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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성의 세 층위
김지숙(문학평론가 시인)
사람들의 일상은 대부분 먹고 자고 일어나서 활동하는 생리 현상에 대한 충족으로 시작된다. 이에는 매일 되풀이 되는 생물학적 행동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와 관련된 활동이 인간사의 배후가 된다. 따라서 일상을 통해 한 개인의 내면과 외연적 삶의 정도를 파악할 수 있으며 이로써 일상적 공간에서 발현되는 특정한 행위에 담긴 일상성의 의미들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개인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읽을 수 있다.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우리의 삶은 자주 외부로 표출된다. 때문에 일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건져 올린 감성과 직관은 개인의 본성과 더불어 보다 자연스럽게 문학작품 속으로 스며든다. 개인의 일상은 전반적인 삶에 비해 다소 사소해 보이지만 외부로 표출된 평소 행동과 그 활동의 범주로 가려진 내면의 깊이를 비교적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는 매개가 된다. 이에서 나아가 특히 시에 나타나는 시공간 속에 표현된 일상적 특성은 개인이 지니는 시적 특성과 의미들을 보다 섬세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개인마다 서로 다른 고유성을 지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이 갖는 가치는 사소하지도 시시하지도 않고 무의미하지도 않다 그러나 오래되고 견고한 습관이 자주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또 지속되면서 우리는 이들에 무감각해 하거나 전혀 참신해 하지도 않고 둔감하다는 사고의 틀을 갖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그러한 가치는 설사 고루하고 지루하다고 해도, 각 개인만이 발현 가능한 고유의 영역이므로 일상성은 매일의 반복되는 삶 속에서 찾는 것이 자연스럽다
A. 쉬츠와 T. 루크만에 따르면 일상은 다른 어떤 영역보다도 우위에 놓이는 ‘상호소통의 실재’라고 본다. 왜냐하면 일상은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경험의 현장이자 동시에 서로의 행위가 지향하는 목표지점이 되는 영역으로 다양한 층위를 가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M. 마페졸리에게 일상은 ‘다차원적이며 다중심적이면서도 사소하고 돌발적인 것, 그리고 삶과 경험을 통해 합리성과 다원성을 증대시키는 세계’로 표현된다.(M. Maffesoli, 1989)
이들 두 사람의 견해는 다소 이질적이나 ‘소통’과 ‘다원성’이라는 부분에서는 다양한 층위를 지니는 일상의 공통점을 언급하고 있어 둘 다 설득력을 지닌다. 이를 예술과 관련지어 볼 때, 작품 속에서 일상은 편안하고 안락한 보통의 행복한 삶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어색한 정형화된 모습을 연출하거나 이와 상반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언뜻 보면 하찮거나 무미건조하고 무의미한 듯 보이지만 실상은 조작과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소비에 급급한 욕망을 장착한 채 일상을 살아간다. 따라서 특정한 이들의 일상적 특성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현대 사회 속에 표출된 각 개인의 사고와 문화를 읽을 수 있고, 이로써 이들의 내면 깊숙이 다가서기도 한다. 또한 이 일상에 나타나는 특성에는 한 개인에 대한 중요한 단서들이 함축되어 있고, 이에 대한 면밀한 고찰은 당대 현실을 살아가는 한 개인의 삶이 물리적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삶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방안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또한 주관적인 상황에 따라 개인의 일상은 스스로의 내면과 외부 상황과 더불어 사회적 상황까지도 간섭받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 이는 수많은 언어적 발현의 배경이 되어 작품을 창작하기도 하는데 그 경우, 작품 속에서는 당대적 사회적 공동체적 상황과 더불어 함축된 고유한 개인적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일상의 특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예로 우리는 흔히 뫼비우스의 띠를 생각한다. 일견 지루하기도 하고 한편,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순환하지만 안팎의 구분이 없고 방향을 매길 수도조차 없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한 반복의 단조로움은 우리의 일상에서 오는 고통을 대변한다. 결국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일 매일을 비슷비슷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숙명의 쳇바퀴 위에 얹혀 순환하는 존재로 자신들의 일상을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적 특성에서 나아가 보다 일탈된 일상의 시작은 바로 비일상적인 것들을 가시화하는데서 시작된다. 일상은 관계나 요구 존속 박탈 억압 등의 부정적인 면과 더불어 기쁨 쾌락들과 같은 긍정적인 면이 뒤섞이고 모순된 채 반복적인 형태를 거듭하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온 것은 사실이다 이 일상(Quotodiennete)은 인류가 지상에 존재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비교적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왔고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삶에 대한 근대적인 산물로 기정사실화되었으며 인류가 살아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되어 갈, 삶의 한 양상이라는 점은 누구나 크게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일상성에 대한 기존의 논의들은 주로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으로 나누어 일상에 주목하는 경향과 일상을 영위하거나 재구성하는 내용으로 논의되거나 혹은 일상에 미친 요인들에 주목한 연구들이 주를 이룬다.(공제욱 2006) 일반적으로 층위에 대한 이러한 논의들은 대체로 한 텍스트에 깊은 관심을 갖고 의미가 부여하는 가치를 어떤 형식을 통해 이를 전달하고 해독하는 진행과정을 거쳐 결론적으로 층위에 대한 관점이 형성된다. 따라서 어떤 사물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부분에 이르면 우리의 일상 속 행동에 대한 고찰도 이와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치면서 완성된다는 것을 반증하게 되는 셈이다.
언어학에서 층위란 어떤 유(類)의 언어 요소나 단위가 전체의 언어 구조상에서 차지하는 위치. 언어 분석 단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가령 언어학자는 음소(音素)보다 높은 층위의 기술로서 형태소(形態素)를 설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문장의 구조를 기술하며, 다시 형태소의 구조는 음소라는 낮은 층위의 단위를 바탕으로 기술함으로써 분석의 능률을 기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층위란 학문이나 사상 등에서 어떤 종류의 요소가 전체 구조에서 가지는 위치를 말하며, 문화적 사회적 이데올로기적 심층심리적인 다양한 층위를 들 수 있다.(국립어학원 설명참조)
이 층위는 자연적 현상에서는 계층적으로 구분되어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층위에 대한 언급은, 우리가 어떤 사실을 설명하거나 어떤 현상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편의상 층위로 나누어 기술하기도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 논의에서 층위는 시적 체험에 바탕을 둔 시공간의 범주화에서 시작된다. 본 논의에서 첫 번째 층위는 시의 화자와 사물 간의 관계에 해당되는 물리적 시공간으로 나누는 경우에 해당되며, 이는 현실의 상황 속에 화자가 현존하는 시공간으로 ‘표층’이라 한다, 둘째 층위는 심리적 현상을 다루는 내면의 시공간에 해당되며 이는 순행적 구성이 아니다. 이는 언제든 튀어나왔다가 사라지는 반성 추억 기억 등과 관련지어 인지된 심리적 시공간을 언급하며 이를 ‘심층’이라 한다. 셋째 층위로는 표층과 심층이 함께 드러나는 ‘다층’으로 구분하여 일상성이 지니는 개인적 특성을 파악하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2월호에 수록된 시들 중 일상적 특성 즉, 일상성이 표출된 시들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 이들이 지닌 물리적 심리적 시공간으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표층 심층 다층이라는 세 부류로 나누고 이들이 일상성과 관계 맺는 양상 속에서 표출되는 개별적 특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일상성의 표층, 현실
대부분의 일상은 개인의 영역과 공동의 영역으로 나뉘며 공동의 영역은 가족의 영역에서 나아가 사회적 국가적 세계적 영역으로까지 확대되기도 한다. 이 개인의 영역에서의 경험들은 주로 스스로가 삶의 주체로 혹은 인식의 주체로 활동하는 시공간 속에서는 특별히 개별적 특성을 드러낸다. 공동의 영역에 해당되는 경우는 가족에서 나아가 사회적 공간까지도 포함하며 이 경우는 개인 영역에서 좀 더 확장된 범주로 이는 시대적 상황과 더불어 해석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경우는 물리적 시공간이 한 시대의 시 공간 내에서 이루어지며 다양한 장소성이나 시간성을 드러내기도 하고, ‘이동과 머묾’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만 물리적인 시공간의 경우는 주로 한정된 공간에 놓이며 시공간의 이동 변화는 비교적 드물게 나타난다. 화자의 일상적 특성이 물리적인 공간에서 한정되어 표층에 드러나는 경우에는 화자가 언급된 일상의 공간이 바로 화자가 현존하는 공간으로 설정된다. 이는 화자가 놓인 공간이 화자의 상황을 좌우하는 절대적 우위에 놓이며 이들은 주로 순조롭거나 혹은 부정적인 관계를 획득한다는 관점에 놓인다. 이처럼 물리적 시공간이라는 층위가 표층으로 드러나는 시의 경우에는 어떤 삶에 대한 태도와 방식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는지 아래 시들을 물리적 시공간에 중점을 두고 언급하고자 한다.
