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5장은 전체가 하나로 연결된 내용입니다. 예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되어,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이유로 유대지도자들이 반발하고, 그에 대해 예수께서 스스로 자신을 변호하시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예루살렘에 베데스다라는 이름을 가진 연못이 있었답니다. 이 연못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고, 그 안에 환자들이 누워 있었답니다. 그 이유는 가끔 천사가 연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낫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런데 ‘천사가 물을 휘저을 때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본문의 내용은 초기 사본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삽입된 문장입니다.
거기에 38년이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에게 ‘일어나서 네 자리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더니 그 사람이 곧 나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는데 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에 대해 문제를 삼았다는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도 여러 번 나옵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거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은 옳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안식일 논쟁이 정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17~18절을 보겠습니다.
17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18 유대 사람들은 이 말씀 때문에 더욱더 예수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것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범하였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으셨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유대지도자들, 그러니까 공관복음서에서 율법학자나 바리새인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을 말할 때 그냥 ‘유대 사람’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런 표현은 서기 90년대 들어 유대교와 기독교가 뚜렷이 분리되어 가면서 서로가 상대를 다른 부류의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혈통적으로는 같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저 사람들은 유대교 전통에 속한 ‘유대 사람’이고 자신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의식을 뚜렷이 갖게 되었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유대 사람들의 항의를 받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시자 이 말을 들은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안식일을 범했을 뿐 아니라 감히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불러서 신성모독죄까지 지었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자기와 하나님을 동등한 위치에 놓은 것’이라는 기록은 저자의 해석입니다. 당시 요한공동체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에 대한 기록은 공관복음서에도 자주 나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할 때도, 십자가 위에서 기도할 때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공관복음서의 기록자들은, 그것이 자기와 하나님을 동등한 위치에 놓은 것이라는 해석은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세계관에서, 위대한 인물이 신의 아들로 인정받고 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경우는 흔한 것이었기에, 공관복음서 기자들도 메시아로 인식한 위대한 스승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특별한 의미 부여는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런 당시의 풍습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신학을 전개합니다. 19~23절을 보겠습니다.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대로 따라 할 뿐이요, 아무것이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아들도 그대로 한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여, 하시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어서,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사람들을 일으켜 살리시니,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맡기셨다.
23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공관복음서에서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되고 인정된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심판하는 일에도 전권을 위임받습니다. 24절도 보겠습니다.
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의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갔다.
28~29절도 보겠습니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말아라.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
29 선한 일을 한 사람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님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변하시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런 성서의 기록에 따라, 기독교 전통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며, 유일한 구세주이고, 유일한 심판자로 고백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런 배타적인 고백이 정말로 온당한 것일까요?
전통신학은 하나님을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유일신’으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현대신학은 하나님을 ‘궁극적 실재’로 정의합니다. 하나님을 사람처럼 인격을 가진 존재로 정의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신격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유일신이라는 표현보다는 ‘궁극적 신’이라는 말이 적합하고, 신이라는 말보다는 ‘실재’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현대 신학자들 대부분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ultimate reality’ 즉 궁극적 실재라고 정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화를 내기도 하고 사랑하기도 하는 그런 인격적인 신이 아니라, 만물의 근저에 있는 궁극적인 실재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연에 법칙을 부여한 궁극적 존재이며 우주적 질서의 근원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의 신학은 그 궁극적 실재가 예수라는 한 인격체 안에 오롯이 담겨져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신학적 전개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와 힌두교에도 있습니다.
불교는 모든 사물에 불성이 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부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이 깊은 스님 중에는 개신교 목사를 설교하시는 부처님이라고 하고, 성가대원들을 찬송하는 부처님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힌두교에서 궁극적 실재는 브라흐만입니다. 그런데 그 브라흐만은 모든 사물에 내재되어 있으며, 사람들에게도 내재되어 있습니다. 사람 안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브라흐만, 그것을 아트만이라고 합니다.
불교에서 모든 사물에 불성이 있고, 힌두교에서도 아트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깨달음에 이르면 누구나 부처가 되고 하나님이 된다는 것과 같은 얘기입니다.
그런 점에서 요한의 신학은 동양종교와 맥을 같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동양철학에 바탕을 둔 영성가들이 요한복음에 깊은 매력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다석 유영모 선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명모 선생은 1890년에 태어나서 1981년에 소천하실 때까지 활약하신 우리나라의 위대한 종교사상가입니다. 유교와 도교 불교에 정통한 동양철학자이면서도, 기독교에도 깊은 매력을 느껴 동서양 종교의 통합을 시도한 영성가였습니다.
이분이 요한복음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합니다. 제가 감히 이 분을 평가할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저는 유영모 선생이 놓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이 설파하는 신학은 누구나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동양철학적 대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의 신학은 오직 예수에게만 하나님과 본질상 하나가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배타적인 종교로 만든 결정적인 인물로 바울을 지목하는 사람이 많지만, 저는 바울 못지않게 요한복음을 집필한 저자, 한 사람이 집필했을 가능성보다는 요한공동체의 다수 지도자가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쨌든 요한공동체의 지도자들이, 기독교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종교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