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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를 정교하게 체계화하고, 대중화시켜 완성한 철학자
-Jean-Paul Sartre
전방위적 지식인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쓴 철학자이지만, 그보다 먼저 문학가이기도 하다. 소설, 희곡, 문학비평을 썼고, 보들레르, 주네, 플로베르, 말라르메 등 시인, 작가들의 전기나 평을 쓰기도 했다. 수많은 신문 잡지 기고, 라디오 출연, 정치 평론, 데모대 앞에서의 선동연설 등 그야말로 전방위적 지식인이었고,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메를로-퐁티의 체계보다 허술했으나 그 보다 더 유명한 철학자였고, 철학적 주제를 거의 그대로 하이데거에서 빌려 왔으나 그 보다 훨씬 높은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카뮈의 작품성을 따르지 못했으나 생전에 엄청난 권위로 문단을 지배했으며, 베케트만한 참신성이 없었지만 그의 희곡들은 당대에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드골 다음으로 전 세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프랑스인이고, 지성 혹은 철학의 이미지를 프랑스에 부여한 공로자이기도 하다. 아마 세계적으로 그 만한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작은 몸집의 거인, 사르트르, 그가 죽은지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타자와의 투쟁에서 최종적인 패배는 죽음이라고 갈파했듯이 그도 이제는 더 이상 타자에 의해서 밖에 존재하지 않으며, 타자에게서만 그 자신의 의미를, 그 자신의 승리의 의미까지를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가 평생 진력한 분야는 문학, 철학, 그리고 현실참여이다. 그러나 그 세 분야는 너무나 촘촘하게 교직(交織)되어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각기 고립된 경계선으로 분리해 낼 수 없다. 시쳇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인 셈이다. 철학의 주제가 문학의 주제이고, 문학의 문구들이 그대로 철학적 주제의 일러스트레이션인 것이다. 현실참여의 기본 이념을 철학에서 길어 올리는가 하면 문학은 현실참여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그야말로 모든 분야가 서로 넘나들고 스며들어 경계선을 허물고 있다. 그러나 교직은 커다란 경계선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범주 안에서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혹은 그 자신의 선택에 따라 무수한 변종과 이본(異本)이 앞의 것을 간섭하고 수정하며 그를 모순적 인간으로 만들어 갔다. 그를 다시 읽기 위해서는 실존주의의 계보부터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실존주의라는 명칭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자이다. 우리는 흔히 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을 실존주의의 계보로 그린다. 마치 1백 50년 전에 살았던 키에르케고르(1813∼1855)가 이미 실존주의를 표방하기라도 한 듯이 말이다. 그러나 견고해 보이는 모든 용어들이 실상 아주 짧은 역사를 갖고 있듯이 실존주의라는 철학사조의 명칭 역시 그 역사는 50년 남짓하고, 또 그것은 전적으로 사르트르의 것이다. 새로운 끄세주판의 『실존주의』 저자인 키에르케고르 전문가 자크 콜레트는 이 말이 3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처음 나타났고, 비슷한 시기에 야스퍼스가 『실존의 철학』(1932)이라는 제목의 저서를 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이 대중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44년 프랑시즈 퐁주가 운영하던 공산당 기관지 ‘악시옹’이 사르트르를 격렬하게 비난하면서였다. 사르트르는 자신의 사상을 해명하는 글 속에서 하이데거 철학과의 관계를 처음으로 밝혔다. 그리고 자신이 실존주의자라고 규정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왜냐하면 그의 철학이 모든 체계를 거부하며, 코기토에서 출발하는 완전한 개인성을 강조하는데, 거기에 실존주의라는 타이틀을 붙이는 것은 개체성에 보편적 원리를 구축하는 모순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더 좋은 이름이 없으므로, 그리고 실존주의에 대한 대중적 인기가 폭발적이었으므로 사르트르도 어쩔 수 없이 그 타이틀을 받아들였다.