움푹 패인 봄햇살이
미친 듯이 헝클어진다
어머니가 주신 좋은 점수는
불협화음으로
마음 다치고 정신 다치고
존재 균열이 걸어온다
바닥에 깔린 아이는
상대방 엉덩이를 물었다
“넌 어지러운 거야”
내부에 숨겨진 험악한 감정을 숨기고
힘없이 빛나는 눈매
바보처럼 허술하고 허술하게
삶을 나누고 있는 패거리
-박건자 ⌜우리 모두의 아픔-소년원 아이들⌟
우리는 일정한 시공간에서 반복된 삶을 살아가는 한편, 비교적 유사한 의식의 지배를 받으며 판단하고 살아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생은 한 순간도 똑 같이 이어지거나 같은 감정이나 속도로 진행된 적은 없다 매일 바닷물이 밀려오고 밀려가고, 또 같은 방향에서 해가 뜨고 지는 일이나 혹은 폭포의 물이 한결같이 아래로 떨어지는 일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느끼는 배고픔 등과 같은 자연현상조차도 우리는 지극히 천편일률적이며 대체로 변함이 없는 일상이라 치부한다.
하지만 그러한 일상들은 우리들 스스로가 관념화시킨 논리에 불과하다 매일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는 해조차도 조금씩 동으로 움직이거나 서로 변화하며 그 햇살의 강도가 한순간도 같지 않게 움직이고 있다 또 폭포수조차도 그 물의 양이 일정하지 않고 떨어지는 방향도 같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어떤 큰 틀을 정해 놓고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한 기존의 생각들을 서로에게 주입시키고 주입당하면서 일상의 기준을 비슷하게 만들고 인지하면서 살아간다.
박건자의 시 ⌜우리 모두의 아픔-소년원 아이들⌟에서 화자는 ‘소년원’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상에 대하여 언급한다. 아이들은 겉으로 보면 ‘어머니’라는 존재에 의해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듯 보지만 어머니의 부재 시에는 이들은 서로의 엉덩이를 물고 험악한 감정을 숨기고 힘없는 눈빛을 보내는 ‘불협화음’이 만연한 일상들을 표면에 떠올린다. 이러한 물리적 시공간들은 불행한 상황을 표출하며 그 일상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육체는 물론 내면에 이르기까지 ‘마음’과 ‘정신’은 다치고 병들고 상처 입는다. ‘험악한 감정’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공간 속에서 생겨나는 이 감정들을 뒤로 숨긴 채 주어진 일상의 삶을 겉으로만 평화로운 듯 실제로는 ‘허술하게’ 살아간다.
불교에서 인드라망( indrajāla)이란, 천신의 왕 ‘인드라’가 머무는 궁전 위에 펼쳐진 그물을 말한다. 이 그물의 코에는 보배구슬이 달려있고 모든 구슬들이 서로가 서로를 거듭 비추어 중중 무진으로 관계가 펼쳐진다. 말하자면 모든 관계는 연기된다는 의미를 지닌 이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장애도 없다는 세상의 실상을 언급할 때에 사용된다 한 손가락이 다치면 다른 네 손가락도 아픈 것처럼 시에서 아이들은 ‘균열이 걸어온다.’에서처럼 한 공간에 존재하는 아이들은 같은 사람의 명령아래 움직이는 일체화된 공동체처럼 보이지만 실은 낱낱이 균열된 존재라는 점을 각인시킨다. ‘상대방 엉덩이를 물었다’에서와 같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상 속에서 동일한 물리적 시공간 속에서 매일의 반복되는 삶은 별반 다를 바 없는 일상으로 이어진다. 비록 물어버린 것은 상대의 엉덩이이지만 그 고통은 결국 나머지 아이들에게도 낱낱이 느끼는 아픔의 일체감을 느끼고 이로써 이 시의 화자는 공동체적 삶 속에서 감내하며 살아가야 하는 견디기 힘든 일상은 모두 자신들이 함께 감수하고 가야 한다는 삶에 대한 가치관을 지닌다.
벚꽃 그늘 아래에선
누가 꽃을 바라만 보아도
한 폭 그림이 된다
풍선을 든 천진한 아이들
꽃그늘 진 벤치에 서로 기댄 연인
책 읽는 얼굴에 노을이 들고
꽃터널 속으로 스쳐가는 자전거
나무는 꽃을 뿌리며 바라본다
벚꽃 그늘 아래 서면
무언가 사람을 일렁일렁 흔든다
한 잎 두 잎 흔들리는 꽃잎 아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
가난을 울며 쪼그려 앉은 여인
얼굴이 험상한 사내가 서 있어도
벚꽃 그늘은 사람을 품는 풍경이 된다
-박강남 ⌜바람 없이도 흩날리는 꽃잎⌟
사회 심리학에는 ‘일상성의 편견(Nomalcy bias)’ 현상이 있다. 이는 우리의 뇌가 인지하는 패턴 중 하나로 현재의 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정보를 이용하며 이로써 미래를 예측하는 정신의 정도를 말한다. 우리의 뇌는 이러한 유사한 패턴을 비교적 이탈 없이 유지하기 때문에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으며 안정된 일상을 유지하고 변화 없이 살아가면서 그러한 삶이 안정되고 편안하다고 느끼는 한편, 비교적 큰 동화나 굴곡 없이 지낸다.
