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제285호, 영풍 단산면의 갈참나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불과 서른 두해를 살다간 서정시인 김소월의 시‘엄마야 누나야’이다. 넓은 강가에 한가로이 자리 잡고 있는 초가집 한 채가 금세 떠오른다. 앞뜰에는 가을날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아 금모래가 반짝이고, 뒤뜰에 는 갈잎이 바람에 굴러 노래를 만들어내는 풍경이 너무 정겹다. 뒷문 밖‘갈잎’은 참나무 잎, 특히 갈참나무 의 잎이라고 짐작해 본다.
비교적 낮은 지대에 자라는 넓은 잎을 가진 참나무 중에는 갈참나무가 가장 흔하고, 땅에 떨어지면서 이리저리 바람에 실려 잘 굴러다니기 때문이다. 소월의 시에는 이렇게 갈참 나무를 비롯하여 진달래, 오리나무, 시닥나무, 실버들 등 나무특징을 시로 녹여낸다. 그의 해박한 나무지식 이 바탕이 된다. |
갈참나무 천연기념물은 우리나라 전체 240여 종류 중에 단 1그루가 있다. 풍기에서 부석사 쪽으로 소수서 원을 지나쳐 잠시 달리면 단산읍이다. 우회전하여 영주로 내려가는 지방도 3km남짓한 거리의 마을이 병산 1리, 마을 앞의 약간 높은 언덕에 넓은 터를 차지하고 갈참나무 한 그루가 한가롭게 시골마을을 내려다보 고 있다.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사천개울을 앞에 두고, 뒤로는 병산(屛山)이란 마을이름처럼 야트 막한 야산이 병풍처럼 둘렀다. 마을은 언뜻 갈잎을 노래한 소월 시 속의 풍광을 연상케 한다. 나무는 키 14m, 지름 1m 정도이다. 가지 길이는 동서 16m, 남북 17m로서 수관은 밑변이 넓은 삼각형 모양 이다. 키나 굵기나 규모로 보아 이 정도 갈참나무야 다른 곳에서도 흔히 찾을 수 있다. 덩치로 본 것이 아니 라 마을을 다소곳이 굽어보면서 흔히 말하는 ‘삶의 애환’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해온 나무로서의 값어치 때 문에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랐다. 15도 정도 서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나무는 무엇보다 가지 뻗음이 예 술적이라 할 만큼 너무 아름답다. |
나무 마다 가지를 내미는 방법은 나름대로 규칙이 있다. 마주보기, 어긋나기, 돌려나기 등 몇 가지 법칙대 로 자란다. 그러나 이 갈참나무는 그야말로 자유분방함, 그 자체다. 이리저리 내민 가지는 혹처럼 이상 비 대부분을 갖기도 하여 울퉁불퉁 굵기도 멋대로 이다. 하늘로 향했던 가지가 다시 땅 쪽으로 내리 뻗기도 하 여 가지마다 방향이 다르다. 나무는 조선 세종 8년(1426) 이곳 출신 황전(黃纏) 선생이 선무랑 통례원의 봉례(奉禮)벼슬 할 때 심었다 고 알려져 있다. 3년 뒤인 세종 11년에는 아예 고향으로 내려와 첨모당(瞻慕堂)이란 자그마한 건물을 짓고 학문을 연마하면서 지방의 유생들을 가르쳤다. 이 건물은 정조 2년(1778)에 다시지어 경북 문화재자 료 제315호 지금도 병산리에 남아 있다. 첨모당과 함께 선생이 갈참나무를 심은 데는 깊은 뜻이 있었다고 짐작한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면, 유달리 세종 때 흉년이 많았고 구황식물로서 도토리의 중요성이 누 누이 강조되고 있다. 흉년의 고통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선비들이 즐겨 심는 회화나무나 소나무 대신 에 백성들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도토리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흉년을 대비하여 항상 도토리 모음을 게을 리 하지 않도록 일깨워주기 위한 상징나무로 생각 한 것 같다. |
나무 나이는 6백년, 나무의 크기로 보아서는 황전 선생이 심었다고 믿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원래 나무의 아들나무로 대를 이을 수도 있으니, 생물학적인 나이에 전설 나무들을 대입하면 나무가 갖은 민속학적인 뜻이 없어져 버린다. 오랫동안 마을을 상징하는 나무로 마을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왔다. 그래서 도토리를 따느라 돌을 던 져 줄기에 생기는 흉한 상처 하나 없다. 단오 날이면 남녀 별개로 그네를 매달아 마을의 화합을 다졌으며, 정월 보름에는 이 나무 아래에서 지금도 제사를 올리고 있다. 이를 소홀히 하면 동네의 젊은이 하나가 반드 시 참화를 입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탓에 더욱 정성을 드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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