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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崇善 ]
안숭선의 신도비명(神道碑銘)
성삼문(成三問)
자 : 중지(仲止)
호 : 옹재(雍齋)
시호 : 문숙(文肅)
국조인물고 권14 경재(卿宰)
죽계 안씨(竹溪安氏) 중에 어질고 높은 지위에 오른 분인 휘(諱) 축(軸)은 고려조에 벼슬하여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내고 시호(諡號)가 문정(文貞)이니, 사람들이 지금껏 근재 선생(謹齋先生)이라 칭하고 있다. 이분이 휘 종원(宗源)을 낳으니,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의 관직에 있다가 돌아감에 시호가 문간(文簡)이다. 문간공이 낳은 휘 경공(景恭)은 우리 태조가 개국(開國)할 때에 보좌하여 공신의 녹권(錄券)을 받고 흥녕 부원군(興寧府院君)으로 봉해졌으며 시호는 양도(良度)이다. 양도공이 낳은 휘 순(純)은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이르고 시호는 정숙(靖肅)이니, 근재로부터 대대로 유학(儒學)에 힘써 서로 계속해 명신이 되어 가문이 대단히 빛났는데, 사람들이 비평하는 말이 없었다. 정숙공이 청원군(淸源君) 문간공(文簡公) 정공권(鄭公權)의 딸과 결혼하여 4형제를 두니 공은 둘째로 휘는 숭선(崇善)이며 자(字)는 중지(仲止)요 옹재(雍齋)는 그 호(號)이다.
홍무(洪武) 25년 임신년(壬申年, 1392년 태조 즉위년) 9월 갑신일(甲申日)에 태어나 영락(永樂) 9년 신묘년(辛卯年, 1411년 태종 1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을미년(乙未年, 1415년 태종 15년)에 음직(蔭職) 계성전직(啓聖殿直)에 보임되었고 여러 번 옮겨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영남의 수령(守令)들이 불법으로 백성을 해치는 자가 많아 공에게 지방에 나가 살피는 일을 맡기자 한번에 그 실정을 파악하였으니, 이해는 무술년(戊戌年, 1418년 태종 18년)이었다. 2년을 지내고 경자년(庚子年, 1420년 세종 2년)에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가 과거를 주관하여 공을 장원으로 뽑자 특별히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하였으며, 그 이듬해 예조 정랑(禮曹正郞)으로 옮기고 또 이조(吏曹)와 지제교(知製敎)로 옮기니, 이로부터 다 홍문관(弘文館)과 규장각(奎章閣) 같은 곳의 벼슬을 겸하였다. 당시 낭관(郎官) 벼슬은 1개월 또는 2개월만에 옮기고 길어도 반년에 불과했는데, 공은 어질다 하여 이조(吏曹)에 유임한 것이 3년이었다. 갑진년(甲辰年, 1424년 세종 6년)에는 경기 감영(京畿監營)으로 나아가서 보좌(輔佐)하는 벼슬에 있다가 홍희(洪熙) 원년(元年) 을사년(乙巳年, 1425년 세종 7년)에 부름을 받아 한성부 소윤(漢城府少尹)이 되었는데, 공이 번잡하고 어려운 일을 잘 다스리고 이쪽저쪽으로 부산하게 대처하여 시비를 물 흐르듯이 갈라 해결하였으므로 부중(府中)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선덕(宣德) 원년(元年) 병오년(丙午年, 1426년 세종 8년)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전임되었다가 언사(言事)로 인해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에 좌천되고, 얼마 안 있어 집의(執義)로 발탁되었다가 또 파직(罷職)되었다. 기유년(己酉年, 1429년 세종 11년)에 국가에서 금은(金銀) 공납(貢納)의 면제를 중국에 요청함에 그 일을 중하게 여겨 왕실의 공녕군(恭寧君) 이인(李禋)을 명(明)나라 서울로 보낼 때 공녕군의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당시의 유명한 선비를 뽑아서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는데, 공이 대호군(大護軍)으로서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요청을 관철시키고 돌아오니 임금이 전토(田土)를 하사하였다. 경술년(庚戌年, 1430년 세종 12년)에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발탁 임명하였는데, 신해년(辛亥年, 1431년 세종 13년) 봄에 세종(世宗)이 강원도에서 친히 연무(練武)할 때 혹독한 추위로 사졸(士卒)이 동상에 걸린 자가 있었는데도 정원(政院)에서 즉시 아뢰지 않아 임금이 매우 노하여 지신사(知申事)를 면직시켰으므로, 좌대언(左代言) 이하 사람들이 각각 자기가 그 자리에 들어갈 것이라 스스로 말하였으나 임금은 공을 임명하였다.
