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교회사의 암흑기
대한 예수교 장로회(순장)의 교단 형성은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개최된 제 27회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초석이 놓여졌다.
1938년 2월 미나미 총독이 교회에 대한 시정방침을 신사참배로 결정하고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강한 평북노회에 압력을 가하자
1938년 2월 9일 동 평북 노회가 신사 참배 결의를 채택하였으며 같은해 9월 총회
이전까지 전국 23개 노회중 17개 노회가 같은 이유로 평북노회의 전철을 밟았다.
그 후 평북, 함남, 전남, 경주, 만주, 평남
에서 불참배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이기선 목사는 평북에서, 이계실 목사는 함남 에서, 주기철 목사는 평남에서, 한상동 목사는 경남에서,
손양원 목사는 전남 등 지에서 조직적인 불참배 운동의 주도자가 되었고 그 외에도 최봉석, 주남선, 이인재 목사와 박관준 장로가 가세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혼돈기 속에서 1938년 9월 제 27회 총회가 박두하 였고, 일제의 예배검속으로 주기철, 이기선, 김익두 같은
적극적 불참배 운동자들이 구금되었으며, 평양 경찰서는 총회 개최 전날 평양, 평서, 안주, 3노회대표를 불러들여 신사 참배 통과 각본을
시달하였다.
평양노회장 박응률은 신사참배 제안을, 평서노회장 박임현은 동의를, 안주노회 총대 길인섭은 재청할 것을 강요하여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선교사들에게는 총회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도록 부탁하는 싸인을 요구하였으나 선교사들은 단연코 거절하였다. 일제의 삼엄한 경비 가운데
총회는 개회되었고 임원 선거에서 총회장에 홍택기, 부회장에 김길창, 서기 곽진근, 부서기 조택수, 회록서기 권택희, 회록부서기 전재호, 회계
고한규, 부회계 이춘섭을 뽑은 후 총회 제 2일 평남 지사와 경찰서장의 참석하에 회의가 속개되었다.
총회 공천 부장 함태영 목사가
'평양, 평서, 안주노회의 연합 대표 박응률 목사가 제출한 신사 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표의 제안건을 채용하기로 할 것'이라고 보고하자 총회장
홍택기 목사는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 않은 체 각본대로 선포하고야 말았다. 일제의 무자비하고 비열한 정책 앞에 치마를 벗고 신앙의
정조를 스스로 내어 주는 수치의 순간이었다.
'아등(我等)은 신사(神社)는 종교(宗敎)가 아니고 기독교 교리(基督敎 敎理)에
위반(違反)하지 않는 본의(本意)를 이해하고 신사 참배(神社 參拜)가 애국적 국가 의식(愛國的 國家意式)임을 자각(自覺)하며 이(以)에 신사
참배를 솔선시행 (率先施行)하고 추이 국민정신 총동원(追而 國民精神 總動員)에 참가(參加)하여 비상시국하(非常時局下)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로 기(期)함.'이라는 결의문을 채택한 후, 심의현 목사가 '신사 참배 즉시 실행의 특청'을
하자 이를 받아들여?부회장 김길창 목사의 인솔하에 신궁을 제 발로 찾아가 신사 참배하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2. 순장
교단의 태동
이같은 총회의 결의와 신사 참배 행위에 일부 총회원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한숨만 내리쉬었고, 함남노회에 소속하여
있던 함남 함주군 덕천교회, 동덕천교회, 기곡교회, 상수리교회, 장흥교회 등 5개 교회는 이계실 목사를 중심으로 이같은 총회의 결의가 신경과
성경을 범한 용납 할 수 없는 처사라고 선언하고 함남노회를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각계 각층 인사들이
친일 행위를 솔선하였으나 교계 일각에서는 여전히 불참배 운동이 간헐적으로 일어났으며 이계실 목사를 중심으로 뭉친 5개 교회는 일제 신사 참배 및
동방요배를 배척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일제의 압박으로 인한 환난 중에서도 성도의 신앙을 지켜 나가는 신앙의 투쟁을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이러한 시대적 상황 가운데 조선 예수교 장로회라는 명칭도 1943년 5월 5일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
교단으로 개칭되었고 불참배 운동자들을 색출하는 탄압이 계속되면서 함남노회를 탈퇴한 홍종현, 위병연, 신의균, 홍종선, 안승주, 한윤몽, 한치상,
한사? 신균필, 한복현, 이창수 등은 함흥 경찰서 고등계에 검속되어 반일 사상 지도자라는 명목 아래 무수한 능욕과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역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은 일제의 단발 마적 발악에도 불구하고 삼천리 반도 강산에 해방을 주었다. 한국 교회는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 문서가 읽혀질 때 깨어진 종을 두들기며 울었고, 탄압으로 상처받은 가슴에 흥건히 괴어오는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닦을 겨를이 없었다.
