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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7월 27일 토요일
[(녹)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유다의 주민들이 그들의 행실을 고치면 주님의 집에 살게 하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외치라고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내 이름으로 불리는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 7,1-11
1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리신 말씀.
2 주님의 집 대문에 서서 이 말씀을 외쳐라.
“주님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서는 유다의 모든 주민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3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4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5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6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7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
8 그런데 너희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짓된 말을 믿고 있다.
9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10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 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11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도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24-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군중에게 24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25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
26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들도 드러났다.
27 그래서 종들이 집주인에게 가서,
‘주인님,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가라지는 어디서 생겼습니까?’ 하고 묻자,
28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고 집주인이 말하였다.
종들이 ‘그러면 저희가 가서 그것들을 거두어 낼까요?’ 하고 묻자,
29 그는 이렇게 일렀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30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창세 3,7). 아담과 하와가 죄를 저지르고 난 뒤에 한 첫 행동은 ‘알몸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더 이상 알몸을 보여 주고 싶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누구에게 ‘알몸’을 보여 줄 수 있나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몸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알몸을 보여 주기 싫어졌다는 것은 이제 그 사람과 맺은 사랑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처럼 죄는 하느님과 우리가 맺은 사랑의 관계를 깨지게 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죄는 우리 마음 속에 착각을 일으킵니다. 죄 안에 있거나 그 죄를 계속해서 저질러도 ‘우리는 구원받았다.’라고 생각하는 착각, 하느님과 깨져 버린 관계를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착각 속에 우리를 가둡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마지막 날까지 미루셨습니다. 모두 회개하여 다시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느껴집니다.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해소에서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 우리의 알몸을 그분께 보여 드릴 수 있는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아멘.(김재덕 베드로 신부)
주님의 때를 기다립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젊은 시절을 돌아보니 혈기왕성했던 나머지 이리 충돌 저리 충돌, 사방으로 다니면서 좌충우돌하곤 했습니다. 돌아보니 참 부끄럽습니다. 나 자신의 심각한 결핍이나 죄 앞에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이웃의 작은 실수나 부족함 앞에는 엄청나게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곤 했습니다.
오랜 세월 주님께서 나를 무한한 인내로 참고 또 참아주신 것을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히 이웃의 부족함을 기꺼이 견뎌냈어야 마땅한데...
성경의 가르침을 종합하면 우리의 주님은 분노에 더디시고 인내로 충만하신 분입니다. 수천 년간 거듭되어온 우리 인간의 배신과 반역에도 또다시 자비를 베푸시고, 새 계약을 맺으시며,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분이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런 주님의 모습이 오늘 밀과 가라지의 비유 속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저 같으면 몇 년 동안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실이 없는 나무는 즉시 톱을 들고 나가 바로 잘라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을 보십시오.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십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 들이라고 하겠다.”(마태 13, 29-30)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당신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이 모순되고 폭력적인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주 종들처럼 생각합니다. “저 악한 인간들을 지금 당장 모조리 쓸어버릴까요?” 인간의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최종 심판자이신 주님의 역할을 인간이 직접 수행해버리려는 유혹 앞에 서게 됩니다. 주님의 때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직접 판단하고 결정하고 복수하려고 합니다.
때로 주님께서 깊은 침묵 속에 계시는 것 같지만 사실 당신께서 직접 정한 계획에 따라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주님 홀로 한 인간에 대한, 이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의 권리를 지니고 계십니다.
악의 세력들에 대한 최종적인 단죄와 보복은 주님께 맡겨드릴 일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계획과 섭리, 주님의 뜻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원수는 종종 우리를 찾아와 우리 마음의 밭에다가도 가라지를 뿌려놓고 갑니다. 공동체를 좀먹게 하는 불평불만의 가라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와해시키는 이단의 가라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분심의 가라지...
