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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는 백 마리의 양을 치는 양치기와 같다. 그 중의 한 마리가, 가장 큰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지칠대로 지친 후에 양을 찾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양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다른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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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가장 곤란한 문제로 여겨져 오고 있는 문제 중의 하나는 죄인들 즉, 길을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신과 죄인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죄인은 과연 벌을 받게 될 것인가? 그들은 지옥으로 갈 것인가? 그리고 지옥이란 존재하는가? 왜냐하면 모든 성직자들은 죄인은 지옥에 떨어져 벌을 받는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은 인간에게 벌을 주는 존재일까? 그에게는 자비심이 없는 것일까? 만일 신이 용서를 할 수 없다면 대체 누가 용서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해서는 많은 대답이 나와 있다. 그 중에서도 예수의 답변이 가증 훌륭하다. 그러나 그대, 예수의 말로 들어가기 전에 많은 것을 이해해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대는 그 말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초적인 배경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누군가가 벌을 줄 때 그 때에는 어떤 핑계를 만들어내든지, <이유>는 <핑계>와는 다르다. 그대, 이 <이유>와 <핑계>와의 차이를 잘 기억하라. 그대가 아버지 또는 어머니라고 하자. 그리고 그대의 아이가 그대가 인정할 수 없는 짓을 했다고 하자. 그 아이가 한 일은 옳은가 그른가는 문제가 아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누가 알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대는 그대가 인정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잘못이라고 한다. 그것이 참으로 잘못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대>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옳은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그대가 인정할 수 있는가 부인하는가에 달려 있다.
아이가 길을 잃고 그대의 관점에서 보아 잘못된 일을 했을 때 그대는 아이에게 벌을 준다.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이유는 아이가 참으로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아이가 그대에게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깊은 이유는 그대의 에고가 상처를 입었기 때문인 것이다. 아이는 그대에게 반대를 하고 자기를 내세웠다. 아버지와 권위와 힘 있는 자를 향하여 “아니오.”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대는 아이를 벌주는 것이다. 이유는 그대의 에고가 상처받았기 때문이며, 따라서 벌은 일종의 보복이다.
그러나 <핑계>를 대는 것은 또 다르다. 그대는 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벌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하고 그대는 말한다. 그러므로 잘못된 길로 간 아이들은 바른 길로 걸어가기 위해 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대에게 순종하면 아이는 그만한 보상을 받는다. 이것은 아이들을 올바른 생활로 이끌기 위한 인도라고 그대는 말한다. 그러나 그대, 이것은 하나의 <핑계>일 뿐이다. 이것은 그대가 그대 마음속에서 자신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대의 무의식 속에 있는 <이유>는 아니다.
무의식 속에 있는 이유는 전적으로 다르다. 즉, 그것은 아이들을 일정한 자리에 묶어두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아이의 마음속에 그대가 우두머리이고 아이는 우두머리가 아니라는 것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는 그대가 결정하는 것이며, 또한 지도하는 것도 그대가고, 아이는 자유롭지 못하고 그대는 아이를 소유하고 있는 소유자이며, 그리고 만일 복종하지 않으면 그때에는 아이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아이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한 것이다.
심층심리학자들에게 물으면 그들은 모든 행동 속에서 이러한 <이유>와 <핑계>의 차이는 분명하게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핑계>를 대는 것은 매우 교활한 속임수이다. 그것은 진짜 <이유>를 숨기고 가짜 이유를 그대에게 내놓는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으로만 옳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러한 일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아이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회와 길을 잃은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일어난다. 감옥과 법률이 존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보복이다. 사회에 의해서 가해지는 보복이다.
사회는 반역자를 그대로 놓아둘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사회 구조 전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옳다고 하더라도…… 아테네 사회는 소크라테스를 그대로 놓아둘 수가 없었다. 그가 잘못된 인간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완전히 전적으로 옳았다. 그러나 아테네 사회는 그를 묵인할 수가 없었다. 만일 그를 인정하면 사회 구조 전체가 붕괴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이 개에게 던져져 버릴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는 그 이상 존속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사회의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 또한 십자가에 처형을 당했다. 그가 무엇을 말했든 그것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이 지상에 그 이전에 그토록 진실한 말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의 말하는 방식, 그의 행동하는 방식이 사회 구조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이러한 것을 방치해 둘 수 없으므로 벌을 준다. 그러나 사회는 또한 그럴듯한 <핑계>를 댄다. 사회는 이것은 그대를 바로잡기 위해서이고 그대 자신을 위해서 벌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누구도 선하게 되는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다. 우리들은 수천 년에 걸쳐서 범죄자에게 벌을 주어 왔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그 범죄자들이 형벌을 통해서 바뀌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는다. 범죄자는 계속 증가한다. 감옥이 늘어남에 따라 범죄자도 는다. 법률이 늘면 느는 만큼 범죄자도 늘어난다. 법정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벌의 숫자도 많아진다. 그 결과는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지금까지 보다 더 많은 범죄가 일어나게 된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범죄자 역시 자신이 잘못을 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핑계>에 불과하며 잡혔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 또한 자기의 <핑계>를 갖는다. 다음에는 조금 더 교활하고 현명해져야겠다고, 이것 뿐이다. 이번에 붙잡힌 것은 자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방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음 번에는 자신이 더 현명하고 영리함을 증명해 보이자. 그러면 잡히지 않을 것이다…… 벌을 받는 죄수나 범죄자는 언제나 자기가 벌을 받는 것이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붙잡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벌을 받으면서 배우는 유일한 것은 다음에는 절대로 붙잡히지 말아야겠다는 것이다.
죄수는 감옥에서 나올 때마다 전보다 뛰어난 범죄자가 된다. 그는 감옥 속에서 범죄에 뛰어난 경험자들과 함께 살아온 것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범죄의 도인들, 체포되어 중벌을 받고 오랫동안 고생을 해 온 사람들, 다양한 방법으로 남을 속이는데 익숙해진 범죄의 숙련자들과 함께 살아온 것이다. 그들과 함께 살고 그들의 시중을 들어주며 제자가 되어 여러 가지를 배웠다. 이리하여 그는 전보다 더 노련한 범죄자가 되는 것이다.
벌에 의해서 범죄를 그치는 자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사회는 옳지 않은 일은 중지시켜야 한다고 말을 하면서 벌을 준다. 양쪽 모두 잘못되어 있다. 사회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사회는 복수한다. 범죄자도 이것을 잘 이해한다. 에고는 아무리 무의식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서로의 언어를 간단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범죄자도 역시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좋다. 나도 때가 오면 복수해 주겠다. 머지않아서 말이다.” 이리하여 범죄자의 에고와 사회의 에고 사이에는 갈등이 존재한다.
<신>도 같을까? 그대, 신도 재판관이나 판사와 같을까? 아버지 혹은 우두머리와 같은 것일까? <신>도 사회와 마찬가지로 잔인할까? 그대가 만일 순종하지 않는다면 <신>은 복수를 할 것인가? <신>은 그대를 벌할까? 그렇다면 이미 신에게는 <신성>은 없는 것이다. 그때에 신은 바로 우리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일 뿐이다.
이것은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신은 길을 잃은 죄인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신은 그에게 친절하게 대할 것인가? 그렇다면 거기에는 다른 것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만일 신이 올바른 것을 따진다면 그에게 자비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비와 정의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비는 무조건 용서해 준다. 그러나 그것은 정의는 아니다.
