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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7월 초
아직도 북한의 해상을 통한 무장간첩의 침투를 비롯한 각종 도발이 계속되고 있는 시기며 통계를 분석시 특히 녹음이 우거진 7-9월은 간첩침투의 가장 취약기로 판단하고 있었다.내가 최초로 파견될 백아도는 인천수로 최외곽에 위치하며 서해안을 방어하는 길목으로 해군은 거기에 헬기 기지를 건설하고 배치함으로 지금까지 서해 외곽에서 간첩선 차단을 공군 전투기에 의존해 왔는데 자체 항공력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난 그 계획에 따라 최초 파견되는 항공팀의 막내 조종사이자 유일한 미사일 사수 였다.(ALT-3항공기 경우 wire guided missle을 장착했었고 이 미사일을 쏘기 위해서는 별도의 훈련을 받은 미사일 사수가 필요 했었다.) 조종사3명,정비사 8명의 선발팀으로 난 1981년 7월 초 항공기 정비 장비와 유류차 등을 인천에서 싣고 정비사들과 백아도에 들어갔다.
레이더 기지가 있었고 기지장에는 2년 선배 박학규대위가 있어 제반 근무지원(전력, 식사 등)을 도와주고 있었다. 건설 된 후 몇 달 채 방치되다 시피한 우리 파견대 건물을 청소하고 정비하기를 2주가 지나 파견대장 이기호 소령(4년 선배이고 집사람과의 만남을 이어준 중매쟁이기도 함)과 이걸하 대위(3년 선배)가 항공기를 갖고 들어왔다.
그리고 해무가 밀려왔다.새벽부터 시작된 해무는 1미터 앞을 가리운 채 하루종일 섬을 맴돌고 있었다. 공군의 경우 10년 기상데이터를 고려해서 기지를 건설한다는데 기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지도만 펴놓고 점을 찍은 해군 본부의 책상 작전이 빚은 사고의 단초가 채워졌다. 난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같이 온 선배 두 사람이 모두 육군에서 비행교육을 받은 완전 계기비행 초짜라는 것이다.(난 공군에서 비행교육을 받아 조금은 계기비행의 맛을 보았고 한글로 따지면 “가나다”쯤 쓸 줄아는 수준이었다) 이전 남해에서 거문도 파견을 경험한 난 계기비행 초짜선배들과 벌써 죽을 고비를 몇 번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군대에서 선배에게 "이래라,저래라"
' 말 할 수 없는 게 나를 두렵게 하는 것 이었다. 두해 선배부터 공군에서 계기비행 교육을 받은 선배들이 헬기에 배속되어 우리부대에 오기 시작했지만 계기 비행에서 모두가 초짜인 우리 비행대대에서 계기비행에 관해서는 내 자신을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건 내가 잘나고 못나고 한 문제가 아니라 버스 운전경력 10년 베테랑이라고 바로 지게차 운전을 잘 할 수 없듯이 계기비행과 시계비행은 완전히 장르가 다른 비행이기 때문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안개가 밀려 오고 있었다.
7월 26일 작전개시일에 맞추어 우린 사전 지역 적응 훈련이 필요했음에도 이놈의 안개 때문에 비행기가 온 후 열흘이지나도록 우린 비행을 할 수 없었다.
7월21일
아침부터 오락가락하던 안개였지만 가끔씩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어 비행이 가능 할 듯도 하였다.
갑자기 파래진 하늘을 보며 우린 이륙준비를 서둘렀다.이걸하대위가 오른쪽 정조정석에 이기호소령이 가운데 부조동석(임무에따라 교관 조종석도 되고 미사일 사수 석도 된다.)앉고 난 가장 좌측 관측사석(앞에 레이더와 미사일 선택판넬이 있다.)앉아 카메라를 목에걸고 비행중 평지를 찾아 기점하고 사진을 찍어 앞으로 작전중 비상 착륙장을 미리 기록해두는 임무를 수행 하도록 하였다.
간신히 푸른 하늘을 뚫고 하늘로 올라 가긴 했는데 우리가 계획했던 인천 쪽으로 기수를 틀어 올라 갈수록 아래엔 운무가 가득 전혀 섬도 바다도 보이지 않는 상태의 연속이었다. 비상착륙장을 확인해 보겠다는 생각은 일찌감치 걷어치우고 기지로 돌아갔을 때 이놈의 안개가 기지를 덮치고 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출발 한지 30분이 지나 대장 이소령은
“야! 이거 않되겠다.이대위 그만 돌아가자.”라고 지시 하였다.