이는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의 비유’에서도 찾을 수 있다 동굴 속의 죄수들은 실물이 아닌 어떤 그림자를 늘 바라보다 보면 그것이 바로 실재라고 믿어버리는데 이는 결국 죄수들의 ‘일상성’ 중의 하나로 나타난다. 늘 반복되는 물리적 환경 속에서 세뇌된 어떤 형상들을 곧 자기 확신으로 결정하면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이는 F. 베이컨이 사람들의 올바른 판단을 막는 장애요인으로 선입견과 편견을 들고 이를 ‘우상’이라 정의 내린다. 그의 우상론에서 네 가지 중 첫 번째인 ‘동굴의 우상’에 해당된다. 이는 평생 동굴에 갇혀 살던 사람이 ‘개인의 주관이나 선입견 편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는 올바른 판단을 그르치는데 대한 경고성을 지닌다.
둘째로 ‘종족의 우상’을 든다. 이는 모든 사물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인식 행위에 해당되는데, 이는 온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기심에서 비롯된다. 그 예로는 사회적 편견 자국우월주의가 있다. 셋째로 ‘시장의 우상’이란 영향력 있는 사람이 언어에 대한 잘못된 사용이나 해석으로 일반 사람들이 인식의 오류를 빚는 경우로 나타난다. 끝으로 ‘극장의 우상’은 어떤 학벌이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믿고 받아들이고 세뇌 당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박강남의 시 ⌜바람 없이도 흩날리는 꽃잎⌟에서 화자는 벚꽃 그늘 아래서는 누구나 ‘그림’이 되고 ‘풍경’이 된다고 하여 화자의 눈에는 봄꽃과 사람의 어우러짐이 최고의 풍경으로 든다. 또한 화자는 ‘무언가 사람을 일렁일렁 흔든다고 한다. 만개한 벚꽃 아래를 걷는 일은 일 년에 한번쯤 우리의 일상을 뒤흔드는 일인 것은 틀림없다 큰 변화 없이 지내다가 만개한 꽃들을 대하면서 그간의 평온하던 일상은 뒤흔들리고 마음과 몸은 능동적으로 변화한다 시에서 화자는 그러한 변화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벚꽃아래 걷기를 즐기고 사진 찍고 웃고 떠들며 벚꽃의 만개를 즐긴다.
하지만 화자의 시선은 조금 남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활짝 핀 벚꽃을 보러 오면 벚꽃만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일상처럼 여긴다 하지만 화자는 벚꽃이 아니라 상춘객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들의 통상적인 시선이 아니라 비일상적인 시선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을 갖는다. 즉, 익숙함에서 일탈하고, 스스로 벚꽃을 즐기는 대신 한걸음 떨어져서 남다른 시선으로 벚꽃이 피어있는 시공간의 순간들을 통찰하며 벚꽃을 즐기는 사람들의 표정과 모습 풍경 등을 즐긴다. 이 점은 벚꽃놀이에 대한 일반적 편견에서 벗어나 그것을 풍경화 하는 ‘동굴의 우상’에서 벗어나 진정성 있는 사유에 들어 있는 화자를 바라보게 된다. 이는 벚꽃그늘은 세상의 어떤 사람도 어떤 감정도 차별 없이 품는다는 창의적이고 긍정적인 일상을 즐기는 과정에서 봄날의 삶을 스케치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화자의 가치관을 확인할 수 있다.
낡고 오래된 아파트를
쉽게 떠날 수 없는 건
아이들의 성장기와
내 힘들었던 시간이 고스란히
묻어 있기 때문에
그 때의 내 아버지처럼
언제 들어와도 편하기 때문이다
노후대책에
오늘도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잔뜩 쌓아 놓고선
그대로 두고 떠나는 희귀병에 걸린 듯한
그 속에서 나를 건져내기란 너무 힘들어
어물쩍거리다보니
세월에 떠밀려 귀밑머리 하얀
환갑이라는 나이까지 밀려와
요즘은 아버지란 이름
아주 특별한 순간 아니면
떠올리기가 쉽지 않아
그냥 그렇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승문 ⌜삶·3⌟일부
우리의 일상은 매일 반복되거나 습관적으로 되풀이 된다 삶에 어떤 거부감이나 변화도 추구하지 않으면서 편안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삶이 바로 일상이라 여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범하고 보잘 것 없’으며 당연하게 느끼고 여기는 것들로 구성된’(E.렐프) 이 일상은 진부하고 사소함으로 별다른 주의를 끌지 못한다 하지만 시인의 눈에 일상은 매순간이 달리 와 닿는 한편, 이를 통해 보다 넓고 깊은 심연에 이르기까지 한다. 일상적인 생활 중에는 많은 것들이 그저 평범하고 그 평범한 것들이 평범한 일상을 일궈간다
때로는 예기치 못하는 공간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또 어느 순간 떠나가 버리는 예측 불허의 이별조차도 우리는 덤덤하게 받아들이기 일쑤이다. 낙엽이든 별빛이든 하늘이든 땅이든 곰팡이 같은 미물조차도 변화무쌍한 일상 속을 살아가는데 우리는 미처 그 사소한 것들에 깊이 눈길을 주지 못하면서 일상적인 삶을 지속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익숙함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서 사유는 시작되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 과정에서 이에 대한 사유의 결과를 감사함에 두기도 한다.
노승문의 시 ⌜삶·3⌟에서 화자는 물리적 시공간의 삶 속에서 오래된 삶의 터전을 훌쩍 벗어던지고 싶어 하지만 ‘힘든 시간’이 들어 있고 ‘아버지’에게서 얻는 편안함 같은 것이 있어 떠나지 못한다. 또 여행을 떠나고자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선뜻 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만다. 인생의 전반에 걸쳐 드러나는 삶에 대한 추억과 회한을 ‘여행’과 ‘아버지’를 매개로 표현한다. 예를 들면 화자는 과거로부터 살아온 오래된 아파트에서 쉽게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편안함’과 ‘익숙함’에 둔다. 그 이유를 자신의 아버지처럼 되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찾고 있다. 힘들었던 자신만의 지나온 시간들이 그것에 고스란히 묻어있고 언제 들어와도 편안한 곳이 되기 때문이다.
화자는 어느새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어 있다. 하지만 쉽게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못한다. 왜냐하면 화자에게는 ‘아버지’라는 존재와 ‘오래된 집’은 자기 삶의 표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저 사소한 일들로 가득 찬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신의 내면과 외연은 그저 삭아가는 것이라는 점을 내면 깊이 인식하고 있다. 결국, 화자에게 익숙한 물리적인 시공간은 결국 ‘낡고 오래된’ 시공간에서 ‘평안’과 ‘긍정’이라는 긍정적인 인식으로 안착하면서 이러한 평화로움의 만찬은 스스로도 놀라는 ‘감사’의 정서로 드러낸다. 이처럼 화자는 물리적 시공간 속을 살아가는 가운데 현실적 삶에 대한 인식의 길을 열고 있는 긍정적인 가치관을 드러낸다.
도피오에 앉아서 먼 산을 보았다
독립기념관 주차장 도피오에 앉아서
일상 표층 현재
곰삭은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나 위에 하나를 얹어놓았어도
하나인 것
감감한 당신,
당신의 뜻에 맞추어 날 견뎌냈다
그래도
머나먼 당신
세상은 두 겹이며
두 겹 이상인 바
-안수환 ⌜먼 산⌟
우리들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내재된 욕망과 무의식적 인식을 드러내기도 한다. 반복적이고 무의미함이 연속된 행위로 일상은 단순하지만 순환성을 지니기에 더욱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을 벗어난다는 것은 때에 따라서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상실감을 유발하는 불안감과 마주하게 되므로 이에 대한 불안과 변화를 추구하는 두 마음은 항상 일상을 벗어나려는 마음과 일상에 복귀하려는 두 마음이 길항 작용을 하면서 크고 작은 변화를 모색한다.
