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서양의 시인은 이렇게 쓴다 ; "나는 재앙을 원했고 모래와 피로 숨이 막혔다.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알뛰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그러나 누군들 제 삶이 재앙이기를 바라고, 모래와 피로 숨이 막히길 바랄까. 하지만 우리 생을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절단해보면 그 횡단면에 새겨진 무늬는 분명 불행이 우리 삶에 남긴 궤적일 것이다. 불행 때문에 생의 내부는 자주 울혈(鬱血)되지만, 불행은 뜻밖에도 새로운 생을 도발하는 힘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송암 정약전은 1758년 3월 1일, 경기도 광주 마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동생 다산 정약용에 의하면 그의 본디 성질이 자유로웠다고 한다. 정약용은 쓴다 ; "어려서부터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이었고 커서도 사나운 말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듯했지만, 서울에서 젊은 선비들과 교유하며 견문을 넓히고 뜻을 고상하게 하였다." 길들여지지 않은 말 같은 기질 탓이었을까. 정약전은 일찍이 학문에 뛰어난 성취를 이루지만 젊어서 과거를 볼 생각을 품지 않았다. 1790년 순조의 탄생을 기념해 열린 증광별시(增廣別試)에 응시해 벼슬길에 오른 뒤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아 병조좌랑(兵曹佐郞)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정약전은 천주교에 몸담고, 서양 학설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잦은 모함을 받다가 1978년에 낙향한다. 1801년 정조의 뒤를 이어 어린 순조가 임금이 되자 섭정을 하게 된 정순대비는 사교(邪敎)와 서교(西敎)를 근절하라는 금압령을 내린다. 이게 바로 신유박해 사건이다. 이때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는 귀양길에 오른다. 1807년 봄, 상황이 더욱 나빠져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흑산도 사리 마을로 거처를 옮긴다. 정약전은 신지도, 우이도, 흑산도를 떠돌며 유배생활을 하다가 1816년 여름에 59세의 나이로 우이도에서 유배의 고단한 생을 마친다.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불행을 내장한 삶을 한탄하며 허송세월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용후생과 실사구시의 정신을 떠받드는 과학 정신으로 바닷생물을 두루 관찰하고 탐문하며 그 생태를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바닷생물을 치병(治病), 이용(利用), 이재(理財)로 쓰려는 사람들에게 두루 이롭게 하려고 그 기록들을 책으로 묶는데 그게 바로 『현산어보(玆山魚譜)』이다. 이 책의 원본은 유실되고 필사본만 전해진다.
정약전은 고등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 "길이는 두 자 정도이다. 몸이 둥글고 비늘이 매우 잘다. 등은 푸르고 무늬가 있다. 고깃살은 달콤하고 신맛이 나며 탁(濁)하다. 국을 끓이거나 젓을 만들 수 있지만 회나 포로 먹을 수는 없다. 추자도 여러 섬에서는 음력 5월에 낚시에 걸리기 시작하여 7월에 자취를 감추며, 8 ∼ 9월에 다시 나타난다. 흑산 바다에서는 음력 6월에 낚시에 걸리기 시작하여 9월에 자취를 감춘다. 고등어는 낮 동안 매우 빠른 속도로 헤엄쳐 다니므로 잡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밝은 곳을 좋아하는 성질을 이용하여 횃불을 밝혀놓고 밤에 낚는다. 고등어는 맑은 물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물로 잡을 수가 없다. 섬사람들은 이 물고기가 1750년[건륭(乾隆) 경오(庚午)]에 많이 잡히기 시작했고, 1805년[가경(嘉慶) 을축(乙丑)]에 이르기까지 풍흉은 있어도 잡히는 않는 해는 없었는데, 1806년[병인(丙寅)] 이후에는 해마다 줄어들어 근래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말한다. 요즈음 영남 지방의 바다에서 새로이 이 물고기가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그 이치를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이 도돔발[도도음발]이라는 부르는 약간 작은 놈이 있다. 머리가 약간 쭈그러들었고 몸이 다소 높으며, 빛깔은 옅은 편이다."
이태원의 『현산어보를 찾아서』는 2백년 전 전라도 흑산도로 유배된 정약전이 쓴 『현산어보』와 깊은 교감을 나누며 현대 생물학으로 고증하고 그 발자취를 더듬어 되살려내려는 소장 생물학자의 노작(勞作)이다. 학계에서는 『현산어보』를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저서로 꼽는다. 기왕에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우해이어보(牛海異漁譜)』와 같은 해양생물학 저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양의 방대함과 관찰의 정확성에서 이들 책은 『현산어보』를 따르지 못한다. 그 동안 이 책은 ‘자산어보’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玆’자는 검을 ‘玄’자 두 개를 포개 쓴다. 검다는 뜻으로 읽을 때는 ‘현’으로 읽어야 옳고, 정약전 역시 흑산도의 ‘흑산(黑山)’의 어감이 어둡고 처량하여 매우 두려운 느낌을 주므로 현산이라 쓰곤 했다고 서문에 밝힌 바 있다. 여러 정황에 대한 고증을 통해 저자는 이제까지 알려진 이 책의 이름 '자산어보'를 버리고 대신에 '현산어보'라는 새이름으로 고쳐 쓰자고 감히 제안한다. 그래서 이 책은 『현산어보』라는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현산어보』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따른 한 조선 지식인이 저 아득한 변방에서 고적한 유배생활을 견디며 흑산도 근해의 2백 여종 해양생물의 명칭, 습성, 분포, 이용실태를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다. 정약전은 제 뜻을 펼쳐 보지도 못한 채 변방으로 내몰린 자의 억울함과 소외의 쓸쓸함을 지독한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되갚는다. 그 문면의 켜켜에서 찾을 수 있는 공들인 흔적의 역력함은 불행의 내파(內波)로부터 제 삶을 지켜내려는 한 꼿꼿한 지식인의 자존심과 의지의 흔적이기도 하다. 현직 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저자는 실학의 맥을 이은 정약전의 후학답게 실득(實得)과 즉물사실(卽物寫實)을 중히 여겨 숱한 현장 답사와 치밀한 고증을 마다하지 않는다. 『현산어보를 찾아서』를 통해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해양생물학과 접목해 빚어낸 이 고전(古典)은 새로운 몸을 얻었다. 다소 장황하기는 하지만, 예사롭지 않은 필력, 세밀화와 관련사진 등에서 우리는 이 책에 쏟은 저자의 공력의 깊이를 실감한다. 다섯 권 분량의 책 중에서 지금까지 세 권이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