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장구
김회직
헐어서 못쓰게 된 장구 하나가 손에 들어왔다.
몸통인 울림통은 군데군데 깨지고 구멍이 나있는데다 허옇게 썩어들기까지 해서 곰팡내가 났다. 궁편과 열편에 붙어있던 가죽은 너덜너덜 찢어져 떨어져나갔고, 조임줄이나 조이개는 삭아 없어졌는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모양을 제대로 갖춘 것이라고는 거무스름하게 녹이 슨 무쇠테두리 두 개뿐이었다.
“더덩더덩 덩더더더 덩더쿵, 지잉 징, 쾌앵 쾡, 꽹그르꽤갱 …”
“더덩더덩 덩더쿵 지잉징 덩더쿵 쾌앵 쾡 꽤갱 꽤갱 꽹그르꽤갱 덩더더더 지잉징…”
기우제 올리는 날 풍년을 비는 풍물소리, 동네두레꾼이 마을 한 가운데에 있는 수양버드나무를 싸고 돌면서 한바탕 신명나게 쳐대는 풍장소리였다. 그 소리는 바람에 실려 들녘을 지나고 냇물을 거슬러 올라 언덕너머 다른 동네까지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가까이 들으면 엉덩이가 들썩거리게 흥이 났지만 멀리서 들으면 영락없이 슬프디 슬픈 울음소리였다. 어렸을 적, 학교 끝나고 개울가 징검다리를 건너 집으로 돌아올 때 듣던 풍장소리는 왜 그렇게 슬프게만 들렸는지 모르겠다.
어른들마다 햇볕에 그을려 까무잡잡해진 종아리는 굵은 힘줄이 울룩불룩 했고, 고무신이 헐거워 지푸라기로 꽉 붙들어 맨 발등은 검정고무신 만큼이나 검게 보였다.
조롱바가지 철철 넘치도록 막걸리 한잔 후딱 얻어 마신 장구재비 아저씨는 더욱더 신명이 났다. 어찌나 세고 재게 양장구를 쳐대는지 가죽한복판이 터져나갈 듯하다. 꽹과리재비 어른 역시 땀범벅이가 된 채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위아래로 연신 제쳐가며 깨져나가도록 꽹과리를 두들겨댔다. 장구재비와 꽹과리재비가 그렇듯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칠 때 북재비와 징재비는 까딱까딱 고갯짓장단을 맞춰가며 먼 하늘에 눈길을 주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신명나게 풍장을 치던 동네두레꾼, 그 어른들이 이제는 모두 저 세상으로 갔다. 남은 것은 그 시절 고달팠던 삶의 이야기와 머릿속을 맴도는 가난한 추억뿐이었다.
녹이 잔뜩 슬어있는 무쇠 테 두 개, 문득 원형캔버스 틀이 생각났다. 녹을 벗겨내고, 페인트칠을 하고, 합판을 둥글게 잘라 캔버스 천을 씌워 무쇠 테 위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원형 캔버스 두 개를 다 만들었을 때는 어느새 어둑어둑 날이 저물고 있었지만 쓸모없이 버려질 무쇠 테를 다시 살려낸 것 같아서 마음은 흐뭇했다.
신명나는 풍장소리에 걸맞게 밝고 화사한 꽃잎, <꽃바람>을 그리기로 했다. 장구재비의 궁채와 열채놀림이 잽쌌던 것처럼 나도 붓놀림을 빨리 했다. 색깔은 되도록 밝고 따뜻한 색을 골랐다. 화사한 꽃색깔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빠른 템포의 경쾌한 음악을 틀었다. 마음은 사뭇 앞질러 갔으나 날씨가 너무 더웠으므로 하루 두어 시간씩만 그림을 그렸다.
꽃바람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어 그런지 원하는 색깔들이 비교적 쉽게 만들어졌다. 색을 칠한다기보다 얹어 놓는다는 기분으로 꽃잎에 색깔을 입혀나갔다. 다행인 것은 날씨가 좋았던 탓으로 물감이 쉽게 말라 작업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무쇠 테 캔버스 속에서 풍장소리가 들렸다. 솔무데기에 사는 키 큰 아저씨가 장구를 쳤고, 웃진등 서씨 어른은 꽹과리를 쳤다. 비록 땀에 찌든 삼베중이적삼을 걸쳤을망정 빙글빙글 돌아가며 양장구 치는 솜씨는 삼색 띠와 상모를 갖춘 진짜배기 풍물 꾼 못지않았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리 보였다.
어른들 틈에 끼어 앉아 손가락으로 꽹과리 치는 모양을 흉내 내던 아이, 냇가를 건너다 말고 징검다리에 앉아 송사리 떼를 헤아리며 풍장소리에 귀 기울이던 아이가 그림 속에 보였다. 뱀처럼 꼬불거리는 논둑길이 보이고, 논두렁 끄트머리로 길게 누워있는 콩밭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아버지도 보였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바깥일 대신 세모시헝겊쪼가리를 잇대가며 예쁜 밥상보를 만드시던 어머니 모습도 아련히 떠올랐다.
꽃잎 색깔이 알록달록 살아날 때마다 70여 년 전의 유년시절이 무쇠 테 캔버스 속에서 스멀거렸고, 무심한 세월이 불러온 슬프디 슬픈 풍장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녹이 슬어 언젠가는 없어지고 말 거무스름한 무쇠 테가 대엿새 만에 원형캔버스액자 그림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그림이 붙어있는 한 무쇠 테도 살아남을 것이고, 무쇠 테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림 또한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두고두고 낡은 장구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첫댓글 '낡은 장구'가 '꽃바람'으로 재생되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과정을 봅니다. 한바탕 신명나는 장구재비의 몸 동작이 질펀한 마당놀이 함성과 함께 허공을 가릅니다. 향토색 짙은 언어로 빚어낸 <김회직 수필>의 독창적인 문학세계. 탁월한 심미안을 회화로 절묘하게 접목한 <김회직 화백의 예술세계>. 이런 명품 작업은 아무나 해낼 수 있는 예술세계가 아닙니다. 모처럼 <수필예술>이란 문학카페 이름에 걸맞는 역작 명품을 감상합니다.
윤회장님, 분에 넘치는 과찬이십니다. 찌뿌등한 폭염의 날씨를 그렇게라도겨디고자 했을따름입니다. 꽃잎을 하나하나 그려나갈 때는 땀은 많이 흘렸어도 더운 줄은 몰랐습니다. 읽어주시고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꽃바람>한 작품 속에 참 다채로운 풍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신명나는 가락이 꽃바람을 타고 들려 오는 듯합니다. 꽃잎이 쌓여 있는 듯 아름다워요. 동네 두레꾼 어른들도 그 모습을 바라보시던 선생님도 모두 예술가십니다.^^
김지안 작가님이 그렇게 제가 더 힘이 납니다. 사실은 꽃잎을 그리면서 신명나는 가락의 음악을 들었는데도 생각만큼 나와주지 않아서 고민을 좀 했거든요.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