성자가 그의 일생을 통해서 항상 기도하면서, 하나의 잘못도 범하지 않을 가능성은 있다. 언제나 경계선 저편으로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기의 방안에서 살면서 자기 자신의 감옥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 그리고 잘못된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그의 생애를 덕망 있게 보내면서, 자신에게 감각적인 쾌락을 일체 허용하지 않고, 엄격하게 금욕할 수는 있다. 또한 어떤 자는 자기 마음속에 깃드는 것이면 무엇이든 행하고 탐닉하면서 자신의 감각이 이끌고 가는대로 살고 세상이 그에게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즐기면서 살아갈 수도 있다. 모든 형태의 일들을 행하고 모든 형태의 죄를 저지르면서 살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사람 모두 <신성>에 도달할 수 있다. 양쪽 모두 <신>의 세계에 들어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무슨 까닭인가? 성자가 보상받지 못하고 죄인이 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불공평한 것이다. 양쪽 모두 보상받는다고 해도 역시 공정한 것이 아니다. 아마도 성자는, “나는 선한 생활을 해왔는데 어떤 특별한 보상도 없단 말인가?”하고 생각할 것이다. 죄인도 똑같이 보상받는다면 거기 성자가 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 그렇다면 신은 자비로울지는 모르지만 올바른 것은 아니다.
신이 공정하고 올바르다면 그 계산은 우리들 머릿속에서도 명확할 것이다. 죄인은 벌을 받고 성자는 보상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는 자비로운 것은 아니다. 정의로운 인간은 잔인해야 한다. 정의로운 자는 머릿속에서만 살아야 한다. 가슴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재판관은 가슴을 가져서는 안 된다. 가슴을 가지면 그의 정의는 흔들릴 것이다. 그는 자기 내부에서 일체의 동정심을 몰아내야만 한다. 동정심은 정의를 행사하는데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정의로운 인간은 컴퓨터처럼 머리만으로 살아야 한다. 법이나 보상이나 벌, 그 속에는 가슴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감정은 전혀 허용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자기의 내부에 가슴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무감각하게 방관자로서만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때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들은 수 세기에 걸쳐서 신은 정의롭고 자비롭다고, 다정하고 사랑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또한 공정하다고 말해 왔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이며 역설이다. 그러니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에게는 그 해답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훌륭한 답이다. 이제 그대, 그의 이 답을 이해하도록 하자.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답은 그대의 모든 고정된 관념과 그대의 모든 선입견들에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벌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와 같은 인물이 벌을 믿을 리가 없다. 벌이란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복수이기 때문이다. 붓다, 크리쉬나, 예수와 같은 이들은 벌을 믿을 리가 없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신으로부터 그 정의라는 속성을 떨쳐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자비심을 거부할 수는 없다. 정의는 인간의 이상이지만 자비는 <신성>의 본질이다. 정의에는 “이것을 하라. 그러면 너는 이것을 얻을 수 있다. 저것을 하지 말라. 저것을 하면 너는 이것을 놓쳐버릴 것이다.”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그러나 그대, 자비는 무조건적이다.
신은 깊은 자비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의 자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죄인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는 백 마리의 양을 치는 양치기와 같다. 그 중의 한 마리가, 가장 큰 양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지칠대로 지친 후에 양을 찾게 되면 그 사람은 양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이야기이다. 비논리적이다. 그러나 그대여, 이것은 진실이다. 그대 이것을 이해하도록 노력하라. “하늘나라는 백 마리의 양을 치는 양치기와 같다. 그 중 한 마리가, 가장 큰 놈이 길을 잃었다.”
언제나 그렇다. 길을 잃는 놈은 언제나 가장 좋은 한 마리이다. 그대가 다섯 아이의 아버지라면, 그 중 가장 나은 아이만이 그대에게 저항하고 부정하려고 한다. 가장 나은 아이만이 자기를 주장한다. 평범한 아이들은 언제나 그대에게 굴복하지만 비범한 아이는 반역한다. 그의 정신적 특성 자체가 반역적이기 때문이다. 총명함이란 반역적인 것이다. 총명하면 총명할수록 반역적으로 된다. 그리고 반역적이지 못한 자들, 그저 복종만 하는 자들은 반은 죽은 시체나 다름이 없다. 그대는 그들을 좋아할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내부에는 생명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약하고 두려움에 휩싸여 있으며 홀로 설 수가 없고 대항하면서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대에게 복종한다. 그들은 겁쟁이들이며 무능력자들이다.
그대 주위를 둘러 보라. 그대가 선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대개의 경우 약한 자들이다. 그 선함은 그들의 강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연약함에서 나온 것이다. 그들은 감히 악해질 엄두도 낼 수가 없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 그러나 연약함에서 나오는 선함이란 어떤 유형의 것인가? 그대, 선함이란 흘러넘치는 강력한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것은 선이 된다. 그때 거기에는 생명력이 있다. 홍수처럼 가득 차고 흘러넘치는 생명력이 있다.
따라서 죄인이 성자로 될 때에는 그 성스러움에 독자적인 광채가 깃들어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 성자로 될 때에는 그 성스러움은 창백하게 죽어 있으며 그 안에 생명력이라고는 없다. 그대는 그대의 연약함으로 인해 성자가 될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그대여, 기억하라. 그렇다면 그때 그대는 놓치고 말 것이다. 과녁은 빗나가고 말 것이다. 자신의 강함으로 성자가 되어야 그대는 적중할 수 있다. 악해질 수 없기 때문에 선한 사람은 실제로는 선한 사람이 아니다. 강해지면 그 순간 그는 악해질 것이다. 권력이 주어지면 그는 그 즉시 타락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나라 인도에서 일어나온 일이다. 간디에게는 수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지만, 그 추종자들의 <선함>은 곧 그들의 연약함으로부터 나온 것에 불과했다. 그들은 권력을 갖지 못한 동안에는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일단 권력의 자리에 오르자, 자신들이 인도의 지배자가 되자, 그 권력은 즉시 그들을 타락시켰다.
권력은 강한 사람도 타락시킬 수 있는가? 아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는 이미 힘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권력이 그를 타락시킬 수 있다면 그는 이미 타락해 있던 것에 다름 아니다. 권력이 그대를 타락시키는 것은 그대가 약하고 그대의 선함이 그러한 연약함으로부터 나올 때 뿐이다. 액톤 경은 말했다. “권력은 타락시킨다. 그것도 완전히 타락시킨다.” 그러나 나는 그것에 하나의 조건을 붙이고 싶다. 즉, 권력은 그 선함이 연약함에서 나온 것이라면 타락시키지만, 강함에서 나온 것이라면 어떤 권력도 타락시킬 수 없다. 그대가 이미 힘을 알고 있고 이미 그대 안에 힘이 있다면, 어떻게 권력이 그대를 타락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자신의 선함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찾아내는 일은 매우 어렵다. 만일 그대가 잡힐 것이 두려워서 도둑이 될 수 없었다면, 아무도 그대를 잡지 않을 것이 확인되는 바로 그 날 그대는 도둑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그대를 막고 있는 것인가? 바로 그대의 두려움이 그대를 막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적을 죽이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면 자신이 잡히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을 죽여도 체포되지 않으며 죽여도 형벌을 받지 않을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그대는 그 자리에서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연약함을 통해서만 선한 사람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선함이 연약함으로부터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선에는 흘러넘치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선이란 하나의 사치품이다. 그대 이것을 기억하라. 선은 풍요로부터 돋아난다. 에너지가 남아돌 때 흘러넘쳐서 범람할 때, 그때 그대는 그것을 나누어갖기 시작한다. 그때 그대는 착취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가슴으로부터 줄 수가 있다. 너무 많으므로 실제로는 그것은 그대에게 짐이나 다를 바 없게 되어 그대는 그것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밖으로 내놓고 싶어한다. 그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대의 삶 모두를 선물로 주고 싶어한다.