다시 기지로 돌아왔을 때 기지는 출발때와 마찬가지로 근처에 얼룩덜룩 안개가 떠 있긴해도 착륙장은 뚫려 있었고 쉽게 착륙할 수 있었다.헬기는 안전한 이착륙 접근로가 상당히 중요하다. 모든 비행기는 이착륙시 최대한의 파워가 요구되며 이때 엔진 사고의 대부분이 일어나고 또 고도가 낮은 생태에서 비상처치도 가장 어렵게 된다. 이런 심리적 압박에서 이기호 대장은 한번 더 어려운 결심을 하게된다.
“어이 이대위 이착륙 장주비행(이착륙 접근로를 확인하기위한 이착륙 지점을 중심으로한 사각형 패턴 훈련 비행이다.)만 한번더 해 보자!”라고 지시 하였다.그래서 비행기는 다시
떠올라 100여m를 직진후 좌로 90 ° 선회하며 500ft를 유지하였다. 50m를 진행후 또 이대위는 좌측으로 90 °를 선회하여 다운윈드로(배풍로로 번역되며 이착륙방향과 반대방향으로 나아가 마지박 접근로의 거리를 확보하기위해 착륙지를 좌로 보면서 더 뒤로 돌아가는 비행이다). 접어 들었다. 헌데 순간 비행기는 갑자기 1m 앞도 보이지않는 안개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었다. 순간 내 생각에 곧바로 직진으로 조금만 더 비행해 나가면 안개를 벗어 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역시 비행대장 이소령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었다.안개속에서의 이대위의 조종을 못믿은 것인지 이소령은 “I got"을 선언해 조종관을 인수하였다. 비행중 조종사들은 "I got. You got"을 선언해서 상호간 정확히 조종관을 인수 인계한다.문제는 비행대장 이소령이 조종관을 인수하자말자 비행착각에 접어든 것이었다. 공군에서 야간 훈련 비행시 나 또한 비행착각으로 순간적으로 깊은 경사와 더불어 엄청나게 고도가 강하 되는 것을 경험 했었다. 그땐 야간 편대였는데 난 분명히 똑바로 가고 있는데 앞선 비행기가 갑자기 반대로 급상승하는 것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물론 교관 조종사가 동승하고 있어 그 무시무시한 비행착각을 벗어난 경험이 있었다. 결국 우리 비행기는 왼편에 있는 섬으로 충돌해 가고 있는 것이었다. 자기 감각을 믿고 조종관을 잡은 조종사에겐 그어떤 충고도 불가한 것을알고있는 난 방향은 관두고 고도만 유지해도 섬으로 충돌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 ”대장님! 고도가 떨어지고있습니다.“를 외쳤다.아무런 반응이 없이 몇초간의 침묵이 흐른 후 난 다시한번 악을쓰며
”고도!!!!“
를 외치는 순간 눈앞에 안개가 걷히면서 산이 확 나타나는 것이었다. 이어서
“쾅!!!!!!!”
굉음이나고 난 땅바닥에 떨어져 숨을 헐덕이고 있었다.
아! 결국은 내가 우려하던 바로 그놈의 사고가 나고 말았네-----
무언가 억울하고 서러운 울음도 잠시 난 아직 살아있는 것 같았고 하면
“이소령과 이대위는?”에 생각이 미치었을 때 머리 윗쪽에서 불이 붙은 화재 소리가 들였고 보이지는 않치만 누군가의 신음 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하면 이 사람을 구조해 머리 위쪽 불로부터 멀리 피해야겠다.라며 일어서 신음 소리 쪽으로 다가 가려는데 그제야 숨을 쉴 수 없는 통증이 나를 감싸고 조금도 움직일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거 다쳐도 된통 다친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나라도 살아야겠네”하는 생각에 겨우 몸을 산 아래 쪽으로 굴려 보았다.
“내가 언제 다시 비행기를 탈 거야”하면서 서러움에 복받힌 눈물과 더불어 굴러가는데 걸리는 조종복 옆구리에 달린 구명조끼,썬그래스케이스.귀마개케이스를 멀리 던져 버리고 ‘몇 바퀴를 더 굴러 약간 움푹파진 구덩이 속으로 들어 갔을 때
“꽝---과과광----“
연속적인 폭발음
“”그래 연료탱크,비행기 옆구리 구명정 질소탱크 2개‘이제 터질게 다 터졌나?, 불붙은 소리만 간간히 조금씩 들려오네----------
허긴 이곳이 바로 기지가 있는 백아도 한쪽 기슭이 분명하니 곧 구조대가 찾아 올 거야, 헌데 어딜 다쳐 이렇게 숨이 가쁜거야?“하면서 끙끙, 헐덕 거리길 한시간이나 흘렀을까
“여기다!”하면서 반가운 눈에 익은 우리 대원들이 나를 에워싸고 정비팀장 김성호 상사가
“김대위님 내려가시지요!”하는 것이었다.
