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일찍 끝나고 7월의 따가운 햇살이 지구를 뚫을 듯 쨍쨍 내리쬐고 있던 내가 23세 때인 1981년 7월 21일 이었다.
나는 같은 마을에 사는 키가 작고 야무져서 "돌콩"이라는 별명을 가진 1년 선배와 남원에서 무주구천동까지 거리가 얼마나 된 줄도 모른 채 지도만 보고 19번 국도를 타고 자전거로 하루에 갔다 오겠지 생각하고 가기로 하여 시골에서 꼴망태도 실을 수 있고 어른들이 많이 타는 보통 자전거를 나는 집에 있던것을 그리고 돌콩 선배는 마을 다르 선배한테 빌려서 타고 아침 6시에 무주구천동을 향해서 출발했었다. 여비는 내게 있던 5,000원만을 가지고...
오전 10시쯤에 장수군 장계면 소재지에 도착하여 싸고 배부른 음식을 먹기위해 1,500원주고 라면 5봉을 삶아 달라고 하여 둘이서 국물까지 싹 비우고 다시 무주구천동을 향했다. 키가 165정도인 돌콩 선배와 177인 나는 아마 서수남 하청일씨가 자전거를 타고 여행을 하는 장면과도 같았을 것이다.
산간부 인지라 고갯길도 오직 많아 지금처럼 18단, 22단 자전거도 아니고 오로지 1단 자전거였으므로 오르막길은 무조건 자전거를 끌고 걸었고 내리막길은 돌콩 선배 자전거가 잘 나가지 않아 난 선배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오르막을 힘들게 걸어 오른 보람도 못느끼고 살짝 살짝 브레이크를 잡아가면서 속도를 맞춰서 가줘야 했다.
점심도 역시 양 많은 라면으로 해결하려고 무주군 설천면 소재지에서 라면 끓여주는 식당을 찾아봤지만 없어서 분식집에서 한 그릇에 800원 주고 콩국수로 해결했다.
무주에서 구천동까지만 38km 였는데 구천동 방면으로는 10km만 아스팔트 포장이 된 상태였고 나머지는 비포장 길이어서 먼지를 모두 뒤집어 쓰면서 갔었다.
선배와 나는 "포기하고 돌아갈까" 하고 몇 차례 말을 하다가도 "하늘이 보고있어" 하면서 서로를 위로했다.
구천동에 거의 다 도착할 무렵에 50대 아줌마한테 "구천동을 얼마나 가야돼요? ' 하고 묻자 먼지와 땀으로 새까만 우리들을 보고 "조금만 가면 돼. 노가다판에 가는가 보네" 하시는 것이었다. (그때당시 상가를 한참 건축하고 있었음) 쌩- - 병날 노릇이었다.
그 날 오후 5시 40분에야 무주구천동에 도착하여 시간도 돈도 없어 입장권을 끊어 공원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큰 느티나무 아래 계곡에 가서 땀을 씻고 약 20분 쉬고 다시 귀가를 서두르며 카메라도 가지고 가지 않아 그냥 오려고 하니 아쉬운 생각이 들어 어디 대도시에서 관광을 온 것으로 보이는 피부도 아주 개끗한 아가씨에게 내가 "저 --어-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시겠습니까?"하고 말하자 말대꾸도 하지 않았다. 으- - 자존심이 팍 상했다. 내 몰골은 생각도 안하고 그런 말을 한 내가 잘못이었지. ㅎㅎ
그래서 여행기념으로 상가에서 기념 페난트만 1개씩 800원주고 샀다.
백제와 신라의 경계 지점이었던 라제통문 옆 휴게소에서 생라면 5개를 구입하여 2개는 저녁 간식으로 남기고 물가에 앉아 라면에 물을 적신 후 스프를 뿌려 둘이서 라면 3개로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또 자전거를 탔다. 그날 하루 길가의 집이나 약수터 등에서 마셨던 물의 양은 혼자서 20리터 이상은 마셨을 것이다.
온종일 자전거를 타고 더구나 비포장길만 왕복 76km를 타고나니 엉덩이에 땀띠가 나서 자전거를 타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러나 그때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었으므로 금산으로 가는 3거리의 검문소는 통과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계속 달려 다행히 저녁 10시 무렵에 검문소를 통과했다.
피곤에 지쳐 시골에 보릿짚 등을 덮어놓은 비닐 조각이라도 있으면 조금 떼어서 덮고 자려고 해도 찾을 수 없어 우리는 긴 고개 중턱 구 도로에 자전거를 던져놓고 1시간쯤 잤는데 춥고 모기들이 반갑게 축제를 해주어 잠을 잘 수가 없어 다시 자전거를 끌고 걷다가 우리는 모래를 보관해놓은 적사장 안으로 들어가 또 1시간쯤 잤으나 더 이상 추워서 잘 수가 없었다.
마침 그때 아주 밝은 보름달이 대낮처럼 밝게 떠올랐다. 우리는 달님 덕분에 통행금지고 뭐고 상관하지 않고 밤새 달려 다음날 아침 9시에 마을에 도착해서 무지 피곤하기도 했지만 고남산 아래 쏘가있는 냇가 바위위에 자라처럼 붙어서 땀띠난 엉덩이를 일광욕을 해야만 했다.
나는 요즘에도 그때의 힘들었던 추억을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무슨 일을 할 때에는 기회가 되었을 때는 신속하고 과감하고 정말 무지 야무지게 밀어 부쳐 추진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아울러 나는 매일 1시간 이상 뛸 때에도 일정한 속도로 뛰지 않고 몇 차례는 귓가에서 바람소리가 싹- 싺 - 나게 100m 경주를 하듯이 뛰곤 한다.
그날 돌콩 선배의 환희 담배 2갑 사는데 200원을 더 쓰고 27시간의 여행이었는데도 400원이 남은 내 생애에 여행 경비가 가장 적게든 여행이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도 그때에 사진을 찍어주지 않았던 그 아가씨가 서운하다. ㅎㅎ 지금은 중년 부인이 되어서 어느 하늘 아래서 잘 살고 계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