그대가 주고 싶은 것을 갖고 있을 때, 그대 이 법칙을 잘 기억하라. 그대가 실제로 어떤 것을 갖고 있지 않을 때 그대는 그것에 집착한다. 그대가 소유하고 있다면 그대는 줄 수 있다. 그대 기뻐하면서 줄 수 있을 때에야 그대는 비로소 소유자이다. 그대 만일 그것에 아직도 매달리고 있다면 그대는 내부 깊숙한 곳에서 그것은 자기의 것이 아니며 머지않아 그대로부터 빠져 달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대가 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의 사랑을 줄 때에야 그에게 사랑이 있음이 드러난다. 그밖에 그것을 알릴 방법이란 없다. 오직 그의 삶 모두를 줄 때에만 그가 살아 있는 것이 드러난다. 그밖에 그것을 알릴 방법이란 없다.
많은 선이 연약함으로부터 생겨난다. 그것은 단지 외형일 뿐이며 위조지폐이다. 그리고 위조지폐란 종이꽃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꽃에 지나지 않는다. 나무가 꽃을 피울 때에는 남은 에너지가 흘러넘치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이다. 꽃이란 사치품인 것이다. 넘치는 여유가 있을 때에만 꽃을 피운다. 물이 적절하게 공급되지 않는다면, 비료가 적당한 비율로 주어지지 않는다면, 땅이 기름지지 않다면 나무는 잎을 맺을지는 모르지만 꽃을 피울 수는 없다.
거기 하나의 단계가 있다. 즉, 최고 수준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최고의 에너지가, 최고의 수준까지 움직여갈 에너지가 있을 때 뿐이다. 만일 그대가 충분한 음식을 얻지 못한다면 우선 지성이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이란 하나의 꽃핌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나라에서의 진정한 빈곤은 육체적인 것이 아니다. 지성의 빈곤이다. 그 나라가 최악의 빈곤 상태에 있다면 지성은 뿌리 내릴 수 없다. 지성은 꽃핌인 것이다. 육체적인 필요가 모두 충족될 때에만 에너지는 위로 향한다. 육체적인 수요가 충족되지 않으면 에너지는 우선 육체적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움직인다. 무엇보다도 먼저 밑바닥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먼저 뿌리를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거기 뿌리가 없다면 꽃은 피어날 수가 없다. 만일 육체가 없다면 지성이 어디에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대, 자비는 지성보다 높은 단계의 것이며, 명상은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의 것이다.
인도에서는 붓다도 마하비라도 나라가 매우 풍요로울 때 태어났다. 그 이후에도 소위 <성자>들이 계속해서 등장했지만, 붓다만한 이는 없었다. 그것은 어렵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꽃핌>은 남아도는 에너지, 사용되지 않는 잉여의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에너지는 자기를 즐긴다. 그리고 에너지가 자기를 즐기기 시작하면 그 에너지는 내부로 향하기 시작한다. 내적인 전환인 것이다.
그 때 그것은 명상이 되고 그 때 드디어 한 사람의 붓다가 탄생하는 것이며 그 때 거기 환희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무가 물을 공급받지 못하면 처음에는 꽃이 죽는다. 다음에는 잎이 마르고 가지가 죽는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이 될 때까지 뿌리는 죽지 않는다. 이것은 뿌리가 있으면 다른 것은 다시 소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는 뿌리를 보호한다. 뿌리는 가장 밑에 있지만 가장 밑 단계의 것은 토대이므로 보호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좋은 날이 와 비가 내리면 물을 흡수하게 된다. 그 때에는 뿌리는 싹을 낼 수가 있다. 잎이 다시 소생하고 꽃도 필 것이다. 이와 똑같은 단계가 그대 안에서도 존재한다.
그대의 에너지로부터 선해져야 한다. 약하기 때문에 선해서는 안 된다. 나는 악해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연약함에서 어떻게 선이 나올 수 있을까? 악도 또한 선과 똑같은 정도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에너지 없이는 악해질 수도 없다. 그리고 에너지 없이는, 그대, 선해질 수도 없다. 왜냐하면 선과 악 모두가 실재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없이 그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가짜 얼굴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 때 그대는 아무 것도 아니며, 단순한 겉모습, 기만, 유령이고, 참된 인간이 아니며, 그대가 어떤 일을 행할지라도 그것은 유령과 같은 짓이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그대는 거짓된 선과 거짓된 성스러움으로 위장한다. 그대는 자신을 성자라고 생각한다. <신성>을 획득하지 못했으면서도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대가 <신성>을 획득했을 때에는 그것은 하나의 성취이다. 적극적인 에너지의 성취이다. 그 때 그대는 신처럼 된다. 그리고 거기에는 신처럼 되기 위한 노력은 필요가 없다. 그 에너지는 자발적으로 흘러나올 뿐이다.
그대는 악에 대하여 저항한다. 그러나 그것은 부정적인 힘이다. 저항에는 욕망이 있다. 그리고 악을 행하고 싶다는 욕망이 거기 있다면 그대는 이미 악을 범한 것과 다름이 없다. 이것이 바로 죄와 범죄이 차이이다.
범죄는 행위로 표현되어야 성립한다. 그대는 항상 범죄를 저지를 것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벌할 법정은 없다. 법정은 생각에 대해서 힘을 미치지 않는다. 육체에 대해서만 권위를 갖는다. 범죄는 행위로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 사람을 살해할 의도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의도만으로 나를 벌줄 수 있는 법정은 아무데도 없다. 나는 그것을 줄곧 생각할 수도 있고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행위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행위는 법률의 지배 하에 있지만, 생각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바로 범죄와 죄의 차이이다.
죄는 그대의 생각과 행위 사이에 구별을 두지 않는다. 그대가 생각한다면 씨앗이 거기 있는 것이다. 씨앗이 행위로 싹을 피우는가 않는가는 문제가 아니다. 생각이 행위로 옮겨지면 그것은 범죄이다.그러나 그대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대는 이미 죄를 범한 것과 다름이 없다. 그대는 <신성>에 대한 죄를 범한 것이며 이미 길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그대 다음을 이해해야 한다. 매우 어려운 문제이지만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길을 잃은 사람들은 일정하게 길에 머무는 사람들보다도 강하다는 것이다.
길을 잃은 사람들은 언제나 최고 수준의 사람들이다. 정신병원에 가 보라. 가장 총명한 사람들이 미쳐 있음을 볼 것이다. 지금 세기의 지난 70년간을 돌이켜 보라. 미쳐 버린 자들은 가장 영리한 자들이었고, 그들은 결코 평범한 인물들이 아니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성 중의 한 사람이었던 니체도 미쳤다.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그토록 많은 에너지가 있었던 것이다. 너무도 거대한 에너지였으므로 묶어둘 수가 없었다. 그 에너지는 넘쳐서 홍수가 되었다. 부드러운 흐름의 시냇물이 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물길을 잡을 수 없었다. 그것은 드넓은 바다와도 같이 야성적이었다. 니체도 미쳤고 니진스키도 미쳤다. 금세기의 이 지난 70년간을 돌이켜 보라. 최고 수준의 인간들, 인간 중에서 꽃이라고 할 만한 최고급의 인간들이 미쳤다. 그리고 평범한 인간들은 정상적이었다.