공은 성격이 강직하여 일을 당하면 과감히 처리하였는데, 후한 대우를 당함이 날로 더해지자 동료들이 불평하였다. 임자년(壬子年, 1432년 세종 14년) 과거에 공이 대독관(對讀官)이 되어 김길통(金吉通) 등 33인을 뽑았고, 계축년(癸丑年, 1433년 세종 15년)에 국가가 장차 파저강(婆猪江)을 정벌하려 할 때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였는데, 임금이 공에게 의견을 묻자 공이 대답하기를, “자고로 무신(武臣)은 정벌을 주장하고 유신(儒臣)은 화친(和親)을 고집하였습니다만, 신의 요량으로는 여진(女眞)의 이만주(李滿住)가 심히 극악무도하니 죄를 묻는 군대를 늦출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모든 군정(軍情)의 중요한 일을 공에게 물었는데, 공은 조용히 계책을 세워 결정하고 출사(出師)하여 과연 공이 있으므로 임금이 공을 더욱 중하게 생각하였다. 공은 승정원(承政院)의 임무가 막중함을 들어 모부인(母夫人)이 병환이 있자 앞뒤로 여러 번 사직을 요청했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처음 병시중을 들고부터 옷은 띠를 풀지 않고 눈은 붙이지 않은 지가 수십 일간이었는데, 모부인이 돌아가시자 슬퍼하다가 몸이 여위어 병을 얻었으므로, 임금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조상하고 제사지내게 하는 한편 시의(侍醫)를 보내고 지은 약이 끊이지 않아 몸이 상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정통(正統) 2년 정사년(丁巳年, 1437년 세종 19년)에 거상(居喪)이 끝나고 담제(禫祭)를 지내기 전에 바로 대사헌(大司憲)을 임명하므로 공이 예법에 의거하여 굳게 사양하였는데, 임금이 옳게 생각하여 이어서 ‘사대부들이 담제 후에 벼슬을 내리는 법령’을 만들었으나 공에게는 그 요청을 허락치 않았다. 공이 할 수 없이 그 직에 나아가 부지런히 힘쓰다가 수개월 후에 병이 다시 시작되어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옮기고, 병이 완쾌된 후 예조 참판을 임명하여 가정 대부(嘉靖大夫)의 품계를 더하였다. 허 문경공(許文敬公)이 ‘예조가 삼례(三禮)를 장악하는 자리이니 정밀하고 분명한 자를 택하여 오래 맡도록 하자’고 청하자, 임금이 누가 적임자인가를 물음에 문경공이 공을 추천하여 이 제수(除授)가 있게 된 것이었다. 때마침 경기 감사(京畿監司)의 자리가 비어 있어 공에게 임명하였는데, 기내(畿內)와 서울 주변에서 청구하는 것이 몰려들었으나 공이 다 들어 주지 않았다. 경신년(庚申年, 1440년 세종 22년) 겨울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고 계해년(癸亥年, 1443년 세종 25년)에 형조 판서를 임명하였는데, 감옥이 거의 비었었다. 갑자년(甲子年, 1444년 세종 26년)에 사신(使臣)으로 명나라를 다녀온 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ㆍ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이 되고, 을축년(乙丑年, 1445년 세종 27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 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고려사(高麗史)≫를 편수하였다. 정묘년(丁卯年, 1447년 세종 29년)에 서북(西北) 지방에 흉년이 들어 굶주리게 되자 임금이 근심하여 재상에게 명하여 감사(監司)를 급히 추천토록 하였는바 전날에 공을 시기하던 자가 공을 천거하고 또 이 사람 아니면 불가하다 하였다. 공은 연이은 상사(喪事)로 어지러운 병이 심해져 바야흐로 벼슬을 사직코자 하던 때였는데, 이 명령을 받고서 병을 참으며 출발하여 임지에 이르러 지방으로 몸소 다니면서 힘을 다하여 구호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이에 힘입어 죽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곧 병으로 말미암아 사직함을 두 번이나 청하니 무진년(戊辰年, 1448년 세종 30년) 봄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불러 올려 서울에서 치료케 하였다.