우리를 짜증나게 하고 성가시게 하는 다양한 가라지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때, 주님의 뜻, 주님의 결정적인 개입을 기다려야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개미는 매일 열심히 일하는 성실한 일꾼입니다. 베짱이는 놀면서 시간 나면 일하는 한량입니다. 가을이 지나고 추운 겨울이 오면 개미는 여름에 모아둔 먹이를 먹으며 겨울을 보냅니다. 그런데 베짱이는 추운 겨울이 오면 먹을 것이 없어서 개미에게 구걸하며 겨울을 보냅니다. 과학자들이 일개미를 연구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개미 중에도 30%는 아주 열심히 일하고, 30%는 대충 일하고, 30%는 다른 일개미가 열심히 만들어 놓은 걸 망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열심히 일하는 일개미만 모아서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마찬가지로 ‘3 : 3 ; 3’의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간의 세상에도 비슷합니다. 인재들이 모인 대학에서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들 자기가 속했던 고등학교에서는 최고의 능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학생들이 모인 대학에서는 모두가 최고의 실력을 보여 주지 못합니다. 그중에서도 30%는 열심히 하고, 30%는 대충 하고, 30%는 포기한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자연의 법칙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도전 골든 벨’이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모여서 문제를 맞히는 프로입니다. 학생들은 하얀 보드 판에 문제의 정답을 적습니다. 정답을 적은 학생은 남고, 오답을 적은 학생들은 밖으로 나갑니다. 이렇게 진행되다가, 진행자는 탈락자들을 위해서 ‘패자 부활전’을 합니다. 탈락자들에게 문제를 내서 맞히면 다시 골든 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패자 부활전에서 돌아온 학생이 마지막 문제를 맞히면서 우승하는 때도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패자 부활전’의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원의 골든 벨’에 참석하는 학생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알 수 있는 문제를 내십니다. 바로 ‘십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보내셔서 우리가 문제를 풀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징을 믿고 따르면 누구나 구원의 골든 벨을 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유다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밀과 가라지’의 비유입니다. 밀은 자라면 열매를 맺고 양식이 되기 때문에 잘 길러야 합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자라도 열매를 맺지 않기에 뽑아야 합니다. 밀에도,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가라지를 뽑아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추수 때까지는 그냥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밀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라지의 뿌리가 밀의 뿌리와 붙어 있다면 그것을 나누는 것이 절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밀의 열매이기 때문에 추수 때가 되면 밀의 열매는 거두고, 가라지는 버리면 된다고 하십니다. 류시화 작가의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같은 작가의 ‘신이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라는 책도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나쁜 것 같지만 나를 영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과정인 경우가 있습니다. 잔잔한 파도는 유능한 항해사를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험한 파도를 겪어야만 유능한 항해사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비록 초라하고 남루할지라도 나중에 성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맡기는 것도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밭은 우리의 몸과 같습니다. 밀은 건강한 지체입니다. 가라지는 병들어 아픈 지체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양의학에서 하는 것처럼 즉각적으로 가라지를 제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동양의학처럼 말씀하십니다. 지켜보면서 몸의 기능을 강화해 나가라고 하십니다. 건강한 지체들이 활력을 얻으면 건강하지 않은 지체들이 치유 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밀과 가라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새삼 시편의 기도를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 깊은 구렁 속에서 당신께 부르짖습니다. 주님, 제 소리를 들으소서. 제가 애원하는 소리에 당신의 귀를 기울이소서. 주님, 당신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누가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신께는 용서가 있으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으니. 바로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밀 가꾸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밀
가운데에
가라지
눈살
찌푸리게
하여도
가라지에서
밀에게
고운 눈길을
밀
가운데에
가라지
손길
거칠게
뻗고 싶어도
가라지에서
밀에게
부드러운 손길을
가라지를
뽑는
사람이 아니라
밀을
가꾸는
사람이니까요
오늘의 성인
성 디오니시오 (Dionysius)
활동년도 : +250-362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에페수스(Ephesus)
같은 이름 : 데니스, 드니, 디오니시우스, 디오니씨오, 디오니씨우스
성 막시미아노 (Maximian)
활동년도 : +250-362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에페수스(Ephesus)
같은 이름 : 막시미아누스, 막시미안, 막씨미아노, 막씨미아누스
성 마르티니아노 (Martinian)
활동년도 : +250-362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에페수스(Ephesus)
같은 이름 : 마르띠니아노, 마르띠니아누스, 마르티니아누스, 마르티니안
성 말코 (Malchus)
활동년도 : +250-362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에페수스(Ephesus)
같은 이름 : 말쿠스
성 세라피온 (Serapion)
활동년도 : +250-362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에페수스(Ephesus)
같은 이름 : 세라피언, 쎄라피온
성 요한 (John)
활동년도 : +250-362년경
신분 : 순교자
지역 : 에페수스(Ephesus)
같은 이름 : 요안네스, 요한네스,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소아시아 서해안 도시 '에페수스의 7인의 잠든 자'로 불리는 성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성 말쿠스(Malchus), 성 마르티니아누스(Martinianus), 성 디오니시우스(또는 디오니시오), 성 요한(Joannes), 성 세라피온(Serapion)과 성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의 이름들은 전설의 여러 전승에 따라 다르게도 나타난다. 그들은 데키우스 황제의 통치 때 동굴에 감금당했으나 200년 후 살아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그들은 깨어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으며 성인으로 공경받기 시작했다.