이것은 매우 불합리한 사실로 보인다. 평범한 사람들은 정상적이고 천재들은 미쳤다. 왜 평범한 사람들은 정상적인 것일까? 그들에게는 길을 잃은 만큼의 에너지가 없는 것이다. 아이에게 흘러넘치는 에너지가 있으면 그 아이는 문제아가 된다. 그는 무엇인가 해야 한다. 단지 혈기 없는 아이만이 한 구석에 틀어박혀 있다. 만일 그대가 그런 아이에게, “람, 람, 람, 하고 반복하라.”고 말하면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그에게 염주를 주면 받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아이가 진정으로 생명력에 넘쳐 있다면 그는 염주를 내던지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놀러나가겠다. 나무 위로도 기어올라가고,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그대여, 삶은 곧 에너지이다. 혈기가 없고 빈혈에 걸린 정신은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길을 잃을 수가 없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에너지가 넘쳐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토록 극단으로까지 그토록 심연으로까지 움직여갈 에너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길을 잃은 사람들은 길을 찾기만 하면 그들은 곧 붓다가 된다. 만일 니체가 명상에 들어가기만 했다면 그는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미칠 만한 에너지가 있었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을 에너지가 그에게는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에너지이다. 단지 방향이 틀렸을 뿐이다. 잠재적으로 붓다가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붓다가 되지 못하면 미쳐 버린다. 그 에너지가 어디로 흘러가겠는가? 만일 그대가 창조적으로 되지 않으면 그 에너지는 파괴적으로 된다. 정신병원에 가 보라. 거기에서 그대는 가장 총명한 사람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평범하지 않기 때문에 미친 것이다. 그들은 그대들보다 훨씬 멀리, 훨씬 깊이 볼 수 있기 때문에 미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대들보다 깊숙하게 볼 수 때 환상은 사라진다.
삶 전체는 너무나 혼란스러운 것,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삶을 보다 깊이 볼 수 있다면 정상적인 인간으로 남아 있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깊숙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은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대는 삶의 2퍼센트밖에 보지 못하고, 98퍼센트는 그 뒤에 숨겨져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그대가 그것을 보게 되면 삶은 거대한 홍수가 되어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그대는 미치고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
레잉(R.D. Laing)이나 그 밖의 광기를 깊이 연구해 온 얼마 안 되는 심리학자들은 몇 가지 사실들에 부딪친다. 그러한 사실들 중의 하나는 이것이다. 미친 사람들은 최고의 사람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가장 반역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위대한 성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발미키(Valmiki)가 성자가 된 것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발미키가 살인자, 즉 다코이트(dacoit)로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으며 살았었다. 그런데 어떤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그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어느 날 깨달은 사람이 하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 도둑질로 살아가고 있었던 이 살인자 발미키가 그를 붙잡았다. 그러자 그 깨달은 사람이 말했다. “무슨 일인가?”
발미키가 대답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몽땅 빼앗으려고 한다.”
그러자 그 깨달은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도 기쁘겠다. 나는 내부 깊숙한 곳에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빼앗아 가라. 아주 대환영이다.”
발미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그는 이렇게 되받아 넘겼다. “나는 오직 바깥에 있는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자 깨달은 사람이 말했다. “그런 것은 별로 쓸모가 없다. 그런데 왜 그대는 이런 짓을 하는가?”
발미키는 대답했다. “가족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서이다. 어머니와 아내와 자식들…… 내가 이 짓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굶어 죽는다. 게다가 나는 도둑질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그러자 깨달은 사람이 말했다. “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나무에 묶어라. 그리고는 집으로 가서 어머니나 아내와 자식들한테 너는 그들을 위하여 죄를 범하고 있다고 말해 보라. 그들에게 함께 벌을 받을 마음이 있는지 물어보라. 네가 하느님 앞에 설 때, 최후의 심판이 다가왔을 때, 그들도 함께 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물어보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미키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네 말이 옳은지도 모른다. 집에 가서 물어보겠다.”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내가 함께 벌을 받아야 하지요? 나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한 짓은 당신의 책임이지요.”
그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왜 함께 벌을 받아야 하느냐? 나는 네 에미이고,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은 네 의무다. 네가 무슨 짓을 해서 빵을 가져오든 나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것은 네 책임이다.”
아무도 그와 함께 벌을 나누어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발미키는 마음을 돌렸다. 그는 되돌아와 깨달은 사람의 발 밑에 엎드려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 그 내부의 것을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이제 바깥에 있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제는 안에 있는 것을 도둑질하게 해 주십시오. 나는 내가 혼자이며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나의 책임일 뿐 그것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자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홀로 태어나 홀로 죽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짓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나의 개인적인 책임입니다. 아무도 그것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부를 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끝났습니다. 나는 이제 이런 일은 그만두겠습니다.” 이 자는 한 순간에 마음을 돌린 것이다.
붓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어떤 곳에 미치광이 살인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천 명의 사람을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꼭 천 명을 죽이겠다고 맹세를 한 것이다. 그는 사회로부터 너무나 심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천 명을 살인함으로써 사회에 대한 복수를 하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죽인 사람에게서 손가락 하나씩을 잘라내어 그것으로 목걸이를 만들었다. 천 개의 손가락으로 만든 목걸이…… 이 때문에 그는 앙굴리말라(Angulimala), 손가락 목걸이를 하고 있는 남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999명을 살해했다. 사람들은 앙굴리말라가 가까이에 있다고 알려지면 그 지역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 지역의 통행은 완전히 끊겨 버렸다. 그래서 앙굴리말라로서는 최후의 한 사람을 발견하는 일이 매우 어렵게 되었다. 단지 한 사람만 더 채워지면 되는 것이었다.
붓다가 숲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었다. 그 때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붓다에게 말했다. “그 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앙굴리말라가 있습니다. 그 미치광이 살인자가 그곳에 있습니다. 그 녀석은 생각도 않고 무작정 죽입니다. 당신이 붓다라는 사실 같은 것은 생각해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 길로는 가지 마십시오. 다른 길이 있으니 그 길로 가십시오. 어쨌든 이 숲을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누가 가겠는가? 더구나 그는 지금 마지막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나는 가야 한다.”
앙굴리말라는 자신의 맹세를 거의 완성한 단계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였다. 그는 사회 전체를 상대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혼자의 힘으로 말이다. 그는 천 명에 가까운 사람을 죽였다. 왕들이 두려워하고 장군들이 두려워했다. 지배자나 법률이나 관리들, 그 누구도 대책이 없었다. 그러나 붓다는 말했다. “그는 한 사람의 인간이다. 그에게는 내가 필요하다. 나는 이 위험을 무릅써야 하다. 그가 나를 죽이든가 내가 그를 죽이든가 둘 중의 하나이다.”
이것이야말로 깨달은 사람의 행동이다. 그들은 도박을 하고 자기의 생명을 건다. 붓다는 그곳으로 갔다.
