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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하14:1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작의 중요성을 강조 했지만, 엄밀히 말해 반은 완성 점이 아닙니다. 종점까지 완주해야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도 비슷해요.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과 함께 지속성 있게 살아가는 이후의 삶도 중요합니다. 어떤 자세가 필요한가?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평가는 인간 권력이 누구로부터 오는 지를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고 봅니다. 사건에서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전개되는 역사에서 선지자들의 등장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심을 계시 합니다.
There is a saying that a beginning is half. I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starting, but strictly speaking, half is not the completion point. It makes sense to complete it until the end. The life of faith is similar. Along with the process of entering into a relationship with God, life after continuing is also important. What posture is necessary? I think the evaluation of Israeli history begins with showing who human power comes from. The emergence of prophets in the unfolding history from event to event is that God is the master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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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도록 권력이 행사 될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역사가 형성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권력은 타락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거듭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는데, 이는 그것이 주는 쾌락이 있기 때문입니다(권력이란 무엇인가, 한 병철, 2011, 문학과 지성사). 누군가 가 나의 명령에 따르고, 내 뜻에 따라 움직이는 건 매우 기쁜 일입니다.
In particular, the word of God is at the center of it. When power is exercised so that the word of God becomes a reality, good history is formed in God's eyes. Otherwise, power degenerates and cannot escape God's judgment. Despite knowing this well, humans seek to exercise power over and over again because there is the pleasure it gives (What is power, Byeong-cheol Han, 2011, History of Literature and Intelligence). It is a great pleasure for someone to obey my orders and move according to my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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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할 사람이 없다면, 최소한 자기 자신을 삶의 주인으로서 자리 매김 하려고 합니다. 만일 이런 가능성이 줄어든다면, 다시 말해 권력을 가졌더라도 자신의 마음대로 행할 수 없다면 권력을 추구하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다고 권력에 아무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면 폭력과 강제가 횡행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은 물론이고 타인을 향한 폭력이 일상 화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권력은 늘 폭력과의 관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합니다.
He at least tries to establish himself as the master of his life if there is no one to manipulate. If this possibility is reduced, in other words, even if you have power, your pursuit of power will be significantly lessened. However, if you don't attach any meaning to power, violence and coercion will prevail. Violence against others, as well as against oneself, becomes commonplace. As a result, human power, which does not recognize God as its master, always walks a tightrope in relation to viol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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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샤는 29년 이라는 매우 오랜 시간 유다를 다스렸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선 왕들처럼 그 역시 산당은 제거하지 않았고 백성이 산당에서 제사하고 분향 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모릅니다. 그 앞의 왕들도, 그 뒤에 왕들도 그랬던 것을 보면, 백성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기 위한 통치 전략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사는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처형 했지만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를 죽이지 말라는 율법을 따라(신24:16, 렘31:29)그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Ahmasha had ruled Judah for a very long time, 29 years, and was honest in Jehovah's eyes. But like other Zen kings, he also did not remove the mountain temples and did not prevent the people from worshipping and burning incense in them. I don't know why. The kings before him and the kings after him seem to have a governing strategy not to over stimulate the people. Ahmasa executed the servants who killed the father, but he did not kill the children because of the sins of their parents (신 24:16, 렘 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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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사는 성경이 가르친 대로 개인적인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데 주력한 것입니다. 아마사는 다윗이 에돔을 굴복 시킨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 명을 죽이고 승리합니다. 기고만장 한 아마사는 이스라엘에게도 도전합니다. 이에 요아스는 가시나무가 짓밟힌 우화를 들려주면서, 아마사가 에돔을 이긴 것 때문에 교만해졌다고 조롱합니다.
Amasa focused on realizing God's righteousness, not personal retaliation, as the Bible taught. Amasa kills 10,000 Edomites and wins in the Valley of Salt, where David surrenders Edom. Amasa also challenges Israel. In response, Joas tells a fable that the thorn tree is trampled on, mocking Amasa for being arrogant because of his victory over 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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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요아스는 유다 땅 벧세메스에서 아마사를 쳐서 이긴 후 예루살렘 성벽을 허물고 성전과 왕궁 곳간의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사람들을 볼모로 잡아갔습니다. 어제 승리의 환호를 하루아침에 수치와 조롱의 신음으로 바꾼 것은 다름 아닌 유다 왕의 교만이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아마사가 요아스보다 어느 모로 봐도 못 하지 않은데 성경 기자가 요아스를 더 낫게 여기는 이유가 뭘까? 온전한 신앙은 어떤 모습인가?