실존주의는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를 설명하며 그와의 밀접한 관련성을 말함으로써 하이데거가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떠올랐지만, 40년대에 독일을 방문한 한 프랑스 철학자에게 하이데거는 “실존주의가 도대체 뭡니까?”라고 물었다고 한다. 여하튼 사르트르는 2차대전 종전 후 실존주의의 교황이라는 대중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1945년에 파리는 실존주의 덕분에 다시 세계의 문화 수도가 되었고, 전후 몇 년간 프랑스의 유일한 수출 품목이었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사르트르의 강연회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기절한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존재와 무』는 후설, 하이데거의 철학을 기본으로 깔고,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접목하여 만들어낸 아주 난해한 철학서인데, 이 책을 바탕으로 한 실존주의가 그토록 대중적 인기를 끌게 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연구거리가 아닐수 없다. 그것은 이미 매스 미디어를 통한 대중적 확산의 힘을 보여준 문화현상이었다.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가를 중심으로 번졌던 실존주의 열풍은 철학이나 학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삶의 스타일 혹은 문화적 현상이었다. 생-제르맹-데-프레가의 지하 카페에서 트럼펫을 불며 재즈에 열중하던 일군의 젊은이들,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노래하던 샹송 가수 줄리에트 그레코, 가정이나 진지한 사랑등 일체의 기성 가치를 조롱하며 찰나적인 쾌락에만 몰두하던 사강류의 젊은 여성들, 이들이 모두 실존주의 현상의 모태이며 주인공들이었다.
신의 침묵, 저버림등의 개념은 수백년을 거슬러 올라가 파스칼을 실존주의의 단초로 삼았고, 인간상황의 애매성과 부조리를 강조하면서 인간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거부한 키에르케고르가 실존주의의 시조로 떠올랐다. 비극적 염세주의와 개인의 의지를 강조한 니체도 실존주의자로 부상했다. 문학에서는 도스토엡스키, 카프카, 카뮈, 이오네스코, 베케트 등이 실존주의의 범주 안에 분류되었는데, 그것은 막연한 불안감, 전락, 고통, 죄의식, 절망감, 그리고 이성적으로 설명할수 없는 부조리성 등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우리나라 대학에서 실존주의 문학이라는 같은 범주로 사르트르와 카뮈를 강의하려면 유사점을 찾기가 매우 어려운데 그것은 원래 사조가 엄격한 논리라기 보다는 한 시대의 분위기를 아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실존주의가 거의 전적으로 사르트르의 것이고, 사조로서의 탄생이 매우 불안정하므로(하지만 역사상 불안정하지 않은 사조의 탄생이 있었던가?) 실존주의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실존철학이라 이름 붙여진 모든 철학자에게 공통되는 주제는 개인적 실존에 대한 강조이다. 실존이란 ‘실제로 존재함’이다. 물론 꽃이나 돌멩이 동물들도 실제로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방식으로 실존한다. 우선 인간은 이 세상의 유일하고 독자적인 존재이다. 무성한 나뭇잎은 가을에 낙엽이 지면 다음해 봄에 다시 나오지만 각자의 인간은 한 번 죽으면 그만이다. 인간은 자기 아닌 대상,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다. 자유로운 결단과 선택에 의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하고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인간은 선택에 의해 자신을 앞으로 투사한다. 주체성, 개인의 자유, 개인의 선택 등 실존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은 보편성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모든 가치의 근거는 보편성이었고, 인간이 참조를 구해야할 최고의 윤리 역시 보편성이었다. 그런데 19세기의 키에르케고르가 이 철학적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 개인의 최고의 선은 자신의 유일한 소명을 찾아내는 것이고, 한 개인의 결단에는 아무런 객관적 이성의 기초가 없다고 말하며, 그는 윤리와 진리의 문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인생의 중요한 문제는 이성이나 과학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했다. 시간과 공간 속에 그냥 던져져 지금 여기에 있는 내 실존은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한 존재이다. ‘왜 하필이면 지금 여기?’를 아는 사람은 없다. 인간의 실존은 우연적 사실이고, 거기에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다.