일상이란 근대화가 되면서 생겨난 현상이며 또한 근대화가 지니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양면을 동시에 갖는다.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근본적인 삶의 행위에 대한 실천으로 자기 존재의 기반을 닦는 것이 곧 일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익숙한 물리적 공간에 앉아 익숙한 사물을 오래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상’ 속에서 살게 되고 보다 나은 삶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사유를 향한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변화하려는 노력으로 일상을 채워간다면 일상의 가치는 한층 더 큰 변화로 나아갈 것이다
안수환의 시 ⌜먼 산⌟에서 화자는 ‘도피오’에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든다. ‘하나 위에 하나’를 얹어 하나가 되는 졍경은 화자가 바라보는 먼 산의 바위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화자의 내면에서 바라보는 ‘당신’ 이라는 존재에 화자 자신의 존재를 거듭 올려 둘이 하나의 존재가 되는 것을 뜻하는 것인지 뜻은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화자에게 세상은 여전히 두 겹 그 이상의 의미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는 화자에게 ‘당신’이라는 존재는 물리적인 시공간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여전히 소중한 존재로 남아 있고 그것은 변하지 않는 진실이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시의 화자에게 일상은 ‘당신’이라는 타자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려는 노력을 실천하는 물리적 시공간 속에서의 현재를 뜻한다. 먼 산이라는 자연 경관은 화자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듯이 느끼고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공간 속에서 화자는 마치 정지된 상태에 앉아서 물리적 환경 속의 자신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타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이는 화자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대부분의 일상은 생존의 문제이자 의미의 문제를 내포하기도 한다. 화자에게 일상은 현존하는 문제에서 나아가 타인의 삶에 대해 생각하고 이로써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는 계기를 갖는 이전과는 변화된 가치관을 드러낸다.
2. 일상성의 심층, 추억
프로이드에 따르면 인간은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욕망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한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혹은 경우에 따라서 그 욕망의 대상을 물건과 관련짓거나 유사한 상황을 자신의 기억이나 정서와도 연결 짓기도 한다. 따라서 자신만이 겪고 기억하는 현실이나 상황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내면화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의식에 투입시켜 이를 강화하기도 한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는 외부로 끌어내어 추억하기도 기억하기도 하며 심연 깊은 곳으로 던져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추억이나 기억은 개인만이 공유하기보다는 개인적 활동이 사회화라는 보다 확대된 공간으로의 확산과정을 거치면서 보편적인 인간의 활동에 편승하기도 한다. 때문에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면서 또한 동시에 ‘사회적 산물’(Berger and Luckmann, 1970)이라는 존재로 표현한다.
불교의 유식학에서 인식론적 마음 구조인 8식 중 제 7식인 말나식에서 심층 심리의 성향을 찾을 수 있다. 말나식(末那識, 산스크리트어: manas의 意,manas-vijñāna의식意識)에서 말하는 본질에 해당되는 사량(思量)은 번뇌에 물들어 있는 상태의 염오식(染汚識)이라는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나거나 전의를 득한 상태 즉 번뇌가 정화된 상태의 청정식(淸淨識)이라는 긍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특히 말나식에서 사량은 나와 남을 평등하게 보는 평등심(平等心)과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욕망에 관한 심층의 표출방식과 상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시장 가던 날
송아지는 어미 소를 뒤따르고
어린 나는 아버지를 따라
우시장 가던 날
낯선 곳에
핏줄을 떼어놓고 온 어미소는
거품을 물고 목청이 쉬도록
핏덩이를 불러대는데
철없는 딸은 그 돈으로 아버지가 사 준
머리핀과 꽃신이 좋아
사슴처럼 뛰어다녔다
어둑해진 신작로
어미소 발걸음은 천근 무게인데
눈치 없는 초승달은 양쪽 뿔에
걸터앉아
갈 길을 재촉했다
어미 소 심정을
이제야 헤아리는
지천명의 끝자락
-김선지 ⌜우시장 가던 날⌟
르페브르에 따르면 일상은 하찮음의 반복으로 이루어지며 매일 매주 매달 매년 등 같은 시공간이 비슷한 행위로 구성된다.(Lefevre, 1992) 이러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재화를 생산하는 경제활동을 하면서 사회적 가족적 공동체가 인간관계가 이루며 살아간다. 또한 우리의 일상은 발전과 역사 착취와 억압이라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들이 매일 되풀이 되어 왔다 하지만 물리적인 시공간이라는 시대적 변화와 흐름 속에서 우리의 일상은 다양한 방면에서 달라졌다 생활의 유형은 공동체적 삶을 우선시 여기던 이전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개인의 삶이 우선시 되고 중요하게 여기며 새로운 일상적 삶의 형식으로 변화되어간다.
불교에서 사량(思量)은 ‘생각하고 헤아린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은 전 찰나의 의근(意根) 즉 바로 직전까지 축적된 모든 경험을 토대로 현재의 인식 대상 또는 마음 작용으로 대상에 대해 이모저모로 생각하고 헤아리는 능력 또는 측면을 지니며, 이 능력과 작용을 통칭하는 말이다.(위키 백과) 일반적으로 일상 속에서 어떤 일을 행할 때에는 많은 생각과 고심으로 행하지 않는다. 늘 하던 대로 하는 생활 습관 속에서 특별한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판단하고 행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그래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들은 오랜 세월 통상적으로 이어져 왔기에 잘 변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김선지의 시 ⌜우시장 가던 날⌟에서 화자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우시장 가던 날을 상기한다. 낯선 곳에 송아지를 떼어놓고 오는 어미 소의 마음은 뒤로 한 채 아버지가 사준 머리핀과 꽃신에 마음이 빼앗겼던 과거 어린 시절의 일들을 회상한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천명의 나이가 되고 보니 송아지를 떼어 놓고 끌려와야 했던 어미 소의 심정을 비로소 헤아리게 된다. 현재라는 물리적인 시공간에서 과거의 시공간을 되새기며 철없던 일들을 새삼 깨닫고 후회하게 된다는 화자의 고백이다. 화자의 어린 시절 부모님이 소를 사고파는 일은 일상 속에서 자주 일어나고 반복되는 일은 아니지만 소가 송아지를 낳으면 행해지는 비슷비슷한 행위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기에 비교적 무감각하게 보낸 과거의 한 일상이었던 점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별 무의미하게 보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어른이 되고 보니 비로소 어린 화자는 내적으로 한층 성숙한다. 심층에서 우러나는 성찰을 통해 이전의 타자와의 관계에서 오는 ‘진심’을 알면서 내면적인 인식이 변화되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가치관을 갖는 국면으로 전환된다. 어쩌면 이전에는 무심하게 스쳐 보낸 일상들을 어른이 되고나서야 유사한 일들을 겪으면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 ‘송아지’를 팔러가던 때와 유사한 상황이 펼쳐지고 또 연이어 ‘머리핀’ ‘꽃신’ 얻어서 기뻤던 일들을 통해 어미 소의 심정을 헤아리는 능력인 사량이 생겨난 것으로 어떤 상황을 바라보는 가치관이 변화된 점을 알 수 있다