Finally, after beating Amasa at Bethsemes, Judah, Joas demolished the walls of Jerusalem, seized gold and silver between the temple and the palace, and took the people as hostages. It was none other than the king of Judah's arrogance that turned yesterday's victory cheer into a groan of shame and ridicule overnight. Why does a biblical journalist think of Joas better when Amasa is worse than Joas? What does a full faith look 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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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 왕 아마샤의 통치(1-14)
a.아마샤의 통치 도입부:1-4
b.아마샤의 통치:5-14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통치 종결부(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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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1a)
요아스 이년에(1b)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1c)
아마샤가(1d)
왕이 되니(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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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나아갈 때에(2a)
나이 이십 오세라(2b)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 하니라(2c)
그 모친의 이름은 여호앗단이라(2d)
예루살렘 사람이더라(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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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샤가(3a)
여호와 보시기에(3b)
정직히 행하였으나(3c)
그 조상 다윗과는(3d)
같지 아니하였으며(3e)
그 부친 요아스의(3f)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3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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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4a)
백성이 오히려(4b)
산당에서(4c)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4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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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그 손에 굳게 서매(5a)
그 부왕을 죽인(8b)
신복들을 죽였으나(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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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6a)
죽이지 아니하였으니(6b)
이는 모세의 율법 책에(6c)
기록된 대로 함이라(6d)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6e)
자녀로 인하여(6f)
아비를 죽이지 말 것이요(6g)
아비로 인하여(6h)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6i)
오직 사람마다(6j)
자기의 죄로 인하여(6k)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6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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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샤가 염곡에서(7a)
에돔 사람 일만을 죽이고(7b)
또 셀라를 쳐서 취하고(7c)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7d)
오늘까지 그러하니라(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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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샤가(8a)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8b)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8c)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8d)
오라 우리가(8e)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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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 요아스가(9a)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9b)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9c)
레바논 백 향 목에게 보내어(9d)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9e)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9f)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9g)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9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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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에돔을 쳐서(10a)
파하였으므로(10b)
마음이 교만하였으니(10c)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10d)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10e)
너와 유다가 함께(10f)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10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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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11a)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11b)
올라와서(11c)
유다 왕 아마샤로 더불어(11d)
유다의 벧세메스에서(11e)
대면하였더니(11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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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가(12a)
이스라엘 앞에서(12b)
패하여(12c)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12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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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왕 요아스가(13a)
벧세메스에서(13b)
아하시야의 손자(13c)
요아스의 아들(13d)
유다 왕 아마샤를(13e)
사로잡고(13f)
예루살렘에 이르러 (13g)
예루살렘 성벽을(13h)
에브라임 문에서부터(13i)
성 모퉁이 문까지(13j)
-사백 규빗을 헐고(13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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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호와의 전과(14a)
왕궁 곳간에 있는(14b)
금은과 모든 기명을 취하고(14c)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14d)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1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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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스의 남은 사적과(15a)
그 권력과(15b)
또 유다 왕 아마샤와(15c)
서로 싸운 일은(15d)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15e)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15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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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16a)
이스라엘 왕들과(16b)
사마리아에 함께 장사되고(16c)
그 아들 여로보암이(16d)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16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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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개혁_unfinished reform_
판단 착오_a misjudgment_
슬픈 결과_a sad result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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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며 걸려 넘어지는 암초와 같나이다. 아마사의 교만으로 유다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고 왕도 무명의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나이다. 주님, 성령 안에서 분별력을 같고 과유불급의 줄타기를 더는 하지 않게 하옵소서.
Lord, pride is the vanguard of defeat and is like a reef. With Amasa's pride, Judah had to pay a high price, and the king was killed by an unknown man. Lord, please do not walk the same tightrope in the Holy Spirit.
2024.9.27.fri.C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