키에르케고르에서 낯익은 전락, 고통, 죄악, 죄의식, 불안이라는 주제에서 하이데거는 특히 불안에 주목했다. 실존의 존재방식은 개인적 선택이라고 했는데, 이 개인의 선택을 최종적으로 정당화해줄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여기에서 인간의 불안감이 생긴다. 인간은 자기가 왜 여기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고, 인생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 확실한 것은 죽음뿐이다. 죽음은 나의 최종적인 무(無)이다. 마치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죽음은 내 생애의 매순간 내 위에 드리워져 있다. 그런데도 보통 사람들은 마치 죽음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고, 이 엄연한 현실에서 도망치려 한다. 그러나 죽음은 나의 가장 진정하고 의미있는 계기이며, 나만이 체험할 수 있는 나의 개인적 가능성이다. 내가 죽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정면으로 대면하면 나는 죽음의 불안과 인생의 보잘것없음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리해서 진정한 나 자신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인생의 무의미성과 죽음의 확실성을 염두에 둔 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자기 목표를 선택하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기본주체였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르트르도 하이데거처럼 신을 부인한다. 그래서 흔히 키에르케고르를 기독교적 실존주의,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를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분류한다. 신이 없다면 실존에 선행하는 존재는 없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기본주제를 전폭적으로 받아들여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 철학이나 기독교 사상은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고 인간을 규정했었다. 태초에 남자와 여자의 모습을 구상한 신은 창조를 통해 그들을 실제로 존재하게 했다. 마치 그것은 시계나 나무칼을 만드는 장인이 시계의 모습 혹은 나무칼의 모습을 먼저 구상한 다음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내는 것과 같다.
이런 신학적 세계관에 따르면 본질(구상)이 실존(실현된 물건)보다 앞서 있게 되고, 만들어진 물건에는 그 목적이 미리 정해져 있다. 나무칼의 목적은 책갈피를 자르는 것이고, 시계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인간존재도 만일 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는 신의 의도에 따른 어떤 목적과 성격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신에 의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면 거기에는 어떤 구상도 없고, 따라서 그 어떤 본질도 없다. 그 어떤 개념으로 정의되기 전에 그냥 실제로 있는 그런 존재자,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이라는 실재였다. 그러므로 실존은 존재에 선행한다. 인간은 우선 세계 안에 있고, 거기에 자신의 흔적을 각인시키고, 그렇게 하여 자유스럽게 자신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인간은 그저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무가치한 잉여물이다. 우연히 던져짐이라는 주제는 하이데거에서 빌어 왔지만 사르트르는 거기에 무가치한 잉여물이라는 드라마틱한 묘사를 추가하여 한층 더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뉘앙스를 가미했다. 우리의 존재가 우연에서 시작되고, 그 확실성이 우리를 절망으로 몰고 간다면 “인간의 삶은 절망의 저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희곡 『파리떼』의 한 구절인 이 비장한 문구가 전쟁의 폐허에서 빠져나온 전후의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벅찬 희망을 주었을 것인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아무런 본질도 나를 정의해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모든 철학, 과학, 정치이론, 종교가 무가치한 것이라면 나의 세계를 구축해주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밖에 없다. 이와 같은 완벽한 자유와 선택, 그리고 그에 따른 개인의 책임감은 인간에게 불안감을 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젊은이의 역동성을 자극하기에 적합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주체와 자유의 철학에서 총체성의 철학으로
역사적으로 보면 철학에는 두 경향이 있는 듯 하다. 필연적이고 강제적인 과학을 구축하려 는 의지가 그 하나이고, 이런 흐름에 우연성, 불확실성, 자유를 대립시키는 철학이 다른 하나이다. 사르트르가 40년대에 틀에 박힌 강단 철학에 반기를 들고 수많은 젊은 추종자들을 만들어낸 것은 우연성, 불확실성, 자유의 철학을 가지고서였다. 키에르케고르에서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실존주의는 근엄한 사상이 아니다. 그 사유방식은 냉소적이고, 모든 위선과 엄숙, 권리개념을 거부한다. 실존주의는 반항과 권위 부정을 전제로 하는 철학이었다. 실존주의에서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확정적이며, 한 순간도 고정되지 않은 영원한 떨림이다. 인간의 태생 자체가 우연하고 불안정하지만, 매순간의 삶의 양식 또한 불안정하기 짝이 없다.
