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 보우 太古普愚
고려 말의 고승. 성은 홍씨.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 홍주(洪州)출신. 아버지는 홍연(洪延), 어머니는 정씨이며, 해가 품에 들어오는 태몽이 있었다.
13세에 출가하여 회암사(檜巖寺) 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얼마 뒤 가지산(迦智山)으로 가서 수행하였다. 19세부터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話頭)를 혼자서 참구하였고,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였다. 그뒤 불경을 열람하면서 깊이 연구하였으나, 불경의 연구가 수단일 뿐, 진정한 수행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선수행(禪修行)에 몰두하였다.
1333년(충숙왕 복위 2) 가을에는 성서 감로암(甘露庵)에서 죽기를 결심하고 7일 동안 정진하였다. 그때 푸른 옷을 입은 두 아이가 나타나서 더운 물을 권하였는데 받아서 마셨더니 감로수였으며, 그때 홀연히 깨친 바가 있었다.
1337년 가을에는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두가 다 사라져 버리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고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모든 지해(知解)를 타파하였다. 그뒤 송도의 전단원(檀園)에서 조주(趙州)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였으며, 1338년 1월 7일에 대오(大悟)하였다.
1341년(충혜왕 복위 2)에는 중흥사(重興寺)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太古庵)을 창건하여 5년 동안 머물렀다. 이때 중국 영가대사(永嘉大師)의 <증도가(證道歌)>를 본떠서 유명한 <태고암가> 1편을 지었다.
1347년 7월에 호주 천호암(天湖庵)으로 가서 석옥(石屋)을 만나 도를 인정받았고, 40여일 동안 석옥의 곁에서 임제선(臨濟禪)을 탐구하였다. 그가 떠나려 하자 석옥은 <태고암가>의 발문을 써주는 한편 깨달음의 신표로 가사(袈裟)를 주면서, "이 가사는 오늘의 것이지만 법은 영축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 그것을 그대에게 전하노니 잘 보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1348년에 귀국하여 중흥사에 머물렀으며, 도를 더욱 깊이 하고자 미원의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4년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보임(保任)하였다. 이때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짓기도 하였다.
1363년에 신돈(辛旽)이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불법을 해치고 나라를 위태롭게 하므로, 보우는 "나라가 다스려지려면 진승(眞僧)이 그 뜻을 얻고, 나라가 위태로워지면 사승(邪僧)이 때를 만납니다. 왕께서 살피시고 그를 멀리하시면 국가의 큰 다행이겠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그러나 신돈의 횡포가 더욱 심하여졌으므 왕사의 인장을 반납하고 전주 보광사(普光寺)에 가서 머물렀다. 1368년 여름 신돈의 참언으로 속리산에 금고(禁錮)되었는데, 이듬해 3월 왕이 이를 뉘우치고 다시 소설산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1371년(우왕 7) 겨울에 양산사(陽山寺)로 옮겼는데, 부임하던 날에 우왕은 그를 국사로 봉하였다.
<태고집(太古集)>에는 그의 사상과 경지를 알게 하는 법어와 시 등이 수록되어 있어 그의 불교에 대한 깊이와 경지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공민왕이 불러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물었을 때는 거룩하고 인자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요 다스림의 근원이니,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 보라고 하였고, 때의 페단과 운수의 변화를 살피지 않고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 왕도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고,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일변하고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기를 주장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선문구산(禪門九山)을 일문(一門)으로 통합하여 종파의 이름을 도존(道存)으로 할 것 등을 건의하였다. 1382년 여름에 "돌아가자, 돌아가자." 하고는 곧 소설산으로 돌아왔다. 12월 17일에 언어와 동작이 혼미해지더니, 23일 문인들을 불러 "내일 유시(酉時)에 내가 떠날 것이니, 지군(知郡 : 군수)을 청하여 인장을 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유시가 되자 단정히 앉아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니, 나이 82세, 법랍 69세였다. 시호는 원증(圓證)이다.