“아냐 난 됐고 “대장님과 이대위님을 먼저 구조해!”라고하자 김상사는 그제서야
“대장은 현재 불타고 있는 비행기안에 있어 사망하신 것으로 판단되고 이대위님은 벌써 구조해서 가고 있어 김대위님만 내려가면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해서 상황 판단이 되었다.Alluette-3항공기 구조상 좌우에앉은 이대위와 난 비행기 충돌 때 튕겨서 앞으로 나올 수있고 대장은 계기판에 가려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아있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김상사는 허리띠 두 개를 준비해 양쪽 내 두다리와 같이 어깨에 메고 두손으론 수풀을 헤치며 앞으로 전진해 가고 있었으며 멀리 내리막에 내려갈 땐 앞서 누군가 이대위를 엎고 내려 가는 것도 보였다.그렇게 이상사 등에서 엎혀 가길 한 시간 남짓 울틍불틍한 바위가 널려있는 바닷가 좁은 모래밭에 누워 있었다.
또 한시간쯤 지난을까 너무 목이 말라 오는 것이었다.
“어이 김상사! 물을 좀 주시게”했을 때 김상사는 무슨 응급 상식을 동원 물을 주지않고 조금씩 수통의물을 수건에 적셔 입만 닦아 주는 것이었다. 멀리 기지장 박대위가 벗은 웃통에 PRC휴대용 무전기를 메고 무언가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이때 맑은 하늘 위로
‘두두두두’
하고 헬기가 머리위를 돌고 있었다. 말로만 듣던 미공군 구조헬기 “더스토오프”가 나타난 것이었다.
“아!
이제 난 살았다!!!“를 크게 외치고 싶었으나 숨쉬기도 힘든데 소리가 나올 일이 없었다.더스트오프가 백아도에 오기까지에는 또다른 비하인드스토리가 있었다
1980년도 격렬비열도 간첩선 격파 공군과의 성공적 합동작전이 있은 후 공군 전투기의 지원을원활히 받기위해 해군은 오산 공군작전사령부에 해군파견부대를 창설하고 초대 파견대장으로 반정웅 대령을 보임하였는데 이 반대령의 첫 임무가 간첩선을 격파하기위한 공군 전투기를 부르는게 아니라 김호 대위를 살리기위한 구조헬기를 보내는 것이 되었다. 이날 아침부터 반대령은 백아도에 구조헬기를 보내기위해 먼저 청주에 있는 한국공군에 구조 헬기를 요청했는데 현지 안개낀 기상 때문에 구조헬기를 보낼 수 없다는 회신에 반대령은 오산에있는 미공군 의무항공부대에 구조를 요청하였고 다행히 주한미공군사령관은 나쁜 기상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구조헬기 지원을 수락하였다. 세월이 흘러 2005년 난 김호대령으로 공군 작전사령부 해군 파견대장이 되어 이번엔 훈련중 서해에추락한 미공군 조종사를 해군함정을 지원하여 구조하였다. 각설하고
지금처럼 GPS가 없었던 시절 미군헬기는
안개를 뜷고 내려와 백아도 반대편에서우릴 찾고있었는데 기지장 박대위가 휴대용 PRC무전기로 교신하여 간신히 우리 위치로 데려올 수 있었다.하지만 우리위치는 온통 바위투성이로 착륙 할 수 없었던 구조헬기는 바다위에 떠있으면서 잠수복을 입은 구조사들이 물로 점프해 뛰어내리고 바닷가로 헤엄쳐나오는 모습을 난 누어서 볼 수 있었다.두 명의 구조사가 모두 내 옆에 붙어서 응급처치를 하는 동안 난 "왜 이러지? 이대위님은 괜찬고 내가 상당히 위급한 모양이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이때 이대위님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그나마 나는 살릴 수 있는 상태였나보다. 이어서 헬기가 다시 머리위에 왔을 때는 승강기(hoist)를 내려 이대위님과 날 비행기로 걸어 올렸다.