해방과 더불어 이계실 목사를 중심한 덕천교회 등 5개 교회는 무소속으로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해방도 잠깐의 기쁨에 불과했다. 강대국의
개입으로 3.8선이 그려지고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김일성 괴뢰도당들의 만행의 손길이 뻗쳐 왔고 공산당의 박해에 북한 교회들은 또 다시 일제의
박해를 방불하는 상처를 입어야 했다.
3. 이남 정착기-연합 교회 시대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남침으로
비극의 6.25전쟁이 발발되면서 한반도는 초토화되었다. 그러나 6.25전쟁은 함남노회를 탈퇴한 5개 교회와 이계실 목사를 월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4 후퇴시 흥남 부두에서 유엔군 구원선을 탄 6000명의 피난민들 가운데 이계실 목사와 덕천교회 등 5개 교회 수백 명의 성도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들이 거제도에서 연합 교회 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 때 일제의 강압 앞에 신사 참배를 받아들인 총회와 구분하기 위하여 공식
명칭을 대한 예수교 순장로회로 칭하였다.
1951년 12월 27일 경남 거제군 연제면 연사리에 25평 규모의 덕천 연합 교회를
세운 이계실 목사와 5개 교회 성도들은 1952년 초부터 성경 구락부를 세워 어린이 교육을 시작하였고, 1953년 3월에는 교역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학교를 세웠다.
이즈음 이북에서 피난 나온 재건교회 성도들이 부산에 정착하여 교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재건교회는 일제 치하 평양에서 총회가 신사 참배 가결 이후 그로 인해 옥고를 치른 김린희 부흥사, 박신근 집사, 김득필 권사와 이병희 권사
등으로 구성되었고, 6.25를 계기로 그 당시 월남하였던 전봉성 장로, 홍득표 장로, 이형록 장로 등으로 연맥을 이어온 교회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재건교회는 신사 참배를 가결한 총회 및 목사들과는 매매 거부, 친교 거부 등의 강경한 자세를 취하며 비판하는 입장을 보였다.
이들은 피난 나와서 부산 영주동 교회, 범일동 교회, 청학동 교회 등 재건교회를 세워 활동하던 중에 거제도에서 덕천교회 및 성경
구락부와 신학교를 운영하면서 무소속으로 있던 이계실 목사를 찾아와 합류할 것을 청원하였다. 이에 이계실 목사는 재건교회의 청원을 받아드려
1953년 8월 9일 양측이 은혜스럽게 합의한 후에 노회 를 구성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대회제도를 제창하였다.
4. 대회 시대
대회 본부를 부산으로 정함에 따라 이헌무, 박보효, 한정오, 주순숙 등은 1954년 2월 23일 이주 위원회를 조직하고 부산에
도착하여 부산시 문현동에 교회 기지 및 성도들의 거주지를 매입하고 동년 3월 23일 거제도 덕천교회와 성도들이 완전 이주하게 되었다. 부산에
정착한 교회와 성도들은 1954년 3월 29일 교회 건축을 시작하여 32평의 목조 건물을 준공하였으며, 6월 9일에는 덕천 성경 구락부 가교사를
짓고 교사 3명, 학생 60명을 수용하면서 뿌리를 내려갔다. 또한 1954년 11월 20일 성경 학교 및 신학교를 개교하고 교역자 양성에 진보를
내딛었다.
