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 이기론(理氣論)
조선을 이끌었던 사상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자연과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와 그 가치를 파악하려는 철학이다. 이의 밑바탕에 깔린 개념이 이(理)와 기(氣)다.
이와 기는 불교에 대한 유학의 빈곤한 철학사상을 보완하기 위하여 송 나라의 사상가들이 정립한 용어다. 당나라 때는 불교가 나라 전체를 뒤덮었다. 그때까지 유학은 불교에 맞설 만한 우주론이 없어서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우주론을 세울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주목한 최초의 용어가 주역에 나오는 태극이었다. 태극은 우주 생성의 모태로서 서양의 혼돈(chaos)과 유사한 개념이다. 우주의 시원인 이 태극에서 음양과 오행이 생기고 나뉘어 현실세계가 이루어졌다고 주역은 설명한다. 태극은 현상으로 드러나는 음양, 오행, 만물 속에 내재하는 보편의 원리다.
주자는 이 태극을 받아들여 이(理)라고 하고 만물 생성의 근본원리로 삼았다. 이는 불교의 이사론(理事論)에 영향 받은 바 크다. 이(理)는 모든 사물이 존재하게 하는 근본 원인과 이유이며 이를 지배하는 법칙이다. 우주를 형성하는 근본원리며 본질이다. 그러므로 이(理)는 감각으로 경험할 수없는 형이상(形而上)에 속한다.
기(氣)는 구체적인 사물 즉 현상을 가리킨다. 우주에 널리 존재하는 물질과 에너지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형이하(形而下)다.
이는 우주가 존재하는 원리고, 기는 그에 따라 나타난 현실세계다. 이(理)란 어떤 것이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치요 본래성이며, 기(氣)란 어떤 것의 이치가 실현될 수 있는 재료이자 실현될 에너지다. 모든 사물에 있어 이는 기의 주재(主宰)역할을 하고 기는 이의 재료가 된다
이와 같이, 이와 기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 전체, 곧 자연과 인간에 대한 존재원리와 현상을 탐구하기 위한 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기를, 우주론보다 주로 인간의 심성과 관련한 선악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와 기는 근본적인 성격에 차이가 있다. 이는 순전히 선하여 악이 없는 반면, 기는 선과 악이 섞여 있다고 보았다. 이는 불변적인 무형(無形), 무위(無爲)의 특성을 지니고 선하나, 기는 가변적인 유형(有形), 유위(有爲)의 특성을 지니고 악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이와 기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
주희는 이에 대하여,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도 없고, 서로 섞일 수도 없다.”[不離不雜]고 하였다. 이러한 모호한 정의는 조선의 학자들로 하여금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황은 이와 기는 엄밀히 구분되며 갈래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理)는 순전히 선하고 악이 없는[純善無惡] 데 반하여, 기(氣)는 선과 악이 혼재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도 기도 다 같이 발동한다(움직인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담은 일군의 학파를 영남학파 또는 주리파(主理派)라 한다. 이황은 사단(四端; 仁義禮智의 端緖)과 칠정(七情; 喜怒哀懼愛惡欲)을 논하면서, “인간의 정서 가운데 사단은 우주의 근본원리인 이(理)가 발동한 후, 사물과 그 에너지인 기(氣)가 그것을 따르고, 칠정은 기가 발동한 후 이(理)가 거기에 올라타서 생기는 것이다.”[理發而氣隨之 氣發而理乘之]라고 하여, 이도 기도 발동한다고 하였다. 이도 기도 다 같이 발동한다[發]고 하여, 이를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이라 한다.
반면, 이이는 이와 기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을 폈다. 곧 이(理)와 기(氣)는 하나이면서 둘이요, 둘이면서 하나라 하였다. 그들은 또 발동하는[發] 것은 기며, 원리인 이는 결코 발동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들을 일러 기호학파 또는 주기파(主氣派)라 한다. 이이는 이황이 주장한, 이가 발동한 후에 기가 그것을 따른다는 것을 부정하고, 기가 발동하면 이가 그것을 올라탄다는 것만[氣發理乘] 인정하였다. 이것이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다. 발동하는 것은 기뿐이고 이는 그것을 타는 오직 한 길뿐이라는 것이다.
즉 발동하는 것은 기(氣)요, 발동하는 까닭이 이(理)이다. 기(氣)가 아니면 발동할 수 없고, 이(理)가 아니면 발동할 까닭이 없다."고 하여 기는 발동(發動)하는 기능을 갖고 있고, 이는 기(氣)가 발동하는 원인 내지 원리로서만 존재한다고 하였다. 이에 덧붙여, “이(理)는 형체가 없고 기(氣)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이는 모든 것에 두루 통해 있고 기는 개개 사물에 국한(局限)된다.”고 하여, 이른바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을 주장하였다. 즉 이(理)는 시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보편성을 가졌고, 기(氣)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는 제한성을 가졌다는 뜻이다.
이이의 이러한 이론적 전개는 이황의 이기론과 대립된다고 보기보다는 발전적 계승이라는 지평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철학적인 정합성(整合性)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주기론은 주리론을 앞서는 것 같다. 그러나 도덕적 실천이라는 면에서 보면 주리론이 합리성을 갖는다. 선의 밑바탕이 되는 이가 발동하지 못하고 법전의 조문처럼 정지 고착되어 있다면, 인간이 왜 선행을 하려고 애를 쓰는지를 해명할 수가 없다. 선한 이가 천한 기를 제어하지 않으면, 이욕(利慾)에 매몰되어 짐승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주리론자들은 이가 발동하여 우리의 삶을 선의 세계로 견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이기론은 이황과 이이의 제자와 후학들에게 이어져, 300여 년 간이나 그 논쟁이 계속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철학문제를 논의한 나라는 없다. 이기론은 조선의 성리학이 중국을 앞서게 된 계기를 제공해 주었고, 나아가 우리가 철학하는 민족이라는 자부심도 갖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