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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상림숲 ♣ 학정 이재익 시인의 발길은 역사와 의미를 추구한다. 1. 5월초에는 이팝나무가 흐드러진다. 2. 이팝나무꽃 3. 4. 5. 너는 내 모습. 6. 물에 비친 이팝나무꽃 7. 꽃창포 8. 노랑꽃창포, 7월경에는 여기 연꽃이 한창이다. 9. 10. 마당바위. 11.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 신도비는 무덤가까이 세우는 것이다. 최치원의 묘는 없는데 왠 신도비인가? 최치원은 해인사에서 만년을 보냈고. 타계한 시기는 알 수없다. 가야산에서 신선이 되셨다고 막연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공들여 다스리던 함양땅 어딘들 혼이 서리지 않으랴. 그러므로 이 상림은 최선생의 묘원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래서 신도비다. 12. 최치원의 호는 고운이다.사운정? '고운 선생을 사모하는 정자' 이런 뜻이다. 13. 안동 김씨 화수정, 문중시설 14. 그네가 있는 공원 15. 함화루 16. <망악루>(지금은 함화루로 개명) / 김종직 작년 내 발자취가 저 맷부리를 더럽혔거니 망악루 올라서 다시보니 무안하구나. 산신령도 내가 다시 더럽힐까 두려워하여 흰구름시켜 곧 문을 굳게 닫는구나. * 항양군수로 와서 선정을 베푼 김종직이 망악루에 올라 보니, 먼산에 구름이 덮이는 것을 보고 읊은 시. 17. 연리목 18. 연리목 19.고운광장 20. 고운광장 복돼지. 21.고운광장., 남원아면 온통 춘향이! 함양에 가면 온통 최고운! 22. 좌안동, 우함양 23. 상림의 역사인물공원, 송덕비를 죄다 여기에 모았네. 24. 지리산과 덕유산 산세의 기운을 머금은 고장 25. 역사인물공원기. ; 선현들의 얼과 기백을 이어받아, 선비정신을 배우고 익혀서 혜안을 열어 나라의 기둥이 되고 보람된 삶을 누리자! 26. 최치원 선생이 좌장座長이 되어 좌우 5명씩 10명, 그래서 함양과 관련된 훌륭한 관료, 선비 학자 모두 11분이 선정되었다. 27. 청소년들이 꼭 와봐야 할 코너이다. 28.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925?)
* 신라 최고의 문장가요 한문학의 비조鼻祖이며 동방 18현인 중의 1인이다. 경주 사량부에서 태어나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 관리로 종사하면서 황제의 자금어대를 하사받았고 <토황소격문>의 글을 써서 내란을 평정함으로써 공의 문장은 중국에서도 명성이 드높았다. * 28세에 귀국하였으나 문란한 국정에 통탄하며 외직을 자청하여 태인, 정읍, 서산을 거쳐 천령(함양) 태수로 부임하여 대관림(상림)을 조성하고 풍수해를 막아 이 고장 발전에 기여했고 덕으로써 풍속을 교화하고 치정을 쌓아 후세인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 저서로는 <계원필경>. <사육집>. <사산비명>. <고운집> 등이 있다.