그것은 대자(對自), 즉자(卽自)의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사르트르의 철학이 어려운 것은 생소한 철학적 용어들 때문인데, 대자와 즉자도 그 중의 하나이다. 쉽게 생각하면 대자는 우리의 의식이고, 즉자는 사물이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은, 다시 말해서 대자적 존재 양식은 매순간 자신의 존재를 자기가 결정한다. 내 앞에 있는 책상은 처음에 책상이면 끝까지 책상으로 남아 있을뿐, 자신의 존재를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오늘까지의 나를 완전히 바꿔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내일 나타날 수도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자유이다. 설명하기 좋게 오늘과 내일이라고 했지, 사실 인간은 매순간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 이것을 실존주의에서는 기획투사라고 한다. 자신의 기획을 매순간 앞으로 투사하며 전진한다는 것이다.
이때 대자가 지향하는 것은 즉자적 존재이다.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어떤 야망, 그것은 고정된 불변의 어떤 물질적 상태이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물질적 상태, 즉 즉자에 도달했다 하더라도 대자는 잠시도 거기에 머물러 있지 못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최고의 베스트 셀러를 기록한 작가는 벌써 다음 작품의 구상에 들어가야 하고, 앨범 판매 부수 1위에 올라간 가수는 벌써 다음 곡의 녹음을 하고 있어야 한다. 대자는 끊임없이 즉자를 동경하지만, 일단 그 즉자 상태에 도달하자마자 다른 즉자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다시 말하면 대자는 휴식을 모르고, 자신의 즉자 상태를 즐길줄을 모른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크게는 삶 전체가 그러하고 작게는 매순간의 의식 상태가 그러하다. 대자가 이 피곤한 투기(投企, 기획을 앞으로 투사하는 일)를 중단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의 순간일 뿐이다.
촛불처럼 깜박이는 이 불확실성, 불안정성, 우연성은 이미 푸코나 데리다를 예고하고 있지 않은가? 기표(記標)(signifiant, 말의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와 기의(記意·signifi : 말의 의미 내용) 사이의 차이, 미세한 지연, 미끄러짐, 흔적 등을 얘기하면서 텍스트의 해체를 주장하는 데리다의 비확정성, 불안정성은 사르트르의 중단 없이 앞으로 치닫는 피곤한 대자(對自)와 얼마나 닮아 있는가? 그리고 그 어떤 인식도 확고부동한 것은 없으므로 담론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고 말하며 인간에 대한 인식의 불안정성을 말하는 푸코의 계보학과는 또 얼마나 닮아 있는가? 금년 1월에 『사르트르의 세기』를 출간한 베르나르-앙리 레비가 사르트르의 현대성을 확인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자신의 청년기에 썼던(『존재와 무』는 그가 38세 되던 해에 나온 것이다)이 경쾌하고 유연한 자유의 철학을 한없이 무거운 총체성의 철학으로 대체했다. 1960년에 나온 『변증법적 이성 비판』이 그것이다. B-H 레비는 이 책을 헤겔에 대해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철학자가 결국 헤겔에 패배하고 만 사건이라고 본다. 『존재와 무』도 헤겔에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의 대타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헤겔의 주관과 객관의 변증법을 차용한 것일 뿐이다. 상대방 앞에서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즉 서로 자신의 주관성을 회수하기 위해 두 의식이 벌이는 싸움을 헤겔의 인정투쟁의 개념을 빌어 묘사한 것이었다.
