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본기에 이런 말이 있다. 소수림왕(小獸林王) 즉위 2년 임신(372)에 전진(前秦)의 왕 부견(부堅)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시켜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다. 또 4년 갑술(374)에는 아도(阿道)가 동진(東晋)으로부터 왔다. 이듬 해인 을해 2월에는 초문사(肖門寺)를 지어 순도를 그곳에 있게 하고, 또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어 아도를 그곳에 있게 했는데, 이것이 고구려 불법의 시초다.
삼국유사 3. 順道肇麗
백제 본기에 이런 말이 있다. 제15대 침류왕(枕流王)이 즉위한 갑신년(384)에 인도의 중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에서 오니, 그를 맞이하여 궁중에 두고 예로써 공경했다. 이듬해 을유에 새 서울 한산주(漢山州)에 절을 짓고 증 열명을 두었으니, 이것이 백제 불법의 시초다.
삼국유사 3 難陀闢濟
신라 본기 제4권에 이런 말이 있다. 제19대 눌지왕(訥祇王) 때에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일선군(一善郡)에 이르니, 고을 사람 모례(毛禮)는 자기의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고 그를 있게 했다. 이 때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시켜 의복과 향물(香物)을 보내왔는데, 신라의 임금과 신하는 그 향의 이름과 쓸 곳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향을 싸 가지고 널리 나라 안을 다니면서 묻게 했다. 묵호자가 이것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향이란 것입니다. 불에 태우면 향기가 매우 강렬합니다. 정성을 신성(神聖)에게 통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성은 삼보(三寶)만한 것이 없으니 만약 이것을 불에 태워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 때 왕녀가 병이 위급해서 묵호자를 불러다가 향을 피우고 소원을 말하니 왕녀의 병이 즉시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예물을 후히 주었는데, 잠시 후에 그의 간 곳을 알지 못했다.
또 제21대 비처왕(毗處王) 때 아도(我道)화상이란 이가 시종을 데리고 역시 모례의 집으로 왔는데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다. 몇해 동안 이 곳에 머물다가 아무런 병도 없이 죽었다. 그의 시종 세 사람은 남아 있으면서 경률(經律)을 가르치니, 가끔 믿는 사람이 있었다.
아도본비(我道本碑)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아도는 고구려 사람이요, 그의 어머니는 고도령(高道寧)이다. 정시(正始) 연간에 조위의 사람 아굴마(我굴摩)가 사신으로 고구려에 왔다가 고도령과 관계하고 돌아갔는데, 그로 인하여 아기를 가지게 되었다. 아도는 다섯 살에 어머니의 말에 따라 출가했다. 나이 열 여섯 살 때에 위나라에 가서 굴마를 뵙고 현창화상(玄彰和尙)의 강론을 듣고 배우고, 열 아홉 살 때에 돌아 와서 어머니를 뵈었다. 아도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신라에 가서 서울의 서쪽 마을에 살았는데, 그곳은 지금의 엄장사(嚴莊寺)이며, 그 때는 미추왕(未雛王) 즉위 계미(263)이었다. 아도가 대궐에 나아가서 불교 전하기를 청하니, 세상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것이라 하여 꺼리고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으므로, 속림(續林) 모록(毛祿)의 집으로 도망해 가서 숨어버렸다. 미추왕 3년에 성국(成國)공주가 병들었는데 무당과 의원이 치료해도 효험이 없었으므로 사방으로 칙명을 보내어 의원을 구하게 하였다. 법사는 급히 대궐로 들어가서 치료하니 그 병이 드디어 나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그의 소원을 물으니 법사는 대답했다. "제게는 아무런 청도 없사오나, 다만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세워 불교를 크게 일으켜서 국가의 복을 비는 일만을 바랄 뿐입니다." 왕은 이를 허락하고 공사에 착수하도록 명령했는데, 그 때 풍속이 질박 검소해서 초가집을 지어서 살면서 불법을 강연하니 간혹 천화(天花)가 땅에 내렸다. 절 이름을 흥륜사(興輪寺)라 했다. 모록의 누이동생은 이름이 사씨(史氏)인데 법사에게 귀의하여 여승이 되어 또한 삼천기(三川岐)에 절을 짓고 살았다. 그 절이름을 영흥사(永興寺)라 했다. 얼마후에 미추왕이 세상을 떠나니 나라 사람들이 법사를 해치려 했다. 법사는 모록의 집으로 돌아가서 스스로 무덤을 만들고 문을 닫고 세상을 떠났으므로, 마침내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불교도 또한 폐지되었다.
삼국유사 3, 阿道基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