▶ 동방(동국) 18현 ; * 신라 ; 설총, 최치원 / 고려 ; 안향, 정몽주 / * 조선 ;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성혼, 이이, 조헌,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 박세채 ▶ <토황소격문> 최치원이 당나라말 황소의 난 때 고변 장군 휘하 종사관으로서 ‘황소를 토벌하는 격문’을 써서 문명을 날렸다. ▶ 함양과 상림 옛 이름은? 천령, 대관림 29.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1357~1418)
* 고려 말의 학자요 중신으로서 두문동 72현 중의 1인이다. * 함양 덕곡(덕암) 사람으로 약관弱冠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는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錦魚袋를 하사받아 중국에서도 명성을 떨쳤다. * 성품이 강직하고 의로운 일에 앞장서기를 두려워하지 않아 이성계가 등극하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절개를 지켜 관복을 벗고 두문동에 은거했다가 고향으로 내려와서 교수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여 이 고장에 학풍을 일으켰다. * 공의 충직함에 태종은 침향궤寢香机를 하사했고 성종은 그의 사후에 충절을 기려 사제문賜祭文을 내렸으며 후인들이 그의 충의를 흠모하고 있다. * 유고로 <덕곡집>이 전한다. ▶ 자금어대紫錦魚袋 ; 문관의 공복公服에 패용하여 등위等威를 가리던 물고기모양의 장식물. 황궁에 드나들수 있는 신표. 30.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 조선 초 도학의 거유로 영남학파의 종조宗祖이다. 밀양에서 태어나 세조 5년 문과에 급제했고 함양군수 재임 시는 백성들의 다세茶稅를 감면, 관영차밭을 조성했으며 매년 짚으로 이던 함양성 나각羅閣을 기와로 바꿔 부역을 덜어주고 *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중시한 학교를 진흥 육성시켜서 학문의 꽃을 피워 정여창, 김굉필 같은 도학의 거유와 유호인, 표연말, 조위, 김일손, 남효원 등 문장의 명사를 많이 배출했고 중론을 조화시키고 풍속을 바로잡아 교화에 힘썼다. * 흥학·육재·안민·화중(興學·育才·安民·和衆)을 치정治政의 제일로 삼고 백성을 편케 했으니 군민 그의 청덕과 선정을 앙모仰慕하여 생사당生祠堂을 세웠다. * 저서로 <점필재집>, <청구풍아>, <당후일기> 등이 있다. ▶ 생사당生祠堂 ; 지장관의 공적을 고맙게 여겨, 백성들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받들어 모시는 사당.
31. 일로당(逸老堂) 양관(梁灌, 1437~1507)
* 조선초기의 학자이며 청백리로 이름을 떨쳤다. 함양 모감(효리) 출생으로 세조 3년 사마시 동 6년 무과에 급제하여 봉직할 때 정성을 다하고 근면하며 몸가짐이 맑고 삼갔다. * 덕천군수로 재직할 때 양민흥학養民興學에 힘쓰고 준법정신이 강했으며 청렴하고 검약하여 백성들이 칭송을 받았다. * 임기후 귀로의 행장을 검색하니 두보시집, 거문고와 삼베이불 한 채뿐이었다. 임금께 보고되어 청백리안淸白吏案에 기록되고 임금이 화공을 시켜 공의 행색을 그려 어전 벽에 걸어놓고 관리들이 외직으로 부임할 때마다 그림을 가리키며 공을 본받으라 하였다. * 부패한 시대일수록 공의 옥 같은 청렴은 더욱 빛나고 만인의 존경을 받는다. ▶ 군수 퇴직 후 집에 가지고 간 양관의 소지품은? 32. 뇌계(㵢溪) 유호인(兪好仁, 1445~1494)
* 조선 초 학문에 통달한 충효의 표본이며 3대문장가 중의 1인이다. 함양 형곡(가성)에서 태어나 뇌계천(위천) 위 대덕에서 살았으며 성종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 공은 점필재를 스승으로 섬기고 점필재는 공을 벗으로 대접했으며 학문과 문장 진충효양盡忠孝養으로 인해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 어버이 봉양을 위해 주로 외직을 택했으며 가세가 청빈하여 사후에 하사한 부의賻儀로 장례식을 치뤘고 후임 군수(합천) 어득강이 유고를 출간해주고 묘비를 세워주었다. * 충효청검忠孝淸儉하고 침중간엄沈重簡嚴하며 시문이 고고하고 필력이 힘이 있어 당대의 삼절三絶이라 했기에 후인들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흠모하고 있다. * 저서로 뇌계집이 있다. ▶ 삼절三絶 ; 詩書畵에 다 능한 자. 33.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
* 조선초기의 문신 성리학의 대가로 경사經史에 통달한 조선5현의 1인이다. 함양 개평에서 태어나 성종 21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 3년간 지리산에서 5경과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체용體用의 학을 궁명窮命하여 경명수행經明修行한 실천철학자로서, 독서를 주로 하였다. * 김굉필과 더불어 한국유학의 논리적 핵심부분인 이기론의 꽃봉오리를 맺게 하였다. 안음현감 재직 시는 문교 산업 부역 조세 형제刑制 등을 개혁하여 주민들의 복지치화福祉治化에 주력하였고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추구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공의 학문과 역행실천 도학사상이 만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 저술은 무오사화로 인해 소실되었고, 현재 <일두문집> 이 남아있다. ▶ 체용體用의 학 ; 사물의 본체와 활용 및 응용에 중점을 둠. ▶ <조선 5현> ; 한훤당 김굉필, 일두 정여창,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34. 옥계(玉溪) 노진(盧禛, 1518~1578)
* 조선중기 영남유림의 거유이며 청백리로서 효행과 덕행이 남달라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다. 함양 개평에서 태어나 명종원년 문과에 급제하고 * 지례현감 재직 시는 아전들의 비행과 불법을 밝혀 선정을 베풀어 높은 치성治聲으로 칭송을 받았고 가는 곳마다 송덕비 유애비遺愛碑를 세워 공의 선정과 청덕을 길이 흠모하였다. * 효제孝悌(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동기에 대한 우애)가 생활철학이며 근검절약으로 소박하고 사치와 허영을 몰랐다. 대사간 대사헌 이조판서 등 중책에 임명되었으나 수차 상소하여 사양하였다. * 경敬을 수양의 요체로 삼아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치중하고 당파의 기미가 보이자 조정변調停辨을 제론提論하고 왕도정치王道政治에 노력했다. * 저서로 <옥계문집>이 있다. ▶ 송덕비 유애비遺愛碑 ; 송덕의 뜻을 가지는 비. 유애비·기공비(紀功碑)·순절비(殉節碑)·충렬비(忠烈碑)·관개비(灌漑碑)·정충단비(旌忠壇碑)·대첩비(大捷碑)·순교비(殉敎碑)·전승기적비(戰勝紀蹟碑) 등을 들 수 있다.
