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역학: 엔트로피와 역엔트로피
- 까르노(Sadi Carnot, 1796-1832)와 클라우지우스(Clausius, 1822–1888)
물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서 벗어나는 것은 르네상스 시기부터 갈릴레이 이후 이다. 이 시기에 물질적인 힘(la force)이 물체 안에 내재해 있다고 보았다. 그 힘의 사용과 작용이 물체를 움직이게 한다. 힘이 일을 한다.
일의 양은 운동의 양과 더불어 측정하고 예측할 수 있다고 보았다. 힘은 운동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여겼고, 그 운동을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공간을 가정하고 있다. 그 공간에서 움직임의 양과 시간을 비례로 보아서, 공간 속에서 궤적을 시간으로 환산할 수 있다고 보았다. - 그러나 형이심학적으로 다루는 “운동”과 “시간”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즉 동태적 사유는 19세기 후반에서야 제대로 다룰 것이다.
힘의 이동과 열의 이동으로 설명하는 데는 보다 효과적인 개념으로 에너지 개념을 도입한다. 에너지는 동양철학에서 기(氣)와 같다. 힘, 일, 에너지, 열의 상황변화와 이동에 대해 물리학적 법칙을 찾고, 이를 수학적으로 설명한다. 이런 설명이 이론이란 측면에서 동양에서 리(理)에 가깝지만, 서양에서는 천문학과 물리학의 성립으로 법칙화의 이론(사실에 가깝지만 사실이 아니며,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이 측지학이 아니듯이)을 정립하였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리(理)를 기(氣)와 관계 또는 연관 속에서 다루면서, 자연론(물리학과 화학)보다 인성론과 도덕론에 적용 가능한 영역을 확장하였기에 법칙화보다 관계론을 중요시하였다. 이런 사유는 동양의 사유에서는 공동체론의 토대에서 벗어나는 사유를 가볍게 다루었다.
힘, 에너지, 열의 상호 변환을 다루는 것은 화학의 발달을 기다려야 했다. 물질을 원자들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을 때, 힘과 에너지가 실행한 일의 측정은 법칙화 가능했다. 이런 일이 열의 이동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 열은 언제나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이행임을 알아챘다. 이 이동의 평준화를 “엔트로피”라 부른다. 우주의 열의 평준화가 논리적 극한에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논리적 예측). 이 평준화의 절대적 평준도 추론할 수 있는데, 이런 평준화에서는 더 이상의 열의 이동이 없기에, 운동도, 일도, 열의 전도도 있을 수 없다. 그런 상태를 이론적으로 절대적 평준화라고 부르고자 했다(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의 절대공간을 인정하듯이).
우주적으로 열의 이동에서 열의 평준화가 일어난다면, 더 이상의 운동도, 일도, 열도 없는 상태를 가정할 수 있다. 이런 상태로 가는 길(흐름)을 엔트로피 증가라고 불렀다. 그 엔트로피 세상에서는 우주에서 모든 물질과 물체들이 고요한 평정의 세계일 것이다. 그런 세상을 물리-화학적으로 추론할 수 있으나, 실제로 우주가 그런 절대 평준화의 상태로 이르는 흐름으로만 진행할 것인가? 열역학이래로 우주에 대한 거시물리학과 미시물리학은 빅뱅과 흑체를 가정한다는 것은 에너지의 이동에 관해서 열평형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절대적 열평형은 추론들의 한 극한에서 있을 수 있는 개연성일 것이다.
열평형의 지성적 추론이 공간이란 측면에서 보면 절대적으로 매끈한 공간을 설정하는 것과 같다. 벩송의 해설에 따르면 바닷가 모래밭이 매우 매끈하다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그 모래밭에 손 바닥을 누르면 손바닥의 자국이 남을 것이다. 매끈한 모래밭은 열평형이라 비유하면, 손자국은 역엔트로피에 해당한다. 그러면 매끈한 평면은 질서이고 손자국은 무질서일까? 이런 생각은 지성의 이중적 사고, 즉 물체의 너비와 의식의 이완을 유비적으로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손자국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 평형 속에 새로운 자국 또는 물체의 흔적이, 기억이론 상으로는 추억에 지나지 않는다. 기억은 이런 자국을 내게 하는 기나긴 생명의 노력의 과정이다. 말하자면 손자국은 누군간(새명)이 질서 위에 무질서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한 흔적이며, 그 과정은 열평형에서도 화석과 같은 흔적인 손자국에서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손자국을 내는 생명활동이 무엇이며, 기원과 원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를 내성적 사유라고 한다. 추억의 흔적들을 모아서 무질서를 생산한 과정에서 질서에 대립되는 무질서를 설명하는 것은 기계론적이다. 이에 비해 손자국이 생명체에 따라 달리 생성되고 바닷물에 의해 지워지고 또 다시 다른 새들이 자국을 만들 수 있고 ... 등등, 자국들은 현실에서 생명체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생성되고 있다. 이 만들어지고 생성되는 생명체의 의식과 신체는 지금도 여전히 바닷가의 평평한 모래밭에 자국을 내고 있다. 물리학자의 예측은 그 자국(흔적)이 지워져서 평평함 모래사장이 남는다는 것이고, 이런 모래사상이 원리적으로 법칙적으로 있다고 예측한다는 점에서 목적론이다. 이에 비해 생명론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자국이 생겨나는 중이고 이 생겨나는 힘(충력)을 qpfrthd은 도약이라 부른다. 생명은 힘(도약)은 열역학 제2법칙의 엔트로피 법칙을 역행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명체는 역엔트로피(벩송의 표현으로 전도된 심리학)이라는 것이다.
생명이 지속하는 한, 역엔트로피는 성립한다. 물리학자와 천문학자는 그래도 예측적으로 엔트로피의 필연성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필연성을 벗어날 수 있는 시기가 언제인가 물으면, 절대온도에 이르는 시기, 아마도 태양이 식은 45억년 이후라고 예측한다. 이런 사고에는 현실이란 관점이 없고, 논리의 극한의 판단이 있고, 판단의 믿는 신념이 있고, 그 신념을 절대화하는 신앙이 있다. 벩송이 상식의 판단을 양식의 진리로 삼고 이 진리를 신앙으로 삼는 자들을 네오스콜라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실은 미래의 예측과 달리, 현존의 조합 또는 혼성(혼성)은 매우 복잡하다. 한 인간이 현실 지구에서 85억의 인구와 조합 도는 혼성의 관계와 연관을 일반화할 수 도 없고, 이를 법칙화하는 서구산업사회에 연관 없이 사는 이들도 많고, 게다가 일반화와 법칙화를 넘어서 관념화의 학문(판단과 논리)의 전개는 일부에 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75억 인구가 하루도 먹고 싸고 자고깨고 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철학 이전에 삶이 먼저다. 먹고 자고의 이야기의 일반화, 그리고 실사화 그리고 현실화의 길로 사유하는 것을 생각할 때이다. 75억의 인간에 가난과 고통은 빅뱅과 흑체의 미래 예측보다 더욱 절실하고 급박한 현실의 문제인데도 이에 눈을 감고 있는 자본 제국 철학이 아닌가?
소란 소요 반란 폭동이란 용어를 쓰는 이들이 이미 제국의 철학에 포획된 것이다. 지구 상에서 생명은 역엔트로피를 실행하고 있고, 인민은 저항, 봉기, 항쟁, 혁명의 알면서도 모르고도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자신들이 먹고 자고 하는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삶은, 생명은 저항과 분출을 덕목을 실행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현실에서 확장이 혁명이 아니겠는가. (56QK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