장시간의 수면은 신화와 민담의 공통된 주제로 그리스도교의 색채를 머금고 있는 이 이야기는 이미 6세기에 널리 유포되었다. 가장 신뢰할 만한 기록은 500년경에 사루(Sarugh)의 성 야고보(Jacobus)가 시리아어로 남긴 기록이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도미니코회 회원인 보레뉴(Voraigne)의 복자 야고보(Jacobus)가 황금 전설을 포함시킨 후 인기가 많아졌다.
7인의 잠든 자들은 에페수스에서 태어났다. 데키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처형하러 에페수스에 와서 도시 중앙에 신전을 짓고, 모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과 함께 우상에게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찾아내어 제사를 올리든지 아니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경험하든지 선택을 하게 했다. 그 일로 인해 고통이 너무나 두려웠던 나머지 친구가 친구를 배신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밀고하고, 아버지가 아들과 인연을 끊는 일도 발생했다.
7인의 잠든 자로 불리는 7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이때 체포되었다. 그들은 우상에게 희생제사 드리기를 거부하는 데 앞장선 인물들로 자신들의 집에 숨어 단식하고 기도하던 이들이었기 때문에 많은 군중들은 그들의 체포에 대해 슬퍼하였다. 데키우스 황제에게 고발당한 후 그들은 신심이 매우 깊은 신앙인임이 드러났다. 그들은 데키우스 앞에 재출두하기 전 배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그 와중에 자신들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내놓고 모여서 회의를 하여 첼리온 산(Mount Celion)에 올라가 비밀리에 긴 시간을 지냈다. 그들은 서로를 돌보고 봉사하며, 도시로 내려올 때면 걸인 복장을 하고 내려오곤 했다.
데키우스 황제가 돌아와 그들을 소환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그들을 섬기며 식사와 음료를 대접하던 성 말쿠스는 몹시 무서워하며 돌아와 황제의 광포함과 광기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모두 두려움에 빠졌다. 그러나 갑자기 그들은 하느님의 뜻대로 모두 잠에 빠졌고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그들을 찾았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데키우스 황제는 그들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가 그들이 살던 동굴의 입구를 돌로 막아 봉인하여 그들이 굶어죽도록 했다. 지방장관과 두 명의 신자인 테오도루스(Theodorus)와 루피누스(Rufinus)는 그들의 순교록을 써서 돌 사이에 끼워 놓았다.
데키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테오도시우스 황제 재위 30년에 자비로우시며 죽은 이에게 부활의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들은 다시 깨어나게 되었다. 즉 한 에페수스의 시민이 버려지고 별 쓸모없는 산에 목동을 위해 마구간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마구간을 만들던 한 벽돌공이 우연히 동굴을 열게 되었고, 그 순간 7명의 성인들은 잠에서 깨어 서로 인사를 하며 전날의 무서운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겨우 하룻밤만 지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성 막시미아누스는 그들의 종이었던 성 말쿠스에게 시내로 가서 빵을 사오라고 하며 전날 사왔던 양보다 조금 더 사오라고 덧붙이고 또 황제의 명령에 대해서도 알아보고 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성 말쿠스는 5실링을 가지고 동굴을 나왔고 동굴 앞에 있던 벽돌공과 돌들을 보고 그들을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성 말쿠스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으므로 앞에 놓인 돌들에 대해 별로 놀라움을 느끼지는 못하였다.
도시의 성문에 도달하자 그는 점점 의심을 품게 되었고 완전히 아연실색하게 되었다. 성문 위에 달려 있는 십자가를 보았기 때문이다. 바로 다른 성문에 가보자 역시 십자가 달려 있었고, 모든 성문에 십자가가 달려있다는 사실과 도시 전체가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다. 그는 스스로를 진정시킨 뒤 자신의 얼굴을 숨기고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빵가게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들은 그는 머뭇머뭇하며 말했다. “어제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더니 어떻게 오늘은 모든 이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까? 이 도시는 다르게 지어진 에페수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 도시가 참으로 에페수스라는 말을 듣고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성 말쿠스는 동료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빵을 사고 돈을 지불했다. 그러나 상인은 놀라 이 젊은이가 오래된 보물을 발견했다고 외쳤다. 그리고 옛 황제들의 보물을 보여주면 빵과 돈을 주겠다고 말하며 어디서 왔는지, 친구가 되어 비밀을 지키겠다고 그를 보챘다.
성 말쿠스는 너무나 놀라 공포에 질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가 말을 하지 않자 그들은 그의 목을 끈으로 묶어 도시 가운데로 끌고 갔다. 성 마르티누스(Martinus) 주교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집정관인 안티파테르는 이 소식을 듣고 성 말쿠스와 그가 가지고 있던 돈을 자신들에게 가져오라고 했다.
