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백과에서 〈1월 28일〉을 검색하면 그날 출생자로 ‘1457년 영국 국왕 헨리 7세, 1887년 폴란드 태생 미국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1898년 대한민국 현대 의학의 개척자 백인제, 1912년 미국의 추상 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 1916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안진생(독립운동가 안정근의 아들이자 안중근의 조카), 1955년 프랑스의 대통령 니콜라 사르코지’ 등이 확인된다. 백인제는 어떤 사람이기에 ‘대한민국 현대의학의 개척자’라는 대단한 수식어로 소개되고 있는 것일까?
다음백과 〈백인제〉의 첫 줄은 ‘혈액형 및 수혈 연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인제〉의 마지막 문장은 ‘그의 연구는 다방면에 걸쳤으나 특히 구루병佝僂病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 이외에도 혈액에 대한 연구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이다.
백인제白麟濟는 1898년 1월 28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했다. 1915년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지만 1919년 3 ‧ 1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했다. 10개월 투옥되었다가 출소한 후 복학하였고, 1921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일제는 수석 졸업생인 그에게 의사 면허를 주지 않았다. 2년 후 겨우 의사 면허를 얻은 그는 서른 살이던 19 28년 동경제국대학 의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백인제는 해방 이후 서울대 의대 교수, 서울시 의사회 회장, 대한 외과 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백병원(현 인제대 부속 서울백병원)을 설립했다. 백범 김구가 모스크바 3상회의에 반발하여 결성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조선 시대 이전에 생존했던 사람도 아니고 현대인, 그것도 대단한 저명 인사의 타계 연월일을 아무도 모른다니 이상하다. 물론 알고 보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그는 6 ‧ 25전쟁 중에 납북되었다.
파주 임진각 초입에 〈국립 6 ‧ 25전쟁 납북자 기념관〉이 있다. ‘납북자 및 그 가족들의 명예회복과 더불어 국민들과 함께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되새기고 평화 통일의 의지를 다지기 위한 공간’으로 설립된 이 기념관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개관하며, 여름철(5∼10월)은 09 :30∼17:30, 겨울철(11∼4월)은 10:00∼17:00에 관람할 수 있다. 매주 월요일과 주중 공휴일, 그리고 설과 추석 연휴 때는 문을 열지 않지만 설날과 추석 당일에는 개관한다.
6 ‧ 25전쟁 당시 납북자는 10만 명 정도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국립 6 ‧ 25전쟁 납북자 기념관의 게시물은 ‘납북자’는 ‘남한에 거주하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군인은 제외)으로서, 6 ‧ 25전쟁 중(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체결 전까지)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북한에 의하여 강제로 납북되어 북한에 억류 또는 거주하게 된 자’로 규정된다.
기념관의 통합 명부에 등재된 납북자를 지역별로 보면 전체 93,758명 중에서 서울 지역이 23,386명으로 전체 인원의 24,9%를 점유한다. 경기 지역이 17,740명으로 18.9%, 충북 지역이 13,572명으로 14.5%이다. 강원 지역이 10,790명으로 11.6%, 충남 지역이 9,196명으로 9.8%, 경북 지역이 7,676명으로 8.3%, 전북 지역이 5, 928명으로 6.3%, 전남 지역이 3,731명으로 4.0%, 경남 지역이 1,209명으로 1.3%, 불명 및 기타 지역이 350명으로 0.4%이다. 전쟁이 번지지 않았던 부산과 제주도는 없다.
기념관 안에는 ‘마지막 가족 사진’이라는 전시물도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특히 아프게 한다.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임진각로 153(사목리 481-1)에 있는 국립 6 ‧ 25전쟁 납북자 기념관은 꼭 한번 찾아가 볼 만한 곳이다. 특히 임진각까지 가서 그곳을 둘러보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그야말로 ‘속 빈 강정’ 여행을 했다고 할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시간 여유를 만들어 서울 종로구 북촌로7길 16(가화동) ‘백인제 가옥’을 방문하면 더욱 좋다.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영화 〈암살〉을 촬영했던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