가장 가까운 제자들, 최후까지 붓다와 함께 하겠다던 제자들조차 뒤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이것은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붓다가 언덕의 바위 위에 앉아 있는 앙굴리말라가 가까이 왔을 때에는 뒤에 따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혼자였다. 제자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앙굴리말라는 이 어린아이같은 순진무구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살인마조차도 그의 아름다움에 자비를 느꼈다. 앙굴리말라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이 길을 지나갈 리가 없다.” 그리고 이 사나이는 너무나 순진하고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으므로 앙굴리말라조차도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그냥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자. 다른 사람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 그는 붓다에게 말했다. “돌아가라. 그 곳에서 멈추고 돌아가란 말이다. 앞으로 한 걸음도 더 이상 나와서는 안 된다. 나는 앙굴리말라다. 여기 999개의 손가락들이 있다. 지금 내게는 손가락 하나가 더 필요하다. 비록 내 어머니가 오신다고 해도 나는 죽여서 내 맹세를 달성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가까이 오지 말라. 나는 위험한 사람이다. 게다가 종교 같은 것은 나는 믿지도 않는다. 나는 네가 누구일지라도 상관하지 않는다. 너는 훌륭한 중일지도 모르고 위대한 성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손가락 뿐이다. 네 손가락이든 다른 자의 손가락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니 한 걸음도 더 나오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를 죽이겠다. 멈추어라.” 그러나 붓다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그러자 앙굴리말라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귀가 먹었든지 아니면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버 큰 소리로 외쳤다. “멈춰라. 움직이지 마.”
그 때 붓다가 말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멈추어 있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앙굴리말라, 움직이는 것은 그대가다. 나는 줄곧 멈춰 있었다. 모든 움직임은 내게서 사라졌다. 모든 동기가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동기가 하나도 없을 때 어떻게 움직임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목표가 없다. 나는 목표를 이미 달성했다. 그러니 내가 왜 움직여야 하겠는가?”
앙굴리말라는 바위 위에 앉아서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참으로 미쳤구나. 나는 앉아 있는데 움직인다고 말하고, 너는 움직이고 있으면서 멈춰 있다고 말하다니, 너는 완전히 바보이거나 아니면 미친 놈이다. 아니, 나로서는 네가 어떤 자인지, 무슨 일을 하는 자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붓다는 가까이 다가가면서 말했다.
“나는 그대가 손가락 하나를 더 필요로 하고 있다고 들었다. 여기 있는 이 육체에 관한 한 내 목표는 달성되었다. 이 육체는 이제 나에게는 쓸모가 없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은 이 육체를 태울 것이다.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는 물건이다. 그대가 이 육체를 사용하라. 그러면 그대의 맹세가 달성될 것이다. 내 손가락을 잘라 가라. 내 목을 잘라라. 나는 그것을 위해서 왔다. 왜냐하면 이것이 내 육체가 어떤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은 이 육체를 태워버릴 것이다.”
앙굴리말라가 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 주변에서 미친 놈은 나 혼자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무 영리한 체 하지 말라. 나는 위험한 인물이라 말이다. 여전히 나는 너를 죽일 수가 있다.”
붓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를 죽이기 전에 한 가지만 해다오. 죽을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다. 이 나뭇가지를 하나 잘라주지 않겠는가? ”앙굴리말라는 칼로 나무를 내리쳤다. 그러자 큰 가지 하나가 잘렸다. 붓다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하나만 더. 이제는 그 가지를 다시 나무에 붙여주지 않겠는가?”
앙물리말라가 대답했다. “이로써 네가 완전히 미친 놈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나는 잘라낼 수는 있지만 도로 붙여놓을 수는 없다.”
그러자 붓다는 웃으면서 말했다. “파괴는 가능해도 창조는 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파괴해서는 안 된다. 그런 파괴는 어린아이들도 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용감한 행위가 아니다. 이 가지는 어린아이들도 자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원위치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스승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대에게는 가지 하나 되붙일 능력조차 없으면서 어떻게 사람의 목을 자를 것인가? 이제까지 이것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앙굴리말라는 눈을 감고 붓다의 발 밑에 꿇어 엎드렸다. “저를 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리고는 그는 한 순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다음 날에는 그는 한 사람의 중, 한 사람의 깨달은 걸인이었다. 그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을 전체가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아주 두려워하면서 말했다. “비록 저 자가 걸인이 되었다고 해도 믿을 수는 없다. 저 자는 너무나 위험한 인물이다.”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앙굴리말라가 구걸을 하러 와도 누구 한 사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위험을 감수하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창가에 서서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가 이 마을 사람 중 999명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거의 모든 가족에게는 그에게 희생된 자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앙굴리말라는 길 위에 넘어졌다. 온 몸에서 피가 흐르고 상처 투성이가 되었다. 그 때 붓다가 제자들과 함께 와서 말했다. “보라, 앙굴리말라, 느낌이 어떤가?”
앙굴리말라는 눈을 뜨고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마음으로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 육체를 죽일 수는 있지만 <나>를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일생 동안 해오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사실입니다.”
이 말을 듣고 붓다는 말했다. “앙굴리말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브라흐만의 한 사람이 되었다. 브라흐마, 궁극의 실체를 아는 이가 되었다.”
에너지가 거기 있다면 이러한 일은 한 순간에 일어날 수 있지만, 그곳에 에너지가 없다면 어려운 일이다. 요가의 모든 체계는 어떻게 하면 가장 많은 에너지를 창출해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대는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
예수는 말한다. “그 중의 한 마리가, 가장 큰 놈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
뛰어난 사람들, 가장 나은 인물들만이 길을 잃는다. 죄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자들이다. 물론 길은 잘못되어 있지만, 그들은 언제라도 성자가 될 수 있다.
성자들은 훌륭하다. 죄인들도 훌륭하다. 그 중간에 있는 사람들, 그들은 추하다. 왜냐하면 무기력함이야말로 유일하게 추악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기력함이란 그대에게 아무런 에너지도 없을 때, 그대가 이미 죽은 것과 다름이 없을 때, 시체와 같을 때, 어떻게 겨우 자신을 옮길 수 있을 때, 혹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운반될 때를 말한다.
왜 뛰어난 자들, 가장 나은 자들은 길을 잃는 것일까? 거기에는 이해해야만 하는 비밀이 하나 있다. 성장의 첫째 과정은 그대가 먼저 에고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대가 결정화된 자아를 얻지 못하면 자기를 완전히 내맡기는 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역설적으로 들릴테지만 이것이 그 과정이다. 첫째로 그대는 우선 확실하게 결정화된 에고를 획득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대는 그것을 내던져야 한다. 결정화된 에고를 획득하지 못한다면 그것을 모두 내맡기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갖지 않은 것을 어떻게 내맡기겠는가?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버릴 수 있다. 그러나 걸인은 어떨까? 걸인에게는 버릴만한 아무런 재산도 없다. 위대한 학자는 자기의 지식을 버릴 수는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은 어떨까? 그것을 갖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 그대에게 지식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을 버리고 무지 상태로 겸허해 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런 지식도 없다면 어떻게 그것을 버리겠는가?
소크라테스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것이 두 번째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지식이란 모두 쓸모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것은 소크라테스와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았던 사람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성은 훈련되어져야 하고 지식은 획득되어져야 하며 에고는 결정화되어야 한다. 이것이 삶의 맨처음 단계이다. 가졌을 때에는 버릴 수도 있다. 이 차이는 대단한 것이다.