성당으로 소환된 성 말쿠스는 자신이 데키우스 황제에게 넘겨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주교와 집정관은 돈을 보고 놀랐으며 알려지지 않은 이 보물을 어디서 발견했는지 물었다. 성 말쿠스는 그 돈은 어디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문과 재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집정관은 그 돈이 데키우스 황제의 통치 초기의 것으로 현재 통용되는 것과 전혀 다르다며 믿으려 하지 않았다.
성 말쿠스는 무척 당혹스러워 하며 자신들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로부터 도망쳐 있으며, 만약 이 도시가 에페수스가 맞는다면 어제 황제가 에페수스로 들어왔다고 대답하였다. 주교는 한참을 생각한 후 주님께서 이 젊은이를 통해 무엇인가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다. 성 말쿠스는 “저를 따라 오십시오. 첼리온 산에 있는 나의 동료들을 보여주겠습니다. 그리고 믿으십시오. 우리 모두는 데키우스 황제의 면전에서 도망쳐왔다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성 말쿠스를 따라 산으로 올라갔고 도시의 많은 군중들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성 말쿠스가 동굴에 먼저 들어가고 주교가 뒤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동굴을 막았던 돌들 사이에서 은으로 봉인된 두 개의 편지를 발견했다. 주교는 함께 온 이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들 앞에서 편지의 내용을 읽었다. 모든 이들이 놀라며 당황스러워했다. 그리고 그들은 동굴 안에 앉아있는 성인들을 보았다. 그들의 용모는 꽃피는 장미 같았으며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있었다. 성 막시미아누스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설명하며 부활을 굳게 믿는다면 영원히 살 것이라 하고는 다른 동료들과 함께 그리스도께 자신들을 맡겨드리고 숨을 거두었다. 그날 밤 성인들은 황제에게 나타나 그들이 다시 부활할 그날가지 누워있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황제는 동굴을 진귀한 돌로 아름답게 꾸미고 귀한 보물로 그들의 무덤을 장식하였다.
이 이야기는 몇몇 잊혀진 묘소를 발굴하던 중 “주님 안에서 잔다”라는 용어를 오해한 데서 나온 이야기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육신의 부활에 대한 논쟁과 연관되어 기록된 신심 깊은 가공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영웅들은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특히 동방교회에서 이 성인들은 매우 큰 공경을 받고 있다. 그들이 발견되었던 동굴은 순례자들에게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그들의 시신은 큰 석관에 담겨 프랑스의 마르세유(Marseille)로 옮겨져서 성 빅토르(Victor) 성당에 안장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바로니우스(Baronius)는 이 이야기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그들의 축일은 로마 순교록에 의해 보존되었다. 교회미술에서 그들은 동굴에서 잠들어 있는 일곱 명의 젊은이로 묘사되고 있다.
성 판탈레온(Pantaleon)
성인구분 : 성인
신분 : 의사, 순교자
활동연도 : +305년경
같은이름 : 빤딸레에몬, 빤딸레온, 판딸레에몬, 판딸레온, 판탈레에몬
성 판탈레온이 성 판탈레에몬(Pantaleemon)으로도 알려진 이유는 그가 그곳에서 살고 순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이교도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 에우불라(Eubula)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사가 되었고 박해를 받을 때까지 궁중의 방탕한 생활을 즐겼던 인물이었다.
성 판탈레온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되찾게 된 계기는 그의 스승 성 헤르몰라우스(Hermolaus) 신부 덕분이었다.
이 스승은 자신의 의술을 가난한 이를 위한 인술이 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 소유물을 팔아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꾸준히 도왔기 때문이다.
303년 흑해 근방 니코메디아(Nicomedia, 오늘날 터키의 이즈미트, Izmit)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가 거세게 일어날 때, 그는 다른 동료 의사의 고발에 의해 그리스도인임이 발각되어 자기 스승 헤르몰라우스와 그의 형제인 성 헤르미푸스(Hermippus) 그리고 성 헤르모크라테(Hermocrates)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들은 모두 사형 언도를 받았고 성 판탈레온은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성 판탈레온은 동방 교회의 최고 순교자이자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공경을 받는다.
그의 축일에는 이 성인의 피가 용해되는데, 이런 현상은 나폴리(Napoli)에서 일어나는 성 야누아리우스(Januarius, 9월 19일)와 같은 경우라고 한다.
성 판탈레온은 성 코스마(Cosmas, 9월 26일)와 성 다미아누스(Damianus, 9월 26일)와 함께 의사들의 수호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