뒤돌아보지 않겠습니다
아쉬움은 잔물결로 남겨두고
물거품을 지우며 흐르겠습니다
백두대간 나의 몸에 질곡을 내시어
넘치는 욕심은 흘러가게 두시고
오물을 받아들여 가라앉히고
밑거름되게 하소서
부족한 만큼 채워주신
지난 날들은 축복이었습니다
몰아 올 한파를 염려하며
이제는 모두가 자중해야 하는 시간
말씀으로 주시는 지혜
머리 숙여 깊게, 깊게 침잠하면서
당신의 강으로 흐르겠습니다
-장하지 ⌜겨울강의 기도 ⌟전문
칸트에 따르면 반성이란 주어진 어떤 표상이자 우리의 인식이 감성과 오성의 어느 쪽에 속하는 것인가를 판별하는 것이다, 이중에서 오성이란 감성 및 이성과 구분되는 지력(知力)으로 감성 및 이성의 두 능력에 대비하여 대상을 구성하는 개념작용의 능력을 뜻한다. 이는 마음이 어느 쪽에 치우쳐 있는지를 깨닫는 것이 기준이 되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또 헤겔에 따르면, 반성은 상관적인 것들의 내적 관계를 나타낸다. 여기서 상관적이란 서로 구별되는 것이면서 또한 상대방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기 자신의 규정을 갖는 동시에 양자의 성립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반성이란 인간이든 사건이든 타자성을 토대로 내면에서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대부분의 기도는 이러한 반성을 기초로 이루어진다. 누구나 반성이나 간구로 시작되는 기도 속으로 몰입하면 현재의 물리적 시공간은 어느새 사라진다. 그래서 기도의 힘이 갖는 강도가 높을수록 현실에서 벗어나서 영적인 세계로 도달하는 힘이 강하다고 말한다. 과거는 현재를 이룩하기 위해 사라지는 존재로 인식되고 미래 또한 현재를 기반으로 완성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과거 현재 미래는 일상 속에 존재하며 또한 기도 속에서 순간순간 과거 현재 미래를 오가거나 동시 공존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의 공통점은 과거 현재 미래의 일상성에 둘 수 있고 그 내용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기도가 있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전구 청원의 기도도 모든 일에 감사하는 기도도 있다.
장하지의 시 ⌜겨울강의 기도⌟에서 화자는 비록 아쉬움이 남더라도 과거를 지우고자 하며 욕심도 버리려는 자기 성찰의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겨울강의 모습을 빌어 자아에 대해 깊이 있게 내면을 바라보려 한다. 또한 화자가 물리적 시공간 속에서 심리적 시공간을 오가면서 반추하거나 감사하는 두 마음이 오가는 일상적 상황에 대해 언급한다. 자중하는 현재의 상황 속에서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시에서는 당신(절대자)가 이끄는 대로 미래로 흘러가겠다고 결의한다.
강은 앞으로만 흘러간다는 정화의 의미를 상징한다. 이에 더해 강은 자연을 창조하는 동시에 시간의 흐름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인생의 과정을 비유적으로 암시하거나 과거 현재 미래의 일상적인 삶들을 상징한다. 또한 강은 비옥한 토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강은 되돌아가지 않는 점과 같은 강물이 두 번 다시 흐르지는 않는다는 과정이라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흔히 인생과 동일시한다. 시의 ‘강’은 첫 번째 언급된 상징성에 가까운 의미를 가지며, 이는 비옥한 영혼을 갖기 위해 기꺼이 구도자를 따라 나서는 간구와 기원을 하는, 보다 심층적인 삶을 살아가는 화자와 만나게 된다.
은하수를 건너면 갈 수 있을까
찌르레기 따라가면 만날 수 있을까
두고 온 달그림자 볼 수 있을까
옛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엄마의 그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을까
들판에 꽃눈 내리는 날
달빛 아래 슬몃슬몃 풍등 타고
함박꽃 만발한 그 곳에 가면
다시 나물전 냄새, 왁자한 웃음에
기왓장이 들썩대는 따뜻한 말들이 녹은
세상에서 가장 크게 펼쳐진
엄마의 치마폭을 다시 소환할 수 있을까
-김지숙 ⌜그 곳, 소환⌟
누구에게나 고향은 있다. 태어나고 자라면서 추억이 서려 있는 곳으로 언제든 달려가고 싶고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 또한 고향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한두 가지쯤은 누구나 가슴에 품고서 살아간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언제고 눈감고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고향은 흔히 원초적인 그리움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쓰인다. 무엇보다도 그리움의 원형으로 명명되는 고향은 삶에 지치고 힘들 때 떠올리는 곳이며 다양한 감정들이 뒤섞인 채 마음 깊이 내재되어 있다. 흔히 고향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평화로움과 안락함으로 혹은 상실이나 회환으로 떠올려지기도 한다.
불교의 심우도는 소가 말없이 자기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봉사의 과묵함은 깨달음을 향해 정진하는 납자(衲子)들의 본분(本分에 비유된다. 일상 속에서 소는 정진과 저력으로 생명성을 갖는데, 불성의 세계에서는 선사들이 선 수행 과정과 의미를 심우(尋牛) 견적(見跡)견우(見牛) 득우(得牛) 목우(牧牛) 기우귀가(騎牛歸家) 망우존인(忘牛存人) 인우구망(人牛俱忘) 반본환원(返本還源) 입전수수(入纏垂手)라고 하여 소를 시각화한 십우도에서 근원적인 깨달음을 찾는다. 이는 논밭을 가는 소의 일상화 속에서 수행과 깨달음이 곧 일상 속에 있다는 의미를 되새기는 선화이기도 하다.
김지숙의 시 ⌜그 곳, 소환⌟에서는 ‘고향’과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 저리는 화자의 마음이 담겨있다. 살면서 종종 다른 시공간 속 상황을 살다가도 문득 그리운 고향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추억이 따뜻하게 다가와서 큰 위로가 되어 주는 때가 있다 쓸쓸하고 고단한 현실의 삶에서 과거의 어떤 일상이 그리운 때가 있다. 생각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안식을 얻는 것은 고향의 특별한 날이 아닌 그저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충분히 가능하다. 별다른 큰 추억거리가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생각해보면 모든 일상은 추억이 되고 특별한 기억으로 와 닿는 경우가 있다. 화자에게 ‘나물전 왁자한 웃음소리’들은 과거의 일상 속에서는 별반 특별한 일들이 아니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세월을 보내고 보면 그때 그 순간 그 일들은 어느새 정말 그때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소중한 과거의 일상이고 추억이 되어 가슴 한 구석이 저려오기 대문이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먹고 함빡 웃고 떠들고 행복했던 날들에 대한 잊히지 않는 추억은 화자의 가슴 한편에 늘 아름답고 소중한 그리운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시의 화자 역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의 일상을 돌이키는 과정에서 위로 받고 싶어 하고 따뜻한 마음들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향을 향한 애틋함은 언제나 그리운 사람들과 더불어 생각나기 마련이고 그것은 엄마가 연계되지 않으면 불가능했던 일들이기 때문에 생각은 생각의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그리운 날들을 생각하면서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행위와 마음의 변화는 불교의 심우도에서 소를 만나고 찾고 데려오고 보내는 과정에서 마음이 변화되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대상에 대한 깨달음의 기회를 찾게 되는 화자의 자기 성찰과 사유를 읽을 수 있다.
