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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역사가 흐르는 길 원문보기 글쓴이: 영천호
을사조약 직후 고종 황제의 밀명을 받은 정환직(鄭煥直)은 고향 영천에서 계몽운동을 벌이고 있던 아들 용기(鏞基)에게 의병을 일으키게 했다. 이에 1906년 3월 정용기·이한구·정순기·손영각 등이 거병하고, 청송의 임용상이 합세한 것이 경북 동남부 지방에서 활약한 산남의진(山南義陣)이다.
후기의병은 우재룡이 지휘하는 해산군인이 합류하면서 전장은 보현산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군위, 동쪽으로는 흥해에 이르렀다. 강릉으로 북상을 꾀하던 산남의진은 영일군 죽장면 입암리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려다 오히려 역습을 받아 정용기를 비롯한 지휘자들이 전사했다.
2차 산남의진이 무너지자 정환직은 6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뒤를 이어 의병장으로 나섰다. 그는 이세기·우재룡 등과 보현산 및 영일 북동대산을 거점으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당시 경기도를 중심으로 13도창의진이 편성되고 서울 진공작전을 시도하자 부대를 관동지방으로 북상시키던 정환직은 청하에서 일본군에 체포되어 영천에서 총살로 순국했다.
‘몸은 죽으나 마음마저 변할소냐(身亡心不變), 의로움은 무거우나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義重死猶輕), 뒷일을 누구에게 맡기리오(後事憑誰託), 말없이 새벽까지 앉았노라(無言坐五更)’. 아들을 앞세우고 순국한 노의병장이 남긴 절명시이다.
충효동 사적비(忠孝洞 史蹟碑)
산남의진 정대장(양세출신) 충효동 사적비(忠孝洞 史蹟碑) : 산남의진의 정환직∙정용기 부자의 출생지인 검단리를 충효동이라 하고 그 사적을 기록한 비
짐망화천지수전세비(朕望華泉之水傳世碑)
짐망화천지수전세비(朕望華泉之水傳世碑) 삼남도시찰사와 중추원의관 등을 지낸 정환직(鄭煥直 1843~1907)은 1905년 굴욕적인 을사늑약 당시 고종황제로부터 경이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 라는 밀지를 받게 됐다. 화천지수란 제나라 환공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데 힘써 달라는 황제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있는 것이다.
산남의진(山南義陳)
산남의진은 1906년 3월 경북 영천에서 조직된 항일의병부대이다. 산남은 문경새재 즉 조령 이남의 영남지방을 이르고 의진은 오직 구국일념의 충성된 의기로 뜨겁게 뭉쳐진 의병진영을 줄여 일컫는 말이다.
정환직(鄭煥直), 정용기(鄭鏞基) |
정환직,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山南 ; 영남을 말함)의진은 1905년 을사오조약 늑결 직후 영천을 중심으로 한 경북 남동부 일대에서 그 위세를 크게 떨친 의병이다. 특히 이 의진을 주도했던 정환직, 정용기는 부자간으로 양대가 의병대장에 올라 항일전을 수행한 끝에 모두 순국하고 만, 의병항전사상 유례가 드문 경우에 해당된다.
정환직(鄭煥直) 정환직은 1844년 5월 경상북도 영천군 자양면(紫陽面) 검단리(檢丹里 ; 금(今), 충효동(忠孝洞))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백온(伯溫), 호는 동엄(東嚴)이며 연일(延日)이 본관이다. 임란 때 민병을 모집, 영천, 월성(月城) 일대에서 크게 용맹을 떨친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라하며, 증조부 정하호(鄭夏濩)는 성균관생원이었다 한다. 이와 같은 집안 내력으로 미루어, 그는 다소 가세가 기울게 된 잔반의 후예로 태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이와 같이 정환직이 이끄는 산남의진은 대구, 경주, 영천을 중심으로 영덕, 흥해, 청송, 의흥, 신녕 등지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일군경의 전력은 증강되어가는데 비해 의병측은 피로가 쌓이고 무기와 탄약이 점차 소모되는 등 전력이 현저히 저상되어 전투가 거듭됨에 따라 전황이 점차 의병측에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육신이야 죽더라도 마음만은 변치 않고
정용기(鄭鏞基) 정용기는 자를 관여(寬汝), 호를 단오(丹吾)라 하고 1865년 역시 영천 자양 검단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넉넉치 못했던 까닭에 15세 때에 학문수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으나, 원래 타고난 자질이 특출났으므로 서예, 회화, 음악, 율학 등 다방면에 능하였고, 그 가운데서도 회화에 특히 뛰어났다고 한다.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의진은 영해에서 거의한 신돌석 의진과 연락을 취하면서 청하읍을 공격목표로 삼고 4월 28일 행군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의병들이 경주 관내의 우각(牛角 ; 금(今), 영일군 신광면 우각동)에 당도하였을 때 경주진위대장 참령 신석호(申錫鎬)가 정용기에서 간계를 담은 서신 한 통을 보내왔다. 서울에서 정환직으로 추측되는 대관이 구금당하였으니, 이 문제로 자기와 만나 상의하자는 것이었다. 정용기로서는 대단히 중용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의의 구상이 아버지 정환직으로부터 나온 이상 그 일이 중간에 누설될 경우 의진의 활동에 큰 제약이 가해질 것은 물론이며 더욱이 그의 아버지의 신변도 극히 염려되었던 것이다. 이에 정용기는 진위대 병사들을 따라 경주성 안으로 들어갔으나, 이것을 그를 체포하려던 진위대측의 함정이었다. 그는 입성 즉시로 피체되었으며, 얼마 뒤 대구 경무청으로 압송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적신(賊臣)은 나라를 팔려 하고 이웃나라는 강성하여 외모(外侮)가 날로 심하여 대세가 장차 기울려고 하니 5백년 지켜오던 문명국이 장차 공허로 돌아갈 것이며 2천만 생령의 멸망일이 목전에 당도하였다. 이에 그 누가 통곡하지 않으리오. 열성조(列聖朝) 함양의 덕을 추모해야 할 사류들은 (중략) 긴 밤에 벼개를 높이 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다만 구구한 낙을 취할 뿐이요 동량지화(棟梁之火)를 알지 못하고 있다. (중략) 비록 우리들은 용렬한 재질이나 역량을 헤아릴 여가도 없이 장차 나라가 기울어지려 하는데에만 전심이 쏠리고 민족을 구하려는 충곡(衷曲)만이 용솟음쳐 민병을 모아 널리 거의를 선포하는 바이니, 존비귀천(尊卑貴賤)과 상하장유(上下長幼)를 가릴 것 없이 일치단합하여 의진의 대열에 동참토록 하시라.