그는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宗祖)로 받들어지고 있다. 저서로는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2권과 <태고유음(太古遺音)>6책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동사열전>(광제원. 1994)
꽃 피니 가지마다 붉은 빛이요
꽃 지니 나무가득 빈공이네
꽃과 공이 서로 침해하지 아니하니
만남과 헤어짐이 다 아름답구나
성냄은 급류같아 은혜를 쓸고
성냄은 불과같아
공덕의 숲을 태워버린다.
물위에 바람이 불고
달빛은 연못에 잠기네.
아 먼지하나 일지않음이여
애석히도
오늘 다시 나홀로 보는구나.
마음과 경계를 잊은자리 무어라 말할건가
갈대꽃과 눈빛은 같은듯 같지 않네
사방으로 통한 길은 묘하기 끝이 없어
一千江을 다 다녀도 달그림자 남지 않네
움직이니 일천가지가 나타나고
고요하니 한 물건도 없구나
無! 이것이 무엇인고
찬서리 내린뒤야 국화는 성하구나
<태고보우>
한국불교의 중흥조- 태고보우국사 -
석가모니 부처님의 49년 설법과 달마의 독특한 조사가풍을 이은 임제의 정종正宗이 고려말엽 한 스님에 의해 중국에서 동국東國으로 건너오니, 그 분이 바로 오늘날 한국 선조의 종조라 추앙받고 있는 태고보우국사(1301~1382)였다. 충렬왕 27년 홍주땅에서 홍연의 부인 정씨가 해가 품어드는 꿈을 꾸고 스님을 낳으니 자를 보우普愚라 했다.(원래 이름은 보허普虛임) 13세때 회암사 광지선사廣智禪師에게 출가하여 가지산 총림에 안거하며 19세 때에는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참구하는 한편 화엄학을 공부하며 경전의 이치를 연구하고 탐색하니, 26세때에는 화엄선과에 합격하게 된다. 그러나 문득 경전공부에 한계를 느낀 스님은 ‘이것도 방편일 뿐이다. 옛날의 대장부들은 높은 뜻을 세워 공부하지 않았던가. 어찌 나만 대장부가 못되겠는가’ 탄식하며 선의 수행으로 돌아가 정진하니, 이후로 보우스님의 사교입선捨敎入禪적인 입장은 일관되게 그의 행장과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충숙왕 2년 정진중에 성서의 감로사에서 1차의 깨달음을 경험했고 「원각경」을 보다가 “일체가 다 멸하면 不動이라고 한다”는 구절에서 알음알이가 전부 떨어지는 2차의 깨달음을 경험한다. 그후 스님은 조주의 ‘무자無字’를 참구하니 1338년 1월 7일 홀연히 크게 깨닫고 그해 3월 고향인 양근의 집으로 돌아와 정진을 계속하다가 ‘엄두밀계처嚴頭密啓處’에 이르러 마침내 4차의 깨달음을 이루게 된다. 깨달음을 얻은 후 삼각산 태고암 등지에서 머물면서 「태고암가太古庵歌」를 읊으면서 5년을 소요하던 스님은 충목왕 2년 46세로 인가를 받기 위해 元으로 떠나니 그때야 비로소 임제의 정맥 ‘석옥청공石屋淸珙’을 친견하게 된다.