가파른 언덕을 실어나르는 모노레일은 출렁이는 푸른 바다
를 생중계한다 오랜 방황의 끝에 돌아온 이바구 길엔 모래시
계가 희미한 기억을 반추하고 통제할 수 없는 독백을 쏟아낸
다 그림자를 잠식하는 키 큰 가로수가 뒤척이는 번민을 쏟아
내면 그대 울먹이는 목소리가 파도의 절규로 밀려온다 고즈넉
한 풍경을 갈아 끼우는 통 유리창에 한 겹씩 실루엣을 입힌다
카톡에 실려 온 한줄 전언이 혈관에 침투되고 아직도 지키지
못한 약속이 생의 밑바닥을 휘젓는다 흐린 눈빛이 이끼로 번
식하는 동안 응시하는 밤별은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층계를 오
르는 그림자 사이 신발 끄는 미세한 파장을 엿듣는 지친 느티
나무 하나 오랜 열병을 앓는다
-이신정 ⌜이중창의 구조·2⌟
다중성(Ambivalences’)은 심리학적 용어로, 감정의 교차 서로를 용납하지 못하는 여러 층위의 가치를 의미한다. 이는 현대를 가장 적절하게 드러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우리의 일상은 평범하지만 역동적인 것을 추구하기도 하고 어려운 가운데서 손쉬운 것들을 찾기도 하는 모순된 감정을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함께 있기를 원하면서도 혼자만의 세계를 꿈꾸고 가장 도덕적이고 싶지만 내적으로 꿈틀거리는 내재된 욕망에 혼란스러운 때도 있다. 대체로 가지지 못한 것, 알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불확실하고 갈등하며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J. 햄든은 모든 인간이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든다. 부유함에 재능 덕망 부지런함 학식까지 갖춘 ‘지킬’의 성품은 수치심이 강하고 유혹도 컸으며 도덕과 욕망사이에서는 고통을 당한다. 이러한 욕구를 채우기 위해 또 다른 자신을 분리시키는 약을 만든다. 작고 기분 나쁘고 잔인한 사람으로 ‘하이드’가 만들어지고, 자주 변신을 하지만 이미 ‘하이드’는 너무 악에 가까워서 다시 선으로 돌아오는 일이 힘들어졌고 다시는 인격적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회한과 유혹 사이에서 갈등하고 결국 하이드에 무릎을 꿇는다.
이신정의 시 ⌜이중창의 구조·2⌟에서 화자는 화자 자신이 현존하는 일상을 눈에 보이는 정경을 생중계하듯이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눈앞에서 보이는 풍경은 화자가 물리적 시공간을 넘나들며 모두 화자의 현실로 끌어들여서는 자신의 무의식과 통합을 이끌어내는 사유를 택한다. ‘출렁이는 푸른 바다’라는 물리적 시공간이 존재하는 현실의 공간에서 ‘울먹이는 파도의 절규’라는 상상과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 심리적 시공간의 심연으로 깊이 가라앉아’ 환상은 정지된다. 이후 연속적인 내면 공간을 펼쳐내는데, 이 과정에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아우르는 심층 구조가 적나라하게 표현된다.
이 시에서 일상은 핸드폰 속의 공간과 눈앞의 정경이자 화자가 현존하는 일상적인 공간이라는 이중 층위가 나타난다. 또 화자는 일상 속에서 강렬하게 연결된 심리적 상황이 강한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끊어진 각각의 공간에서 펼쳐진 일상을 조각 모음하고 있다. 화자는 심리적 공간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어떤 고통이 동반된 내적 심연의 공간에 머물러 있다 하지만 삶에 활력을 불어 넣는 스스로의 생명력과 의식의 뿌리 깊은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가는 유혹과 처절한 회환이 동반되어 나타나고 있으나 이를 극복하고 기존의 가치관과 의식이 변화된 삶 속으로 다가서기도 한다.
3. 일상성의 다층, 공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는 순간순간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이를 받아들이고 인식하고 실행에 옮기느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일순간 일어났다가 다시 사라지는 구름 같기도 하다. 마치 강물이 매번 다른 물로 계속 흐르는 것처럼 우리 역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각기 다른 생각으로 우리의 가치관은 형성되고 실행, 유지된다. 인간의 마음 역시 스스로가 만든 다양한 형태의 다른 표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서 언급되는 다층이란 표층과 심층, 위층과 아래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이는 시 속에서 내적 외적으로 존재한 시공간 등이 두 개 이상의 층위로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다음에서 언급될 시에서 다층 구조를 드러내는 경우, 물리적으로 심층적인 두 개 이상의 층위가 존재하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층위를 구분하여야 만이 사유의 상황이 해석되는 점에 기준으로 두었다. 이들 시들은 한편의 시에서 여러 층위가 병존하거나 겹쳐져서 복잡한 형식을 지닌다. 이들은 개인의 경험이나 기억 지각 추리 판단 등이 인지된 물리적 환경과 더불어 드러나는 표층 구조와 표층 구조가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심리적 요인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드러내는 심층 구조가 서로 간섭과 교차를 이루며 상호작용을 하며 둘은 뚜렷하게 구분되어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특징을 지닌다. 다만 시를 분석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표현된 부분에서 의식 활동인 심층과 생체적 물리적 활동인 표층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비교적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뜻이며 이들이 경험이 바탕이 되는 미래가 순행적인 시간으로 구성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효기간의 연장신청을 내도 누적 마일리지의 최소기준은 개
별적으로 차감되지 않는다
구매일정을 급히 잡기 어려워질 땐 고객센터의 안내 벨을 누
른다 보충 또는 추가의 중고샵을 찾는다
첫눈 곱게 휘날릴 때면 수첩을 열고 그녀의 얼굴을 찾아 순백
의 들판에서 한두 개 별을 찾아간다
아직도 그는 내 운명 속에 한 조각 겨울앓이 하늘 바람을 탄
다
-정연덕 ⌜겨울앓이⌟
루카치는 예술에 있어 내용과 형식을 불가분의 관계로 본다. 즉, 예술의 형식이란 표현을 위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현실에 내재하는 본원적인 개념으로 본다. 그는 변증법적으로 이를 해명하는데, 어떤 사물의 형식과 내용이 완전히 통합되면, 수용자는 그 사물의 내용과 형식을 구분하지 않고 통합된 상태를 미적 대상으로 인식한다. 다시 말해 그는 예술적 형식도 사유의 범주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또 그에 따르면 예술은 가상의 창을 통해 현실을 반영하며 이들은 상호 독립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상호 관계하는 체계를 이루면서 그 자체로 존립한다.
또한 그에게 있어서 리얼리즘은 총체성 특수성 카타르시스 비유적인 것 상징 등으로 구성되며 이는 모방하지도, 현실을 복사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한편, 그는 진정한 예술은 리얼리즘적 본성을 가지는데, 이는 형상화에 기초한 예술 일반의 기본 특징이자 창작의 예술적 기초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예술행위는 현실을 반영한 가상의 영역에서 상호 영향관계 속에서 존재하지만 그것은 현실도 아니고 현실의 모방도 복사도 아닌 가상현실이 된다는 것이다.