그런데 『변증법적 이성 비판』은 마르크시즘과 실존주의를 융합시키려는 의도를 표방하면서 철두철미하게 폐쇄적 총체성의 체계를 세웠다. 그중에 ‘타성적 실천’(pratico-inerte)같은 흥미로운 개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마르크스적 소외 개념의 사르트르적 버전이라 할수 있는 이 개념은 좀 더 빨리 달리기 위해 자동차를 구입한 운전자들이 너무 많은 자동차 때문에 오히려 교통혼잡 속에서 꼼짝 못하는 것처럼 인간의 행동이 부머랭처럼 다시 인간으로 돌아와 옥죄는 현대의 딜레마를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래알처럼 흩어진 개인들(散在性·s rialit ) 대신 ‘타자’가 없는 순수 상호성의 융화집단(groupe-en-fusion)을 상정하고 그것을 거대한 대자(對自)라고 한 것은 너무나 인위적이고 전체주의적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개인에서 집단으로
실존주의는 원래 개인을 강조하는 철학이다. 개인은 집단과 대립하는 개념이고, 따라서 사회적 통합과는 거리가 멀다. 특히 사르트르의 초기 실존주의는 사회적 통합과 대척점에 있었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의 철저한 고립 생활을 떠올리기 바란다. 그것은 사르트르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중에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그는 2차대전 전까지만 해도 사회문제에 아무 관심이 없이 문학과 철학에만 몰두하던 문학청년이었다. 그러다가 2차대전 중 군에 소집되어 집단과 접한 후 비로소 집단의식을 갖게 되었다. 종전 후 그는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참여 문학론으로 일약 현실참여 지식인이 된다. 그리고 죽는 날 까지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세계의 주목을 받는 거대한 사상의 지도자가 된다.
참여문학을 주창한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그는, 자본주의는 파시즘의 토대이고, 사회주의는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사회이며,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자유를 누리는 사회만이 진정 자유로운 사회이므로 작가의 제1 임무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스스로 정한 원칙에 집착하여 그는 현실 정치의 실상을 직시하지 못했고, 점점 과격으로 치달았다. “근대 철학의 복잡한 문제를 포기하고 주저 없이 행동 속으로 들어가 맹목적인 참여를 했다”는 한나 아렌트의 비판처럼 그 후 그는 거의 이데올로기적 맹목성을 보이며 수많은 레닌주의적 오류를 범했다. 모스크바나 북경, 쿠바의 유혈적 전체주의를 보지 못했고, 전체주의적 범죄를 정당화하거나 정치적 범죄를 옹호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1961년까지도 소련을 옹호하며, 소련이 지은 죄가 무엇이든 간에 소련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훨씬 월등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체제는 혁명을 실현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혁명의 완성을 위해 반-혁명적 인물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냉혹한 이데올로기의 섬뜩한 인명경시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1972년에 그는, 혁명 체제는 혁명에 위협적인 사람들을 제거해야만 하는데, 감옥에 넣으면 언제고 나올 수 있기 때문에 그 방법은 죽이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1793년의 혁명가들은 충분히 죽이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1950년의 한국전도 미국의 사주를 받은 남한 정부의 북침설을 지지했다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이 판명되자 여하튼 그것은 미국 측의 도발에 대한 북한측의 정당한 대응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레닌주의적 오류가 인도차이나 전쟁 반대나 알제리 독립투쟁지지 등 인류의 보편적 대의를 지킨 순수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를 낭만주의적 무정부주의자로 회고하게 만든다.
60년대에는 주로 서구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제3세계 인민들의 저항을 지원했고, 70년대에는 68년 5월세대의 늙은 지지자로서 마오이즘에 합류하여 부르주아 자본주의 사회의 전복을 목표로 극좌 투쟁을 벌였다. 당대에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으며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사그라질 줄 몰랐다. 60년대에 구조주의가 부상하며 그의 철학과 문학이 퇴조하고, 그의 책을 읽는 사람이 급격히 줄어든 이후에도 그는 더욱 유명해지고 더욱 존경받았다. 그것은 세기 초부터 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사회주의 사상이 지성계의 주류 사상이었던 프랑스 특유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격렬하게 체제에 반항하며 시대를 거슬러 이야기한 것 같지만 사실 그는 자기 시대가 듣고 싶어하던 것을 말한 역설적인 순응주의자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신적 외상(外傷)으로서의 문학
