향하도록 함으로써 침체된 농촌 교회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12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동오(崔東五) 아타나시오 신부는 1955년 9월에 6.25 전쟁으로 불타 없어진 학산 공소 강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고, 12월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여 가난한 신자들이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3대 주임으로 부임한 디어리(P. Deery, 李) 파트리치오 신부는 1958년 송계리 공소를 설립하였고, 1960년 12월에는 가리파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1962년에는 송계리 공소의 강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1965년 3월 원주교구가 춘천교구에서 분리 · 신설됨에 따라 용소막 본당은 춘천교구에서 원주교구로 이관되었다. 이후 용소막 본당은 관할 지역의 분할과 주민들의 도시 진출 현상으로 말미암아 교세가 크게 감소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27대 주임으로 부임한 아이젤(H. P. Eisel, 양) 파트리치오 신부는 1981년 유아원을 세워 신자들을 비롯한 지역 주민들이 유아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1983년 5월에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신부들이 원주교구에서 철수함에 따라 이후부터는 한국인 사제들이 본당의 주임을 맡게 되었다. 28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태원(金泰元) 요한 신부는 1984년에 성당 내부를 수리하고 성당 지붕을 동판으로 교체하였으며, 1985년에는 초가집을 구입하여 피정의 집인 두루의 집으로 개축하였다. 아울러 1986년 7월에는 수녀원을 건립하여 성모 영보 수녀회 분원을 마련하였고, 도농 간의 나눔의 공동체 실현을 위해 서울교구 소속의 길동 본당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또한 1987년 10월에 남상교(南尙敎)의 후손과 미아 3동 본당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학산 공소 강당 옆에 있는 남상교 유택의 지붕을 기와로 교체하고 뒷산에 14처를 조성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는데, 남상교는 성인 남종삼(南鍾三)의 부친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꽃당이(현 제천시 백운면 화당리)에서 이곳으로 이사와 살았던 인물이다.
아울러 1988년 11월에는 용소막 출신 사제로 성모 영보 수녀회를 설립하고 성서 번역에 큰 자취를 남기고 1976년에 선종한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의 삶과 공적을 기리는 유물관을 성모 영보 수녀회의 도움을 받아 설치하였고, 피정 센터인 두루의 집과 지하 기도실을 새로 준공하여 축복식을 가졌으며, 1989년 5월에 낡고 협소한 학산 공소의 강당을 헐고 새로 지은 뒤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29대 주임으로 부임한 곽호인(郭鎬仁) 베드로 신부는 1990년 12월 가리파 공소가 중앙 고속도로 건설 부지에 편입됨에 따라 이를 폐쇄하였으며, 1991년 4월에 황둔 공소의 강당을 이전 · 신축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아울러 1994년 4월에는 남상교 유택을 수리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 소방도로 개설로 인하여 신림 공소 건물을 철거하였다. 31대 주임으로 부임한 남궁민(南宮玟) 루카 신부는 피정 센터인 두루의 집을 보수(1, 2층) · 증축하여(3층) 축복식을 거행할 뿐만 아니라 성당의 전기 시설을 수리하고, 음향 시설을 교체하며, 마루와 창틀을 보수하는 등 본당의 시설물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단행하였다.
33대 주임으로 부임한 박상용(朴相龍)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2000년 4월에 남의 소유로 되어 있던 메주 집 부지(355.4평)를 교구의 도움을 받아 매입하였다. 이 메주 집에서는 10여 년 전부터 신자들이 메주와 된장을 제조하여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길동 본당 신자들이나 다른 도회지 신자들 및 수녀원에 판매해 오고 있으며, 그 수익금으로 열악한 본당의 재정을 돕고 있다. 많은 도회지 신자들이 1915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성당 건물과 선종완 신부의 기념관도 둘러볼 겸 용소막 본당을 방문하여 이곳 신자들이 직접 만든 토종 메주나 된장을 사 가고 있다. [출처 : 서종태,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에서 발췌]
고딕양식을 변형시킨 소규모 벽돌조 성당의 전형적 형태인 용소막 성당은 1986년 5월 23일 강원도 유형 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 5월 5일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교구장 김지석 주교의 주례로 기념미사와 축하식을 가졌다. 2003년 부임한 이학근(李學根) 신부를 중심으로 용소막 본당 공동체는 본당 설립 100주년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왔다. 성당 앞마당에 야외미사를 위한 제대를 만들고, 사제관과 성당 진입로를 정비했으며, 종탑과 종을 새로 교체하고 성당 뒷산에는 십자가의 길과 로사리오 동산을 꾸몄다. 그리고 예수부활상과 성모상도 새롭게 봉헌하였다. [최종수정 2011년 1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