비행기에 누었을 때 안도감과 더불어 처음으로 의식이 가물거리기 시작하면서 목이 말랐다.
“I'm thirsty. water please!"하니까
구조사는 아예 수통으로 물을 부어 넣어 주었다. 다시 의식이 회복되면서 난 사고의 전 과정 동안 의식을 잃지 않은 채 모든 걸 머릿속에 기록하게 되었다. 아주 몇 년 뒤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구축함에 출동을 나가 함장으로 있던 반대령님에게 들은 이야기로 그때 난 강서구 등촌동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되어야 하는데 미군 조종사가 근처 가서 병원을 찾지 못해 하는 수 없이 다시 오산 비행장으로 가서 한국 조종사 한명을 더 태우고 나서야 국군 수도통합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니 오전 10시쯤 사고가 난 후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에 왔을 때 내 몸에 연결된 호수는 7-8개나 되었다 .이때 응급실 주치의는 무조건 내 배를 갈라야하는가 두고 보는가를 무지 고민 했다고 했다. 처음 한 달은 가르지 않은 걸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결론이 나기까지는 몇 달이 더 필요했다.
내 의학 상식으로 판단한 그때의 상황을 재구성해 보았다.
사진기를 메고 있던 난 사진기 랜즈 캡을 조종복 왼쪽 주머니에 넣어두었다.비행기가 섬에 충돌할 때 처음충격으로 몸이 앞으로 튕겨 나갔고 좌석 왼쪽에있던 미사일 콘트롤박스 귀퉁이가 왼쪽가슴 렌즈캡(반으로 잘라졌슴)을 치고 들어가 심장아래 늑골 2개를 부러뜨리면서 부러진 늑골은 좌측허파아래 반쪽을 밀고 들어가 깊숙이 비장을 터트렸다. 그리고 배에 두른 안전벨트는 소장, 대장, 신장을 눌러서 터트리고 끝어졌다. 이때 난 사진촬영 임무 때문에 어깨 안전벨트를 하지 않고 아랫배에만 안전벨트를 하였는데 만일 어깨벨트까지 했으면 어떤 일이 생겼을지 알 수가 없다 .어깨벨트까지한 이대위는 최종 목뼈 골절로 사망했다. 그리고 최종으로 지상에 충돌할 때 난 허리가 먼저 닿으면서 떨어져 요추돌기 2개가 골절 되었다.
수도통합병원에서 비장 파열은 발견되지않은 채 허파에 파이프를심어 고인 피를 뽑아내고, 요도에 파이프를심어 신장에 고인 피를 ㅓ뽑아 내었다.또아래배에 심은 파이프로소장 대장 파열로 고인 피를 뽑아내고 있었다. 요추돌기골절은 심하면 추출해낼 수도 있지만 심하지 않으면 자연 접합 된다고 했다. 3일쯤 지난을까 주치의가오더니 “그래 발등 골절이 있었지 오늘 정형외과가서 깁스하자구”했다.
얼마나 심각한 내상 이었던지 발목골절은 보이지도 않았슴을 단적으로 이야기한다. 이틀이 지나면서 무시무시한 통증이 찾아왔다. 6시간 마다 주는 진통제 opium(아편)만이 날 살려주는 희망이었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다가 저멀리 통로로부터 간호장교가 들고오는 opium주사 냄새를 맞을 때 부터 통증은 가시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 좋은 opium은 8시간, 12시간 간격으로 줄어들고 결국은 밤에 수면제로 대채 되면서 그렇게 통증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내 몸에 곶혀 있던 그 많던 파이프도 하나하나씩 줄어들었다. 한 달이지나 응급환자 신세를 완전히 벗어난 난 부산 통합병원으로 후송 되었다.별로 치료할 것도 없었던 부산 통합병원에서의 일상은 장기와 바둑이 전부였다. 물론 진해에서 오는 남산같이 배부른 연지엄마와의 데이트가 또 다른 희망이었다.
9월 3일 분명히 연지엄마가 면회를 와야 하는데 부산 처형이 반찬을 들고 면회를 왔다. 어제 성질 급한 딸이 갑자기 연지엄마 배를 탈출해 나왔다는 것이다. 급히 나오면서 양수를 많이 마신 애기(연지)를 마산 파티마 병원에 그데로 두고 연지 엄마는 진해 집으로 퇴원을 하였다는 것이다.
“크크크”
그땐 초음파검사가 극히 제한되고 있어 태아 성별을 알 수 없었는데 내가 바라고 바라던 딸이 태어났다.