처음 병조 판서로 있었을 때에 공적인 착오(錯誤)가 있었는데, 공을 시기하는 자가 적발하여 옥사(獄事)를 일으켜 고성(固城)으로 유배(流配)되었었다. 공은 문벌(門閥)있는 집안에서 성장하여 하루아침에 궁벽한 바닷가로 귀양 갔으나 하나도 원망하거나 분개하는 빛이 없고 오직 시서(詩書)를 즐기며 지냈는데, 얼마 안되어 임금이 그에게 딴 마음이 없었음을 살피고 드디어 돌아오도록 하였다. 경태(景泰) 원년(元年)인 경오년(庚午年, 1450년 문종 즉위년)에 황제의 명령을 받고 오는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이 도착하니 문종(文宗)이 공을 기용하여 묵는 객사(客舍)에 가서 그들을 접대케 하였다가 바로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임명하였으며 얼마 안 있어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이 되고 신미년(辛未年, 1451년 문종 원년)에 좌참찬(左參贊)으로 옮기어 겨울에 병조 판서를 겸임시키자 공이 재삼 극구 사양하였고, 임신년(壬申年, 1452년 문종 2년) 봄에 또 병이 생겨 퇴임하고자 청원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공은 병중에도 세수와 빗질을 그만두지 않았으며 반드시 갓을 쓰고 띠를 매고 있었는데, 4월 무인일(戊寅日)에 병이 심하여 안방에 자제를 모아놓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이치라, 이제 내가 벼슬이 조정(朝廷)의 대신이며 나이 또한 60세라, 어찌 한탄하겠느냐? 죽은 후에 불사(佛事)를 하지 말라.” 하고 말을 마치자 졸(卒)하니 향년(享年) 61세였다. 원근(遠近)에서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슬퍼하지 않는 이 없이 말하기를, “나라의 한 어진 재상을 잃었다.”고들 하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조회(朝會)를 2일 동안 중지하고 부의를 내리는 한편 시호를 문숙(文肅)이라 하였다. 공은 자질이 영민 총명하여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즐겨 비록 많은 책이라도 한번 보면 기억하였으며, 시가(詩歌)를 잘 지어 사람들이 유창하고 아름답다고 추앙하였다.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하고 벗을 사귐에 신의(信義)가 있고 집에서 이익(利益)을 말하지 않고 재물을 문안에 들이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선비를 좋아하였으며 어진 이를 예로써 대우하고 악을 미워하고 선(善)을 칭찬함이 천성에서 났으며, 집에 거처하여 일을 처리할 때는 늠름하기가 추상(秋霜)같이 엄했으나 사람과 더불어 담소(談笑)할 때에는 화기(和氣)가 다사로웠다. 내가 근일에 태사(太史)의 뒤를 좇아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수하면서 공이 한 일을 보았는데, 승지의 자리에 있은 지 6년간에 임금이 공이 아뢴 말을 듣고 계책을 따랐으며, 임금을 보좌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못하게 한 유익함과 두터운 대우가 매우 컸음은 임금과 신하가 마음이 서로 통한 것을 말해 주는 것으로 천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드문 만남이라 할 수 있으니 미상불 공을 여러 번 찬탄(讚嘆)하는 바이다. 공의 시험관 즉 좌주(座主)였던 허 문경공(許文敬公)이 별세할 무렵 1품 벼슬의 관리가 두르던 띠인 서대(犀帶)를 공에게 주었는데, 본시 이것은 우리 독곡수(獨谷叟, 성석린(成石璘)을 이름)의 구물(舊物)로서 세상 사람들이 유가(儒家)의 전수물(傳授物)이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공이 (1품에 올라) 이 띠를 두르지 못하였다고 한스럽게 여기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겠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늘이 꼭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닐진대, 띠를 띠었던가 안 띠었다든가는 말할 것이 못된다. 띠는 지금 우찬성(右贊成) 이사철(李思哲)공에게 돌아갔다 한다.