이와 동시에 정용기는 광무황제에게 창의의 배경과 그 정당성을 밝히는 상소를 올렸고, 또 전국민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청조문'(請助文)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각지에서 의병이 쇄도해와 정용기가 이끄는 산남의진은 그 기세를 크게 떨칠 수가 있었다. 즉, 부산, 대구 방면에서는 김현극(金賢極), 유화실(柳花實)이 화약을 운반하여 오고 안동에서 김석정(金石井), 동해 방면에서 임중호(林中虎), 의성 지방에서 박태종(朴泰宗), 경주 지방에서 권규섭(權奎燮) 등이 각기 일단의 의병을 거느리고 합류해 왔던 것이다. 이에 산남의진은 아래와 같이 부서를 재편하였다.12)
산남의진은 재기 이후 1907년 9월 대장 정용기가 전사할 때까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의 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영천, 경주, 청하, 청송 등지에 분대를 두어 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 결과 기동성과 연합작전 수행 등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보다 효과적인 항전을 수행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 군사가 천명이라 불리워지나 실상은 8백에 불과하고, 무기와 탄약이 부족해 일장 전투 뒤에는 다시 산곡으로 후퇴하여 탄약 준비를 해야 하니 도저히 전진할 수가 없다. (중략) 또 한 이유는 제(정용기)가 경상, 강원 연락지대의 내륙을 담임하기로 하고 신돌석은 연해 요지에 있는 수로를 담임하기로 약조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신돌석이 수차 연해에서 낭패를 당하게 되니, 저도 또한 군기준비를 못하여서 여기저기로 방황하는 동안에 서울과 영남에서 언약한 일이 모두 어그러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8월이 되어 한국군이 강제 해산됨에 미쳐, 우재룡(禹在龍)을 비롯해 일부 해산군인들이 산남의진에 가담해와 전력향상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에 정용기는 각지의 분대에 북상령(北上令)을 내려 부대별로 관동 방면으로 이동을 개시하도록 조처하였다. 그리하여 장영도소(將營都所 : 지휘본부)를 영일군 죽장면 매현리(梅峴里)로 정하고 정예병 백여명을 이곳에 주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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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환직·용기 부자의 주요 활동지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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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배용일(裵勇一) : <산남의진고(山南義陣考)>(《논문집(論文集)》6, 포항실업전문대학, 1982), p.17. 2) 정환직은 시종관으로 있던 1899년 11월 20일 밤 종묘화재시(宗廟火災時) 광무황제를 업고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일이 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황제는 언제나 그를 신임했다 한다. (송상도(宋相燾) : 《기려수필(騎驢隨筆)》, 1955, p. 140 참조) 3) 송상도(宋相燾) : 《기려수필(騎驢隨筆)》, pp.139∼140. 4) 위와 같음. 배용일(裵勇一) : 앞의 논문, p.4 참조. 5) 을사오조약 늑결 직후 정환직이 광무황제를 배알하니 황제는 그에게 "화천(和泉)의 물을 아는가? 이것이 짐의 바라는 바 짐망(朕望)이다."라고 하여 '짐망'(朕望) 두 자의 밀조를 내렸다 한다. '화천(和泉)의 물'은 옛날 중국의 제경공(齊景公)이 제후국의 군사들에게 포위되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차우장(車右將) 봉축부(逢丑父)가 기지(奇智)를 써서 화를 면하게 한 고사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산남의진사(山南義陣史)>, 《독립운동사자료집 3》, 보훈처, 1971, p.381) 6)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보훈처, 1970), pp.578∼579. 7)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 pp.580∼581 참조. 8) 송상도(宋相燾) : 《기려수필(騎驢隨筆)》, p.142. 신망심불변(身亡心不變) 의중사유경(義重死猶輕) 후사빙수탁(後事憑誰託) 무언좌오경(無言坐五更) 9) 김의환(金義煥) : 《항일의병장열전(抗日義兵將列傳)》(박영사(博英社), 1975), pp.100∼101. 10) 산남의진유사간행위원회(山南義陣遺史刊行委員會) 편(編) : 《산남의진유사(山南義陣遺史)》(1970), pp.83∼840,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 pp.351∼353, 배용일(裵勇一) : 앞의 논문, p.27 참조. 11) 이순구 편 : <산남의진사(山南義陣史)>《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集) 3》, (보훈처, 1971), pp.384∼385 :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보훈처, 1970) pp.388∼389 참조. 12)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 pp.389∼390. 13) 배용일(裵勇一) : 앞의 논문, p.23. | ||||
충효재 찾아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