정연덕의 시 ⌜겨울앓이⌟에서는 여러 층위가 나타난다. 첫 번째 문장과 두 번째 문장에서는 지극히 현실적인 일상의 일들이 드러난다. 시의 화자는 물리적 시공간 안 에서 일어나는 일상 속의 일들 중에서 마일리지 사용에 대해 연장 신청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현실과 안내 벨을 누르는 행위, 그리고 ‘고객센터’ ‘중고샵’과 같은 소소한 경제 활동의 결과에 대한 지력이 필요한 내용들을 언급한다. 화자의 일상적 삶이 특별한 갈등이나 커다란 기쁨이 아닌 그저 당면한 현실의 상황에 개입되어 비교적 현장감 있는 전개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세 번째 네 번째 문장에서 화자는 이미 현실에 아닌 환상이나 상상의 너머 특수한 공간을 일상 속으로 들여온다. ‘순백의 들판에서’ 별을 찾는 행위나 운명 속에서 하늘 바람을 타는 행위의 층위에서는 ‘들판’ ‘하늘’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묘사한 것으로 앞의 두 문장에서 엿보이는 현실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따라서 이 두 공간은 서로 이질적이지만 화자의 마음속에서는 다중 층위를 드러낸다. 즉, 현실적 공간에 해당하는 표층에서 시작된 마음이 매개가 되어 심리적 가상공간으로 찾아들고 이들은 마지막 연에 이르러서는 ‘한두 개 별을 찾아간다’라고 하여 현실적인 별과 마음속의 별을 동시에 찾는 동시공존의 가치관을 드러낸다.
우리는 대체로 하나의 상황 속에서 둘 이상의 판단으로 갈등을 느끼고 힘들어 하는 마음이 상존함을 느끼며 살아간다. 두 마음의 이질적인 층위에 대한 표현은 비교적 질서와 구성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다. 이들은 물리적이고 사물을 대면하면서 생기는 마음과 그것을 계기로 스스로 깨닫고 표현하는 이들 마음은 본래의 마음과 그 본래의 마음이 바탕이 되어 일어나는 마음으로 이루어지며 나중에 일어난 마음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갈등을 형성하는 마음이 그것이다. 따라서 시의 마지막 연 ‘아직도 그는 내 운명 속에 한 조각 겨울앓이 하늘 바람을 탄다.’에서처럼 어느 마음이 완전하다 아니다로 구분되기보다는 두 마음의 가치를 집약한 상태가 가장 올바른 마음 상태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이퍼링크
그와의 접속은 훈훈하던 대화가 잘록해진다
무제한 공간을 초월하여
자기에게로 시선을 끌어들인다
여유롭던 일상이 조여지고
턱 아래로 좁아진 하늘에는
노래를 잃어버린 새의 그림자만 남는다
과속에 걸린 지평선의 균열이 슬프다
바쁜 옷은 점점 더 복잡한 길을 좇는다
뉴스의 전파력은 예상보다 강력하다
면역력이 인증되었다지만 신뢰가 점점 약해지고
아, 눈을 감고 시간을 뒤로 밀어본다
스크랩북에서 회전하는 지구의 초점이 잡힌다
간간이 기적소리 들리던 그 찻집인가 보다
디제이의 손놀림이 여유롭다
-장정순 ⌜그 찻집⌟
인간의 내면에는 수만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삶의 경험과 수백 만 년 동안 흘러온 다양한 시간의 층위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여러 시간들은 한곳에 자리 잡은 유전적 층위와 마음의 층위가 복합적으로 자리 잡거나 다양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일상적 삶에도 다양한 층위는 있다. 하지만 이들은 한가지만으로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공간과 시간 심리 현상에 대한 반응 등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층위와 어우러져 인간의 삶은 더욱 복잡하고 미묘하면서도 함축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파블로 피카소와 조르주 부라크에 의해 만들어진 콜라주(collage)의 어원은 ‘풀칠하다’이며 문학작품에서는 한 시간의 층 위에 다른 시간의 층을 얹는 기법으로 흔히 사용된다. 캔버스에 여러 가지 재료 즉, 천이나 나무 조각 철사 쇠붙이 등을 자르고 붙이고 꾸미는 회화를 구성한 초현실주의 기법이다. 이 기법은 사진이나 그림조각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감정을 쉽게 나타낼 수 있어서 부적절한 감정이나 욕구불만 등의 내적 욕구나 퇴행표현에 효과가 있어 치료기법에도 사용된다(杉浦京子, 1994) 문학 작품에 사용된 이 기법은, 대개는 물리적 시공간을 초월하거나 서로 다른 물리적 심리적 시공간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동시 공존하는 형태로 한 공간에 두어 생경한 이미지를 연출하여 새로운 의미를 도출하는 낯선 시도를 하고 있다.
장정순의 시 ⌜그 찻집⌟에서는 여러 층위가 병렬식으로 나열된다 ‘하이퍼 링크’ ‘접속’ ‘무제한 공간’ ‘뉴스’ 등과 같은 SNS의 심리적 정신적 다층화된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가상공간이 깔려있고 ‘일상’ ‘하늘’ ‘새’ ‘과속’ ‘옷’과 같은 물리적인 시공간의 현실세계의 층위가 나타난다. 나아가 ‘눈’을 감은 행위 ‘기적 소리’가 들리는 ‘찻집’ ‘디제이’ 와 같은 어휘에서는 과거의 시간 층위로 역행하고 기억 속으로 역행하는 화자의 모습이 현재의 일상 속에서 과거의 일상적 시공간 층위 속에 깊이 개입하여 서로 충돌하는 모습이 보인다.
결국 화자는 물리적 시공간의 표층을 드러내는 현실의 일상적 시공간과 정신적 심리적 심층을 표상하는 가상세계의 시공간 그리고 과거의 회상을 향한 또 다른 심층의 일상적 시공간을 오간다. 이러한 여러 층위의 시공간들이 화자의 머릿속에서 흩어지고 모이는 다양한 형태로 동시 공존하는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데 이 기법이 바로 초현실주의에서 언급되는 콜라주 기법에 해당된다. 즉, ‘하이퍼 링크’ ‘하늘’ ‘기적 소리’ 같은 다양한 시간의 층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흩어져서 콜라주 형태를 이루다가 다시 모이는 상황들이 재현되는 이 기법들을 통해 이전의 관계는 모두 흩어져 버리고 전혀 이질적이고 새로운 일상의 의미를 재창출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서울행 케이티엑스 3호차에
배추흰나비 한 마리 탑승했다
강릉에서 무임승차한 배추흰나비는
당최 내릴 생각이 없다
승무원이 불러도 본체만체,
승객들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뜻 모를 미소를 던진다
3호차가 특실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수영복 차림으로 승차했는지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바다냄새가 났다
여름 한낮, 하루 종일 배추밭에 엎드려 지냈던
젊은 날의 어머니는 정작 배추 한 잎 먹어보지도 못한 채
장다리꽃이 다 지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뿌리에 바람이 들고 이파리가 노랗게 물들었지만
씨앗을 보러 오지도 않았다
이미 오십 수년 전의 일이었다
기차가 양수리 철교를 지날 때쯤
배추흰나비는
차창 밖에서 날개에 푸른 물이 든 채로
나를 따라왔다
케이티엑스 3호차 객실 가득
배추흰나비들이 몰려와 아직 여물지 않은 어머니의
배추를 뜯어먹고 있었다
-김남권 ⌜배추흰나비의 여행⌟
데빼이즈망(depaysement)은 현실적으로 일상적인 의미면에서 전혀 연관성이 없는 동떨어진 사건끼리 서슴없이 한자리에 놓이는 것을 말한다. 이는 이전에 맺었던 관계를 모두 벗어던지고 전혀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기 위한 창조적인 발상에서 유발된다. 이 발상은 합리적인 관계나 현실적인 관계가 전혀 이질적으로 생뚱맞게 놓이는 과정에서 연결감이나 공통점 이해감은 박탈되고 비로소 새로운 의미를 도출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이 데빼이제(depayser)는 전위(轉位)의 의미로 사용되며 ‘국적을 갈아엎는다거나 환경 습관을 바꾼다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데빼이제된 하나하나의 사물을 초현실주의에서는 오브제(objet)라고 하며 일상적이고 합리적인 관념에서 해방된 특수한 객체를 의미한다. ‘현대시에서 우리는 순수한 이미지만 읽으면 그만’(조향)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물끼리의 충돌이 빚어낸 생경하면서도 표면적으로는 의미체계가 파괴되고 이로써 두 사물 간에 거리감을 가져오는 의미심장한 특징이 드러난다. 이는 오히려 화자의 내면적 의지를 표출하는데 뛰어나 효과를 보여주는 또 다른 특성을 지닌다.