공의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야로 송씨(冶爐宋氏)로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휘(諱) 천우(千祐)의 딸이다. 2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안훈(安訓)으로 봉훈랑(奉訓郞) 종묘서 영(宗廟署令)이요, 차남은 안의(安誼)로 승의 교위(承議校尉)ㆍ중군 부사직(中軍副司直) 겸 사헌 감찰(司憲監察)이며, 장녀는 선절 장군(宣節將軍) 의흥사 호군(義興司護軍) 김숙(金潚)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봉렬 대부(奉列大夫)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 조석문(曺錫文)에게 출가하였는데, 조석문은 갑인년(甲寅年, 1434년 세종 16년) 과거에 차석으로 급제한 사람이다. 종묘서 영 안훈은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이후(李厚)의 딸과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안우연(安友淵)이요 다음은 안우상(安友商)ㆍ안우석(安友晳)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감찰 안의는 녹사(錄事) 윤효동(尹孝童)의 딸과 결혼하여 4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안우삼(安友參)이요, 다음은 안우급(安友伋)ㆍ안우건(安友騫)ㆍ안우익(安友益)이요 나머지는 어리다. 호군 김숙은 4남 2녀를 두었으니, 장남 김복녕(金福寧)은 사직(司直) 이명통(李命通)의 딸과 결혼하였고 차남 김수녕(金壽寧)은 계유년(癸酉年, 1453년 단종 원년)에 장원(壯元) 급제하여 곧바로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을 임명하였으니, 나이 겨우 18세로 공에게서 배우고 양육된 자이다. 다음은 김덕녕(金德寧)ㆍ김명녕(金命寧)이며, 딸 장녀는 유학(幼學) 유한경(柳漢卿)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공이 돌아가신 지 3개월째 정유일(丁酉日)에 경기 임진강(臨津江) 임내(任內) 송림(松林) 고현(古縣)의 북쪽 주암동(朱巖洞) 묘원에 장사지냈다. 종묘서 영으로 있는 안훈 형제가 갑술년(甲戌年, 1454년 단종 2년) 음 2월에 비(碑)를 세우기 위하여 나에게 비문을 요청하였다. 아! 정묘년(丁卯年, 1447년 세종 29년)에 아버님(성승(成勝))이 명(明)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가실 때 평양을 지나게 되자 감사(監司)인 공이 객사에 양곡을 더 주고 연회석(宴會席)에서 성삼문(成三問)에게 술을 붓도록 명하며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명하여 말하기를, “우리 두 집안은 대대로 왕래하였고 내가 너의 아버님과 교분(交分)이 또 오래임을 네가 아느냐? 네가 즐거이 우리 아들과 더불어 이 두 애비들과 같이 사귀겠는가?” 하므로, 성삼문이 말하기를, “본래 바라던 바입니다. 하물며 공의 명이 있으시니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러 나와 기뻐서 잊지를 못하였다. 세월이 얼마나 지냈기에 묘비명(墓碑銘)을 짓는 청이 내 귀에 들리는고. 삼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굳은 뿌리가 백리까지 서리고 얽히어 무성하게 우거져 해를 가리고 하늘까지 닿았네. 죽계(竹溪)의 명망 있는 집안 안씨(安氏)인데 근재(謹齋, 안축(安軸))는 동방 사람들 북두(北斗)와 태산(泰山) 같이 우러렀도다. 아들과 손자 대대로 어질어 부조(父祖)의 가업과 미덕(美德) 계승하여 충효가 온전하도다. 위엄 떨치는 옹재(雍齋, 안숭선의 호)는 참으로 뛰어나서 송골매 가을에 태화산(太華山) 정상을 나는 듯 하네. 어진 신하가 어진 임금 만나기 천년에 드문데 한번 축출 당해 남쪽 바닷가 살펴보았도다. 의정부에 왕래하자 신선처럼 우러러보는데 지난번 비방하던 자 뻔뻔스럽기 그지없도다. 덕을 주고 또 수(壽)하게 했으니 하늘이 아낀 바요, 나라 위해 슬픈 눈물 사람들로 흐르게 하네. 묘 앞에 비 세우고 글자를 새기리니 글을 지어 후세에 보게 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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