길 위의 걸인과 길 위의 붓다…… 두 사람 모두 걸인이다. 그러나 질은 완전히 다르다. 붓다는 자기 의지에 의한 걸인이다. 그는 무리한 구걸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자유 의지이다. 붓다의 구걸행위는 그가 부를 맛보면서 그것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알고 나서의 일이다. 붓다가 걸인이 되는 것은 이 세계의 왕국이 그에게는 헛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붓다의 구걸에는 풍요로움이 있다. 어떤 왕도 이토록 풍요롭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왕은 아직 길을 가는 도중에 있지만 붓다는 하나의 원을 완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요로웠던 적이 한 번도 없는 걸인도 역시 길 위에 서 있다. 그의 구걸은 단순한 구걸이다. 그는 풍요의 맛을 모른다. 어떻게 그로 하여금 충족시켜 보지 못한 부에 대한욕망을 포기하게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그에게 왕국 같은 것은 헛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그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미녀 같은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어떻게 그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미녀를 모르기 때문에 그에게는 그렇게 말해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 오직 경험해야만 포기에 대한 열쇠를 얻을 수가 있다. 경험이 없이는 단지 자신을 위안할 수 있을 뿐이다. 많은 가난한 사람들,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그대의 아내가 아름답지 못하면 그대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미녀에게 어떤 가치가 있단 말인가? 육체는 단지 육체일 따름이다. 그리고 육체는 언젠가는 죽어 없어질 운명의 것이다. 육체는 죽음의 소굴이다.”
그러나 그대 내부 깊숙한 곳에는,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는 욕망이 남아 있다. 그리고 욕망은 경험을 거쳐야만, 이것은 위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야만 사라진다.
가난한 자는 “궁전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자기를 위안한다. 하지만 그는 안다. 거기에는 무엇인가 있다는 것을…… 그렇지 않다면 왜 누구나 부를 얻기 위해 광분하겠는가? 그리고 그 자신도 빠져들어서 미쳐 가고 있다. 그는 꿈속에서는 궁전에서 산다. 꿈속에서는 그는 황제이다. 그러나, 낮 동안에는, 길 위에서 구걸하고 있는 사이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흥미가 없다.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나는 포기했다.” 이런 위안은 전혀 쓸모가 없다. 그것은 거짓이며 위험한 일이다.
올바르게 성숙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삶의 첫 단계는 에고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을 버리는 것이다. 이 때에 하나의 원이 완결된ㄷ.
아이들은 부모에게 반항하고 부모와 투쟁해야만 성장한다. 부모와 분리되고 대립함으로써 그들은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에고를 획득한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매달리고 순종하면 그들은 결코 자신의 힘으로 설 수가 없다. 아이들은 길을 잃고 해매야 한다. 이것이 삶의 존재 방식이다. 그들은 독립해야 한다. 그리고 독립에는 아픔이 따른다. 거기에는 싸움이 있다. 그러나 그대가 자신은 존재한다고 느낄 때에만 그대는 싸울 수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원이다. 자신은 존재한다고 깨닫게 되면 더욱 더 싸움하게 된다. 싸우면 싸울수록 그대는 강해지며 더욱 더 존재하게 된다. 그대는 자신의 존재를 느껴간다. 아이들은 완전히 독립을 획득했을 때 성숙을 얻는다. 이 독립성을 위하여 아이들은 길을 잃고 해매야 한다.
죄인은 사회로부터, 혹은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길을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죄인은 독립과 에고를 잘못된 방식으로 구하고 있다. 성자도 역시 독립을 구한다. 그러나 옳은 방식으로 구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릇된 방법은 언제나 쉽게 따를 수 있다. 성자가 되는 길은 어렵다. 왜냐하면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죄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대, 이것을 잘 이해하라. 그대는 죄인이 되기 위해서 먼저 별도로 성자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대가 성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죄인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의 성스러움은 빈약해지며 결코 풍부해질 수 없다. 그것은 극히 단조롭고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생명력이 없고, 여름의 바닥까지 마른 강처럼 흘러넘치는 강물이라곤 전혀 없을 것이다.
“그 중의 한 마리가, 가장 큰 놈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
내가 알기로는 양의 세계에서 <가장 크다>란 <가장 좋은 것, 최고>의 의미이다. 가장 큰 양이 가장 좋은 양이기 때문이다. 그 털은 풍성하며 지방분도 많다. 그러므로 그런 양은 사려면 비싸고 팔면 이익이 크다. 양은 크면 클수록 좋다. <가장 큰 것>은 <가장 나은 것, 최고>를 의미한다. 그런데 그러한 최고의 양이 길을 잃은 것이다. 이것은 상징적이다.
“양치기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양들은 가치가 없다.
왜 예수는 언제나 양치기와 양들을 선택해서 비유로 삼는가? 거기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그의 비유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 양의 무리란 평범한 정신을 가진 군중을 의미한다. 그들은 무리를 이루어 살아간다. 길을 가는 양의 무리를 보라. 그 무리는 마치 집단 정신이라도 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독립된 존재로서가 아니다. 서로 밀치고 웅성거리는 것은 좋아하지만,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두려워한다. 양들은 언제나 무리를 지어서 움직인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이다. 학교 교사가 양치기를 하는 아버지를 둔 아이에게 질문을 했다. “너희 집에 열 마리의 양이 있다고 하자. 그 중에서 한 마리가 울타리를 넘어 도망치면 뒤에 남은 양은 몇 마리이냐?”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 마리도 남지 않습니다.” 선생은 놀라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이것은 산수 문제이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양이 열 마리 있다고 하자. 그런데 한 마리가 울타리를 넘어 도망쳤다. 뒤에 남은 것은 몇 마리이냐?”
아이는 다시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산수를 알고 계실지 모르지만 저는 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단 말입니다. 한 마리도 남지 않습니다.” 양에게는 집단 정신이 있기 때문에 무리지어 몰려다닌다. 한 마리가 도망을 치면 모두 함께 도망치는 것이다.
양치기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뒤에 남기고 길을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예수는 늘, 하느님은 죄인을 찾아 나서며 평범한 중간 계층은 찾지 않는다고 말한다. 평범한 인간은 찾을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 만큼의 가치도 없다. 더구나 그는 반드시 제 갈 길을 가고 있으므로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그는 길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치기는 아흔 아홉 마리를 숲속에, 어둠 속에 남겨두고, 길을 잃은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선다. 이 한 마리가 비로소 개인적인 존재로 되었기 때문이며, 비로소 자아를 얻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아흔 아홉 마리에게는 자아가 없다. 그들은 하나의 무리일 뿐이다.
그대의 존재 전체를 보라. 아직도 무리지어 물려 있는 상태인가? 아니면 그대는 하나의 자아를 획득했는가? 그대가 자아를 획득하면 그때 신은 그대를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럴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그대라면 찾아 나서야 하고 발견해야만 한다. 그대는 원의 반을 얻은 것이다. 이제 나머지 반은 자신을 내던지는 데 있다. 이제 남은 반은 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그대가 자아를 가질 때에는, 신은어디에서든, 어떤 형태로든 그대를 찾는다. 왜냐하면 그대는 그대 쪽에서의 일은 끝냈기 때문이다. 그대는 개별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제 그대가 그 개별적인 존재를 잃는다면 그대는 보편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그 차이이다. <개인>이기 전에는 그대는 단지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보편성이라곤 없었다. 단순한 무리에 불과했다. 이것을 지나야 그대는 개별성을 얻는다. 그대는 길을 잃고 홀로 서며, 그대는 하나의 자아가 된다. 그러고 나서 그대가 이 자아를 잃을 때 그대는 하나의 바다가 된다. <전체>가 되는 것이다.