철학의 변화, 투쟁의 과격화와 함께 그의 문학도 많은 변화를 겪게 된다. 원래 문학은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마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정신적 외상(外傷)과도 같았다. 그는 원래 문학에 대한 깊은 신뢰와 문학적 명성에 대한 갈망을 품고 인생을 시작했다. 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말들』에서 보면 그에게 이런 문학적 선망을 심어준 것은 외조부인 샤를르 슈바이처였다(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의사 슈바이처는 사르트르의 어머니와 사촌간이다). 생후 1년만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다시 외가에 들어가 외조부모 밑에서 성장한 어린 사르트르는 독일어 학자로서 풍부한 인문적 교양을 갖춘 외할아버지로부터 문학이 종교적 신앙을 대신할 수 있는 성스러운 활동이라는 생각을 주입받았다. 문학을 구원으로 생각하는 이런 문학관은 그의 첫 소설인 『구토』에 잘 나타나 있다. 실존의 우연성과 무상성(無償性) 앞에서 심한 구토 증세를 보이던 주인공 로캉탱은 카페의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흑인 여가수의 재즈를 듣고 구토가 씻은 듯이 낫는 것을 느낀다. 무미건조한 삶이 예술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일종의 은유인 셈이다. 그리고 로캉탱은 자신이 할수 있는 예술 분야인 학, 즉 소설을 하나 쓸 결심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의 이 성스러운 문학관은 사르트르에게 심한 수치심과 죄의식을 안겨주며 그의 내부로 깊이 숨게 된다. 자서전 『말들』은 플로베르에게 매혹당한 어린 사르트르를 보여준다. 소설 『구토』(33세에 출간)를 쓸 때까지만 해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40년대에 마르크시즘에 경도되어 참여문학을 주창하면서 그는 플로베르에 대한 심한 경멸과 증오감을 표방한다. 사회문제에 등을 돌리고 문학에만 몰두한 부르주아 작가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에 의하면 작가는 자기 책의 영향에도 책임이 있지만 언뜻 보기에 직접 상관이 없는 듯이 보이는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사건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플로베르와 공쿠르 형제를 그가 극렬하게 비판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1871년 노동계급의 혁명 운동인 파리 코뮌이 실패한 후 정부는 2만 명에 가까운 혁명 가담자들을 학살했는데 이 작가들은 학살을 저지하려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학살의 책임자라는 것이다. 더구나 학살된 사람들은 노동계급이고, 플로베르와 공쿠르 형제는 사르트르가 죽을 때까지 증오를 멈출 수 없다는 부르주아 계급이 아닌가.
그러니까 19세기 예술지상주의자들에 대한 격렬한 판을 내세운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기실 사르트르 자신의 자가비판이었던 것이다.
문학적 비관주의 속에 감추어진 순수문학의 열정
문학을 사회혁명의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는 참여문학의 주장은 앙가주망(engagement)이라는 단어를 전세계적으로 유행시키면서 사르트르를 참여 지식인의 이상으로 올려놓았다. 그러나 50년대부터 이미 그는 앙가주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채 그냥 친 마르크스주의적 (그는 한번도 공산당원은 아니었다)사회 투쟁을 벌였고, 60년대에 들어와서는 참여문학의 효용성에 대한 믿음마저 상실했다. 도구로서의 문학을 극단으로 밀고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문학의 효용성은 사라지는 법이다. 그의 자서전적 글쓰기인 『말들』이 어두운 색조의 비관주의로 물들어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1964년 4월 자클린느 피아티에와 가진 회견(르몽드지)에서 그는 자신의 평생의 업적을 부인하며 문학에 이별을 고하는 씁쓸함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칼로 생각했다. 이제 나는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또 “죽어가는 어린아이 옆에서 소설 『구토』는 무슨 가치가 있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낮이면 격렬한 가두 투쟁을 벌이고 문학의 포기를 표방하면서 밤이면 자신이 그토록 경멸한다는 19세기의 작가 플로베르의 전기에 몰두했던 사르트르의 말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8세부터 거의 실명에 이른 68세까지 6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썼는데, 마지막 10년간을 꼬박 플로베르의 전기 『집안의 백치』를 쓰는데 바쳤다. 1971년에 첫권이 나온, 거의 3천 페이지에 달하는 3권짜리의 이 책은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도구적 문학관과도 다르고, 『말들』에 피력된 문학에의 절망과도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놀랍게도 『말들』에서 다 청산된 것으로 보였던 순수문학과 절대예술에의 동경과 믿음이었다.