보우스님이 입실하여 證한 바를 보이니, 석옥화상은 스님의 법기됨을 알아보고 마침내 인가하며 말씀하시길 “흥, 노승이 비록 궁산에 묻혀 있으나 항상 祖門을 설하여 아손을 기다린지 오래더니, 오늘에야 비로소 너를 만났구나.”하시니 스님은 “선지식은 억겁을 지내어도 만나기 어려운즉, 그대로 좌우에 있어 모시고자 합니다.”하고 청한다. 그러나 석옥화상은 만류하며 본국에 돌아가기를 명한다. 돌아올 때, 스님은 다시 “아주 묻겠나이다. 이밖에도 다시 무엇이 있습니까?” 하고 두드린즉, 석옥화상은 “노승도 또한 이러하고 삼세제불도 또한 이러할 뿐이다. 무엇이 다시 있겠느냐. 나의 70여년 살림살이를 온통 너에게 빼앗겼는데. 그러나 나는 이런 3백근이나 되는 무거운 짐을 너에게 지워 놓았은즉, 오늘부터 두다리를 쭉 뻗고 자겠다.”하며 웃는다.
충목왕 4년 연도를 거쳐 본국으로 귀국한 뒤 미원장 소설암에 은거, ‘세상과 인연을 끊고 종신토록 살겠다’며 「산중자락가山中自樂歌」를 읊고 지내다 공민왕 5년 왕의 초청으로 봉은사에서 개당설법을 하고 왕사로 책봉된다. 그후 원융부를 설치, 승직의 임명권을 장악하고 구산선문의 통합을 주장하여 선종 교단의 개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나, 고려의 5교양종의 체제가 붕괴되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후일 홍건적 침입, 신돈의 중상 등으로 희양산, 가지산, 속리산 등으로 옮겨 지냈고, 69세에 다시 소설암으로 돌아왔으며 신돈의 죽음후, 다시 국사로 추앙되나, 우왕 8년 여름에 가벼운 병을 보이더니, 1382년 12월 23일 문인들을 불러 “내일 유시에는 내가 떠날 것이니 지군知郡을 청하여 인장을 봉하라”한 후 목욕갱의하고 단정히 앉아 게송을 말하였다.
人生命若水泡空 八十餘年春夢中
臨終如今放皮袋 一輪紅日下西峰
사람의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팔십여년이 봄날 꿈속 같았네.
죽음에 다달아 이제 가죽푸대 버리노니 수레바퀴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게송을 마치고 입적하니 세수는 82세요, 법랍은 69세였다. 다비하는 날은 광명이 하늘을 뻗쳤고 사리가 무수히 나왔으며 정수리에서 나온 사리는 별처럼 빛났다. 그 사리 백알을 골라 왕궁에 올리니, 왕은 공경하고 존중하여 원증圓證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보우국사는 신라통일 직후에 주류를 이루워왔던 타력적 경향의 미타신행에서 벗어난 자력적 미타신행을 주장했는데 그 정토 자체를 마음에서 구하자는 스님의 해석은 당시 몹시 호응을 얻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임제종의 전법을 강조, 간화선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는데, 의선인宜禪人에게 내린 법어를 보면, ‘부처나 조사들이 전한 묘한 진리는 경전같은 문자나 언어에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中下의 근기를 위하여 심지를 가르쳐 주는 방편으로 쓴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고 오직 단 하나의 화두만을 참구할 것이며, 소득이 있으면 조사를 찾아가 확인을 받으라’고 하였으니, 그 내용을 보면 스님의 사교입선적인 입장이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한, 스님은 화두를 참구하는 과정에서 지해智解나 사량분별을 용납지 말 것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지해나 교학적인 면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선교융회를 강조한 보조지눌국사의 선교관과 확실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통현의 화엄사상을 도입하고 그러한 기초 위에서 전통적인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격외선지格外禪旨를 가져와 간화적인 선법을 펼친 지눌국사 역시 보우스님과 마찬가지로 사상적으로 지향하고 있던 것은 간화선이었으니, 결국 두분의 사상이 방법상의 차이는 있지만 뿌리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임제종의 간화선풍을 도입, 한국적인 선사상을 확립했던 보우스님의 법맥은 당시 고려불교를 꽃피우고, 환암 돈수를 거쳐 서산~사명으로 이어졌으니, 이러한 스님의 사상적 전통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승되어 제방에서 공부하는 선승들의 눈을 밝혀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