지금 현재 그대는 아직 없다. 그러므로 전체가 될 수 없다. 지금 현재 그대는 저 무리 속에 있다. 그대는 무리 속의 하나의 번호에 불과하다.
군대에서는 이것을 잘 하고 있다. 그들은 병사들에게 군번을 매긴다. 이름은 일체 없다. 실제로 그대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그대는 아직 이름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대는 단지 하나의 번호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병사가 죽으면 그들은 칠판 위에 군번 <몇 번>이 떨어졌다고 기록을 한다. 병사는 군번이다. 번호는 대체될 수 있다. 만약 1번이 떨어지면 다른 사람으로 대체시키고 그 사람에게 다시 1번을 매기면 된다. 군대 안에 있는 것은 양들이다. 그리고 군대란 완벽한 사회이다. 개미들의 사회와 같은 완벽한 사회, 하나의 무리이다. 무리 지은 곳의 특성을 알고 싶으면 군대를 보라. 그들은 그대를 완전히 규율 속에 묶어 놓는다. 그것은 그대의 독립성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방식이다. 명령은 명령이다. 그대는 명령에 관해서는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우향우!”라고 말하면 그대는 오른쪽으로 돌아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가 있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이다. 어떤 대령의 아내에게 굉장한 고민거리가 있었다. 남편인 대령은 왼편으로 돌아누워 잘 때마다 심하게 코고는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것도 보통 코고는 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마치 으르렁대는 소리와도 같았다. 이 때문에 그녀는 거의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령은 오른편으로 돌아누워 자게 되면 코를 골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정신과의사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물어보았다. 의사는 말했다. “간단한 일이 아닙니까? 주인 양반이 코를 골면 오른편으로 향하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어렵단 말이에요. 주인은 몸이 몹시 무겁고, 게다가 그렇게 하려고 하면 화를 내지요. 그래서 밤새도록 몇 번이고 이런 짓을 하다가 날을 새버리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에요.”
그러자 그 정신분석의는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부인. 대령의 귀에다 이렇게 속삭이기만 하면 됩니다. <우향우>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확실히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명령은 명령이다. 명령은 무의식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있는 것이다.
사회는 하나의 무리로서 존재한다.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곧바로 군대로 바꿀 수가 있다. 히틀러가 독일 전체를 하나의 병영으로 바꾸는데 성공한 것은 이 때문이다. 모택동도 자기 나라 전체를 병영화하는데 성공했다. 사회는 바로 경계선 위에 서 있다. 그것은 즉시 전환될 수 있다. 사소한 규율로 사회는 군대의 병영으로 바뀔 수가 있다. 개성은 허용되지 않으므로 거기 개성이라곤 없다. 그대는 자기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마치 양의 무리와 같다. 양과 같은 정신들이다.
그대에게는 자신의 의식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아니면 자신이 태어난 사회의 일부로서 살고 있을 뿐인가? 그대는 힌두교도이다. 회교도이고 기독교도이며 시크교도, 자이나교도이다. 그러나 그대는 인간인가? 그대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인간은 사회 따위에는 소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와 같은 이는 인간이다. 예수와 같은 이는 인간이다. 나나크(Nanak, 시크교의 개조)와 같은 이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대는 아니다. 그대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도 소속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발로 선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말하고 있는 의미이다. “가장 좋은 한 마리가 길을 잃는다……”
일단 한 마리가, 가장 좋은 놈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양치기는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그 한 마리가 발견될 때까지 찾아 나선다.”
그대는 <신>에게 기도를 하지만 신은 그대를 찾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신을 놓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우선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신은 그대를 찾아나설 것이다. 신을 찾을 필요가 없다. 더구나 그대의 힘으로 어떻게 신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대는 신의 주소도 알지 못한다. 그대는 신이 어느 곳에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대가 아는 것이라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들과 이론들 뿐이다. 그런 것들은 그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는다.
어떤 목사가 한 도시에 처음으로 부임해 오는 길이었다. 그런데 택시 운전기사들이 파업 중이었으므로 택시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날 저녁 설교를 하기로 되어 있었으므로 어떻게든 교회에 가야만 했다. 그래서 목사는 한 소년을 붙잡고 교회는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 소년은 친절하게도 그를 교회까지 데려다 주었다. 교회에 도착하자 목사는 소년에게 감사하면서 말했다. “네가 도와준 데 대해 나는 참으로 감사하고 있다. 너는 길을 가르쳐 주었을 뿐 아니라 함께 와 주기까지 했다. 네가 만일 하느님이 어디에 계신가를 조금이라도 알고 싶거든 오늘 저녁에 내 설교를 들으러 오너라. 나는 하느님께 가는 길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자 소년은 웃으면서 말했다. “목사님은 교회로 가는 길도 모르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아신단 말이지요? 나는 가지 않겠어요.”
그러나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그대가 가령 교회로 가는 길을 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 누구라도 교회로 가는 길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별 차이가 없다. 교회는 하느님의 거처가 아니다. 그대, 교회가 하느님의 거처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대는 신을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그대를 찾을 수 있다. 신은 그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기본적인 가르침 중의 하나이다. 즉, 인간은 신성을 찾아갈 수 없지만 신성은 인간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대에게 준비만 갖추어지면 언제라도 그대를 찾아온다.
따라서 문제는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준비하고 기다리는 데에 있다. 그리고 최초의 준비는 한 개인이 되는 일, <길을 잃는 일>이다. 첫 번째 것은 반역적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그대는 자아를 얻을 수가 잇다. 우선 첫 번째 것은 무리를 초월해가는 것이다. 테두리가 뚜렷하게 공식화된 사회적인 한계와 범위를 뛰어넘으면 그 곳에는 끝이 없는 평원이 펼쳐져 있다. 그것을 초월한 곳에는 신의 광대무변함이 존재한다. 사회는 숲속에 있는 하나의 개간지에 불과하다. 사회는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그대들의 법이란 모두 인간이 창조한 것이다. 그대가 덕이라 부르든, 죄라 부르든, 모두가 인간의 창조물이다. 그대는 실제로는 덕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이 덕(virtue)이란 말은 라틴어에 그 어원을 갖는 실로 아름다운 말이다. 라틴어에서의 이 말의 의미는 <힘 있다, powerful)>라는 것이다. 그것은 <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용감하다(virile), 힘 있다>라는 뜻이다.
힘차게 존재하라. 자기를 주장하라. 그대 자신의 발로 서라. 그대여, 무리의 희생물이 되지 말라. 생각하기 시작하고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하라. 그리고 자기의 고독한 길로 가라. 무리지은 양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숲속에 남겨 둔다. 그들에 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다. 그들은 방황하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밀치면서 웅성대고 있을 테니까 언제라도 찾아낼 수가 잇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저 한 마리, 무리를 이탈한 저 가장 놓은 놈 한 마리이다. 양이 무리를 이탈했다는 것은 그 양에게 반드시 <힘>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 양은 숲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양은 두려움을 넘어선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양은 무리를 이탈할 수 있다. 이러한 두려움 없는 상태야말로 바로 존비의 첫 번째 단계이다.
