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아홉 그때
봄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이성부 시인의 ‘봄’ 전문)
진도에서는 봄과 겨울의 간격이 분명하지 않는다. 봄인듯 하면 찬 바람이 머리칼을 헤집고 겨울의 무채석을 떠올리기도 전에 푸른 들판이 1월의 찬 기운을 금방 씻어버린다. 소월이 ‘갈봄 없이’ 산에 산에 꽃이 핀다고 한 것처럼 진도도 그 기간에 오히려 더 많은 꽃들이 피어난다.
지난 가을부터 이 겨울의 한 가운데로 끊임없이 푸른 꿈들을 심고 묶고 다시 부풀리는 작업들을 긴 고랑마다 노래의 거름을 뿌렸던 진도 아낙네들의 지심이 바닥을 다져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봄은 마음에 먼저 있기에 사람에 따라 기다림이 더 기쁘거나 더딘 내음이 간절함을 더해준다. 사람이 그리운 그 겨울에 진도는 봄의 어머니가 기꺼이 된다.
설이 곧 다가온다. ‘너 먼데서 이기고 온 사람’들인 향우들의 발걸음이 벌써 느껴진다.
민주화의 봄을 재촉한 80년대를 지나 진도는 지자체 실시와 함께 늘 전환점에 들어서 있다는 주장과 해법의 다리를 번복해 건너왔다. 하지만 한국의 위상이 세계 속에 높아질수록 진도는 무언가로부터 더 멀어져갔다. 사람도 봄도 희망도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그런 화신보다 어디 뻘밭 구석에서 한눈을 팔기도 했었다.
그래도 다시 봄의 전령역할을 자임하는 진도의 들판이 푸르다. 명절을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마늘쪽처럼 일어나기도 한다.
이제 우리지역 특성에 맞게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변화와 선택의 대안은 무엇인지 우리는 끊임없는 의심(무분별한 의혹이 아닌)을 통해 강력한 믿음을 얻어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저 좋다고 관성에 따라 간단하게 판단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게 되면 그만큼 우리의 미래도 자기주도를 잃기 마련이다.
올 지방선거에서 특히 진도 군민들의 표심이 각개 적으로 분산되어 나타나기 보다는 후보 초청 토론과 사전검증을 통해 분명한 공약이행을 다짐받아야 한다는 게 뜻있는 지역 사회단체 관계자들의 의견이다.
항간에서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풍자가 한동안 나돌고 있다. 더 넓은 소통에 이르지 못하는 현 정권 박근혜 정부의 집밖 나도는 1%의 갑과 통치세력을 빗대어 하는 ‘안녕하지 못한’ 세태를 꼬집었지만 진도에서도 ‘군수만 모르는 일들이 너무 많다’는 것과 상통한다는 주장도 있다. ‘내 식구’라는 공무원 감싸기가 도를 넘어 분명한 잣대를 놓친 것은 아닌가 안타까움을 표시한 비유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글로벌한 재능이 넘쳐나는 화법보다는 더 낮게 더 세심히 살피는 진정성이 필요하다는 간절한(?) 불만이 분노로 물결을 일으키려 한다.
군정홍보지인가 특정인띄우기 전단지인가
지난 몇 년 동안 점진적인 변화를 이뤘지만 다시 제기되는 여러 사안에 대해 시민사회단체의 심도 있는 지적과 의견에도 마이동풍 식으로 있다가 뒤늦게 해명해 때를 늦춰 오히려 반발을 산 것도 분명히 기억된다. 진도군의회 회의 인터넷 방송이 실시되었지만 재방영은 아직 안 되고 있다.
모 신문은 ‘군수신문’ 또 다른 ‘군정 홍보지’ 이고 이와 다른 신문은 또 누구를 위한 ‘특정인 신문’이라는 세간의 비아냥거림을 서로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바람풍’을 지역신문이 ‘바담풍’으로 해석하는 것인지 본디 ‘바담풍’ 밖에 대 군민 발성 능력의 한계에 봉착한 것을 바람풍으로 해석했는지 곧 판단할 때가 왔다.
지자체가 시작된 지 언제부터 담당 공직자들이 ‘이렇게’ 보고하면 ‘응’ 저렇게 보고해도 ‘응’만 하면서 “모두가 내 사람”이라는 자기최면에 빠진 것은 아닌가 의심하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황희정승의 일화는 우리시대와 다를 뿐만 아니라 가화(家和)를 위한 자기 집안일에 국한될 일이지 무랑태수격이 되어서는 군정의 기강이 서지 않는다.