김남권의 시 ⌜배추흰나비의 여행⌟에서는 ‘서울행 케이티엑스 3호차’라는 물리적인 시공간에 해당되는 표층인 현실에서 기차에 탑승한 ‘배추흰나비’를 매개로 한다. 이 배추흰나비는 실제로 탑승했다기보다는 가상의 공간에서 들여온 가상현실의 사물에 해당된다. ‘바다냄새’ ‘배추밭’ ‘양수리 철교’와 같은 물리적 시공간에 존재하는 표층의 현실적 장소를 지나 다시 현실인 ‘서울행 케이티엑스 3호차’와 가상 속에 몰려든 ‘배추 흰나비떼’를 만난다. 화자는 정신적 내면 공간인 심층에서 ‘오십 수년전의 일을’ 떠올리며 ‘젊은 날의 어머니’를 회상하며 심층적 층위를 오간다. 그리고 정신적 시공간을 대변하는 심층에서의 일상에서 만나는 ‘젊은 날의 엄마’ 그리고 다시 ‘여물지 않은 엄마의 배추를 뜯는’ 현실로 돌아오는 일상의 중층 구조의 시공간을 그려놓고 있다
시에서 나타나는 층위는 물리적인 시공간의 일상과 심리적 시공간에서 들여온 가상공간의 일상 그리고 과거의 시공간에서 들여온 심층적 시공간의 일상들을 한 공간 위에 펼쳐 놓았다 극명한 대립각을 세우는 것은 ‘서울행 케이티엑스 3호차’와 ‘배추흰나비떼’이다 이들은 한 공간에 존재하기가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그만큼 시에서는 의도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을 한 공간에서 다중첩적으로 동시 공존시킨다. 이 데빼이제된 두 사물은 ‘나비’와 ‘기차’라는 전혀 이질적이지만 한 공간에서 충돌하여 급기야는 신선하고 생경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일견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를 연상하게 되고 이에 대한 오마주적 성격을 갖는 듯도 보이지만 탁월하게도, 이와는 전혀 이질적인 물리적 시공간을 선택하면서 기시감은 모두 배제되고 전혀 새로움을 가장 현실적으로 강렬하게 장착했다는 점에서 데빼이제의 특성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지금까지 2월호에 실린 시들을 ‘일상성’이 갖는 의미들을 물리적 시공간에서의 일상적 층위를 드러내는 ‘표층’과 정신적 의미를 내포한 일상적 층위를 드러낸 ‘심층’, 그리고 환상 상상 및 가상적 시공간을 모두 포함하는 ‘다층’이라는 일상적 층위를 포함하는 세 부류로 구분하고 시에 표출된 일상적 특성과 가치관 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물론 시에 드러나는 층위를 표층 심층 다층으로 반듯하게 자를 수 없거니와 정확하게 나눌 수도 없지만 어느 쪽으로 좀 더 치우친 점을 중심으로 삼아 언급한 바, 이를 통해 각 화자의 개별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일상적 현실을 다루는 물리적 시공간의 표층들은 공통적으로는, 주로 접하는 주변의 상황이나 처지 풍경 등을 단순히 재현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면, 심리적 정신적 시공간의 심층을 다루는 시들의 경우, 자신이 의식하는 관습적 체계 속에 깊이 들어가서는 무의식이 개입되고 이를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재현하는 경우로 이루어진다. 또한 다층의 경우에는 앞의 두 경우가 뒤섞이고 이에 가상적인 층위를 더하거나 증강함으로써 순간과 기억과 상상 환상 등이 어우러져 가상적 시공간과 물리적 시공간을 오가는 경우로 드러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정서적 심리적 상황적 서정을 시에서 개성적 표현하는 과정에서 내적 가치관을 재현한다. 그래서 서로 표현 방식이나 관점은 다소 다르지만 각각의 시선들은 모두 자신의 외부나 내부로 혹은 내부와 외부를 오가며 일관되게 자신이 중심이 되는 일상과 더불어 표현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내면을 지향하는 목표지점을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가 추구하는 바는 시공간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고유한 의미들을 새롭게 획득하려는 시적 노력이 드러난다. 일상을 벗어나려는 삶 혹은 일상에 갇혀 있는 사물들은 이젠 더 이상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어떤 감흥도 불러들이지 못하고 또한 낯설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가 자주 접하는 이 자리, 이 사소한 일상들은 매순간 현재를 연속하는 서로 다른 시간 층위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서 일상은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을 계기로 그에 어떤 특별한 의미를 해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가 지닌 가치를 찾고 평가하는 단계에 이른다. 따라서 우리 일상의 층위들은 더 이상 과거 현재 미래에 속하거나 구분되는 시간의 층위가 아니다. 이는 삶의 본질 자체이자 단일 구성체로 볼 수 있으며 다만 그 시간들이 다양한 층위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매일 접하는 일상에 이따금씩은 숙연해질 필요가 있으며 동시에 일상의 모든 순간들을 귀하게 여겨야 할 필요성도 갖는다. 그러면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가장 비일상적인 것들을 찾고 또 그 가운데에 가장 빛나는 것들에 눈을 돌리기도 한다.
삶이란 짧은 한순간 한순간들이 영원히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얽혀져서 완성된다. 현재는 수많은 과거의 잔해이고, 우리가 누리는 현재라는 시간은 미래를 위해 지속적으로 존재하면서 사라지고 또 새로운 형태로 존재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이고,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일상적인 것들 가운데서 비일상적인 것들의 강렬함을 찾거나 혹은 깊이 내재된 울림으로, 혹은 일상 속의 창의성을 스스로 찾아가는 존재의 방식으로 시와 만나고 시를 생각하고 시를 꿈꾸듯, 다양한 층위에서 일상적 삶을 뜨겁게 누리는 자가 바로 시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