난 그전에 벌써 딸이 태어나면 더 이상 둘째를 볼 것없이 오로지 딸 하나에 내 모든 것을 주어 사랑하리라 라고 결심을 해 두고 있었다.
주말에 면회를 온 형수와 같이 깁스한 발목에 쌍지팡이를 집고 먼저 마산 파티마 병원으로 가 강보에 쌓인 새빨간 딸 연지를 만났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다른 조카들 신생아 시절 보다 제법 이목구비가 뚜렸한 것 같아 생긴 것에 대한 예감이 좋았다.
“하느님 이 아이가 백아도 사지에서 날 잡아 준 아이가 맞는지요?
하오면 다시 제가 먼 훗날 주님 옆에 갈 때 까지
주님의 자녀로 건강하게 자라나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주님의 종이 되게 하소서!!!!!!!!“
라는 기도를 올리고 진해 집으로 가서 연지엄마를 만났다.
주말이면 이어서 외박을 나가 집에 머무르곤 했다.
9월 말 일요일 어느날 외박중 아침부터 소화가 되질 않으며 무언가 계속 불안한 것이다.
난 집에서 연지를 얼르는 것을 그만두고 바로 부산 병원으로 일찍 돌아갔다. 장교 병실은 점심 배식을 마치고 모두들 장기와 바둑을 두고 있었다. 난 내 침대에 누어 옆 침대에서 두고 있던 장기에 훈수를 열심히 두고 있을 때다. 갑자기 아랫배에서 왼쪽 심장쪽으로 감전 되듯이 통증이 지나가면서
“악^^^^^^^”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어서
군의관, 간호장교가 뛰어오면서
“응급실로!!!”
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깨어 보니 난 회복실에 누어있었고
“비장 지연성 파열”
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사고후 한달 이상 지나 증상이 나타나는 것은 극히 이례적으로 학계에 보고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했다.
이렇게해서 난 백아도 사고 후유증으로“비장의 무기가 없는 놈”
으로 다시 태어 나게 되었다.
비장은 일반적으로 “지라”라고도 부르며 피덩이로 뭉쳐진 심장 아래 뒤에 깊이 위치한 5장 6부중 하나로 어릴 때는 면역기능의 중요한 역할을 하다가 성장하면서 면역기능을 일부 간이 분담하게 되며 손상된 비장은 봉합 수술이 불가하여 터지면 아예 절제해 낸다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또 석달 비장척출 후 회복기를 거쳐 난 부산 통합병원을 퇴원해 진해 비행장으로 복귀하였다.
처음엔 두렵기도하고 많이 망설였다.
“비행기를 다시 타야하나?
아니면 다른 병과로 전과를해?“ 하지만
수도 통합병원 장교 병실에서 담당해 주던 유명한 할머니 수녀님 당부 말씀이 생각났다.
“김대위!
꼭 회복해서 다시 비행기를 타야하네.
꼭 그렇게 되도록 김대위를 위해 나도 열심히 기도할 것이야!“ 하던 수녀님의 말씀이 생각났고
”그렇게도 살려주신 주님께서 기어이 또다시 날 데려가실 일이 있으까?
내 다시 비행기를 타서 내가 살아난 이유를 직접 알아 볼거야.“하는 의구심과 오기가 생기는 것이었다.
결국 그렇게 다시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두 번 더 하늘에서 엔진이 정지하는 사고를 경험해야했고 대령으로 마지막 부임지에선 뇌졸증과 2009년 군복을 벗은 후엔 죽을 것 같은 공황장애를 또 경험해야했다.
백아도 사고에서의 비장절제로 나름 면역결핍에 따른 후유장애를 안았지만 국가는 나에게 “상이 국가보훈대상자(6급)”라는보상을 주었다
난 왜 죽지 않고 아직까지 살아있는거지?”라는 답은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로 숨이 붙어있는 한 계속 찾아봐야한다.
아니 일단 오늘은
“쌍둥이 손주 다나, 다민이를 보기 위해서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
내일은 내일데로 또 찾아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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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S 엘리엇의 말데로 죽은 땅에서 새 생명을 잉태하길 65번째 맞이하는 잔인한 봄 어느 날
2018.3.25..
첫댓글 가슴아픈일이었네. 생각하기 싫을정도로 !!
살아났으니 쌍둥이 손녀손자 보고 즐기고 있잖아요 이젠 즐기고 살아 가시기를