燕京行錄(23)<11/11∼11/14>
燕京行錄(연경행록) 嘉靖四十一年(가정사십일년) 壬戌(임술)
명종17년 1562년.
十一月十一日
晴
以二度習儀事(이이도습의사)復往三淸宮(부왕삼청궁)
제2차 조회 의식 연습 때문에 다시 삼청궁으로 갔다.
路過西長安門外街市(로과서장안문외가시)有通事李億長進曰(유통사이억장진왈)
서장안문
밖의 시장을 지나가는데, 통역관 이 억장이 다가와 말하기를,
此乃燕朝柴市(차내연조시시)文天祥死于此云(문천상사우차운)
“이 곳은
원나라 때의 땔감 시장인데, 문 천상(1)이
이 곳에서 죽었다고 합니다.”하였다.
聞來毛髮上立(문래모발상립)住馬不能(주마불능)過(과)
그 말을
들으니 머리카락이 위로 곤두서서 말을 멈추어 세울 수 없어 지나갔다.
到三淸(도삼청)問文丞相之祠安在(문문승상지사안재)
삼청궁에
도착하여 문승상의 사당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니,
有秀才答曰(유수재답왈)在順天府裡云(재순천부리운)
수재 한
사람이 “순천부(2) 안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習儀罷後(습의파후)請于序班(청우서반)見帝王廟(견제왕묘)
의식연습을
마친 후에 담당관원에게 청하여 제왕묘를 가보았다.
中殿嵬然(중전외연)九楹榜曰(구영방왈)景德崇聖之廟(경덕숭성지묘)
중전은 우뚝하고
기둥이 아홉이었는데 숭덕숭성지묘라고 하였다.
入其中(입기중)則以伏羲爲中堂之主(즉이복희위중당지주)
그 안에
들어가니 복희를 중당의 주신으로 하고,
神農黃帝少昊高辛帝嚳陶唐氏有虞氏大禹成湯武王以世代爲次(신농황제소호고신제곡도당씨유우씨대우성탕무왕이세대위차)
신농,황제,소호,고신,제곡(3),도당,유우(4)를 모셨고, 또 대우(5)성탕(6)무왕(7) 등 세대에 따라 차례를 삼았다.
東有高祖光武(동유고조광무)西有太宗宋祖爲十五位(서유태종송조위십오위)
조금 동쪽에는
한고조와 광무제의 위폐가 있고, 서쪽에는 당태종과 송태조 등 15위가
있었다.
東西廡亦各以十六位配享(동서무역각이십육위배향)東則風后爲首(동즉풍후위수)
동무와 서무에는
각기 16위를 배향하였는데, 동무에는 풍후를 수위로 하였고,
西則力牧爲主(서즉역목위주)皐陶伯益龍傅說召公奭召公虎張良曹參周勃馮異李靖房玄齡潘美岳飛序于東(고요백익룡부열소공석소공호장량조참주발빙이이정방현령반미악비서우동)
서무에는
역목으로 주신을 삼았다. 고요,백익룡,부열,소공석,소공호,장량,조참,주발,빙이,이정,방현령,반미,악비를 동쪽에 차례로 모셨다.
力牧夔伊尹伯夷周公太公方叔蕭何陳平鄧禹諸葛亮杜如晦曹彬韓世忠張浚序于西(역목기이윤백이주공태공방숙소하진평등우제갈량두여회조빈한세충장준서우서)
역목,기,이윤,백이,주공,태공,방숙,소하,진평,등우,제갈량,두여회,조빈,한세충,장준(8)을
서쪽에 차례로 모시고
春秋享祀云(춘추향사운)元世祖則別立廟祀之(원세조즉별입묘사지)
춘추로 제사한다고
하였다. 원 세조(9)는
별도로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으나,
而爲科道所彈不祀(이위과도소탄불사)而廟毁不修云(이묘훼불수운)
과도(10)들에게 비판을 받고 제사를 하지 않게 되어 사당이 훼손된 뒤에 수리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歷路(역로)見人家有鸚鵡(견인가)翠羽丹吻金觜鸚然可愛(취우단문금자앵연가애)
길을 따라오다가
어떤 민가에서 앵무새를 보았는데 그 푸른 깃과 빨간 부리와 황금색 벼슬이 매우 사랑스러웠다.
還館未幾(환관미기)主事胡定來坐行禮之(주사호정래좌행예지)
관사에 돌아
온지 오래지 않아 주사 호정이 찾아와서 인사를 하였다.
後歷見冬至使而來(후역견동지사이래)
그 후에
동지사를 찾아 뵙고 왔다.
1) 文天祥:
1236∼1282년, 宋 末의 충신, 수도 臨安이 元軍에게 함락되자 근왕군을 조직, 元에 대항하다가 잡혀
토굴에 갇혀 있다가 참수됨.