35. 개암(介庵) 강익(姜翼, 1523~1567)
* 조선 중기 성리학에 밝고 향토를 빛낸 학자이다. 함양모간(우명리) 사람으로 명종 4년 진사시에 합격 대과나 벼슬에는 뜻이 없고 학문과 시문을 벗 삼으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 천품이 맑고 밝으며 기국器局이 크고 침착과묵하며 학행이 독실정밀하고 실천을 중시했다. * 일두선생의 한을 풀기 위해 유생 30여명을 설득하여 일두 선생 숭모사업을 착수하였다. 1552년 사림士林에서 뜻을 모으고 군수의 지원을 받아 남계서원 건립을 시작했으나 어려운 여건과 재정부족으로 공기가 연장되어 3명의 군수를 거치면서 어려움을 극복, 10년 만에 완공하여 선비고장의 긍지를 높이고 학풍을 잇게하여 군민의 존경을 받고 있다. * 저서에 <개암집>이 있다. ▶ 남계서원을 세운 이는 누구인가? 36.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 * 18세기 말 문장가요 북학파 실학자의 중심인물로 개혁사상가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과거나 벼슬보다 경제문제와 서양의 과학에 심취했다. * 청나라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써서 사대부의 허례허식과 고루한 사상을 지적하고 선진문물과 기술을 과감히 수용할 것을 주장하여 경세제민과 이용후생의 뜻을 펼치고자 하여 민족사의 창조적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 안의현감 재직 시는 몸소 체득한 지식과 이상을 실현, 물레방아 등 생산기구를 제작하여 사용케 하며 제방을 쌓고 기민飢民을 구휼救恤하여 바른 치정을 실천하였고 저작활동을 통해 이 고장을 빛내어 만인의 존경을 받는다. * 저서 ; <연암집>과 <과농소초>, <양반전>, <열녀함양박씨전> 등 다수가 있다. ▶ 물레방아 ; 함양에는 물레방아가 많다. 예전에 없었던 것을 박지원이 청을 견문하고 받아들여 함양군수 재직시 보급시켰다. 37. 진암(眞庵) 이병헌(李炳憲, 1870~1940)
* 민족 수난기의 대학자요 유교개혁운동가로 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함양병곡에서 태어나 20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유학자다. *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복원된 유교에 포용해서 시운과 민족의 여망에 부응하는 참신한 유교 교리로 체계화하고 중국의 실천적 개혁사상인 변법자강설變法自疆說의 영향을 받아 실천적 유교로 정립하였다. * 강유위, 이승희, 박은식, 김태영, 김구 등과 교유하며 국민정신 계발과 의식개혁을 통한 국권회복과 부국강병을 주창하고 공자교의 윤리도덕문화를 꽃피우고자 노력해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 저서로 <유교복원론> 등 50여권이 있다. ▶ 변법자강설變法自疆說 ; 부분적인 서양식 개혁운동인 양무운동보다는 차원이 높다. 1898년 청나라 말기에 근본적인 근대화 개혁운동 정신. 38. 의재(義齋) 문태서(文泰瑞, 1880~1912)
* 함양 서상 태생. 구한말 호남의병대장.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追敍한 애국투사이다. * 을사늑약(1905)이 체결되자. 1906년 창의하여 덕유산을 중심으로 경남 전북 충북 경북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왜군과 투쟁했다. 특히 장수수비대습격, 고창곡전투, 남덕유산유인작전 7읍연합수비대교전, 이원역폭파 등이 유명하며 수십 차례의 격전에서 왜군 수백명을 사살하고 400여점의 무기를 노획하여 왜군들도 덕유산 호랑이라 불렀다. * 굽힐 줄 모르는 의기와 희생정신은 애국애족과 조국근대화의 싹을 틔웠고 해외독립투쟁에도 영향을 주어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 6년간의 항일투쟁 끝에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였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서상에 의재사義齋祠가 있다.