6.25전쟁의 포화가 멎고 휴전협정이 맺어지자, 대회는 1955년 3월 임원을 선발하여 서울로 보내 정착지를 물색케
하여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동 107번지 소재 2000여평의 대지를 매입하고 동년 10월 16일 완전 이주를 하게 되었다. 1955년 12월
10일 합류하였었던 재건교회는 성산 교회, 공주 교회, 대선 교회, 한천 교회, 숭덕 교회, 영암 교회 등 6개 교회를 제외하고 나머지 일부
교회는 본래의 재건교회로 환원되었다.
한편, 교역자 양성 기관인 신학교는 1962년 2월 21일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고
이헌무, 주순숙, 박제일, 정준경, 진상훈, 김성하, 이경자 등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64년 4월 12일 대회 육영사업으로 서울시
교육 위원회로부터 인가를 받아 덕천 고등 공민학교를 세웠다. 1939년부터 1950년 12월까지 이북 5개 교회 시대라면 월남 후 1951년부터
1953년까지 연합 교회 시대이며, 재건교회와 합류한 뒤 1954년부터 1968년까지는 대회 시대라 할 수 있겠다.
5.
노회-총회 시대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69년 2월 7일 대한 예수교 순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어 노회장에 이계실 목사, 서기에
주순숙 목사, 부서기에 유영교 목사, 회계에 신원회 장로가 선출되어 1979년 10월까지 독노회 시대?막을 열었다.
장로 교회
12신조를 대한 예수교 순장로회 독노회의 교리적 신조로 채택하고 웨스트민스터 신조 개요서와 성경대소요리 문답을 채용하여 대내외에 교단 출범을
선언하는 한편, 칼빈주의적 정통 보수 신앙을 지킬 것을 재 천명하였다.
1971년 4월 9일 노회장 이계실 목사가 소천하게 되자
서기 주순숙 목사가 노회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80여세의 일기로 소천한 이계실 목사는 1891년 9월 17일 출생하여 구학문을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할 꿈을 꾸었으나 나라가 일제의 손아귀에 넘어가 한일 합방이 되자 나라 잃은 설움에 상심하여 있던 중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경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 후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31년도에 동 신학교를 제 26회로 졸업하였다. 그 분의 신앙적 강직성은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순장교단 형성에 귀금석 역할을 하였다.
곧이어 총회가 형성되면서 교세가 전국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1980년도 9월 총회에서는,
한국 교계 내에 단일 장로교 총회 개념이 사라지고, 장로교의 여러 교단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음으로, 교리적 이라기보다 역사적 산실이라고
볼 수 있는 '순장로교'를 원래의 총회 이름으로 환원하여 공식 명칭을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하고 '순장측'이라 하여 일제의 신앙 말살 정책에
항거하였던 신앙적 역사성을 살리는 동시에, 현재와 또 장래에 다가오는 다른 여러 가지 형태의 비진리의 도전에 과감하게 맞서고자 하는 결의의
상징으로 남기기로 결정하였다.
그 이후로 후손들이 이 신앙적 전통을 이어받아 보수 정통 신앙을 고수하고 신앙의 순수성 회복을
추구하는 가운데, 현재 한국 전국에 신앙의 그루터기와 같이 본교단 산하 교회들이 정립하게 되었다.
6. 해외 교회
교세가 확장되면서 해외로 이민간 노회 산하 교인들이 생겨나게 되어 1977년 9월 4일에는 뉴욕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캐나다를 포함한 구미 수개의 교회가 개척되었고 86년 4월에는 아들레이드 교회가 개척되면서 시드니, 골드코스트, 뉴질랜드까지 교회가
개척되었다. 아시아에도 일본, 중국 등에 교회를 개척하였고, 특히 중국에는 유하성 교회를 중심으로 6개 교회를 개척 관할하고 있다. 나아가
러시아 모스크바 교회를 중심으로 유럽 선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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