2) 順天府:
明의 수도(北京)의 지방 행정관청으로 그 청사가
있는 곳을 가리킴.
3) 伏羲,神農,黃帝,少昊,高辛,帝嚳: 모두 고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들.
4) 陶唐,有虞: 중국의 전설상의 성왕(聖王). 도당은
요(堯)인데 아들 단주(丹朱)가 제왕의 그릇이 아니라 하여 제위를 사위인 유우, 즉 순(舜)에게 물려주고, 유우도
아들 상균(商均)이 불초하여 사공(司空: 토지와 백성을 다스리는 자리)인
우(禹)에게 양위하였다고 하여 성왕으로 추앙되었음.
5) 大禹:
우(禹)로서 백우(伯禹) 또는 하후(夏后)씨라고도 하는 중국 태고(太古)의
하(夏) 왕조의 시조.
6) 成湯:
기원전 1600년 경, 夏의 걸(桀)이 무도하여 이를 쳐서, 은(殷:商)나라를 세움.
7) 武王:
기원전 1020년 경, 殷의 주(紂)왕이 왕비 달기(妲己)의 미모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고 폭정을 하자, 이를 쳐서 주(周) 왕조를 연 임금. 주
문왕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발(發).
8) 風后부터 張浚까지: 중국의 상고(堯·舜) 때부터
송나라까지의 역대 왕조의 창업(創業) 또는 수성(守成)에 유공한 충신(忠臣)과 현신(賢臣)들.
9) 元 世祖: 쿠비라이 칸(忽必烈). 1215∼94년(제위1260∼94), 칭기즈 칸(元 太祖)의
끝 아들 투루이 칸의 둘째 아들임. 元의 제3대 憲宗이 그의
막내 동생에게 양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즉위하여 동생을 격파하고, 중국을 경략하여 71년에 도읍을 燕京에 정하고, 국호도 元이라 하였음.
10) 科道:
명(明), 청(淸) 시대에 감찰 업무를 맡은 도찰원(都察院)과 6과(科) 급사중(給事中)과 지방(15道)의 감찰사(監察使).
十一月十二日
晴
是日(시일)冬至使慰序班及副使等官(동지사위서반급부사등관)
이날 동지사께서
서반과 부사 등의 관원들에게 위로연을 베풀었다.
余以病(여이병)未得叅(미득참)
나는 병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十一月十三日
晴
留于玉河館(류우옥하관)令李億長(령이억장)委問洪武大典之事(위문홍무대전지사)
옥하관에서
머물렀다. 이 억장을 시켜 홍무대전에 관한 일을 알아 보게 하였다.
十一月十四日
晴
是日(시일)得見九月三十日內通報(득견구월삼십일내통보)外之巡撫巡按(외지순무순안)
이날 9월 30일자 통보(1)를
얻어 보았다. 지방관으로는 순무사와 순안사,
內之六科給事中(내지육과급사중)陞黜臧否無日無之(승출장부무일무지)
중앙관으로는 6과의 급사중에 이르기까지 승진과 파면, 포상과 처벌이 없는 날이
없었다.
至於朝廷大官方面重任(지어조정대관방면중임)無不擧劾(무불거핵)
조정의 대신과
지방의 고관들에 이르기까지 탄핵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皇上處決(황상처결)如流不滯(여류불체)
황제께서
처결하시는 것이 물 흐르듯 하여 막힘이 없었다.
四十餘年(사십여년)得享萬乘之榮(득향만승지영)有由然矣(유유연의)
40여 년간 만승의 영예를 누리신 것이 모두 이런데 연유가
있는 듯 하다.
非徒科道(비도과도)凡任官司者(범임관사자)無不擧劾(무불거핵)
비단 도찰원의
과도들뿐만 아니라 일반 관아의 관리들도 탄핵을 받지 않은 자가 없는데,
雖樞要之官(수추요지관)略不少饒(략불소요)
비록 중앙
요직에 있는 관리들일지라도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다.
雖不明言其狀(수불명언기상)而其所謂納賂請托(이기소위납뇌청탁)
비록 그
죄상을 명백히 하지는 않았으나 이른바 뇌물을 받고 청탁을 하거나
依成負社者(의성부사자)必與嚴嵩結爲肺腑(필여엄숭결위폐부)
권세가에
의지하여 사직을 저버린 자들은 모두 엄숭의 졸개가 되어
而病民者也(이병민자야)
백성들을
병들게 한 자들이었다.
引病去任者(인병거임자)無日不書(무일불서)
병을 핑계로
벼슬에 물러난 자들이 기록되지 않은 날이 없었다.
亦必有氷山見日(역필유빙산견일)不能自安(불능자안)故爲自退者矣(고위자퇴자의)
역시 빙산이
태양을 보고 마음이 편안치 못해서, 스스로 물러난 자들이다.
1) 통보(通報): 중국 정부의 관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