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평왕릉(사적 제180호)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608
진평왕릉으로 가기 위해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무다리를 건넜다.
쥐똥나무꽃이 코를 아프게 할 정도로 향기가 진하게 난다.
꽃속에서 많은 벌들이 윙윙거리며 열심히 꿀을 빨고 있었다.
진평왕릉은 너른 터에 공원처럼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쉴 수 있는 의자도 마련되어 있다..
왕릉 주변으로 띄엄띄엄 줄지어 서있는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푸른잔디밭이 깔려있는 길을 따라가면 나무그늘이 기다리고 있다.
진평왕릉은 동쪽으로는 명활산(明活山), 서쪽으로는 낭산(狼山)을 대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넓은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보문사터(普門寺址)이다. 신라 경문왕 11년(871)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에는 당간지주를 비롯해 많은 유적과 흔적들이 남아있다.
진평왕릉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들판 너머로 야트막한 낭산이라는 산이 보인다 그곳에 진평왕의 딸인 선덕여왕의 릉이 자리하고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돌아가시자 백성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멋대로 구부러진 아름드리 나무 사이를 지나 왕릉으로 다가가 본다.
왕릉 가까이에 나무 밑둥이에 잎이 잔뜩 나서 신기해 했던 나무이다.
진평왕릉은 보문동의 평야 가운데에 별다른 시설없이 봉분만 덩그러니 놓여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경주에 있는 155개 고분 중에서 위용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담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고분은 진평왕릉뿐이다" 라고 강조하였으며, 찬란한 신라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곳"이라고 소개하는 이유를 왕릉에 가까이 다가서니 조금은 알것도 같았다.
이 능은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7.6m, 지름 38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무덤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는 몇개만 드러나 있다. 삼국시대 말기와 통일신라초기의 양식으로 보고 있다.
진평왕은 591년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고, 593년에 명활산성(明活山城)을 개축하는 등 경주방위를 중요시하였다. 54년간 왕으로 있는 동안 여러차례에 걸친 고구려. 백제와 싸움이 빈번했으며, 중국의 수(隋)나라. 진(陳)나라. 당(唐)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진평왕릉은 구황동 3층 석탑의 동쪽에 있는데 왕릉 주변에 시야를 가리는 지물이 없어 능이 커보이기는 하지만 재위기간이나 명성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왕릉이다.
한문으로 새겨진 마모되어 오래된 묘표석
그 옆에 새로 세워진 듯한 묘표석에는 사적 180호 신라 진평왕릉이라는 글이 한글로 새겨져 있다.
진평왕의 본명은 김백정(金伯淨:白淨), 진흥왕(眞興王)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갈문왕(葛文王) 김현종(金玄宗)의 딸 만호부인(萬呼夫人), 왕비는 마야(摩耶)이다.
신라시대 왕들 중 최장수 기간인 54년간 왕으로 있었으며 대내적으로 위화부(位和府). 선부서(船府署). 예부(禮部) 등의 관청을 신설하고 내정의 충실을 도모하였을뿐만 아니라 또한 지명(智明). 원광(圓光) 담육(曇育) 등 명승이 수(隋). 진(陳) 등에 왕래하였고, 불교를 진흥시키고 왕실을 튼튼히 하는데도 힘썼다.
진평왕릉은 사색하며 걷기에도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왕릉 주위를 빙 둘러 배수로가 쳐져 있다.
날씨가 더워서 시원한 물을 찾아 발을 담그고 한참을 서 있었더니 더위가 싹 가셨다.
진평왕릉 숲에서 더위를 식히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농사를 지을 때 이물을 끌어다 쓰는 듯 하다.
설총묘를 찾아 가는 길에 재실같은 기와집도 바라다 보이고
아름다운 산과 보문선원의 절마당도 들여다 보인다.
진평왕릉의 동쪽 보문리에 있다는 원효와 요석궁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신라 경문왕 때의 대학자이며 신라 10현 중 한분인 설총(薛聰)의 묘 (경상북도기념물 제130호)를 찾아 해메다가 못찾고 말았다. 설총은 1022년(현종 13) 홍유후(弘儒候)에 추봉,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으며,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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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 Bird Of Paradise 원문보기 글쓴이: 극락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