자아의 획득이야말로 바로 그것을 전부 내던지는 길로 가기 위한 첫 걸음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역설적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대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대는 항상 겸허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그것이 아니다. 먼저 자아가 필요하다. 예리한, 칼날같이 예리한 자아가 필요하다. 자아는 그대에게 그대 존재의 명확성을, 다른 사람과의 구별을 가져다준다. 그래야만 그대는 자아를 버릴 수 있다. 그대에게 에고가 있을 때에는 그대는 그것을 버릴 수 있다. 그때 그대는 겸허해진다. 그 겸허함은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가난한 사람의 겸허함과는 다르다. 약한 자의 겸허함이 아니다. 그것은 강한 자의 겸허함이다. 힘이 넘치는 사람의 겸허함이다. 그때 비로소 그대는 그 전부를 버리고 굽이쳐 갈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안 된다.
“그는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두고 그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해매 다녔다.”
그리고 그대 잘 기억하라. 그대는 신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신이 그대를 찾아온다. 가치있는 자가 되어라. 그러면 신은 그대를 찾아올 것이다. 신은 그대에게로 오는 길을 만들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결정화되는 순간, 신적인 에너지 전체가 그를 향해 움직인다. 신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으로서 그대에게 올지도 모른다. 스승으로서, 구루로서 그대에게 올지도 모른다.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그대에게 올 것이다. 그러나 어떤 방식으로 오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신이 생각할 문제이므로 그대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먼저 자아를 획득하라. 개인이 되어라. 그러면 우주적인 사건이 그대에게서 일어날 수 있다.
“지칠대로 지친 후에 양을 찾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양에게 말할 것이다. ‘나는 다른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
목사들은 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반역적으로 된 자, 신은 그를 더 사랑한다.” 목사들은 말할 것이다. “무슨 소리인가? 신이 길을 잃은 자를 더 사랑하다니, 그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인가?”그러나 예수의 이 말은 옳다. 예수는 길 잃은 양이었다. 붓다는 길 잃은 양이었다. 마하비라 또한 길을 잃은 양이었다. 무리가 그 평범함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을 동안에, 한편에서는 마하비라나 예수, 붓다같은 인물들에게 누군가 찾아온다. 신은 그들을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대여, 이것이 바로 보리수 밑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그곳에서 붓다는 완전한 개인으로서, 사회나 문화, 종교의 모든 사슬을 끊어버리고 아무런 연결도 없이 홀로 고독하게 앉아 있었다. 그때 신은 모든 장소에서 온갖 방향으로 그에게로 달려왔다. 신은 어느 곳에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붓다는 신이 되었다. 그리고 붓다는 신의 존재를 부정했었다. 이것도 길을 잃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나는 그 어떤 신도 믿지 않는다.” 그는 “사회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다. 종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베다를 부정하고, 바라문이나 카스트 등의 인도 카스트 제도를 부정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힌두교도가 아니다. 나는 어떤 사회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어떤 이론도 믿지 않는다. 스스로 진리를 깨닫지 않는 한, 나는 아무 것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계속 부정했다. 그리하여 그가 완전히 홀로 되는 순간이, 모든 것과 연결 관계가 끊어지고 철저하게 파괴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는 드넓은 바다 속에서 고독한 섬이 되었다. 완전히 홀로 되었다. 25세기 전 저 보리수 밑에서 아아, 신은 길 잃은 사람, 이 젊은 양에게 사방에서 달려왔다. 그리고는 지칠대로 지쳐서 신은 이렇게 양에게 말했다. “나는 다른 아흔 아홉 마리의 양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
이것은 예수 역시 들었던 말이다. 이것은 언제나 그러했다. 이 말은 근본적인 법칙이다. 신이 인간을 찾아온다.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준비만 하면 된다.
그러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그대, <개인>이 되라. 혁명가가 되어라. 사회를 초월하고 두려움 없이 모든 쇠사슬과 관계들을 넘어서 가라. 홀로 되어 마치 자신이 세계의 중심이라도 된 것처럼 존재하라. 그러면 신은 그대를 향하여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달려오는 신 속에서 그대는 자아를 잃는다. 고독한 섬은 바다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갑자기 그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먼저 사회를 떨쳐 버려야 한다. 이것은 인간 내부의 역학이다. 자아는 사회가 있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계속해서 사회를 떨쳐 버리면 그때 자아가 완전히 홀로 되는 순간이 온다. 사회가 전부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회 없이는 자아 또한 존재할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는 그대가 에고로서 존재하는 것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계속해서 사회를 떨쳐버리면 서서히 아주 서서히 그 기반은 사라져 간다. <너>가 없으면 <나>란 존재할 수가 없다. <너>가 떨어져 나가기 때문에 <나> 또한 소멸해 간다. <너>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면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너>를 떨쳐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나>도 사라진다.
그러나 먼저 <너>를 떨쳐버림으로써 <나>는 보다 예리해지고 더욱 결정화되며 중심이 정해진다. 뛰어나고 강하게 된다. 그때 그 <나>는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신성의 달려옴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그의 이 말들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반역적이게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길을 잃으라고 가르쳤다. 그는 하느님은 길을 잃은 자들, 죄인, 반역자, 그리고 자아를 가진 자들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은 그 말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지나친 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나이를 침묵시켜야 했다. “이 사람은 입을 다물게 해야 한다. 그는 너무 지나치다. 그는 사회 전체를 파괴하고 있다.” 그는 사제들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교회가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는 무리들에게 반대했다. 그대를 둘러싸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무리들이다. 그 무리는 몹시 당황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은 적이다. 그는 우리들의 기본 토대를 파괴하려 하고 있다. 무리를 짓지 않고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남은 아흔 아홉 마리에게 길을 잃으라고 가르침으로써 양들은 더욱 굳게 뭉쳤다.
만일 그대가 계속 그렇게 가르친다면 그들은 복수할 것이다. 그들은 그대를 죽이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젠 되었다.”
우리들은 무리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들은 무리의 일부이다. 우리들은 혼자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홀로 존재할 수 있을까를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과 함께 산다. 우리들에게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이다. 다른 사람이 없다면 그대는 누구인가? 그대는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가 없다.
이것이 문제이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은 온갖 종교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그대, 참다운 종교는 길을 잃은 그 한 마리에게서만 가능하다.
용기 있는 자가 되어라. 그 개간지를 넘어서 벌판으로 나아가라. 황야 속으로 달려가라. 그 곳에는 삶이 있다. 그렇게 해야만 그대는 성장한다. 거기에는 고통이 따를지도 모른다.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성장이란 없다. 거기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괴로운 시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성장이란 없다. 사회는 복수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라. 그것은 일어나야 하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 한 마리의 양이 돌아오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죄인이다. 이 양은 길을 잃었었다. 이 녀석은 우리들과는 동료가 아니다. 이 양은 우리들과는 별개의 존재이다.”
그리고 이들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은 양치기 자신이 그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왔음을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놈은 길 잃은 양이었고 그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양치기는 기뻐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온 것이다.
예수는 말한다. 양치기는 집에 돌아와 친구들을 초대하여 축하 잔치를 벌인다. 양을 잃었었고, 드디어 그 양을 찾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죄인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크나큰 환대를 받는다.” 왜냐하면 양을 한 마리 잃었었고, 드디어 그 양을 찾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