플로베르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는 것만으로 그를 비난했던 좌파 독자들은 책이 출간되자 그 내용을 보고 다시 심한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일생의 주제들이 확대되거나 증폭되고, 또는 역사성이 가미된 채 다시 언급되어 있어, 가히 ‘사르트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문학의 신성시, 문학에 의한 인간구원, 미의 비현실성, 형식에 대한 가치부여, 예술작품은 보이지 않는 미적 이념의 유사물(analogon)이라는 개념, 작가자신의 비현실화와 탈현실화라는 미학적 태도 등, 사르트르의 초기 예술 개념들이 더욱 체계적이고 더욱 심화된 형태로 다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이 마지막 자기부정이야말로 독자들의 영원한 사랑 속에 그의 이름을 각인시켜줄 축복의 모순이 될 것이다. 벌써 21세기, 낮이면 아스팔트에서 포효하고 밤이면 등불 밑에서 미친 듯이 글을 써대던 사르트르의 세기도 어언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20세기의 책갈피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사르트르 연보 (관련 학자들의 저서 포함)
1905 6월 21일 파리에서 출생.
1907 아버지 사망, 외가인 슈바이처(Schweitzer)가에 들어감.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한 유명한 의사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사르트르의 어머니의 사촌.
1915 파리에 있는 앙리 4세(Henri IV) 학교에 입학.
1916 어머니 재혼, 어머니를 따라 라 로셸(La Rochelle)로 이사.
1917 라 로셸의 중학교에 입학(1919년에 졸업).
1919 파리의 루이-르-그랑(Louis-le-Grand) 고등학교에 입학(1922년에 졸업).
1924 고등사범(Ecole Normale Sup rieure)에 입학, 철학을 전공하며(1929년까지) 교수자격시험(agr gation)을 준비. 시몬느 드 보봐르(Simone de Beauvoir)와 만남.
1926 나중에 『상상』(L'Imaginatio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될 논문 완성.
1927 하이데거(Heidegger), 『존재와 시간』 출간.
1928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일반 정신병리학』 공역.
1929 군에 입대, 투르(Tours)에서 기상병으로 복무(1931년까지).
1931 르 아브르(Le Havre) 고등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
1933 베를린(Berlin)의 프랑스 문화원(Institut Fran ais)에서 1년간 장학금을 받아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과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를 연구.
1933 코제브(Kojeve)의 헤겔 강의 시작(1939년까지). 프랑스에 헤겔 사상이 처음으로 도입된 계기.
1934 베를린에서 돌아와 다시 르 아브르 고등학교에 복귀. 『자아의 초월』(Transcendance de l'Ego) 집필.
1936 라옹(Laon)의 고등학교에서 철학 교사. 『상상력』 출간.
1937 파리의 파스퇴르(Pasteur) 고교로 전근(1939년까지 근무). 『자아의 초월』 출간. 라캉(Lacan), 자아의 기능을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거울 단계 이론 발표.
1938 『구토』(La Naus e) 출간.
1939 『감정 이론 초고』(Esquisse d'une th orie des motions)와 단편집 『벽』(Le Mur)출간. 『지향성, 후설 철학의 한 기본 개념』 집필. 군에 소집됨.
1940 독일군에 포로로 잡힘(6월). 『상상적인 것』(L'Imaginaire : Psychologie Phnom no-logique de l'imagination) 출간.
1941 프랑스로 돌아와 파스퇴르 고등학교에 복귀.
1942 파리의 콩도르세(Condorcet) 고교로 전근(1944년까지 근무). 레지스탕스 운동. 메를로-퐁티(Merleau-Ponty), 『행동의 구조』(Structure de comportement) 출간. 카뮈 (Camus), 『시지포스의 신화』(Mythe de Sisyphe), 『이방인』(L'Etranger) 출간.
1943 『존재와 무』(L'Etre et le N ant, Essai d'ontologie ph nom nologique), 희곡 『파리떼』(Les Mouches) 출간.
1944 희곡 『출구 없는 방』(Huis clos) 초연.
