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명문: 상신 가문-청풍김씨 김극함 가문의 교훈
조선조 중, 후기 상신 가문/ 청풍김씨 우의정 김구 선조 김극함 가문의 교훈
청풍김씨 우의정 김구 선조 김극함 가문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이는 김징 부부이다. 김징은 택당 이식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이식은 신흠, 이정구, 장유와 함께 한문 4대가로 꼽힌다. 어릴 때는 이식에게 글을 배우고 그 뒤 동춘당 송준길에게 글을 배웠다.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으로 직언을 서슴치 않아 고위 관리들의 미움을 사서 좌천되기도 했다. 한때는 영의정 정태화와 좌의정 홍명하의 죄를 논핵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벽동에 유배되었다. 그 뒤 풀려나 동부승지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김징의 배위 함평이씨는 이조참판 이효원의 증손녀로 이 집에 공로가 크다. 함평이씨의 증조는 이조참판을 지냈으나 초가에 살면서 청빈하여 세상 사람들이 재신을 지낸 사람 같지 않다고 하였다. 이효원은 광해군 즉위 초에 거제에 유배되어 14년간 귀양을 살았고 그 아들 한림 이정은 울분을 참지 못해 죽었다. 이정의 동생 이해는 공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다. 함평이씨는 한림 이정의 손녀이며 청백리 이해의 종손녀이다. 함평이씨는 명문 출신으로 청풍김씨 가문을 번성케 하였다. 이 함평이씨는 80세가 되도록 장수하면서 맏아들 구를 우의정에 둘째 아들 유를 대제학에 올려놓고 손자 호조참판 희로, 영의정 재로, 부사 정로, 이조판서 취로, 판결사 성로, 좌의정 약로, 영의정 상로를 장성하도록 키웠다. 그 아들, 손자, 증손, 현손 4대가 6상이 났다. 이것은 함평이씨의 부덕의 힘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앞장에서 우의정 김구 집안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대제학 검재 김유 집안을 보기로 한다. 김유는 박세채와 송시열 양문에서 수학했다. 일찍부터 문명을 날렸다. 경학이 뛰어나 천거를 받아 창릉참봉에 임명되었다. 그 문과하여 삼사, 춘방, 반장, 제학, 이조참판을 거쳐 양관 대제학에 올랐다. 배위는 참판 송시길의 손녀 여산송씨이다. 둘째 아들 취로는 문과에 삼사, 춘방, 대사헌을 거쳐 6조 판서를 지내고 숭록대부 판의금부사에 이르렀다. 위는 판서 이기하[지중추 한흥군 이여발 아들]의 딸 한산이씨이다. 셋째 아들 성로는 판결사를 지냈다. 배위는 감사 홍성보의 손녀 풍양조씨이다. 넷째 아들 약로는 6조 판서를 지내고 좌의정에 올랐다. 배위는 대제학 이일상[대제학 이명한 아들]의 손녀 연안 씨이다. 다섯째 아들 상로는 여러 조의 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배위는 판서 조정만의 딸 임천 씨이다.
대제학 김유의 장손자 치량은 현령을 지냈다. 배위는 좌의정 이관명[대제학 이민서 아들]의 딸 전주이씨이다. 둘째집 손자 치영[이조판서 취로 아들]은 처사며, 배위는 영의정 한익모의 딸 청주 씨이다. 손서[취로 사위]는 남양 씨 판서 홍계희이다. 셋째집 손자 치공[좌의정 약로 아들]은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넷째집 맏손자 치양[영의정 상로 아들]은 이조참의를 지냈다. 배위는 판서 정익하의 딸 연일정씨이다. 셋째 손자 치현은 교리를 지냈다. 배위는 참판 홍자의 딸 남양홍씨이다. 넷째 손자 치광은 처사며, 배위는 이조판서 도암 이재의 손녀 우봉이씨이다.
김유의 장증손 종건은 학행이 있었다. 배위는 부윤 이정명의 증손녀 전주이씨이다. 둘째집 증손자 종걸은 처사이다. 배위는 판서 홍낙명의 딸 풍산홍씨이다. 셋째집 증손[판결사 성로 손자] 증철은 처사이며, 배위는 판서 유복명의 손녀 전주유씨이다. 넷째집 증손 종부는 처사이며, 배위는 판서 이연상[좌의정 건명의 손자인데 영의정 경여 현손으로 입양]의 딸 전주이씨이다.
청풍김씨 관찰사 김징 부부는 앞장에서 이미 살펴 본 우의정 김구 집과 위에서 살펴 본 대제학 김유 집을 이와 같이 화려하게 꽃을 피게 하였다. 김징은 기절있는 유가의 가풍을 몸소 실천한 고위 관리이다. 전라도 관찰사로 재임시 어머니 회갑 잔치를 수수하게 하였는데도 수령들로부터 많은 뇌물을 받았다고 의금부에 투옥되고 배천에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강음, 광주 등지에서 은거하다 투옥의 아픔을 잊지 못해 53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이때 맏아들 구는 27세, 유는 23세의 청년이었다.
어머니 함평이씨는 남편이 죽은 뒤 6년 동안 아들의 뒷바라지 끝에 맏아들 구를 문과에 장원급제시켜 우의정에 오르게 했고, 둘째 아들 유를 7년 뒤 사마시에 합격시키고 23년 뒤 기어코 문과에 급제시켜 대제학이 되게 하였다. 이것이 모두 홀어머니 함평이씨의 피나는 노력의 댓가다.
함평이씨는 청백리 집안의 후손답게 어머니로서 그 덕이 아름다워 남편 출세에 이바지하고 아들을 현달시키는데 일생을 바쳐 모두를 성공시켰다. 하나를 버리고 열 개를 손에 쥔 셈이다. 조선의 위대한 여인 신사임당, 약봉 어머니, 좌의정 김국광 조모 양천 허씨에 이어 또 여기서 위대한 여인 하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위대한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함평이씨도 위대하고 아름다웠으며 고왔다. 청백리 집안의 기품으로 절개가 있고 분수를 지켜 덕행을 쌓았다. 제반 행동은 예의에 맞았으며 자태는 줍고 아름다웠다. 식구를 잘 돌보아 가정이 화목하고 남편이나 자식들이 밖에 나가 종사하는 일에 열의와 정성을 마음껏 쏟게 하였다. 어진 마음으로 친척을 대하고 손님 접대를 기꺼이 하여 집안의 명성을 멀리 멀리 아름답게 전파했다.
청풍김씨는 이와 같이 한 여인의 부덕을 밑바탕으로 하여 명문이 된 것이다. 조선의 명문이 꽃을 화려하게 피운 이면에는 여인의 아름다운 마음과 고운 행동이 있기 마련이다. 그 마음과 행동의 위대함을 드러내지 않는 겸양의 미덕이 3-400년이 지난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이것이 명문의 위력이며,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