▶ 을사늑약(1905) ; 1905년 을사보호조약, 외교권 박탈. 통감부설치 등 일제의 국권침탈 조약. 늑약은 강제 맺었음을 뜻한다. 39. 의병장 권석도 權錫燾
* 안동 권씨, 1879년 합천 대병쌍암 출생. * 병자수호조약(1876) 체결 후 일제침략의 마수에 저항, 고광순 의병장 휘하 지리산 일대 활약, 고장군 전사 후 의병 규합 지휘, 하동 주둔 일군 습격 40여 명을 죽임. 섬진강 유인 작전으로 적을 섬멸함. * 1908년 진주감옥 폭파 모의중 화약을 구입하다 정보가 누설되어 체포됨. “나라를 도적질한 왜놈의 재판을 받을 수없다” 당당히 맞섬. 종신형 선고 받고 복역 중 서울서대문형무소 복역 중 만신창이가 돼서 가출옥, 부인 노씨의 극진한 간호로 회복되어 갈 무렵, 총독부 검거령, 다시 전주감옥으로 재투옥 됨. 부인 노씨 먼저 타계. 고문과 신병 악화로 가출옥. * 삼일운동 후 요시찰인으로 친지까지 감시당하자, 포항으로 이주. 외아들 영수를 남겨두고 광복 5개월 전 67세로 서거함. 1986년 건국공로훈장 추서함. ▶ 합천인 인데, 왜 함양에 동상이 있는가? ; 8세 부터 함양 죽장에서 수학했다.
40. 의병장 권석도 41. 의병장 권석도 42. 열녀 학생 임술증 처 유인 밀양 박씨 지려之閭
아전 임술증의 아내 밀양 박씨의 열烈을 기려 세운 정려비旌閭碑이다. * 밀양박씨는 안의 사람으로 19세에 병든 신랑 임술증과의 혼인 약속을 지켜 결혼하였으나, 남편이 사망하자 3년상을 치른 다음 같은 날 같은 시에 자결한 열녀로서 * 1793년(정조17년) 안의 현감으로 있던 연암 박지원이 쓴 유명한 <열녀 함양 박씨전>의 실제 인물이다. * 밀양 박씨의 열은 당시 인근 고을까지 두루 알려져 함양 군수 윤광석, 산청현감 이면제, 거창의 신도향, 사인 이학전, 벽송사 승려 응윤 등도 각각 기록을 남긴 바 있다. * 비문은 일두 정여창의 7대손인 청하 현감 정덕제가 짓고 썼다. 1797년(정조 21년)에 처음 세웠고, 2009년 2월 19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 열녀 함양 박씨전 ; 박지원의 소설. 일찍 과부가 된 한 여인이 깊은 고독과 슬픔을 달래기 위하여 동전銅錢을 굴리면서 아들 형제를 입신시킨 이야기를 삽화로 넣어 수절의 어려움을 밝히있다. 과부의 개가를 금지시킨 사회제도에 비판적이다.
43. 열녀 학생 임술증 처 유인 밀양 박씨 지려之閭 44. 열녀 학생 임술증 처 유인 밀양 박씨 지려之閭 45. 열녀 학생 임술증 처 유인 밀양 박씨 지려之閭 46. 열녀 학생 임술증 처 유인 밀양 박씨 지려之閭 47. 함양 사근沙斤 산성 수동면 원평리 연화산에 <사근산성> 유적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 분쟁지역이었다. 산성 아래에 조선시대 경상도 지방 14개 역을 총괄하던 사근역이 있었다. 48.. 남계서원 모형도. 상림 주장장 영역에 함양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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