1945 고교 교사직을 떠나 생-제르멩-데-프레(Saint-Germain-des-Pr s)가의 카페를 전전하며 집필 활동에 전념. 이때부터 실존주의의 대중적 인기 폭발.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 est un humanisme)이라는 제목으로 강연. 비공산주의 계열의 좌익 정당을 창당하려 했으나 실패. 미국에서의 순회 강연 시작(1946년까지). 연작소설 『자유의 길』(Les Chemin de la libert ) 제1권 『철들 나이』(L'Age de raison), 제2권 『유예』(Le Sursis) 출간.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Phnomnologie de laconception) 출간.
1946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유태인 문제 고찰』(R flexions sur la question juive), 희곡 『더러운 손』(Les Mains sales), 『무덤 없는 주검』(Morts sans pulture)출간.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 공동 발기인으로 창간.
1947 『출구 없는 방』, 『일은 벌어졌다』(Les Jeux sont faits), 『존경할만한 창녀』(La Putain respectueuse), 『상황 1』(Situations, 1), 『보들레르)(Baudelaire) 출간.
1948 『문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litt rature?)를 『상황 2』로 출간. 희곡 『더러운 손』(Les Mains sales) 출간. 사후에 출판될 『진실과 실존』(Verit et existence) 집필.
1949 『자유의 길』 제3권 『비탄에 빠져』(La Mort dans l' me), 『상황 3』 출간. 시몬느 드 보봐르, 『제2의 성』(La Deuxi me sexe) 출간.
1951 희곡 『악마와 선신』(Le Diable et le bon Dieu) 출간.
1952 카뮈와 논쟁. 『생-주네, 희극배우 혹은 순교자』(Saint-Genet Com dien et Martyr) 출간. 메를로-퐁티, 현대지의 공동 편집인 사임.
1953 『앙리 마르텡 사건』(L'Affaire Henri Martin). 라캉, 소르본느에서 세미나 강의 시작.
1954 러시아와 중국 여행.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의 『킨』(Kean) 각색.
1955 시몬느 드 보봐르, 『만다린』(Les Mandarins) 출간. 메를로-퐁티, 『변증법의 모험』(Les Aventures de la dialectique) 출간. 이 책에서 메를로-퐁티는 사르트르의 정치 철학을 신랄하게 비판.
1956 희곡 『네크라소프』(Nekrassov)
1957 『1957년의 실존주의의 현 상황』(나중에 폴란드 잡지에 『방법의 문제』로 실리게 될 논문.
1958 『프로이트의 일생』에 대한 영화 대본 작업.
1960 『변증법적 이성 비판 제1권』(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을 『방법의 문제』 (Question de la methode)를 서문으로 하여 출간. 『방법의 문제』는 현대지에 『실존주의와 마르크시즘』(Existentialisme et Marxisme)이라는 제목으로 실린바 있음. 희곡 『알토나의 유폐 자들』(Les S questr s d'Altona) 출간. 쿠바 방문.
1961 메를로-퐁티 사망.
1962 『스탈린의 유령』 집필.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 『야만의 사고』(La Pense sauvage) 출간. 존 휴스턴의 영화 『프로이트』 출시.
1964 노벨 문학상 거부. 『말들』(Les Mots) 출간. 레잉(R. D. Laing)과 쿠퍼(David Cooper), 『이성과 폭력 : 사르트르의 철학 10년, 1950-1960』 출간.
1965 유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자들』(Les Troyennes) 각색.
1966 『상황, 7』 출간. 라캉, 『에크리』(Ecrits) 출간.
1971 『집안의 백치』(L'Idiot de la famille) 1,2권 출간.
1972 『상황, 8』, 『상황 9』 출간. 『집안의 백치』 3권 출간.
1976 『상황 10』 출간. 영화 『사르트르 자신에 의한 사르트르』 출시.
1980 4월 15일 파리에서 영면. 향년 75세.
1983 『윤리학을 위한 메모장』(1947-48년에 씌어진 것) 출간.
1985 『변증법적 이성 비판』 제2권 출간.
1989 『진실과 실존』(1948년에 씌어진 것)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