임기 동안 사람은 자주 만났는데 공감과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는 평도 나온다. 듣는데 더 치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다보니 ‘구관이 명관’이라면서 일각에서 “도대체 현 군수가 한 것이 무엇이냐”고 되묻기까지 한다. 예산확보 분야에서 기대치보다는 실망 적이라는 주장도 뒤따른다.
이제 나무와 숲을 함께 보는 지혜가 요구되는 시점인 것이다. 나무가 크면 그늘만 커져 다른 나무가 제대로 크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군민이라는 숲의 시대적 기후적 주기로 상록수림을 우거지도록 하거나 생태계를 주도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갖추어야 한다. 인물대망론은 그 주변사람들의 희생만 강요하게 마련이다. 호남의 슬픔과 낙후성은 인물에 대한 강요된 선택에 원인이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때로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말은 기득권의 화장발이 선 논리일 뿐이다.
그저 그런 소문에 이끌려 예단을 미리 하게 되면 편견이 들어서게 되고 올바른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우며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서는 안 된다.
진도는 현재 인구 3만의 문턱이 위협받을 정도로 군세가 약화되는 가운데 노령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농작물 가격도 해마다 널뛰기를 해 농사짓는 일이 도박이나 다름없다는 자조감이 오래 전부터 나왔지만 시원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경작관행을 벗어나지 못하는 농민의 책임도 없지 않다. 토지소유자가 토지 거래가격과 맞먹는 작물재배 판매를 해도 별로 남지 않는 사회경제적 구조는 더 큰 문제다. 우리는 농노해방과 산업화시대에 어설픈 정보화시대를 3천 원짜리 짜장면으로 융합해 살고 있을 뿐이다.
진도농민들은 분명 자기 땅을 소유하면서도 농업노동자로 전락한지가 오래이며 편리한 농사기계, 해산물 채취 및 작업관련 신제품을 제대로 검증도 못하고 구입해야 일이 가능하지만 정작 또 판매 유통에서는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이용료에 보험 없는 위험부담까지 거저 받아야 한다. 이게 현실이다.
‘진도군수의 진도’ 아닌 ‘군민의 진도’ 되려면
진도는 민선 5기에 들어서 농수산업 경쟁력 강화에 주력하고 특히 해삼 전복 김 미역 등 수산 양식업에 커다란 전환점에 들어서 있다고 주장한다. 휴양 레저산업의 유치에 따른 지역발전 기대에 일정정도 성과를 이룬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행정적 소외계층도 드러나 분쟁의 불씨를 남겼으며 각종민원도 이해에 따라 선별적으로 처리되거나 무시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행정 편의적 논리만 횡행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절차가 생략 무시되고 군의 행정작전이 실행되다가 각종 감사에서 호된 질책을 받아 징계를 받거나 취소하는 우습지도 않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LED사업, 수산사업, 각종 주민피해 민원 실종 등이 그런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래도 누구 하나 군민 사과를 하는 이가 없을 뿐 더 깊이 내밀하게 행정합리성에 매달리기만 한다. 사고 쳐도 승진점수로 연결되는 악순환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설날에는 이런 우려가 다 녹아내리길 간절히 기원한다.
앞서 거론한 민선5기 성과라는 이런 일들이 관심 있는 향우들과 경향각지의 은퇴자들, 군민들의 공감을 갖고 제대로 정착되기 까지 험난한 여정과 우려도 없지 않은 가운데 군민의식의 혁신적인 변화와 열정, 그리고 온 군민은 물론 향우까지 한 뜻으로 뭉치는 공동체 형성을 위한 일꾼을 찾는 여정이 기다리고 있다. 일개인의 영달과 명예가 우선되지 않고 봉사와 헌신을 통해 진도의 꿈을 실현하는 진정한 일꾼을 뽑는 우리 군민들의 뛰어난 선구안이 필요하기 때문에 더욱 더 자신을 자꾸 의심하며 확고한 믿음을 키워내야 한다.
봄은 당신에게 있습니다. 싸우고 피흘리고 고민하고 바람에 더 흔들리며 내 안에서 가장 황홀한 꽃을 피우기 위해 오늘 하얀 눈발을 기꺼이 맞을 것입니다. 뿌리가 깊어지는 저 들판의 푸른 대파 허리에 자진모리 아리랑 춤사위를 서로 서로 당겨 하얀 허리를 묶어보자고 합니다.
가장 어려울 때 가장 훌륭한 결단과 온몸을 다 받쳤던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씻김 고풀이에 엮고 풀며 닦아 새로운 이상향을 찾아왔던 그 정신을 본받아 재현할 때 진도는 분명 더 보배로운 내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선거라는 통과의례를 거쳐 또 다시 ‘군수와 행정기관의 진도’가 아닌 ‘군민 모두의 진도’가 되는 것 또한 군민의 손에 달려있는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