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세를 맞이한 카이사르는 우선 그가 수립하고자 하는 새 질서의 표어로 '클레멘티아(관용)'을 내걸었다.
개선식 때 배포된 기념 은화의 한 쪽 면에는 '클레멘테아'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다.
카이사르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술라와는 다르다"고 공언했다.
반대파를 처단하기 위한 '살생부' 작성을 거부하고, 망명한 사람도 원하면 귀국을 허락하고, 그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고 폼페이우스파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한 안토니우스에게는 그 재산을 반환하도록 시켰다.
포로 로마노의 연단에 폼페이우스파 사람들의 목이 효수되는 일도 없었다.
귀국과 복직을 원한 사람 가운데 카이사르의 허락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하여 카이사르를 반역자로 규정한 전직 집정관 마르켈루스의 귀국도 허락했다.
카이사르가 원한 것은 적도 동지도 없이 일치단결하여 국가 로마의 재생을 위해 애쓰는 것이었다.
카이사르의 방식은 반대파를 배제하고 자기 편끼리만 개혁을 단행한 술라의 방식보다 훨씬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술라의 방식이 술라의 기질에 맞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카이사르의 기질에 맞는 방식이었다.
---로마인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